오늘 따라 우연히 컴을 뒤적이다 이런 영상을 발견했읍니다.

노래란것은 각자 좋아하는 장르가 있고 목소리가 있고 가수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 가수를 평가 비슷하게 얘기하기는 조심스러운게 사실입니다.
또, 그 어떤 가수라해도 곡에 따라 들리는 느낌은 최고작부터 졸작에 이르기
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사진을 찍어도 수십장 중에 한장 작품이 나올까 말까한
이치와 같다고 할것입니다.
 

진성의 노래는 '안동역에서' 와 '내가 바보야' 두곡을 일찌기 녹음도 했었고
비교적 최신 노래중에서는 트롯의 맛이 좋은 노래라 많다고 여기고 있었지요.
그러다 진성이 큰 성공뒤에 어려운 병을 얻었고 그것이 평생 끌고 가야할
숙명적인 그런것임을 알았다고 할때 그의 얼굴에 스치는 쓸쓸함 같은걸 얼핏
발견하기도 했지요. 그뿐 아니라 초등학교도 늦게 들어가 불과 2년밖에 다니지
않아 속칭 그야말로 가방끈이 아주 짧고,거기다 무명 가수를 아주 오래
했다는거~
거기다 어린시절 혹독한 가난과 불우했던 가정사 까지~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불리함을 끝끝내 참고 이겨내어 트롯 가수로의 입지를 굳건
하게 다졌읍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오랜 기간의 고생과 스트레스와 인내의
결과에 따른 성공도 무참한 병마로 물거품이 될 운명에 처했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읍니다. 현재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다행이긴 합니다.

그의 지병을 아주 조금은 도울만한 방법도 가지고 있긴한데 아마도 좋다는거,도움이
된다는거는 안해본 방법이 거의 없지 않을까 해서 사족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그의 주택에는 온갖 종류의 약초, 자연물들이 방 하나에
꽉 차 있더군요!

 





대전부르스를 여러 가수가 부른걸 듣고 또 제 자신도 직접 녹음도 해 봤지만
위의 진성 만큼 마치 노래를 톱으로 썰어 하얀 구름빵을 만들듯 강력하게 넣고 빼고가
분명하게 하는 가수는 처음입니다. 힘이 있지만 원곡의 아련한 감성도 결코 놓치지
않는~,, 원창자인 안정애를 비롯하여 이 곡의 대표 주자인 조용필도 엄밀히 말하자면
트롯적 역량은 진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볼수도 있읍니다. 일본 엔카가수로 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아오에 미나(靑江三奈)도 전혀 따라올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창법이자
진성만의 감성이 듬뿍 배어 나옵니다. 영상 중간에 노래 분위기를 저해하는 불 필요한
영상이 더러 나오긴 하지만!
 

대전부르스는 1950년대,아주 까마득히 먼 시절의 노래입니다. 사실 50대 후반
60대는 되어야 겨우 기억이나 할까 말까한 거의 고전에 속하는 노래이지요.
눈쌓인 하얀 대전역,혹은 비가 철철 내리는 아니면 안개가 자욱한 밤 0시50분
대전역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했던 정경을 상상해 보면 지금도 그
느낌은 물씬 가슴에 차 오른다고 말할 수 있지요! 지금은 그 시각 열차는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참고로 일본 가수 아오에미나가 부른 대전부르스를 첨부해 봅니다. 왜 거기에
일본 가수가 나와? 할수도 있으나 대전부르스는 원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곡
이란 반증이고 한국 일본을 비롯해 내노라 하는 많은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뜻하지 않게 진성이 부른 대전 부르스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그런데 트롯의 장인인 진성의 면모는 여러군데서 확인됩니다. 그의 대표곡의
하나인 보릿고개도 자세히 들어보면 아주 깊은 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읍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론 전부 그렇진 않지만 보랫고개란 걸 잘 알수가 없다고
봅니다.시골서 농사를 짓던 안 짓던 이젠 이 나라에서 보릿고개란 단어는 사라진지
꽤 될것입니다. 양력으로 3-5월 아직 밭에는 보리가 다 익지않아 추수가 멀었고
작년 가을 수확한 쌀은 다 떨어져 먹을것은 그 어디에도 없던 시절, 쑥이나
어린 소나무 껍질이나 아니면 밀가루 약간으로 이런걸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던
그 전설같은 얘기를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진성은
굳이 이런 노래를 만들었지요. 도무지 노래로는 힛트가 될거 같지 않은 노래를
말이지요~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겪어본 사람만이 꼭 노래를 절절하게 잘 한다고는 하기는
힘들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6.25 이후엔 가수가 거리에 넘쳐 났어야할게
아닌가요? 힘들다고 다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 부를수는 없는게 분명한데
진성같은 가수는 아무튼 좀 독보적이라 생각이 듭니다. 노래의 결과 스타일은
분명 다르지만 조용필과도 대비되는 트롯의 장인인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노래방은 진성의 집에 설치한것 같읍니다. 아무래도 마이크나 뭐 기계장비
같은걸 일반 노래방 보다는 조금 높게 설치하지 않았을까 생각은 되지만,
그런것 치고는 음향의 질이 아주 높아 보입니다. 뭐 저 정도 노래가 녹음이
된다면 집에 한번 설치해 보고 싶긴 한데,여건이 안 되니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지요^
굳이 공연실황이 아닌 이런 영상을 덧붙인 이유는 그 어느 자리에서든
진성의 진가는 특별하다, 특히 트롯에서는 그렇다는걸 실증해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이시대 한국 최고의 트롯의 장인은 누굴까? 그것은 각자의 취향과
노래에따라 각양각색이 당연할것이지만, 일단은 나의 판단은 남자에서는
진성을 꼽아 봅니다.

 

 

보통 수준의 취미생활을 목표로 할경우 대체 카메라는어느 정도까지 추구

할거며 렌즈 또한 어디까지 구비해야 하는지가 고민이 많은 분들도

있을듯하다.

 

취미를 처음부터 일정수준으로 한정하고 시작할건 아니지만, 골프건

사진이건 그 일로 돈을 벌어 쓰지 않는 이상 대략적인 범주는 정해두는게

좋을것 같다. 본업을 제켜두고 취미 생활을 본업처럼 하는것도 썩 바람직

하지는 않다는게 나의 평소 지론이다. 뭐 나이 들어 은퇴후 그렇게 하는거야

뭐라 할것은 못되지만 말이다.

 

해서 dslr 을 구비한 처음부터 나는 충동적으로 렌즈를 사 들이지 않도록

매우 조심을 했다. 많은 분들이 그때그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사들인 렌

즈를 감당못해 도로 팔거나 처박아두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해서 찬찬히 실력도 쌓을겸 24-70과 100 mm 하나 그렇게 달랑 두개의 렌즈

만 가지고 5년정도를 버텼다. 보통은 계륵이라는 24-70 을 나는 한우갈비 이상

으로 잘 활용했다. 사실 일상 생활에서 필요로하는 사진은 저정도만 해도 부족

함은 거의 없다할수도 있다. 특정 사진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분들이라면 당연

추가로 렌즈가 있어야할 것이지만, 소소한 일상 여행이나 계절의 변화 그리고

봄철 화려한 꽃을 담아 내기에 문제가 된적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만일 조금은 더 특수한 상황을 맞이했을때 현재의 렌즈로는 분명 부족

함이 있을것으로 생각은 늘상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망원렌즈였다. 광각과

망원중 뭐가 급선무일까를 오랜 시간동안 고민한 결과 먼저가 망원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망원도 분류가 다양하고 각각 퍌요로하는 영역이 있다보니

쉽게 결정을 하기도 어렵다. 고가의 렌즈를 사두고 활용을 못하면 이것처럼

답답한일도 없을것이다. 그런데 결정이 됐다면 새걸로 살지 중고로 살지를 또

정해야한다. 거기다 고급품을 선택할지 보급품을 선택할지도 정해야한다.

문제는 고급품을 사야 좋은 사진을 얻을수 있다는 막연한 기준을 갖을 경우다

대개 이런 경우 잡다한 비싼 렌즈를 많이 구매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좋은 화질을 원하는데 적절한 비용을 쓰자면 괜찮은 중고품을 구입해야 할것

이다. 그러면 중고는 또 어떻게 구매해야 잘하는 것일까? 의 문제가 남는다.

 

그 결과 엊그제 내가 선택한 답은 캐논의 70-300mm f 4~5.6 L 렌즈였다.

일명 할매백통이라 불리는 무게는 1KG, 비교적 가벼운 제품이다. 사실 dslr 의

문제는 무거운 무게이다. 나의 경우는 왼손목의 통증때문에 도저히 무거운

카메라나 렌즈는 감당이 안된다. 오랜 기간동안 골프를 하며 생긴 결과이기도

한데 아무리 삼각대를 끼고 다닌다 해도 무거운건 역시 무거운것이다. 해서

바디도 좀더 가벼운 6D 로 입문을 했으니 말이다. 사진을 하다 보면 자꾸

장비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건 사실이나 나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가격이 저렴한 서드파티도 나름 충분히 훌륭하다고 나는 믿는다.

 

문제는 나의 기술이나 감각, 감성의 부족이 더 크지 절대 장비의 고가 여부에

사진이 달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설령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

에서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오른들 그걸 업으로 삼지 않는 다음에야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사진은 생활의 일부여야 한다. 나의 궤적을 좀더 의미있게 오래 보존할수 있을

정도의 사진이면 오케이지 않을까? 우리의 눈이 보아서 좋고 기쁨을 줄수 있는

사진이라면 되었지 뭐를 더 바랄것인가? 단지 아쉬운건 많은 분들이 핸드폰의

발달로 또 편리함으로 그 수준의 사진에서 만족한다는데 있다. 핸폰으로도 충분

히 멋진 사진을 얻을수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나의 기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아까운 시간 장소를 보존하는데 대충 넘어갈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새로 구입한 망원렌즈로 어떤 사진을 보여줄지가 무척 기대가 된다.

새제품은 아니고 어느분이 사서 몇백장 정도 겨우 찍었다는걸 대략 반값 정도에

멀리 성남까지 가서 업어온 녀석이다. 태풍이 불어 아직 시험테스트도 못해봤다.

이제 곧 누런들판이 나를 반길것이다. 망원을 썻을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또 하늘 높이 달려있는 감을 찍을때 어떤 변화가 있을것이가? 등등으로 올 가을

을 기다리는 중이다!

 

 

 

사상 초유의 약국을 통한 마스크 판매~ 그것도 그냥 판매가 아니라

일일이 주민 번호를 등록하고 1인당 2매로부터 시작해서 5매까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10매까지 점진증가하는 방식으로 온 국민에게 균등 분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가족 대리 판매도 엄격히 제한했다. 사실 이런 판매 규제는

난생 겪어보는 것이라 온 국민이 힘들어했지만, 무난히 잘 따라주어 약 4

개월간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냈다.

 

이제야 이런 얘기를 쉽게 쓰지만, 3월부터 7월 초까지 마스크 제한 판매

시기에는 약국의 하루 일과가 온통 마스크로 시작해서 마스크로 끝나는

웃지도 못할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허나 이런 가격통제 판매통제로 인해 발생한 수입에 대해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면세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도 다급해서 얼떨결에

내뱉은 약속일수는 있으나 국가의 공신력이 많이 떨어지는 처사가 아닐수

없게 되었다. 만일 비슷한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면 어느 누가 이런 국가적

재난에 선뜻 동참을 할지 알수없게 되었다. 물론 일정 수입이 발생하면 당연

세금은 필수이지만, 이번은 매우 특이했고 또 매우 제한적 규정이 강제되는

과정이 있었다.

 

암튼 마스크 판매는 끝났고 국민들은 언제 약국에서 마스크를 구입했냐는듯

이젠 거의 마스크 구입을 안하는 실정이다. 무슨 꿈을 한바탕 꾼듯한 참으로

어이가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특정 종교 집단에 의한 코로나 감염이 계속 문제가 되고있다. 왜? 교회

를 통한 전파가 종식되지 않는걸까? 교회는 밀폐된 공간이긴 하지만, 지하철

도 버스도 밀폐되긴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교회에서만 집단적 감염이 끊이질

않는걸까?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아무도 아직은 밝혀낼 단계가 아니다.

 

 

이제 마음놓고 어딜 여행 하기도 단체 모임을 하기도 집단으로 모여야 뭐가

되는 공연, 대회, 이런건 꿈도 꾸기 힘들게 되었다. 인류를 산산이 흗어놓은

코로나의 힘,  무엇보다 자유하는 인간이 구속받고 사는듯한 이 답답함이 사

실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껏 공기를 못 마시고 마스크를 쓰고 산다는

게 어디 간단한 일인가?  호흡량은 2/3 로 줄어 들었고 폐 기능이 약한 분들은

알게 모르게 생체 반응이 떨어질게 뻔하다.

 

사람들은 이것이 짧게 그저 1-2년 안에 끝날것으로 생각할것이지만, 만일 그렇

지 않고 몇년씩 지속된다면 아마도 지쳐 죽는 이도 꽤나 되지않을까 생각해 본

다. 7-8월 여름은 긴 장마로 휴가다운 휴가가 되지도 못했다. 이제 간신히 장마

가 끝나자 마자 태풍이 몰려 온단다. 숨쉴 틈도 없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

다.

 

이런 얘기야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좀 시원한 그런거 없소?

 

곧 9월이 오고 10월이 닥치는데, 지금 보다는 좀 나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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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로 지칠대로 지쳤다.  봄 부터는 이미 코로나로

다들 기진맥진하지 않았는가? 겨우 평온을 찾은 늦은 8월!

오늘 따라 하늘의 구름이 희고 멋지다!  뭉게 구름이 바로 저것

이다!  기상 이변으로 저런 구름 보기도 이젠 하늘의 별따기 만큼

이나 힘들다^ 이래 저래 삶의 즐거움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혹시나 들판의 벼가 좀 익어가지 않을까? 누런 층층 계단 다락 논의

풍광이 생각났다. 양지 넘어 원삼부근의 그 모습을 한참 전 몇번이나

봐 왔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하얀 구름이 사라지기 전에 적당한 곳을 찾아

얼른 몇장 찍어 본다.

 

때 마침 흰 구름 옆으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는 중이다. 아마도 인천 공항으로

가는듯하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런 구름 하늘을 보는 건 1년에 고작 몇번이다. 전에는 미세 먼지로 인해

저런 풍광을 보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무엇 때문에 보기 힘든지 잘 모르겠

다. 게다가 저런 하늘을 잠시 보았다해도 막상 사진을 찍으려 하면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쳐진 전깃줄 때문에 좋은 사진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언제쯤

전봇대는 지중화가 이루어질까?

 

 

아직 들판의 벼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듯하다. 이제 겨우 벼가 패서

익어가는 중이다. 적어도 한 5번은 나와 봐야 때를 좀 맞추지 않을까?

서북 방향으로 삥 둘러 산으로 쌓인 이곳은 언제봐도 안정감과 푸근함을

주는 곳이다. 10여년 전과 비교해도 그다지 파 헤쳐지지 않은것이 참 다행이다

 

 

저수지에는 마름이 자라 수면을 많이 덮고 있었다. 예전 시골 고향

산북리 저수지에도 저랬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두어개 자라나 만지기가

쉽지 않았던 마름!

 

저수지에는 한가로이 낚시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고 저녁해는 뒷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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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도 중순이라 이제 가도 목백일홍 꽃이 좀 남아 있을까?
지난 두어번 방문했던 논산 윤증 선생 고택이 웬지 한번 더
가고 싶어 8.16 일 느즈막하게 집을 나섰다. 장마 끝의 태양은
장난 아니게 뜨거웠다. 노성리 동네 쯤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산 항아리보쌈' 집인데 시골 동네 식당같지않게 매우 정갈한
음식이 나왔다. 그것도 보쌈 1인분에 단돈 1만원이라니~

 

 오후 2시경의 고택 전경~ 역시 한낮의 풍광은 조금 미진하다

 


역시 예상대로 배롱 꽃은 거의 다 진듯, 아니면 긴 장마에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한 건 아닐까?  사실 여기 배롱나무는 연못에
있는것까지 합해 딱 3그루가 전부이다. 이전에 두번 왔을때와는

 다르게 사진이 시원찮다. 허나 이 더위에도 낮 시간에 방문객이
꽤나 많았다. 문화 해설사도 상주하고 있었다.


연못의 이끼는 푸르름을 잃었다. 7월 말쯤에 온통 연두색으로
뒤덮였던 연못은 8월 중순엔 전혀 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황량

해진 풍광에 기분이 영 별로가 되었다. 관광 버스 한 대가 사람들을

잔뜩 싣고 와서 내려 놓는다. 저 분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오신

분들인가? 일행의 가이드인듯한 여자분을 따라서 우르르 몰려

다니고 있었다

 


이번에는 배롱꽃 보다 건물을 중점으로 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우선 건물은 볼 수 없도록 출입 금지라서
세세하게 관찰하기가 힘들었다. 옆에 있는 명륜당을 잠시
기웃거리다 얼른 철수를 결정했다.

 

지금까지 이상하게도 내가 방문했던 곳 들은 그 첫번째가
가장 좋았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남겨 볼 욕심에 2차,3차
찾은곳 치고 더 좋은 결과를 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번도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데다 방문 시간대도 좋지 않았다. 이번

이 두번째 방문인 아내는 아예 덥다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이쯤에서 끝내고 부여로 가 보기로했다. 중학교 때인가?
수학여행을 부여로 갔지만 여행 비용이 없어 난 가질 못
했다. 그 이후 다시는 부여를 갈 기회가 없었다. 노성리에서
부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선 기억나는대로 고란사와 낙화암
을 향해 달렸다.

 

능산리 고분

 

능산리 고분을 찾아드니 소나무 숲 사이에 아담한 능 들이
나타났다. 한낮의 땡볕에 매미 소리만이 우렁차게 들린다.
푸른 잔듸로 덮힌 능은 아담하고 예뻣다. 능을 쭈욱 둘러본 후

 매표소 입구 매점에서 청량한 매미소리를 안주삼아 아이스 바

하나씩을 먹고 고란사로 향했다.

 

낮은 건물이 주욱 자리하고 있는 부여는 깔끔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란사를 향해 가는 백마강 부두에 닿으니 황포돗대가

왕복 7000원에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1키로 남짓한 강을 왕복하는데, 배도 너무 크기만했다.
음 웬지 좀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랄까? 처음부터 고란사로
가는 길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대충 얘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낙화암의 전설은 정말
보고 또 봐도 어처구니가 없게 들렸다. 저 정도 바위에서
뛰어 내리면 백마강에 떨어지기는 커녕 모두 산 기슭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마치 꽃처럼 강으로 떨어졌다는 3000
궁녀의 얘기는 도무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현실성도 없어 보일뿐 아니라 백제에 대한 아련한 기대가

한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제의 전설이 낙화암

하나로 끝나는건 아니기 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마냥 빈 말 만은 아닐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말이다!

 

잠시 고란사에 올라 장마로 누렇게 변한 백마강을 내려다
보았다. 산 너머 부소산성을 다 둘러 본건 아니지만 백제
의 도읍지인 이곳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 정도의 땅을 도읍지로 선택했을까?

 

공주에 이어 백제의 3번째 도읍지라는데, 주변에 어떤

지리적 유리함이 있었는지는 아직 충분히 파악을 못했지만 

단지 휘도는 백마강 하나 밖에 없어 보이는 이곳이 무엇이관대,,

 

나의 뇌리는 백제에 대한 실망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첫

인상이 그렇긴 하지만 이것은 백제에 대한 나의 빈약한

이해가 그 원인일수도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좀

유보해 두기로 했다. 

 

 

 

그저 자그마한 야산에 불과한 낙화암, 1400여년 전에도

저 모습은 그대로 였을듯

 


낙화암에서 실망한 마음은 유홍준 선생의 반곡리 휴휴당을

찾아 30여분을 달리게 했다. 간혹 TV 에서 휴휴당 모습을 더러

접했던 지라 이왕 온 거 함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

 인근에 가깝게 있는줄 알았던 휴휴당은 보령쪽으로 꽤나

먼 길을 달려야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도착한 휴휴당!


 

 휴휴당은 동네 맨 윗쪽에 있었다.  휴휴당 길 쪽을 걷는데

동네 노파 한분을 만났다.

 

 " 유홍준 선생의 고향이 이 동네인가요?"

 

" 아니에요! 여기 분 아니에요!  휴휴당 저 위 집이 살림집이구 

저쪽 골짜기 건너 쭈욱 산까지 다 그 양반 땅이에요!
난, 고라니가 곡식을 먹어 치워서 그거 막으러 지금 가는 중이라오"

 

노파는 구부정히 허리를 굽히고 조그만 끌것을 밀며 계곡을 지나

건너 가셨다

 

  반곡리 휴휴당 

 

휴휴당 황토 건물 위쪽에는 큼직한 시멘트로 보이는 낮은 건물 하나가
더 지어져 있었다. 거기가  살림집이라고 !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여기 반곡리 마을은 익히 알고 있는 김종필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가족묘까지 모두 이 동네에 있다했다.

 

휴휴당을 직접 찾아들어가서 유홍준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면 더

없이 좋았을텐데, 갑자기 찾아와 가능한 일도 아닐테고 아쉽지만

돌담이 아름다운 반곡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동네 남쪽편으로

는 꽤나 준수한 산 봉우리들이 두어개나 청청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여에서 아주 가까운곳으로 알고 찾아 왔지만 사실 꽤나 먼 곳

이었다. 

 

 

 해도 어스름하게 지고 있었고 해서  동네를 빠져 나와 집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집 까지는 아주 멀었다. 서천-공주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올라 오는 길은 매우 지루하고 거칠었다.  아니 부여가

이리 먼 동네라 말이여?

 

지금도 이러니 그 옛날에는 얼마나 먼 곳이었을까? 도무지
쳐들어 갈려해도 멀어서 갈 수가 없는 외진 동네였단 말
아닐까?  그럴리야 없겠지만 백제가 660 여 년을 버틴 이유중

하나가 혹시 내륙 갚숙히 포진해 있어 공략하기가 매우 어려

웠던 그런 점은 없었을까?

 

 

 부여를 찾은 나의 첫 인상은 대략 이런거였다. 화려한 백제의

문화같은 건 둘째 문제인 셈이다. 차차 공부해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여행이란게 특히 아무 준비없이 불쑥 찾아가는게 얼마나 무모한지를

 새삼 느낀다.  이번 논산- 부여행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듯하다.

그러나 여행이 항상 좋을수만은 없지않나? 때로는 기대 이상의

수확을 얻는 반면 때로는 전혀 예상밖의 실망을 할수도 있는것

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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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색이 30년 골프를 쳐 왔는데, 하루 아침에 골프와

연을 뚝 끊을순 없지 않나! 아니 그 보다도 올핸 왜 이리 비가

계속해서 오는지 참, 골프장 속 많이 썩겠다!

 

허긴 여름 내내 비가 안 오고 하늘이 맑으면 더워 죽을 맛 이겠다.

골프장은 좋아 비명을 지를지 모르지만, 그러나 올 핸 코로나의

여파로 골퍼들이 대거 국내 골프장에 몰렸다. 전 같으면 한 여름

혹서기 특별 그린피 할인도 있었지만, 올 핸 어림도 없는 일이다

뭐 올테면 오고, 갈테면 가라는 식이다. 그린피도 많이 덤을 붙여

놓았다. 해서 이래저래 요즘 골프장 갈 일이 없어졌다

 

 

그러니 이제 한 달에 한번이나 필드에 나갈까 말까다. 까짓거 안 가면

되지 이 덥고 비만 왕창 오는데 언제 반짝 날이 맑을까,, 궁리하고 번개

처럼 필드를 갈 계획은 접은지 오래다. 이 나라 골퍼들이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치면 치고 말면 말고,,했다면 이토록 올해 골프장이 문전성시는

이루지 않았을게 틀림 없겠지만, 사실은 아직도 많은 골퍼들이 나에게 골

프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불사하겠다... 뭐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듯하다. 나도 한참 전 예전에는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제 웬만큼 골프도 쳤고 필드의 재미난 맛도 어느 정도 느낀 셈이고

하다 보니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암튼 뭐 현재의 나는 골프에

목을 매달고 있지 않은건 확실하다. 아니 그보다 고 비용 골프에 진절

머리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골프 안 치고 그 돈을 모을수는 없

을지 모르지만, 만일 10년 20년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라운딩

숫자를 1/2 혹은 그 이하로 줄이고 10년,20년 후를 대비했을 것이다.

 

아니 뭘 대비했단 말이요? 

 

이건 골프와는 그닥 상관이 없는 얘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골프

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전혀 상관이 없을수는 없을것이다.

그 시간에 그 노력과 비용의 1/2, 1/3, 혹은 1/5 만 썻더라도 말이다.

 

인생은 크게 봐서 두가지 패턴으로 살 수 있다. 하나는 먼 미래를 보고

현재의 삶을 아끼고 절약하며 고군 분투하는 것이요! 하나는 현재 자

체에 충실하고 최대한 그 시간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일이다. 여기

서 중요한 것이 그 어느것을 택하더라도 적절한 안배와 중심을 잃지

않는 자세이다. 즉,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얻는 전략을 택했다 해도

막상 그 미래가 닥쳤을때 과연 그 준비한 역량으로 찬란한 생을 살아

갈 수가 있겠냐는 것이요~  미래는 없다! 오로지 현재가 중요하다고 해

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잘 살아 냈을때 과연 미래까지 잘 준비하며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

이다.

 

" 뭐 그런걸 따지시오? 걍 되는대로 삽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류일게다. 이쯤 말하면

뭘 의미하려는지 다들 눈치를 챘을듯 싶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 충실했

던 사람이 미래 빈 털털리가 되어 힘든 삶을 보낸다 할때 그 자체를 보고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 지을 순 없을것이다. 또한 미래 준비만 하고 현재

를 반납한 사람이 막상 미래에 아무것도 할수없는 목석이 되어 산다 해

서 역시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렇긴 하지만,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이란 그래서 쉽게 호락호락 얻어지

는 것은 아닌 셈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어떤 경우엔 그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좋기로는 둘을 얻고 소소한 하나를 잃는

것일게다.  나 개인의 경우를 보면 현재 충실형의 인생을 산 셈이다. 따라

서 미래 대비형은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제 이 나이에 무슨 미래 대비형을 추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주

전적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약간의 미래 준비형은 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5년,10년 정도는 말이다. 그 이상의 먼

미래는 나에겐 의미가 없을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필드 위에서의 삶은 즐겁다. 이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상당부분 절제된 형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 나머지 시간과

비용은 아마도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는데 쓰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이

현재 나의 골프를 대하는 자세라 해도 그닥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이런

글은 현재 골프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귀에 들어 올리가 없을것

이다. 그러나 혹 나와 비슷한 생각이나 처지에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기는 건 어떨지^  너무 뜬 구름 잡는 글이라서 좀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7월 셋째주 약속을 잘못알고 둘째주인 7.12 일에 덕소의

프라움 악기박물관 레스토랑을 갔던 얘기는 이미 올린 바

있다. 헛탕친 약속이었지만,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우리는

그 길로 쁘띠프랑스로 찾아갔고, 잔뜩 흐린날이었지만 인근

설악면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약속된 제 날짜에 푸라움 악기박물관에서

선배 부부를 만났다.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제법 괜찮은

만남을 가졌으나 한참을 사진을 찍다 보니 카메라에 메모리

카드를 빼놓고 온 것이 발견되었다.

 

 

카메라는 쓸모가 없게 되었으며 긴급 핸폰으로 몇장을 찍는데

그쳤다. 물론 이 사진은 추후 보정을 거친것이긴 하지만!

 

암튼 이곳이 풍수상 명당 자리라는것^

우리들은 바로 옆에 위치한 악기박물관을 관람했다. 레스토랑 식사자들은

반값으로 구경을 할수 있다는 점,

 

 

우리는 거북을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핸폰 사진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어쩌랴! 그러나 더 이상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맘이 없었다. 일주 전에 와서 본 감흥만큼 두번째 본 그곳은

실감이 덜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팔당호를 건너 오며 비 그친 풍광을 열심히 찍기도 했는데

모든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카메라의 메모리 칩은 빵으로 치면

앙꼬에 해당 할것이다.

 

혹시 인생을 살면서 더러 이런 일은 없는 걸까? 열심히 뭔가를 도모

하지만 막상 진짜 중요한 그 무엇을 빠뜨리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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