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어번 방문했던 논산 윤증 선생 고택이 웬지 한번 더
가고 싶어 8.16 일 느즈막하게 집을 나섰다. 장마 끝의 태양은
장난 아니게 뜨거웠다. 노성리 동네 쯤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산 항아리보쌈' 집인데 시골 동네 식당같지않게 매우 정갈한
음식이 나왔다. 그것도 보쌈 1인분에 단돈 1만원이라니~
오후 2시경의 고택 전경~ 역시 한낮의 풍광은 조금 미진하다
역시 예상대로 배롱 꽃은 거의 다 진듯, 아니면 긴 장마에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한 건 아닐까? 사실 여기 배롱나무는 연못에
있는것까지 합해 딱 3그루가 전부이다. 이전에 두번 왔을때와는
다르게 사진이 시원찮다. 허나 이 더위에도 낮 시간에 방문객이
꽤나 많았다. 문화 해설사도 상주하고 있었다.
연못의 이끼는 푸르름을 잃었다. 7월 말쯤에 온통 연두색으로
뒤덮였던 연못은 8월 중순엔 전혀 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황량
해진 풍광에 기분이 영 별로가 되었다. 관광 버스 한 대가 사람들을
잔뜩 싣고 와서 내려 놓는다. 저 분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오신
분들인가? 일행의 가이드인듯한 여자분을 따라서 우르르 몰려
다니고 있었다
이번에는 배롱꽃 보다 건물을 중점으로 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우선 건물은 볼 수 없도록 출입 금지라서
세세하게 관찰하기가 힘들었다. 옆에 있는 명륜당을 잠시
기웃거리다 얼른 철수를 결정했다.
지금까지 이상하게도 내가 방문했던 곳 들은 그 첫번째가
가장 좋았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남겨 볼 욕심에 2차,3차
찾은곳 치고 더 좋은 결과를 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번도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데다 방문 시간대도 좋지 않았다. 이번
이 두번째 방문인 아내는 아예 덥다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이쯤에서 끝내고 부여로 가 보기로했다. 중학교 때인가?
수학여행을 부여로 갔지만 여행 비용이 없어 난 가질 못
했다. 그 이후 다시는 부여를 갈 기회가 없었다. 노성리에서
부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선 기억나는대로 고란사와 낙화암
을 향해 달렸다.
능산리 고분을 찾아드니 소나무 숲 사이에 아담한 능 들이
나타났다. 한낮의 땡볕에 매미 소리만이 우렁차게 들린다.
푸른 잔듸로 덮힌 능은 아담하고 예뻣다. 능을 쭈욱 둘러본 후
매표소 입구 매점에서 청량한 매미소리를 안주삼아 아이스 바
하나씩을 먹고 고란사로 향했다.
낮은 건물이 주욱 자리하고 있는 부여는 깔끔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란사를 향해 가는 백마강 부두에 닿으니 황포돗대가
왕복 7000원에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1키로 남짓한 강을 왕복하는데, 배도 너무 크기만했다.
음 웬지 좀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랄까? 처음부터 고란사로
가는 길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대충 얘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낙화암의 전설은 정말
보고 또 봐도 어처구니가 없게 들렸다. 저 정도 바위에서
뛰어 내리면 백마강에 떨어지기는 커녕 모두 산 기슭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마치 꽃처럼 강으로 떨어졌다는 3000
궁녀의 얘기는 도무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현실성도 없어 보일뿐 아니라 백제에 대한 아련한 기대가
한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제의 전설이 낙화암
하나로 끝나는건 아니기 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마냥 빈 말 만은 아닐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말이다!
잠시 고란사에 올라 장마로 누렇게 변한 백마강을 내려다
보았다. 산 너머 부소산성을 다 둘러 본건 아니지만 백제
의 도읍지인 이곳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 정도의 땅을 도읍지로 선택했을까?
공주에 이어 백제의 3번째 도읍지라는데, 주변에 어떤
지리적 유리함이 있었는지는 아직 충분히 파악을 못했지만
단지 휘도는 백마강 하나 밖에 없어 보이는 이곳이 무엇이관대,,
나의 뇌리는 백제에 대한 실망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첫
인상이 그렇긴 하지만 이것은 백제에 대한 나의 빈약한
이해가 그 원인일수도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좀
유보해 두기로 했다.
그저 자그마한 야산에 불과한 낙화암, 1400여년 전에도
저 모습은 그대로 였을듯
낙화암에서 실망한 마음은 유홍준 선생의 반곡리 휴휴당을
찾아 30여분을 달리게 했다. 간혹 TV 에서 휴휴당 모습을 더러
접했던 지라 이왕 온 거 함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
인근에 가깝게 있는줄 알았던 휴휴당은 보령쪽으로 꽤나
먼 길을 달려야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도착한 휴휴당!
휴휴당은 동네 맨 윗쪽에 있었다. 휴휴당 길 쪽을 걷는데
동네 노파 한분을 만났다.
" 유홍준 선생의 고향이 이 동네인가요?"
" 아니에요! 여기 분 아니에요! 휴휴당 저 위 집이 살림집이구
저쪽 골짜기 건너 쭈욱 산까지 다 그 양반 땅이에요!
난, 고라니가 곡식을 먹어 치워서 그거 막으러 지금 가는 중이라오"
노파는 구부정히 허리를 굽히고 조그만 끌것을 밀며 계곡을 지나
건너 가셨다
반곡리 휴휴당
휴휴당 황토 건물 위쪽에는 큼직한 시멘트로 보이는 낮은 건물 하나가
더 지어져 있었다. 거기가 살림집이라고 !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여기 반곡리 마을은 익히 알고 있는 김종필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가족묘까지 모두 이 동네에 있다했다.
휴휴당을 직접 찾아들어가서 유홍준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면 더
없이 좋았을텐데, 갑자기 찾아와 가능한 일도 아닐테고 아쉽지만
돌담이 아름다운 반곡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동네 남쪽편으로
는 꽤나 준수한 산 봉우리들이 두어개나 청청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여에서 아주 가까운곳으로 알고 찾아 왔지만 사실 꽤나 먼 곳
이었다.
해도 어스름하게 지고 있었고 해서 동네를 빠져 나와 집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집 까지는 아주 멀었다. 서천-공주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올라 오는 길은 매우 지루하고 거칠었다. 아니 부여가
이리 먼 동네라 말이여?
지금도 이러니 그 옛날에는 얼마나 먼 곳이었을까? 도무지
쳐들어 갈려해도 멀어서 갈 수가 없는 외진 동네였단 말
아닐까? 그럴리야 없겠지만 백제가 660 여 년을 버틴 이유중
하나가 혹시 내륙 갚숙히 포진해 있어 공략하기가 매우 어려
웠던 그런 점은 없었을까?
부여를 찾은 나의 첫 인상은 대략 이런거였다. 화려한 백제의
문화같은 건 둘째 문제인 셈이다. 차차 공부해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여행이란게 특히 아무 준비없이 불쑥 찾아가는게 얼마나 무모한지를
새삼 느낀다. 이번 논산- 부여행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듯하다.
그러나 여행이 항상 좋을수만은 없지않나? 때로는 기대 이상의
수확을 얻는 반면 때로는 전혀 예상밖의 실망을 할수도 있는것
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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