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세번도 아니고 방문한것만 치면 5번째는 될것이다. 우리집에서

멀지않고 또 내 고향 안성 땅이기 때문에 친근감도 있을뿐 아니라 난실마을

자체가 아담한 뒷산에 넓지않은 논밭이 펼쳐져 있어 마치 고향같은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또 바로 옆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어 더 자주 찾게되는 곳이다.

 

어제도 새로 구입한 망원렌즈도 테스트 해볼겸 날이 흐린중에 방향을 잡아 일단

미리내 쯤으로 가는중 이었다. 아내가 조병화선생 기념관 내부를 본적이 없다해서

급히 길을 찾아 들었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 한번에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기념관도 갈 때마다

다른것이 자꾸 보인다. 생전 53권의 시집과 110여권의 산문등등 책을 출간한

선생은 참 대단한 분이다 라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저 웬만한 저술가라도

몇십권 정도지 이처럼 다작을 내기는 힘들다. 우리는 평생 몇권의 책을 낼수

있을까?  단 한권도 내지 못하는 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마로니에는 밤보다 일찍 익는다. 서양칠엽수로 알려진 마로니에 나무는

저렇게 열매가 익었다. 망원렌즈의 힘이 느껴진다. 일반 렌즈로는 저 열매가

저렇게 찍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가로수에 많이 심지만 사실 저 나무

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서양 외래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나무가

서울 문리대 교정에 있었고 또 대학 초년시절 그 나무 밑에서 사진도 찍고 가끔

나무 아래 앉아 있기도 해서 나의 닉네임을 마로니에로 하게되었다.

 

 

지난번에도 썻지만 관리가 힘들어 울창한 담쟁이 밑둥을 잘랐다는데 일부는

싹을 내어 자라고 있었다. 지자체등이 관리하지 않고 오롯이 후손들이 관리

하기엔 벅차긴 하지만, 못내 아쉬운 점이다

 

 

버릴거 버리고 안버릴것까지 버렸다는 말씀!  인생이 누구나 그렇듯

이 말씀은 짧지만 울림이 매우 크게 느껴진다

 

 

 

웬만한 사진은 지난번 방문때 대충 다 찍은고로 이번엔 좀 색다른걸로

몇장 찍었다. 누가 그린걸까? 찍은걸까?

 

 

많은 후배 문인,동료, 선배들의 글들이 많지만 이번엔 이 김남조 시인의 글이 눈에 쏙 들어

왔다.  그래 맞는다!  나를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고향도 아니고 나의 '눈물의 교향'을

아는 사람들 뿐이로구나! 오죽하면 이런 글이 나왔을까?

 

코로나 여파로 옆쪽 편운재는 안내를 안한다 했다. 해서 본채 기념관만 관람을 했다. 전보다

아주 약간 내부 진열품의 구조 변경을 한듯했다.

 

 

편운 문학상 수상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왕성한 문학활동을 하고들

계실터이다

 

선생의 생가터이자 후손이 살고 있는 집^

 

 

동네 담벼락에는 군데군데 이렇게 글들이 씌여져 있었다. 충무의 동피랑 마을을

연상케 한다. 동네가 옛적 모습을 간직하니 이것도 가능할게다

 

 

 

이렇듯 고향에 땅이 있고 후손이 살고 있고 또 고향에 묻히신 선생은 행복한

분이다. 이 시대에 그 누가 고향이 온전히 보존되며 집과 땅이 있으며 더구나

고향땅 태어났던 곳에 묻히는 이 누가 있으랴?  동네도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부러운 점이다

 

 

 

난실 마을의 9월 정취는 이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우리는 비가 살짝 뿌리는 미리내를 찾아 들었다. 이번 호우로 미리내

안쪽 올라가는 길은 큰 피해를 입었다. 도로 한편 물 흐르는 쪽이 대거

빗물에 쓸려나가 버린것이다. 아스팔트 일부도 마치 지진을 당한듯 주름이

크게 잡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아낙이 파는 토마토 가지등을 사고 포도밭에서는

거봉과 요즘 신품종 연두색의 포도를 좀 구입했다. 아내는 새우 매운탕을

먹자고 했으나 저녁을 먹기엔 너무 이른 오후 4시경이라 사실은 저녁값으로

과일을 산 셈이다.

 

그러나 그 토마토는 내가 이제껏 평생 먹었던 그어느것 보다도 맛이

좋았다. 설령 독같이 시골땅에서 키운 토마토라 할지라도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좋은 토질은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내고 좋은 사람이

좋은 과일도 만들어 낸다. 난실 마을이 바로 그런곳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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