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2년 7월, 미국에 본부를 둔 전 세계 아마추어 골퍼 중 티칭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자격을 주는 시험이 한국에 상륙한 지 몇 년 안 됐을 때이다. 

 

거 뭐 그냥 골프 잘 치면 됐지 무슨 자격증을? 이런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뭔가 인증 같은걸

받아두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심심풀이라도 초보 골퍼들을 지도해도 면(面)이 서고 말 빨이

먹힐게 아니냐? 이런 생각에 시험에 응시했다. 

사실 IMF를 막 지나 나라 살림은 겨우 기지개를 켤 시기였고 2000년 7월 의약분업이 실시되어

약국 환경도 혼란할 때였다. 그러나 슬럼프가 있기도 했지만, 나의 골프 실력은 아마추어로서는

어느 정도 상위급에 도달한 시점이었다. 

 

이미 그런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경북의 어느 약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이러저러 의문점

을 묻기도 했으나 그분은 별로 특별한 메리트는 없다고 답을 한 터였다.

 

PGTCA(Professional Golf Teachers & Coachs of America)는  USGTF와 더불어

당시 한국에 상륙한 유력한 골프 티칭 기관이었다. 한국의 두 프로 골퍼 단체 KPGA, KLPGA

에서 이렇다 할 티칭프로를 양성하고 있지 않을 때여서 미국의 티칭프로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이 그런대로 매력이 있기도 할 때였다. 

 

물론 나중에 차차 KPGA, KLPGA에서도 티칭프로를 선발하게 되었지만,  프로를 목표로

훈련하던 선수 지향 출신들과 나이 들어 아마추어로 골프를 잘하고 좋아하던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는

애당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미국의 두 기관이 주관하던 티칭프로는 당연 보통 일반인을 위한 것이라서 그 실력이나 수준을

프로급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겨우 체계적 골프 교습이 마약 시작되던 때라서 두 기관의 티칭

교육 수준은 나름 꽤 높은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암튼 7월인가? 많은 지원자들과 함께 블루헤런 골프장에서 선발 시험을 치렀다. 사전에 그곳

회원권을 갖고 있는 약사 후배들과 팀을 만들어 예행연습도 했다. 사실 블루헤런은 한국

여자 프로 메이저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코스가 만만치 않게 어려운 곳이다. 

 

아웃코스로 출발해서 전반 7번 홀까지 이븐파로 순항 중이었다. 한데 8번 홀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8번 홀은 그린 앞에 조금 큰 연못이 있는 곳이데 연못 앞까지 티샷을 날려 불과 100여 미터 타깃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세컨드샷이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한번 더 샷을 했지만 그마저도 연못에 빠지는

기이한 일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그날 그곳 일정 부분의 잔디나 흙의 상태가 안 좋은 곳이 있었던 거

같다. 결국 여기서 양파 즉 4타를 까먹고 말았다. 

 

잘 나가다 전의가 상실됨은 물론 후반에서 만회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아시다시피 블루헤런은

후반 9홀이 전반에 비해 훨씬 어려운 곳이다. 8번 홀의 충격은 계속되었고 홀이 지날수록 스코어는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9 오버파로 대회를 마쳤고,

나는 티칭프로의 꿈을 버렸다. 

 

그런데 이듬해 7월 난데없이 작년 테스트에 추가 합격을 했으니 몇 날 며칠까지 준비하여 합숙훈련에 

참여하라고 연락이 왔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나는 훈련에 참여하기로 했다. 당시 1주간의 합숙훈련

을 용평에서 실시했는데, 골프장비를 차에 싣고 7월 여름 용평으로 달렸다.

약국 입장에서 1주간의 시간을 내기는 사실 쉬운 일도 아니었다.

 

용평 호텔에서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며 1주간의 훈련을 마쳤다. 볼의 탄도 이론, 구질에 관한 것, 등등

기타 드로우 페이드샷의 실기 테스트 같은 나름 이론과 실전을 겸한 훈련이었다.

당시 골프 이론을 배운후 시험을 보았는데, 어느 골프장인가에서 티칭을 하다 온 프로 2명 인가가

있었는데, 시험 시간이 다 되어도 그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해서 티칭을 업으로 해 온 이 친구들이

골프 이론에는 매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동기들 중에는 상당히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비록 아마추어로 골프를 쳐 왔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골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높았고 골프를 즐겨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벼가 일부 패어 희끗한 7월의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영어로 써진 아주 멋진 티칭프로 자격증을 나중에 보내준 건 물론이었다. 

 

꽤나 근사하게 디자인된 티칭프로 자격증

 

 

나는 이 자격증을 약국에 한참을 걸어 두었었다. 그 이유는 내가 티칭 프로라는 걸 알리기 위함도

물론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끔씩 약국에 오는 손님 중,

 

" 아! 이거 골프 좀 쳤더니 어깨가 뻐근해서 말이요~ 뭐 좀 좋은 거 없소? "  이러면서 아주 거들먹?

( 내가 보기엔 그랬다) 거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던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 아~ 그러셔유? 나 골프 티칭 프로요~

저기 저 증명서 좀 보시구려! 까불지 마시고 "

 

사실 약국에 걸어 놓은 자격증을 누가 유심히 볼까마는, 암튼 나름대로 나에게 그런 심리가

좀 있었다 할까?  즉 괜히 골프 좀 친다고 목에 힘주지 마셔~ 이런 의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약국의 약사가 티칭프로 자격까지 있다는 게 무슨 약국 경영에 도움이 될까? 백번

손해일뿐이지~ 약국은 안 보고 맨날 골프장에만 가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할게 뻔하지 않은가? 

해서 한참 지난 후 저 액자는 집으로 서둘러 가지고 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티칭프로 자격증을 단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동료들과 골프를

칠 땐,,

 

" 아니 프로가 그것도 못 넣어? "혹은 "프로가 샷이 왜 그래~?"

 

이들은 늘 그렇게 나를 골려 먹기 일쑤였다.

 

어쩌다 샷이 멋지게 될 땐 " 역시 프로는 다르군~" 이러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었다. 어느 쪽이 됐든 이런 것들은 나의 골프에 방해만 됐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해서, 에이 괜히 그놈의 티칭프로 자격 땄나 봐~ 그냥 조신히 있을걸~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런 얘기하는 친구는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티칭 프로가 미국으로 건너가 좀 더 훈련과 공부를 하면 Master라는 윗급의 자격을 획득하는

방법이 있었다. 뭐 현실적으로 가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더러는 그런 꿈을 가지고 티칭 프로가 된

이도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연배의 약사 한 분도 USGTF 티칭 프로였는데 원체 재정이 넉넉한지라

충분히 미국에 건너가 Master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려 너무도

아쉽다. 

 

티칭 프로 자격이 나의 골프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주변에 골프를 썩 잘 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기가 쓰는 골프 채의 스펙은 물론 아주 기초적인 것도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또한 티칭 프로가 되었다 해서 나의 골프가 반석 위에 올려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골프란 누가 필드에 자주 가느냐의 문제이지 자격증이 관건이 아님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실 나도 골프가 너무나 안 되는 슬럼프 기간을 오래 겪었는데, 그 시기에 골프채의 특성을 가장 많이 

연구했었다. 골프가 갑자기 잘 안 되니 이것저것 뒤적여 본 것인데, 물론 그것 역시 골프 실력 향상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었다. 골프란 참 이상한 것이 한때 잘 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안되기 시작해서 아주

오랫동안 그 상태가 지속되기도 한다. 확실히 다른 운동보다도 예민한 그런 면이 있다. 

 

티칭 프로 이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런 시도를 해 본걸 나는 그리 후회라거나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직업으로 활용해 본 적도 없고 한국에서 특별히 인정해 주는 자격증도 아니지만, 

아마도 지금도 두 기관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자골프를 위시해서 한국의 골프는 이제 그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 더불어 한국의 골프 티칭 수준도

이젠 세계적 수준에 필적해 간다고 생각된다. K-Pop 이 세계로 뻗어 나가듯 골프 또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뭐든 인생에는 한때라도 해 보는 게 있다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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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지문이 독립적이듯 우리가 글을 쓰는 방법도 천차만별

모두 독특하고 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전에 저는 볼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일단 

글씨를 꾹꾹 눌러야 써지는 게 싫었고 한참을 쓰다 보면 가운데 손

가락 첫째 마디가 아프기도 했지요. 그런데 잉크를 넣은 만년필은

그런 게 없어서 술술 쓰기가 편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쯤인가? 아니 그 좀 전 인듯한데 컴퓨터에 자판

으로 글을 쓰면서 정말 딴 세상이 되었습니다. 쓰다가 안 맞으면 쉽게

지우면 되고 다시 쓰면 되고 너무도 편했지요! 아무튼 그때부터 이런저런

글들을 컴에서 쓰고 저장을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의 띄어쓰기 같은걸 잘 못해서 표준화된 글을 쓰지

못했는데, 한참 전 친구가 제가 쓴 글을 보더니 

 

" 자네는 글에 사투리 표현이 많고 띄어쓰기가 좀 잘 안되고 있군, 사투

리는 뭐 그렇다 치고~ " 

 

해서 다시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그 친구는 교수 출신이라 글을 많이 쓰고

평가도 많이 하고 그래서 저와는 다른 그런 글쓰기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해서 저도 심기일전하여 글쓰기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지요. 

 

최근의 저의 글쓰기 방법을  좀 외람되오나 한번 올려 볼까 합니다.

 

1, 글은 억지로 쓰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써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니다

 

2, 생각이 날 때 어떤 시상이나 글의 주제가 문득 떠 오를 때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글로 옮긴다. 특별히 즉시 메모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다. 폰의 메모장에

가끔 메모도 병행한다

 

3, 대체적인 글의 얼개를 생각 나는 대로 작성한다

4, 써 놓은 글의 전후 좌우를 살펴서 글을 다듬는다

5, 컴 내 카페에 저장을 해 두고 당분간 지켜본다

 

6, 중간에 첨부할 내용이 있으면 집어넣는다. 문득문득 추가로 넣을 내용이 떠 오른다

7, 잘못 쓴 내용, 기타 뺄 내용이 있으면 삭제한다

8, 그러고 다시 글을 다듬는다. 

 

9, 어떤 글은 1주일, 혹은 한 달 이상 어떤 글은 6개월 이상 보고 또 보며 

내용을 고쳐 나간다. 계속 봐도 어쩐지 계속 미진한 글이 있다 

10, 이 과정을 나는 글을 숙성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마치 포도주를

오랜 기간 동안 숙성시키는 것과 같다

 

아무리 빨라도 2-3번 수정은 기본이고 10번, 20번, 어떤 글은 30번 이상 다듬는

경우도 있다. 이는 내가 쓰는 글에 무슨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11, 적절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되면 글을 꺼내어 블로그 또는 카페에 올린다 

12, 블로그에 올리는 글과 카페에 올리는 글은 같을 수도 있고 약간 다를 수도 있다 

13, 예전에 쓴 블로그의 글이 맘에 안 차면 일부 수정도 한다. 그러나 글 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냥 두는 게 대부분이다 

 

글을 다시 정리 즉 퇴고할 때는 최재천 선생의 3원칙에 따라 해 본다.

즉 ~

 

a, 정확하게 써졌는가?

b,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인 글이 되었는가?

c, 표현이 우아하게 되고 있는가? 

 

여기서 잘 안되면 그것이 될 때까지 계속 두고두고 손질을 한다

 

그러나 모든 글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는 즉시 써서 약간의 

수정만 거쳐 올리기도 한다.  타이밍이 필요한 때이다. 

 

위의 3원칙 외에 더 참고할 사항이 있다면 추가로 차용할 예정이다

 

" 거 너무 글 쓰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 아니요? " 

 

그럴 수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내가 혼자 보는 글이 아니다 보니

읽는 분이 편해야 하고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도 가급적 줄여야 하고 또 쓰다

보면 나만 이해하고 독자는 문맥을 파악하기 어렵게 쓴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좀 들이는 편이다  

 

*

 

그런데 여전히 많은 오류가 나는 건 역시 띄어쓰기지요. 카페의 글쓰기에서 

띄어쓰기 오류를 검사해 보면 정말 많은 미스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예전부터

몸에 글쓰기가 체화되어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기본 띄어쓰기 외에 문맥만 통하면 그냥 내 맘대로 해도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쯤 컴 내부의 도움 없이 완전하게 띄어쓰기를 해 낼 수 있을지 참 막연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글을 써 놓고 오래 숙성하다 보니 과연 이런 글을 올리는 게 맞는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글 올리기를 주저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글이란 착상이 떠 오를때 즉시 써서 몇번의 간단한 수정을 거친 후 곧바로

올려지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장고 끝에 악수 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 오래 숙성시키다 보면 뜻하지 않게 부패가

일어날 공산도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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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사람들은 글은 전문적 식견이 있는 사람이 쓴다고 생각하기 쉽다.

일반인들이 무슨 글을 그렇게 거창하게 쓴다고 그러실까?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 역시 지금까지 그 어떤 글쓰기 훈련이나 특별한 지도를 받은 적은 없고

오로지 글은 컴퓨터 자판으로 카페와 제 블로그에 올린 것이 전부다.

2003 년에 동문회, 카페 등에 올린 글을 모아서 수필집이라고 한 권 낸 적은

있었다. 그러니까 순수 아마추어 글 생산자일 뿐이다.  

 

우연히 최재천의 '독서는 일이다'라는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글을

어떻게 써야 좋은지를 생애 처음 들은 셈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지금까지

글쓰기에 적용해 오는 중이다. 단, 그 영상은  진리의 한 파편일 뿐으로  글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그 외에도 헬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최재천 선생의 글쓰기 방법을 위주로 해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  정확하게,  경제적으로,  우아하게 "

    precision, economy and grace!! 

 

 

1, 정확하게 ~ ~ 어떤 내용을 기술할 때 사실에 부합한 정확성을 먼저 확인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문법이나 서술, 앞뒤 문장의 일치 등은 기본이고 사실에 맞지 않는

엉터리 수치라든지, 어렴풋한 내용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가능한 소위 fact를 먼저

확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좀 귀찮지만 맞춤법, 띄어쓰기 등도 포함될 것이다. 

 

그렇게 해도 틀리는 글을 쓸 경우는 많다 

 

2, 경제적~ ~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있으면 과감히 잘라 버려라. 중언부언 중복 설명할

경우 등 , 애매한 묘사 같은 건 가차 없이 도려 낸다는 의미로~  

 

3, 우아하게 ~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써졌다 해도 미적 아름다움과 향기가 나도록

우아하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제일 어려운 일로 생각된다  

 

어떤 글은 지나치게 화장을 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글을 더러 만나기도 한다.

미사려구가 많으면 양념을 너무 친 음식같이 된다. 글은 담백미가 있는 게 좋다. 

 

그렇다면 그런 글은 어떤 글이요? 혹 최재천 선생의 샘플 글이라도 좀 올려 보시구려~ 

네에,  이 글의 말미에 몇 구절  짧게라도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그래야 이 글을 쓴 의미가 완성되겠지요~ 

 

 

 그리고 최재천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4, 미리 써 놓고 가다듬으면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어느 정도로 가다듬어야 하는가? 

 

일단 글을 쓴다.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발음할 때 약간의 걸림돌이 있어 숨이 차거나

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발음되도록 수십 번 고쳐 쓴다. 50번 100번도 좋다.

 

실제 저 자신도 그렇게 10번 ~20번 이상 글을 고쳐 써 본 적이 있다. 처음 쓴 글과 완전히

다른 글이 되어 있음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50번이나 글을 고쳐 쓸 수 있을까?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도 아닌데~ 

 

5, 그리고 많이 읽어야 글은 더 잘 쓸 수 있다

 

흔히 글을 좀 쓰면 주위에서 ' 그 사람 글재주가 있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재주로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말에는 흔쾌히 동의할 수 없다. 손재주, 발 재주 이런 의미의 재주란

뜻과 글은 다르지 않을까? 

 

많은 독서량이 글을 좌우한다는데 동의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아무것도 안 읽으면서 혹은 인생의 어느 한때라도  다량의 독서 경험도 없이

글을 잘 쓸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최 선생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는 Richard

Feynman 으로 알려져 있고 다윈 이후 최고의 생물학자도 역시 Richard Dawkins 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저 분들이 일반인들을 위한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논문만 발표한 것이 아니고!! 

 

6, 그만큼 책을 쓴다는 건 생각 외로 중요하다는 걸 얘기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로버트 위버 교수가 하바드 대학으로 박사 코스를 밟으러 가는 최재천

선생에게 써준 추천서에는 이 문구가 들어있다 

 

He writes  with precision, economy and grace!! 

 

그런데 현재 우리네 대학은 어떤지 몰라도 그 옛날 미국의 대학에서는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에 대한 별도의 강의가 있었다 한다. 그것은 아무리 연구를 잘해도 논문을 발표할 때

그걸 얼마나 잘 글로 표현하느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로 그들은 글쓰기의 중요성을 일찍이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는 과연 글쓰기가 중요하다는 걸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중 고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사회에서 까지! 

 

 

"이 나이에 글은 그렇게 써서 무엇해? "

"까짓 맘 편하게 나는 되는대로 그냥 쓰고 말겠다 고요~ "

"그렇게 써서 출판할 것도 아닌데~~ 뭐! "

 

물론 그런 맘을 먹고 계시는 걸 이해 못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나 자신도 그냥 그러고 싶은 맘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혹시 나는, 또 우리 세대는 그렇다 치고 자식들 혹은 손자녀들에게는 이런 식의 글쓰기

방법이 그들의 앞날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 걔들이 좀 더 글을 잘 써서 그들의

본질적 가치 외에 부가적 성과를 높일 수 있다면 밑져도 본전은 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최재천 선생의 글쓰기 방법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다.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느냐 하는것이 관건일 따름이다. 

 

실제 저 자신도 아직 공부 중인 아들이 어떻게 글을 써내는지 이제껏 물어본 적도 없지만,

이 글을 기회로 한번 알아볼 생각이다. 

 

"  아들아~도대체 너는 글쓰기에 어떤 원칙 같은 게 있냐? 리포트 같은 건

어떤 식으로 써서 제출하고?"

 

 

그런데 최재천 선생도 영상 말미에 언급을 하셨지만, 위의 3원칙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글쓰는데 일부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글이란 다소 투박하여 거친 질그릇처럼 써질 수도 있고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청자처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라 생각한다 

 

 

---------------* -------------

 

참고 , 최재천 선생의 "인간과 동물" 중 일부 글 첨부 

 

• 다윈과 윌리스의 이론에 따르면, 몇가지 조건들만 맞아떨어지면 진화는

반드시 일어나며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진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조건들을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지요. 다윈과 윌리스가

정리한 이론들을 보면 대충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변이'가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모양.크기.색깔이 똑같은 달팽이

집단에서는 아무리 서로 짝짓기를 하여 자손을 낳아도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복제 인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다양한

형태로 결혼을  하더라도 다양한 형질의 자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한마디로 개체를 중요시하는 이론입니다. 다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 따로따로 숨 쉬는 개체, 그리고 개체의 번식을 통한

형질의 계승이었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문학, 예술, 철학 등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인의 의식

구조와 삶까지도 바꿔놓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며,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어서 우리는

이를 '다윈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  글 자체가 간결 명료하며 보통 우리들이 신경을 좀 써서 작성한

글과 대동소이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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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대한 기억~

 

그 희미한 몇가지나마  마치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걸 겨우

가느다란 실 하나로 잡아 당기듯 그렇게 더 늦기 전에 기억 속에

매달아 놓는 중이다. 

 

 

울 엄마는 생전 큰 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왜냐면 나에게 뭘 야단을 치신 적도, 지적을 하신 적도, 명령을 내린

적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한 시간은 고작 12년~

그 중에도 내가 세상을 인식한 때를 5살로 본다면  대략 7년 여에 불과하다. 

 

청미천(안성 일죽면에 있음) 큰 개울 밭!  그 밭에서 여름 뙤약볕에

김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린 내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잠시

나를 업어서 가시곤 하던 것과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쓰고 일하시던 것이

어렴풋 기억 난다.

 

' 앞산 노을 질때까지 호미 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며 흙에 살던

어머니~ ' 

 

딱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겨울이면 대개의 또래 친구들의 엄마는 집에서 겨울을 나시는데 반해

울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인근 동네로 장사를 나가시어 저녁 늦게나

돌아 오시던 것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쌓여도 엄마는 매일 장사를

나가셨다. 집에서 30여 리의 길을 그렇게 오고 가셨다.

당시엔 어린 나로서는 그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우리 엄마는 이 추운 날에도 집에 없는 거야? "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는,

 

" 오늘은 가리울 누구네 집에서 점심을 한 술 떴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는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가 힘든 때였는데,

점심 한술 얻어 먹는다는 것이 그리 녹록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눈치가 보였을까? 순박했던 시골이니 가능한 것이었을 터, 

가리울은 장호원 근처 방추리 옆에 있는 작은 동네로 우리 집에서는 30리도

더 되는 꽤나 먼 곳이었다. 

 

그렇게 한 겨울 내내 인근 마을 사방 삼십여 리를 돌며 장사를 하시고 몇 푼 돈을

버셨던 거다.

 

194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엄마 사진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대략 194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먼저 일본에 가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머리에 꽃을 꽂아 표식을 하여 상봉을

하셨다는 엄마! 

 

오사카에서 형님과 큰 누님을 낳으시고 그런대로 사시다가 해방이 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건데, 아버지의 누님 즉 엄마에게는 시누이가 될 터이고

나에게는 고모가 사시는 합천 덕곡면 옆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정터,

라는 동네~

 

그 동네로 다시 오신 거다. 사실 그 곳은 엄마가 태어나 살던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인근 합천이었다. 

 

그 고모가 사는 집이라고 여유가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6개월을

버티시다 보따리를 싸서 흘러 흘러 오신게 지금의 안성 일죽이다. 기왕 고향을

떠나는 거  왜? 서울로 그냥 가시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다시 정착을 하신

건지는 이제 풀 길 없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당시의 철도는 서울로 쭈욱 이어지는 경부선이 있었고 평택에서 갈라져

안성을 거쳐 장호원, 여주로 가는 지선이 있었다. 

 

오사카도 그렇고 안성 일죽도 그렇고 어차피 산 설고 물 설고 아는 이 없는

타향이다. 내가 태어난 일죽은 나에겐 고향이지만 엄마 아버지에겐 시리기만

한  타향일 뿐이다.

 

'타향살이'  노래를 부를 땐 항상 울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향인 일죽을 떠나 떠나 50년 이상 살고 있는 타향은 타향이라 할 것도 없다.

자동차로 30-40분 이면 닫는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특별히 어떤 노래를 부르신 걸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

가지다. 당시 시골에서는 노래를 부를 일도 없었고 아무데서나 노래를 흥얼

거릴 그런 형국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이 고될 때 불렀다는 농요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며 살 만큼 당시 삶에 흥이 있었을까? 집집마다 라디오는 커녕

좀 사는 집에는 축음기가 있긴 했지만 우리 집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확실한 기억!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음력 4월 초나흘 밤이다. 그 며칠 전 나는 우리집 뒤

작은 동산 너머의 풀숲에서 마침 뜸부기가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걸 발견

했었다. 오랜 투병에 쇄약 해질 대로 쇄약 해져 경각에 달한 엄마는 내가 말하는

뜸부기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 그 뜸부기 좀 잡아 오너라~ " 하셨다.

 

초승달이 실 눈썹처럼 희미하게 비추던 그 밤에 나는 누님(당시 17세)과 함께

큰 광주리를 들고 컴컴한 뒷동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덤이 몇개 있어 밤에는

혼자는 무서워서 가기 힘든 곳이었다. 낮에 봐 두었던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억새풀

둥지를 가늠하여 광주리를 덮쳤다.

 

뜸부기는 알을 품고 있다 광주리와 뜸부기 집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조그마한 중닭 정도의 뜸부기를 손질하여 누이는 밤새 불을 때서 솥에 넣고 푹~고았다.

야생 뜸부기는 살이 질겨 웬만큼 고아서는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엄마는 뜸부기 국물을 한 모금 겨우 드셨을 뿐이다. 더 이상

살코기도 드시지 못했다. 

겨우 누워 계시는 엄마를 뒤로한채 나는 학교를 갔고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학교를 마쳤다. 학교문을 나서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날 찾았다. 

 

최대한 빨리 나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오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엄마가 그 사이 돌아가셨다는 걸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약 2km 남짓 되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 좌우로는 모내기가

한창 이었다.

간간이 제비가 날고 봄날의 따스한 열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 아! 이제 엄마와 이별인가? '

 

그러나 특별한 슬픔이나 애절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딱 1년 전 이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연이어 닥치는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였을까?

 

뜸부기 사건은 나와  엄마의 마지막  이생에서의 인연이었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었고 열 세살,열 일곱살 두 남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눈 감으면 고~ 오 향  눈 뜨면 타향~ "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안 하게 떠 오르는 고향! 고향의 골목, 나무, 우물가, 짚 앞

저 멀리 먼지가 뽀얗게 나던 신작로~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  

아무리 고향을 최근에 다녀와도 뒤돌아 서면 방금 본 변한 풍경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그 옛날 정경만 기억나는 참으로 이상한 그런 경험이 아마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니 천리 타향, 만리 이국에 가서 산들 어찌 어릴적 내 고향을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곳이 뻐젓이 좋은 곳이던 어디 내놓을 그런 곳이 못 되던 그건 중요하지 않

다. 내노라하는 인물이 나왔건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고향은 고향일 뿐이다

 

엄마는 마치 후광처럼 은은하게 내 기억을 감싸고 있다.  마치 어떤 풍경화의 뒷

배경처럼, 연주회의 배경 음악 같이~  

 

엄마와 고향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찬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 모틍이를 돌아 하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시던

엄마가 너무나 그립다^* 

 

그때가 나에게는 무한 행복의 시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항상 거기 계시는 그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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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0년도 초반 , 정확히는 72년 73년 그 즈음이다.

 

가까스로 대학은 갔지만, 그 넘의 학비가 자나 깨나 걱정이어서 

어떻게 하면 학비를 벌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한 학기 등록금은 4만 원 정도

였고 한 달 과외비는 대략 2만원 이었으니 잘만 하면 학비는 충분

하고 용돈까지 되고도 남는 괜찮은 장사였다. 

 

실제로 과외비 벌어서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세고비아 통기타를

종로 2가에 가서 덜컥 사기도 했으니까~ 

 

당시는 유신 반대 데모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해서 하루도

캠퍼스가 평화로운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학비 걱정으로

나날을 지새우는 처지에 무슨 데모인들 눈에 들어올까? 

거 뭐 데모도 다 먹고살만하니 하는 거지~  흠! 

 

일간지 광고란에 엄지 손톱만한 크기로 '과외' 광고를 특별히 싼 값에 

낼 수가 있었다. '과외, 전화번호, 어느 학교 '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돈 없는 학생이라고 특별히 봐준 것이다. 그때 돈으로 한 천원 정도지

싶다. 

요즘처럼 다른 일거리를 해 볼 수도 없었고 오직 과외 외에는 학비 충당

의 기회가 전무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어이쿠 이게 웬 떡이냐~~ 

 

나는 보문동인가 하여튼 어느 허름한 다방 약속 장소로 학교 마치고 

부랴부랴 나갔다. 테이블에는 중년의 잠바 차림의 수수한 분이 앉아

있었다. 통상 학교 어쩌고 등의 소개가 끝나자,

 

" 우리는, 아니 나는 공화당의 자제들 모임인 ' 송아지 회' 란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요! 그런데 당신의 할 일이란 게 공부를 가르치는 그런

게 아니고 안성에 가면 안법 고등학교가 있지. 거기 가서 학교 선생들이

어떻게 수업을 잘하고 있는지, 거 뭐 어려울 것도 없소. 수업할 때 복도에서

슬쩍 한번 들으면 대충 파악이 가능할 거 아니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또 학교 분위기나 운영 사정 같은 것도 좀 봐 가면서~  

그런 거 슬슬  관찰해주면 되는 거요! "

 

" 아니 과외 때문에 저를 보잔거 아니었나요? " 

 

" 그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것도 공부에 관련된 일이잖소? 그리고 음 

이걸 잘 해결해 주면 말이지  까짓 학비 정도는 껌값도 안되게 될 거야~

또 송아지회에도 좀 관여 할 수 있고~ 그러니 어떻게 한번 해 볼 생각이 있소?" 

 

그러나 나는 선뜻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고 이게 대체 나 보고 뭘 하라는

소린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내가 뭘 학교에 가서 염탐꾼이 돼라

는 얘긴가?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더니 그 사람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 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1분이 지나 5분이 지나 10분이 지나 30분이 지나도

도통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아니 그 사람은 영영 자리에 안 돌아오고 말았다

하염없이 다방 구석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하다 결국 집으로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에잇 오늘도 과외는 또 허탕이군~ " 

 

나는 왠지 그가 제안했던 그것이 갑자기 매우 괜찮은 조건인 듯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냥 무조건 해 본다고 할걸 그랬나?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고~

그런데 뭔지도 모르고 덜컥 한다고 하기도 그렇잖아?

 

혹시 그 사람 어디 간첩은 아닐까? 순진한 학생들 데려다 소위 학교 내에

프락치를 심으려는 건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는 무엇을 위하여 나를 만났는지 그게 궁금하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새털 하나만큼도 모르는 쑥맥 같은 나를 보고

아예 틀렸다 하고 때려치운 건 아닌지! 

 

아마도 그 일이 진짜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분이 나 외에도 다른 학생들을 

만나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간혹 이 나이에도 이상하리 만치 특정

집단에 충성을 바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혹시 저 친구 그때 저런 일로 학비를 충당했

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뭐 이건 추측일 뿐이다 

 

그때 그 일이 결론적으로 잘 된 건지, 잘 못된 건지, 새옹지마의 고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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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를 비롯한 너무나 훌륭한 팀들이 즐비한 이번 풍류 대장을 띄엄 띄엄

어떤 週는 보다가 또 어떤 週는 빼먹기도 하며 그럭저럭 시청을 이어 갔는데,

드디어 어젯밤(12.21)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국악의 크로스오버, 순수 국악만이 아닌 팝과 블루스 재즈 발라드 등이

함께 결합된 어쩌면 세계 시장을 넘보기 위한 시도라 보이는 풍류 대장~

 

사실 그동안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캐치프레이즈로만 끝난 감이 있는 이 우리 것~  좋으면 뭐하나? 즐기지를

않고 찾지도 않고 은연중  무시하고 그저 흘러간 옛 시절의 유물 정도로만

여기던 창, 판소리 등등!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이 별 재미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춘향가,

심청가, 등 몇 가지로 소재가 한정되어 늘상 그것만 우려먹는 느낌이었다.

대중의 취향은 날로 새로움을 찾아 다양화 해 가는데, 재료는 100년 200년

전의 것 그대로를 테이블에 늘 올렸던 것은 아닐지~(국악 장르에 얼마나

많은 영역이 있는지 저 자신도 잘 모름)

 

그것을 탈피하고자 함이랄까? 그렇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송가인 조차 

저들이 그냥 국악 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런 자리로 불러내게 된

그 자체에 미안함을 표하고 있었다. 저 수많은 국악 후예들이 그 본래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은 변해가는 시대의 외면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음이리라. 

 

국악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몸부림을 쳐 왔는지는 그저 말끝마다

 

"이제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

 

로 표현된다. 얼마나 엉성한 공연 수준이면 그들이 탈의실 하나 없는 공연장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까? 그동안 우리 국악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하겠다. 

 

우리 것이 좋다는 것은 태어난 이 땅과, 물과, 하늘과, 곡식과, 그 모든 것이

애당초 우리 몸에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출발한 노래, 글, 그림,

기타 그 모든 것이 당연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잘 맞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의 것이 더 좋게 보이는 세월을 살아왔을까? 

 

국악이든 크로스오버 국악이든 그 외면의 본질은 이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 以下의 글은 저 자신의 판단입니다. 우리 것이 외면당한 이유가 이것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

 

그건 조선 500년의 모화(慕華) 사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우리보다 

큰 대국, 중국의 것은 뭐든 좋다는 생각~ 그저 왕을 포함 고위 대신들이 자나깨나

중국을 칭송하는데 백성인들 별 수 있었을까? (그중에 몇몇은 반대의 생각을 했다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 36년간 저들의 조선인 비하 정책이 또 한 번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제국보다 뭐든 열등한 조선~ 그저 엽전들은 해봤자 벼룩이지~ 거 뭐 니들이 

잘하는 게 뭐야? 이름하여 식민사관~

앞다퉈 일제에 빌붙기 바빴던 좀 배웠단 식자층들! 그중엔 역사학자도 많다.

조선 500년도 모자라 다시 한번 자기 비하의 수난을 겹쳐 받아야 했다. 

 

그리고 해방 후 이젠 그 대상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으로 범위가 넓혀졌다. 

 

"뭐든 미국 것은 좋은 것이여~ 유럽? 그야 하나마나한 얘기지~ 우린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을 따라잡을 수 없어~ 쟤들 것은 뭐든 우리보다 훌륭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이~ "

 

이름하여 모양(慕洋) 주의다. 대상이 예전 중국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양 제국으로

바뀐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서구 문물에 흠뻑 빠져 그들을

칭송하기 바쁘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실은 나 자신도 이 慕洋주의란 얘기는 김갑수(꽁지머리 그분 아님) 선생으로부터

불과 1-2년 전 처음 들었으니 말이다. 당연 慕美 주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서양 유럽 제국들의 수려한 자연환경, 유수한 건축물, 문화 예술, 거기에 더해 앞선

복지정책 등을 보면 분명 우리와 다른 탁월한 면이 있고 도저히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엄연히 있는 게 사실이다.

 

자연환경이나 수백 년 걸려 지어진 건축물들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갑자기 그들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의 것이 더 좋게 보이거나 생각되는 건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중국도 미국도 서양 여러 나라에도 일정 부분  당연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본다.

그들이라해서 한국의 어떤 부분에 빠져들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땅에 상당 세월을 약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그 비율이 좀 더

높지 않을까 가정을 해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서양 숭배는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충분한 이유가 있는 존중은 마땅히 표해야겠지만~ 

 

그저 그리스 로마 하면 껌뻑 죽고, 스위스의 자연환경에 기가 팍 죽어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그동안 뭐 한 거야?  독일의 철학자, 클래식 음악 얘기만 나오면

그냥 꼬랑지가 척 내려갔던 건 아닐지! 만에 하나 그런 이유로 그들의 문학, 예술,

기타 문물에 애써 잘 맞는 척, 아는 척, 즐기는 척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물론 척 에 그치지 않고 실제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한번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테스 형을 목청 빠지게 부르짖던 이 노래! 도 그렇다. 왜? 하필 소크라테스인가?

세상이 왜 이런지~ 사랑이 왜 이런지~를 구태어 아테네에 물어봐야 하나?  

 

가까운 우리 나라에 원효~ 성철을 비롯해서 혹 발음이 시원찮으면 퇴계~ 퇴계 형!

발음도 비슷하네!  원효 형~ 성철 형~ 이렇게 물으면 안 되나? 뭐 이 정도를 모양주

의의 발로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우리의 인식이 하여간 이쯤 어디엔가 있다는

의미다! 

 

"거참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오!  ㅎㅎ "

 

그렇다고 아무런 실력이나 근거도 없이 우리가 최고라는 똥 배짱만 부린다고 될 일

은 물론 아닐 것이다. 

 

'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길이 따로 있구나~' 란 박일남의 노래가 있다. 어쨌든

모양 주의자는 그 길을 갈 것이고 그건 아니지! 하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할 것이다.

 

 

 

 

국악이 좋은지 어떤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건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실제

대중 속으로 파고들 만큼 매력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 것을 소홀히 했다고

책망하기 전에 그것이 대접받을 만큼 우수해야 함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풍류 대장을 본 소감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퍼커션으로 이루어진 구성에 거문고, 꽹과리, 대금 등이

함께하는 악기의 조합~  그러나 단순히 악기를 조합만 한다고 기대하는 작품이

될 수는 없다. 서도의 탁월한 보컬은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보여줄까?  

대체로 이번 풍류 대장 출연진을 보면 그 탁월한 목소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판소리의 성악이라는 '정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마치 피리를 불때 나오는

소리와 같은 정가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어떤 이는 국악 그 특유의 목소리 패턴을 약간은 식상한 듯 얘기하는데, 다른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에 비해 그 두터움, 미묘한 연결음, 탁월한 고음, 등등은 과연 이들이

어떻게 훈련을 했기에 저런 소리를 낼까? 흥미롭기만 하다 

 

우리 것이 좋아지기 위한 몸부림도 날이 갈수록 구체화되고 있지만, 그에 발맞춰 우리의

의식도 차츰 예전의 그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 둘의 접점이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듯한 일련의 현상을 점차 감지하게 된다 

 

아직 부족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부지기수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한류 열풍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한류가 실제 어느 정도로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

겠다 

 

다수의 심사위원이 한 목소리로 칭찬을 했지만 박정현은 하루빨리 이들을 세계

무대로 내보내야 한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BTS 가 세계 무대를 주름잡지만 사실 그들의 음악이 진정 한국의 어느 부분을

보여주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국악의 크로스오버를 표방하는 서도밴드의

그것은 분명 한국적인 독보적 그 무엇이 있다.

 

꼭 우리 것이 들어가야 세계적인 것이 될 이유는 없지만, K-pop을 위시한

K-culture의 주축으로 국악의 크로스오버가 일정 부분을 담당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p.s

그리고 심사위원인 김종진, 이적, 박정현, 성시경, 송가인, 우영, 솔라, 박칼린은

하나같이 그 심성이 착해 보이고 감동을 숨기지 않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찌 보면 이들의 뭔가 가족적이고 풋풋한 인간 냄새에 풍류 대장을 자주

보게 된 건 아닌지 생각되기도 한다. 특히 솔라의 얼굴 표정을 보는 건 참 재미

를 배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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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는 바보야 그를 잡고 말을 못 하면
너는 바보야
사랑한단 한 마디 그를 잡고 말을 못 하면
떠나가 버려 어서 말을 해


흔적 없는 거리거리마다
말 못 하는 사람들뿐이야
정만 주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울고 말 것을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말을 못 하고 그냥 떠나 버리고

말면 무슨 소용있나? 를 말하는 그런 것인데,

 

몸을 치료하는데도 여기에 딱 맞는 경우가 있다. 

 

' 그거 말일세~  이렇게 하면 충분히 몇 달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뭐가? 

 

골프나 테니스나 기타 과격한? 운동을 하다 보면 평소 보다 많은 하중이

실리게 되고 따라서 근 골격계에 무리가 중첩되다 보면 엘보니, 어깨 통증

같은 고장이 발생하게 된다. 그 양상은 천차만별이라서 어떤 경우는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몇 달이면 원상 복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부위에

계속해서 무리를 주면 다시 재발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면 또 전 보다

훨씬 긴 시간을 더 소요해야 그럭저럭 원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 

 

'아! 그거, 그냥 놔두면 저절로 낫는 거야~ 

 

저절로 놔둔다는 게 3년, 5년, 그러고 질질 끌며 가는 게 다반사다!

물론 처음엔 6개월 1년에 되기도 하는 거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그 기간이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신체기능이 젊을 때와 같지 않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에는 분명 좀 놔두면 그럭저럭 회복이 되던 것들이 서서히 말을 안 듣게

되기 시작한다. 혹시나, 하고 미련을 둬 봐도 역시나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수많은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는 질환 중에서 엘보나 어깨 통증은 사실 다른

특별한 원인이 없을 경우에 원상 복구하는 건 매우 쉬운 편에 속한다.

다른 특별한 원인이란 심장이나 폐 에 문제가 생겨 그 통증이 어깨로 느껴지는

경우이다. 당연 이럴 경우는 확실한 진단이 필수라 하겠다.

 

개중에는 이를 고치기 위해 몇 년을 헤매고 비용도 어마하게 날려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직접 체험해 본 경험에 의하면 약간의 비용과 몇 달간의 꾸준한 인내심만

있다면 큰 걱정을 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다는 것이 나의 관점에서 볼때 그렇다는 것이지 실은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다들 아실것이다.  

 

그런데, 늘 만나는 친구 중에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 친구들은 뭔가 또 다른

친구가 추천하는 방법을 쫓아 열심히 치료를 해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하는 방법이 아주 간단하고 부작용은 0 이라 할 수 있고 이제 중

노년으로 가면서 필수적인 근 골격계의 리모델링에도 안성맞춤인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해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실제 치료된 나의 경험 및 다른 이들의 예를 보여 주어도

좀체 응할 생각을 안 한다. 허! 이거야 원~ 

 

도대체 그 친구들은 뭘 더 원하고 있을까? 

 

좀 더 빠른 방법? 좀 더 저렴한 비용? 좀 더 쉬운 방법?  좀더 믿음이 가는 방법?

 

뭘까?

 

이것이 참 답답한 노릇이다. 세상 무슨 일이든 단언은 금물이고 확신을 함부로 할것도

아니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근 골격계의 고장 중 엘보, 어깨 통증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하고 있고 또 이건 다른 치료에 비하면 치료 난이도가 저 아래 하급에? 속한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이 보다 훨씬 더 비용도 많이 들고 치료 난도가 높은 질환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답답하지만, 그래서 이게 참 몸을 고치는 것도 각 개인의 팔자소관이라고 밖엔 더

할 말이 없다. 

 

" 아니 어떻게 몸 고치는 걸 팔자소관이라 한다 말이요? " 흠! 

 

믿고 안 믿고가 다 그 개인의 어떤 시기에, 기회에 번개처럼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좌지우지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나의 어떤 설득력, 믿음 등이 일부

관여할 것은  틀림없지만, 

 

" 그래 몸을 고치는 것도 다 팔자여~ 암 그렇고 말고~ 

 

관세음보살 나미아미타불 ~ 은 이럴 경우에 하는 말일까?

 

안타깝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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