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 촬영한 나의 고향 빼낙골
현재는 저 집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우리집은 사진 우측에서 두번째 였는데 이미
당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내 고향 능국리하고도 '동물' 에서도 작은 고개를 넘으면
빼낙골 이라고 있었다.
대체 빼낙골이 뭐야? 허구 많은 이름 중에 어째 그런
요상스런 이름을 쓴댜? 거기다 그 동네는 골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작은 뒷산이 있을뿐 골이라 할려면 뭔가 좀 뒤에 웬만한
산이라도 있고 아늑한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동네라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여튼 빼낙골이던, 빼낸골이던, 삐딱골이던, 아주 빼어난
골이란 뜻이건 거 뭐 자세히 알아 뭐하랴!
그 동네가 주류는 아니란 건 확실하고 모두 6 채가 있었
으니 걍 작은 마을이란 거였다. 6(여섯) 집에 애들이 있어야
몇이나 있었겠나?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은 누이뻘이
몇 명, 한두살 아래 동생들이 또 몇 명,
나중에 국민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아래 큰 동네 '동물'을
내려가 보니 애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욕" 이란 것으로 이새끼, 저새끼, 이년, 저년,
썅놈, 개 x 끼, 씨x 새끼, 등등 난 아마도 그런 욕을 제일 늦게
배운 축에 속할게 틀림없다. 마치 지리산 청학동처럼, 빼낙골은
나름 당시 신성한 동네? 였던거다.
그런데 한집 건너 집에 어디서 인지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딱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살았다. 한살
아래였던 그 애는 '선자' 라 불렀다. 그 작은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애가 살게 됐다는건 꽤나 큰 반가운 일이었다.
겨울이면 그 집 방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한송이 순정의 꽃'
이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노래 제목은
'축배의 노래' 란 거다
한송이 순정의 꽃 뉘에게 바치리까~
마음의 창문을 나에게 열어주고
술잔을 높이 들어 이 밤을 노래하리~
인생은 즐거우리 ~ 인생은 즐거우리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어두운 가시밭 길에도 행복은 있으리라
이 중에서 '술잔을 높이 들어' ~ 이 가사만 아주 선명히
또렷히 기억이 나는데, 여튼 그 어린 시절 내가 6살 정도
였을것이다. 몇년 후 그 애는 아랫마을 '구름밭'으로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다
허여 수십년을 그 기억을 잊고 살았다. 술잔이 뭔지도 몰랐고
어차피 난 지금도 술잔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그러다 작년 쯤인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아! 그때 그
노래를 부르며 놀던 그 애는 지금 어디 살지?
또 몇살 아래였던 그 옆집의 갑순이란 애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그래서 동물 출신 후배에게 수소문을 하니 그 선자란 애는
1년 후배이며 지금 서울 어드메에 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 아! 여보세요~ 선자씨? 나 누군줄 알겠소? 어쩌구 저쩌구
나 빼낙골 살던 누구요!! "
"그 잖아도 상애한테 얘기 들었어요~~ 참 오랜만 이어요"
자 여기서 부터 이제 옥경이 노래 가사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그간
"어디서 무얼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옛날 빼나골 살때 기억은 좀 나는지~ 등등
아니면 최백호가 노래했듯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뭐 첫사랑이라고 말할것 까지는 안 되지만 어린 유년의
추억으로 말하자면 나름 때 묻지 않은
신선한 기억이니까~
전화로 얘기를 한참을 해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 우리 언제 한번 만나 그 간의 얘기를 함 해보자구~
아이구, 나두 그러고 싶어요! 언제 우리 함 만나요!!
_ _ _
시인 김남조는 안성 난실 마을 조병화 시인의 기념관에
이런 글귀를 하나 남겼다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 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이옵니다
- - -
마찬 가지로 나의 어릴적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요!
그러나 나의 시(생각)를 아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나의 고향
사람들 만은 아닐거라고 생각을 해 본다.
암튼 그렇긴 하지만 선자를 만나 보고 싶어 약속을 하고
미뤄지면 다시 또 약속을 하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고 몇 달이 훌쩍 지났다.
대략 그 옛날 화롯불 옆에서 노래 부르고 놀던때 부터 60여 년이
넘었으니 이게 이산 가족 상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렴 이산
가족 상봉만이야 할까마는 그 상봉 이라는 것도 만나기 전에는
죽고 살지 못할만큼 그립고 애틋하지만 막상 만나면 그
감흥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추측일까?
결국은 몇달 사이에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젠
전화도 별로 않게 되었다. 약속이 자꾸 미뤄지다 보니
기대와 희망도 같이 사라진걸까?
아니면 전화로 목소리 듣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니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는 어떤 안도감과 더불어 어렴풋히 느끼던
그 옛날의 약간의 신비감? 같은게 사라져서 그럴까?
무엇보다 내가 일상의 업무에 하루 종일 매달려 맘 대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사는게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이 용두사미가 되어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이 얘기는 내 어릴적 나를 알던 사람! 나란
인간을 원초적으로 기억해 줄 사람!
부모 형제 다음으로 그걸 해 줄 수 있을 사람!
나는 알게 모르게 고향 일죽을 아니 빼낙골의 원초적
기억을 이렇게 나마 한번 살려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희망 사항이겠지. 나의 사투리를 누군가 알아줄
거라고 믿는건 순전히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김남조 시인이 말한,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
이라는 말에 아주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 나는 나의
시를 아는 사람들을 찾으려 알게 모르게 헤매는건
아닌지? 물론 김남조는 여기서 물리적 고향을
꼭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과연 그렇다면 나는
그 누군가의 '눈물의 고향'을 알아 보려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며 살아 왔던가를 자문 자답해 본다!
(등장 이름은 실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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