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그 옛날 덮치기로 새 잡던 시절 유행하던 노래)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시골에서 겨울이란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지독히도 춥고 배고픈

시기였다. 이제 와서 그 긴 겨울을 끄집어내는 건 단지 그 시절이

아름답다고 느껴서도 아니요, 나 개인의 추억을 할 일 없이

공유해 보려 함 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릴 적 성장기에 그것이 내 삶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 하나요, 손에 전해져 오던 그 촉감과 추위를 무릎쓰고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벌판을 달렸던 그 기상이 또한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와

마지막으로 놀이 겸, 새 와의 싸움이 약간의 창의력 신장에 영향을 준

건 없을까? 등을 조금 반추해 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손주 손녀를 두신 많은 분들이 혹시 아이들 교육에

참고로 하실 내용은 없을까? 해서 이다.

 

새를 잡는 덮치기란 아래 사진과 같은 기구이다. 혹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이 좀 어설프게 표현되긴 했지만 활 모양으로 굵은 나무를 구부려 끝에

새끼를 서너 겹으로 연결한 후 그물망을 짠 작은 반 원형의 포집기를 새끼에

끼워 몇 바퀴 돌려주면 새끼의 뒤틀림에 의해 포집기가 볏 집 쪽으로 강하고

빠르게 원 위치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포집기 중앙에는 아래와 같이 벼를 달아 놓는데 그 벼를 새가 쪼는 순간

포집기가 앞으로 덮쳐지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이런 덮치기를 사용해 본 분들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이다.

 

 

이런 덮치기를 3-4개 혹은 더 많이 만들어 눈만 오기를 기다리는 게

시골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는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건 순전히

저걸로 새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이 듬뿍 내리면 새들은 먹이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혹여라도 눈이

좀 덜 쌓인 논둑 옆이나 큰 나무 아래 혹은 벌판의 풀 더미 옆을 찾아

날아다니게 되는데, 하얗게 눈이 쌓인 들판에서 저렇게 만들어져

놓인 덮치기는 아주 쉽게 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고기 반찬은 예삿일이 되었지만 50년대 후반에는 사실 1년에

설 추석에도 만만히 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고기는 커녕 닭도 거의

구경을 하기 힘들어서 어느 한 집에서 닭이라도 잡는 날이면 온 동네에

닭고기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었다.

 

 그래서 한창 자랄 어린 나이에 그나마 눈 덮인 겨울은 고기를 먹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던 것이다.

 

새 고기라 해봐야 손바닥만도 못해서 화롯불에 구우면 한 입 거리도 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그 맛은 천하에 둘도 없이 기가 막혔다.

 

내가 만든 덮치기는 4개 정도였다. 더 많아도 한 번에 들고 이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양손에 두 개씩 들고 눈 벌판을 신속히 이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일단 봉창 밖으로 간밤에 눈이

왔나 부터 확인하는 거였다. 만일 뽀얗게 눈이 쌓였으면 부리나케 옷을 입고

미리 마련해둔 덮치기를 들고 집 앞에서 2-300미터 떨어진 뽕나무 숲으로

내 달리는 거였다. 두 줄로 심어져 꽤 크게 자란 뽕나무 숲은 이런 날

새들이 먹이를 찾아오는 좋은 포인트였다.

 

일단 그곳에 덮치기를 설치해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뽕나무 밭으로 흰 눈을 헤치며 간다. 덮치기 주변에는 이미 촉새며

몇가지 새들이 푸드덕거리고 아주 요새 말로 하면 난리 부르스가 났다. 그리고

문제의 덮치기를 들여다 보면 여지없이 촉새가 한 마리 들어가 눌려 있게

마련이다. 각 덮치기에서 꺼낸 새를 준비해간 새끼 고리에 목을 꾀어 놓고

덮치기를 재 셋팅한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렇게 1차전은 끝나게 된다. 잡아온 새를 한두 마리 불에 구워서 먹는다.

참새가 황소 궁둥이에 앉아서 너 한 마리 다 해도 나 한 마리만큼 맛이 없을걸!

했다는데 참새, 혹은 촉새의 그 맛은 가히 천하 제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맛이 일품이다.

 

그런 식으로 오전을 보내게 되는데, 새는 무한정 잡히는 게 아니다. 계속 집

앞 뽕밭만 왔다 갔다 하면 될 거 같지만 한 장소에서 연속 새는 잡히지 않는다.

결국 장소를 옮겨야  된다. 이제 동네 어귀 철길 변으로 혹은 아예 동네

넘어 저쪽 새댕이 산 벌판 쪽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오후쯤 되면 눈이 펄펄 바람을 타고 날린다. 바람도 분다. 벌판에 덮치기를

세팅해 놓고 추위를 피해 어린이 몇 명이 옹기종기 볏단 아래 몰려있다.

이제 좀 시간이 더 지나면 새는 안 잡힌다. 바지 혁대 고리에 걸린 새끼줄에

잡혀있는 새 숫자를 확인한다. 아직도 목표엔 미달이다.

 

내 기억으로는 하루 최대

8마리였는지 16마리였던지 정확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겨우내 눈이 오면 촉새를 잡고 또 잡았다. 비슷한 모양의 참새가

있으나 너무 영리해서 좀체 덮치기로 잡을 수가 없었다. 참새의 영리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가을철 다 익은 벼를 못 쪼아 먹도록

허수아비를 세워도 그들은 본 척도 안 한다. 일부 새들이 허수아비에

놀라 도망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이것이 겨울철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시골서 새를 잡는 애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과 달리

먹을게 많고 그 추운데 고생해서 새를 잡을 아이도 없을 것이다.

 

덮치기를 만들고 새와 수 싸움을 벌이는 건 또 어떤가? 따뜻한 방에서 겨우

내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과 비교해서 더 바람직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연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울철에 새만 잡은 게 아니다.바람이 불 땐

연을 만들어 높은 창공에 날렸다. 하늘에 연 날리는 게 뭐라고 그 시절엔 참

그것이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추수하고 쌓아 놓은 볕 집단 속에 바람을

피해 두 손을 호호 불며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바라볼수록 온 몸이 시려지는 파아란 겨울 하늘 높이 하얀 연이 하늘 끝에 보일락

말락 떠 있는 걸 보는 마음은 통쾌하고 시원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연에

담아 날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맘에도 은연중 어떤 소원 같은 걸 빌어

보는 맘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부잣집에서는 연줄 감는 통이 6 각형 혹은 8 각형의 둥그런 나무를 짜서 만든 얼레를

사용했고 보통은 그냥 평면으로 납작한 얼레를 사용했다. 난 둥그런 얼레가 정말

갖고 싶었지만 희망 사항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어쩌다 그 둥근 얼레를

하나 장식품으로 구할 수가 있었는데,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 버린 것 같다

 

8각 얼레 / 출처 ; 대한 연 협회

 

 

새를 잡기 위해 덮치기를 만들고 새를 유인하기 위한 벼를 달아매는 도구로는 속이 빈

개나리를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이 나름 치밀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흰 눈

위를 달리고 바람과 싸워 이기고 새들과 수 싸움을 하고 추위를 견디는 훈련을

하고 그 모든 것이 온통 자연과의 한판 승부나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자연에는 온통 놀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 그 옛날 추억담으로만 남아있던 그런 놀이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아래 기사이다

 

 

 

한참 전 간단히 봤던 기사 한 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기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누렸

던 환경이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

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MRI로 분석했더니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를 많이 볼수록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자녀들을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로프' 학교에 보내고 부모에게 스마트폰 금지 약속을

받아 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안 줬고 빌 게이츠는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 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재산을 대물림

할 수 있다는 것~

 

 

(이하 중략! 디지털 뉴스 김의영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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