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수업 시간의 홍문화 선생님은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전문적인 약학 지식 이외에 약학의 밑바탕이 되는 철학, 역사, 기타 약에

관한 비밀스런 스토리 같은 걸 많이 말씀하신 걸로 기억이 나는 분이다^

그런데 언제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 내가 말야 어쩌다 우리 졸업생들이 하는 약국엘 가 보면, 대체로 침침하고

어둑해~ 그런데 약국 구석으로 내 팔을 잡고 가서는 하는 말이


" 선생님 제가 공부를 더 해서 박사가 되어 연구를 하거나 교수가 되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약국을 해서 뵐 면목이 없읍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야~ 아니 왜 약국하는 게 어때서 떳떳하지 못하게

저렇게 말하는가 말이야!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면 안돼요! "


이렇게 말씀하신 걸로 기억을 하는데, 허나 당시엔 학교 다니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단 말씀 정도로, 또 아! 그렇다면 약국은 졸업 후 해서는 안 되겠군

쯤으로 단순하게 이해했었다. 아마도 선생님 말씀은 졸업 후 어떤 일을 하더

라도 떳떳하게 당당하게 살아가란 의미에 방점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느낀 바로는 서울대학 나와서 약국 같은 걸 해서야 되겠나?

서울대학은 그야말로 온통 아카데믹의 알파요 오메가요 그러니 교수 아니면

박사가 되어 연구자로서의 명성을 떨쳐야 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낀 것이

사실이고 또 그것이 서울약대의 자부심의 일부였다고 생각을 해 본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 내가 말이야 이제껏 주례를 선 게 1500여 쌍이 된다고~ "


당시는 도대체 주례 1500 쌍이라면 어느 만큼 대단한 정도인지를 실감하긴

어려웠고 아무튼 주례를 부탁하는 졸업생들이 엄청 많구나~ 정도만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사실 보통 일생에 주례를 서는 횟수라는 게 몇 번 되기도 어렵고

100번 200번도 엄청난 횟수인데 1000번 이상이라는 건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아닌가?


1주일에 한번 정도 주례를 보셨다 치고 1500번이면 이게 햇수로 얼마가 필요

할까? 1년이면 대략 50주 10년이면 500주, 1500번이 되려면 얼추 30년은

꼬박 주말에 주례를 서셨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혹여 1주에 가끔은 두어 번씩

보셨다 해도 암튼 25년 이상은 그 긴 세월 동안 주말을 몽땅 주례에 바치신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아주 특별한 선생님의 주례에 대한 철학이 없이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찌 보면 그만큼 선생님의 명망이 높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1979년 가을, 대학 동기인 김x식 군이 결혼을

하면서 나한데 결혼식 사회 부탁을 했다. 그리고 주례는 바로 그 엄청난 횟수를

자랑하시는 홍문화 선생님 이셨다. 당시 홍익대 미술 강사였던 김 군의 신부는

최연소 동양화 국선 입상 작가였고 미술계 선배가 가지고 있던 당시로는 최고급

승용차인 그라나다를 운전기사까지 딸려 보내서 흑석동에 거주하시던 홍문화

선생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주례를 많이 서신 선생님께 너마저 또 주례를 부탁드렸다는 거냐?

너무 평범하잖아! 선생님 좀 그만 괴롭혀 드리지~ "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암튼 나는 부탁받은 대로 선생님을 결혼식장으로 모시고

가야만 했다


대나무가 담장을 삥 둘러친 흑석동 山 중턱의 선생님 댁은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에 선생님의 전화 구두 안내를 따라 용케도 금세

댁을 찾았다. 선생님을 모시고 남산 쪽에 있던 호텔 식장으로 차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하얀 메모지에 볼펜으로 여덟 글자를 쓰신 후 건네주시면서 이렇

게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 이제 자네들 졸업 동기 중에도 일찌감치 출세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네, 높은 자리

에 올라갔네 뭐 그럴 거야~ 그렇지만 그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지! 이 글자의 뜻은

말이야 인간이 지나치게 어떤 사람에게 폭 빠지면 덕을 잃게돼~ 그리고 물질, 재물, 즉

돈에 너무 탐닉 하면 그 세운 바 뜻을 잃게 되지! 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써준 이 글의

뜻을 잘 새겨서 인생에서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게나~ "


대략 이런 말씀으로 기억을 하는데, 선생님이 써주신 글자는 딱 여덟 글자였다

玩人喪德 玩物喪志


나는 이 메모지를 공손히 받아 품에 깊이 간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도록 집을 십여 차례 이상 이사를 할 때도 이 메모지만큼은 내 책장 한편에 고이 간

직하고 다녀서 최 근래까지도 보관이 되어 있었는데, 막상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

아들에게 책장을 물려준 때문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해서 당시 선생님의 필적이 남

겨진 메모지 실물 사진을 올릴 수 없는 게 매우 유감이다


물론 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빠져 고생을 한적도 또 돈을 너무 벌어 아니면

고위직에 올라 뇌물 때문에 초심을 망칠 일도 없어 그다지 현실에서는 저 글자의 위력이

나 개인에게 발휘될 기회는 없었지만, 이 글의 출처는 서경(書經)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원전의 뜻을 덧붙여 보고자 한다


* * *


《서경(書經)》의 여오(旅獒)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주 나라 무왕이 어느 날 서방의

먼 곳에 자리 잡은 여(旅) 나라로부터 큰 개 한 마리를 선물 받고 그 개를 좋아했다. 이

것을 본 태보(太保) 소공(召公)(무왕의 동생) 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 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玩人喪德),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物喪志)

이 말을 듣고 무왕은 은 나라의 멸망을 교훈 삼아 그 개는 물론 제후국에서 보내온 獻上

品들을 모조리 다른 제후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

 

* * *

 

 


당시 신랑 신부는 선생님의 주례사의 어떤 부분을 기억하고 있을까? 솔직히 그 누군들

결혼식 주례 말씀을 고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는, 사회를 본 신랑 친구에게는

저런 글을 써 주시고 또 그 글귀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보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날의

주인공 신랑 신부에게는 글자로 뭘 남겨 주지 않으셨으니 어찌 보면 그날 결혼식에서 진짜

주례사를 받은 건 사회를 본 친구인 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허긴 저 글자는 인생을 막

새로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 해줄 말씀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혹시 그 많은 주례를 서 주실 때 선생님을 모시고 갔을 수많은 결혼식 사회자 등에게 저

비숫한 어떤 글귀를 써 주신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특별히 나에게만 저런

글자를 써 주셨는지 확인은 어렵지만 혹시라도 이와 유사한 선생님에 관한 일화를 누군

가가 올려 준다면 그것도 꽤나 흥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만큼 선생님은 박학다식하시고 성현들의 말씀을 읽고 몸소 실천하는 그런 삶이 아니

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선생님 생존 시에는 서울약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교수님들

중 유독 세상에 이름을 넓게 알리신 분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벌써 꽤나 오래전에 영면하신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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