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고모령 / 춘강 마로니에  

 

 

 

엄마에 대한 기억~

 

그 희미한 몇가지나마  마치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걸 겨우

가느다란 실 하나로 잡아 당기듯 그렇게 더 늦기 전에 기억 속에

매달아 놓는 중이다. 

 

 

울 엄마는 생전 큰 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왜냐면 나에게 뭘 야단을 치신 적도, 지적을 하신 적도, 명령을 내린

적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한 시간은 고작 12년~

그 중에도 내가 세상을 인식한 때를 5살로 본다면  대략 7년 여에 불과하다. 

 

청미천(안성 일죽면에 있음) 큰 개울 밭!  그 밭에서 여름 뙤약볕에

김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린 내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잠시

나를 업어서 가시곤 하던 것과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쓰고 일하시던 것이

어렴풋 기억 난다.

 

' 앞산 노을 질때까지 호미 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며 흙에 살던

어머니~ ' 

 

딱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겨울이면 대개의 또래 친구들의 엄마는 집에서 겨울을 나시는데 반해

울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인근 동네로 장사를 나가시어 저녁 늦게나

돌아 오시던 것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쌓여도 엄마는 매일 장사를

나가셨다. 집에서 30여 리의 길을 그렇게 오고 가셨다.

당시엔 어린 나로서는 그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우리 엄마는 이 추운 날에도 집에 없는 거야? "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는,

 

" 오늘은 가리울 누구네 집에서 점심을 한 술 떴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는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가 힘든 때였는데,

점심 한술 얻어 먹는다는 것이 그리 녹록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눈치가 보였을까? 순박했던 시골이니 가능한 것이었을 터, 

가리울은 장호원 근처 방추리 옆에 있는 작은 동네로 우리 집에서는 30리도

더 되는 꽤나 먼 곳이었다. 

 

그렇게 한 겨울 내내 인근 마을 사방 삼십여 리를 돌며 장사를 하시고 몇 푼 돈을

버셨던 거다.

 

194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엄마 사진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대략 194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먼저 일본에 가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머리에 꽃을 꽂아 표식을 하여 상봉을

하셨다는 엄마! 

 

오사카에서 형님과 큰 누님을 낳으시고 그런대로 사시다가 해방이 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건데, 아버지의 누님 즉 엄마에게는 시누이가 될 터이고

나에게는 고모가 사시는 합천 덕곡면 옆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정터,

라는 동네~

 

그 동네로 다시 오신 거다. 사실 그 곳은 엄마가 태어나 살던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인근 합천이었다. 

 

그 고모가 사는 집이라고 여유가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6개월을

버티시다 보따리를 싸서 흘러 흘러 오신게 지금의 안성 일죽이다. 기왕 고향을

떠나는 거  왜? 서울로 그냥 가시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다시 정착을 하신

건지는 이제 풀 길 없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당시의 철도는 서울로 쭈욱 이어지는 경부선이 있었고 평택에서 갈라져

안성을 거쳐 장호원, 여주로 가는 지선이 있었다. 

 

오사카도 그렇고 안성 일죽도 그렇고 어차피 산 설고 물 설고 아는 이 없는

타향이다. 내가 태어난 일죽은 나에겐 고향이지만 엄마 아버지에겐 시리기만

한  타향일 뿐이다.

 

'타향살이'  노래를 부를 땐 항상 울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향인 일죽을 떠나 떠나 50년 이상 살고 있는 타향은 타향이라 할 것도 없다.

자동차로 30-40분 이면 닫는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특별히 어떤 노래를 부르신 걸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

가지다. 당시 시골에서는 노래를 부를 일도 없었고 아무데서나 노래를 흥얼

거릴 그런 형국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이 고될 때 불렀다는 농요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며 살 만큼 당시 삶에 흥이 있었을까? 집집마다 라디오는 커녕

좀 사는 집에는 축음기가 있긴 했지만 우리 집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확실한 기억!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음력 4월 초나흘 밤이다. 그 며칠 전 나는 우리집 뒤

작은 동산 너머의 풀숲에서 마침 뜸부기가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걸 발견

했었다. 오랜 투병에 쇄약 해질 대로 쇄약 해져 경각에 달한 엄마는 내가 말하는

뜸부기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 그 뜸부기 좀 잡아 오너라~ " 하셨다.

 

초승달이 실 눈썹처럼 희미하게 비추던 그 밤에 나는 누님(당시 17세)과 함께

큰 광주리를 들고 컴컴한 뒷동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덤이 몇개 있어 밤에는

혼자는 무서워서 가기 힘든 곳이었다. 낮에 봐 두었던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억새풀

둥지를 가늠하여 광주리를 덮쳤다.

 

뜸부기는 알을 품고 있다 광주리와 뜸부기 집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조그마한 중닭 정도의 뜸부기를 손질하여 누이는 밤새 불을 때서 솥에 넣고 푹~고았다.

야생 뜸부기는 살이 질겨 웬만큼 고아서는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엄마는 뜸부기 국물을 한 모금 겨우 드셨을 뿐이다. 더 이상

살코기도 드시지 못했다. 

겨우 누워 계시는 엄마를 뒤로한채 나는 학교를 갔고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학교를 마쳤다. 학교문을 나서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날 찾았다. 

 

최대한 빨리 나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오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엄마가 그 사이 돌아가셨다는 걸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약 2km 남짓 되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 좌우로는 모내기가

한창 이었다.

간간이 제비가 날고 봄날의 따스한 열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 아! 이제 엄마와 이별인가? '

 

그러나 특별한 슬픔이나 애절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딱 1년 전 이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연이어 닥치는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였을까?

 

뜸부기 사건은 나와  엄마의 마지막  이생에서의 인연이었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었고 열 세살,열 일곱살 두 남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눈 감으면 고~ 오 향  눈 뜨면 타향~ "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안 하게 떠 오르는 고향! 고향의 골목, 나무, 우물가, 짚 앞

저 멀리 먼지가 뽀얗게 나던 신작로~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  

아무리 고향을 최근에 다녀와도 뒤돌아 서면 방금 본 변한 풍경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그 옛날 정경만 기억나는 참으로 이상한 그런 경험이 아마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니 천리 타향, 만리 이국에 가서 산들 어찌 어릴적 내 고향을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곳이 뻐젓이 좋은 곳이던 어디 내놓을 그런 곳이 못 되던 그건 중요하지 않

다. 내노라하는 인물이 나왔건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고향은 고향일 뿐이다

 

엄마는 마치 후광처럼 은은하게 내 기억을 감싸고 있다.  마치 어떤 풍경화의 뒷

배경처럼, 연주회의 배경 음악 같이~  

 

엄마와 고향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찬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 모틍이를 돌아 하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시던

엄마가 너무나 그립다^* 

 

그때가 나에게는 무한 행복의 시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항상 거기 계시는 그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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