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여름이었다. 그전부터 소식만 오가던 일본에 거주하는 6촌 형님과
조카들이 보고 싶었다. 말이 6촌이지 나한테는 현존하는 제일 가까운 친척이다.

大山(오오야마)이란 성으로 개명을 하고 일본에 귀화한 형님은 동경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도치키 현에 살고 있었다. 

 

형님은 70년대 말경에도 가끔씩 한국에 나오시면 나를 찾기도 해 당시로서는 귀한

카시오 계산기 같은 걸 전해 주기도 했었다. 

마침 대웅제약에서 파프류의 생산을 검토할 즈음인지라 일본의 사토 제약에
*파프제의 기술을 전수받을 겸 이 기회에 일본 친척도 만날 겸 계획을 짰다. 
당시 생산부의 김창수 대리와  함께 가기로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일본 친척을 만나고 나는 나대로 또 그렇게 하는 비슷한

구상이었다.

 

여름휴가 7일 중 3일은 사또(佐藤) 제약에서 나머지 4일은 친척을 만나는 조건이었다.  

대신 왕복 비행기표와 3일간 사또 제약이 있는 하찌요지(八王子)에서의 숙식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다. 

나리타 공항에 마중나온 조카를 따라 바로 도치키 현으로 달렸다. 조카는 

당시 동경에서 부동산 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형 승용차에 기사를 딸려 가지고 나왔다. 

일본의 부동산이 천정 부지로 오를 때이다. 며칠만 지나도 수천만 엔씩 값이 올라

흥청망청 하던 시절이었다. 조카는 8천여만 엔에 구입한 부동산을 불과 얼마 만에

1억 몇천만 엔에 팔았다는 서류등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동북 고속도로를 140km 이상으로 커브를 돌아 가는데 차가 상당히 성능이 좋아 보였다.

지금은 시속 140 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커브를 그 속도로 돌아 나가는 것은 꽤나

성능이 좋은 차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포니 1,2 가 막 생산되던 때였다.

 

도치키 현에는 우쯔노미야( 宇都宮) 라는 큰 도시가 있고, 일본 최고의 관광지 닛꼬(日光)에서 흘러

내려오는 큰 개울이 있는 언덕위에 형님의 집이 있었다.   
가누마(鹿沼])市란 곳이었는데 근처 개울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마침 형님의 처형이 근처 우쯔노미야의 천리교(天理敎) 회장으로 있어서 다음날부터 
차를 가져와 닛꼬를 구경시켜 주었다. 하얀 백색의 대형차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이 진 구식  토요다의 Century 로 추정된다. 

 

 

나는 억지로 근처 천리교 회당에 끌려가 아침이면 소위 예배를 보아야 했다. 

헌데 그들의 자세는 정말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아닌가?

지극정성으로 아침이면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우쯔노미야 천리교 회장 직함을 다지고 있던 형님의 처형이 엔카 카셋테이프

두어 개를 건네 주셨는데, 거기에 수록되어 있던 노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장가노야도(さざんかの宿) - 조아람 

 

 

 

닛꼬를 올라가는 길은 예의 도꾸가와가 만든 삼나무 숲길을 거치게 된다. 그 옛날

조성한 삼나무 숲은 이제 거목이 되어 길 양 옆을 기가 막히게 장식을 하고 있었다. 큰 나무에

비해 길의 도폭은 좀 좁았다. 

담양의 메타세퀘어 숲길을 연상하시면 되겠으나 닛꼬의 숲 길은 그보다 훨씬 웅장한 느낌이다. 

 

2,000미터 이상의 男大山 을 오르면 거대한 폭포가 나타나고 산 중턱에 조성된 칼데라호의 

크기도 엄청난 편이다. 유람선을 타고 그 호수를 도는데 아래 물이 그렇게 맑고 청명할 수가

없었다. 20여 년이 더 흐른 2,005년에 가족여행으로 닛꼬를 겨울에 다시 찾아보았으나 단체

여행이어서 첫  방문만큼 충분히 둘러볼 수가 없었다. 단지 눈쌓인 고갯길을 정말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잘도 오르고 내려갔다. 

 

호수 뒤로 돌아가면 유황 온천의 넓은 전장의 벌판이 나타난다.  한여름의 닛꼬는 시원했고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를 소금에 구워 팔기도 했다. 닛꼬 호수의 청명함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우쯔노미야 천리교 회장이었던 형님의 처형과~


그리고 조카들과 봉고차를 몰고 쯔쿠바 박람회도 갔었다. 한국에서 처음 온 친척을 

대접한다고 그렇게 한 것이다. 今市 (이마 이찌)라고 하는 닛꼬 바로 아랫동네에서 석재

가공업을 하는 조카의 이모네 식구들을 찾아보니 너무나 맑고 시원한  물이 큰 도랑으로 콸콸 

흘러 내려오고 있는 동네였다. 

 

당시만 해도 스키 같은 걸 탈 생각도 못하던 때였는데,

 

" 이 근처가 겨울이면 스키 타기가 아주 좋으니 함 놀러 와~ "

 

남의 속도 모르고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일본 스키를 몇 번 가 본 경험으로는 그들은 동네에도 스키장이 웬만하면 

한 둘쯤 있었다. 

 

허긴 형님이 일본 형수님과 결혼해 닛꼬 부근에 정착하신 이유도 원체 경관이

수려하고 동네 사람들 인심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눈에 들어왔던 닛꼬 아랫동네의 풍광은 너무도 한적하고 깨끗했다. 

벼가 빼곡히 잘 자라고 있는 시골 농촌은 골목까지 포장이 되어 있었고 집 옆에는

어김없이 승용차가 한 두대 세워져 있어,

 

" 아!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군~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나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당시의 일본 이상으로 잘 되어 있고

마을에는 자동차가 즐비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 사이 세월이 흐르고 형님도 돌아가시고 조카들과는 말도 안 통하고

하다 보니 차츰 연락이 뜸하게 되었고 결국 아주 연락 자체가 두절되고 말았다.

사실 도치키현은 후쿠시마에서 대략 200여 킬로 정도 떨어져 어찌 보면 

방사능 권역에 아주 약간은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그렇다 해도 연락이 두절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막상 일본에 겨울철 스키를

타러 더러 가는데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조카들과 형수님과~

 

조카 준꼬~  당시 열심히 안내를 해 주었는데, 수 년전 연락을

취했지만 두절되어 매우 안타깝다.

 

 

약 36년전 일본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무료한 겨울을 뛰어넘기 위해

일본으로 스키 여행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 파프제 - 파스를 말함 , 당시 기술을 대략 전수받아 왔으나 대웅제약에서는

               파스 제품의 생산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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