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인척 중에 나름 사업적으로도 성공적이고 상당한 재산도

축적해서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L이라는 인물이 있다. 벌써

2년 전이 되었다. 2019년 5월 경이었는데,

 

누님 두 분과 함께 가족 여행으로 제천의 E.S 리조트로 카니발 승용차

를 타고 가면서 첫 얘기를 들었다.

 

원래 L사장은 통풍으로 한참 전부터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백내장 수술도 했고 거기다 녹내장까지 겹쳤노라고 얘기를 했다. 얼굴색

은 매우 좋지 않았고 제천으로 가족 여행을 가는 내내 그의 표정은 수심

이 가득했다.

 

여행을 마치고 약국에 찾아온 L 사장과 면담을 해보니 백내장 수술 후 녹

내장 기가 있을 뿐 아니라 거기다 혈압, 당뇨가 원래 있었고 통풍은 이제

많이 호전되었지만 손발 저림이 심해졌고 병원에서는 신장기능이 저하

되어 있다고 했고 관상동맥 1개가 2/3 가 막혀 있다는 검사 결과를 갖고

있었다.

 

L 사장은 사실 이때만 해도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본인도 몰랐던 거 같다

왜냐하면 그 3개월 후 또 다른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심각히 나빠

진 혈관의 상태를 고려해서 오메가 3 7200mg ( 유효성분 기준), 레시틴

기타 2가지 추가 영양 성분을 함께 먹도록 했다. 그런 후 확인 결과 몸 상

태가 많이 좋아졌고 술은 일절 안 먹고 체중이 7-8kg 이 빠졌노라고 했

다. 그런데 그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무려 석 달이나 말이다

 

처음 복용 당시 급속도로 신체 컨디션이 좋아지자 그는 " 아 이러면 되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는지 나머지 성분은 생략하고 오메가 3 만 적정량을

복용하며 두 달을 더 버틴 것이다. 대개의 환자들이 그렇지만 뭔가 조금만

호전이 오면 곧바로 복용을 중지하고 자신의 몸 상태를 지켜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성 질환의 경우 이렇게 약간의 복용만으로 몸이 고쳐지는 경우는

없다. 왜냐면 만성 질환 자체가 수십 년에 거쳐 서서히 몸에 영향을 끼쳐

병변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10월 말에 나타나서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다니던 A 대학 병원 내과에서 "신장 상태가 안 좋으니 투석 준비를 하라"

는 얘길 했다는 것이다. 투석이라는 게 주변에서 흔히들 목격하는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이것

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 투석이라는 길로 한번 들어 가면 영영 다시 빠져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모른다. 비록 투석을 하며 생명을 겨우 연장은 한다 해도

그 후유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신장이 노폐물과 독소를 자체적으로 걸러주지 못할 때 그걸 체외로

꺼내서 세탁을 아무리 잘해 봤자 이미 혈액의 신선함은 공염불이 될 뿐

아니라 완벽한 세탁이 되기도 어렵다. 해서 심한 전신 가려움증은 기본

이고 원활한 일상을 기대하기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투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선 분들이라면 당연 무슨 수를 써서

라도 투석을 안 하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L 사장은 아무래도 병원을 바꿔서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서울의 A 병원에서는 당분간 상태를 지켜보자 했

다고 했다. 당장 투석은 아니지만,,

 

당장 투석은 아니라 해도 마냥 세월이 흘러가면 무슨 특별한 몸의 호전

이 있을 건가? 우리 몸이 저절로 좋아지는 경우는 사실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슨 특별한 운동 요법을 하거나 식이 요법을 하거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주지 않는 한 나빠진 몸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나는 L 사장에게 간곡히 설명을 했다. 서울 A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진

찰을 받는 건 좋다. 대신 당신 몸에 아무 부작용이 없는 순수 자연영양

요법을 꾸준히 계속하시라! 만일 검사 결과 투석을 안 해도 된다고 하면

이 방법을 평생 계속해 나간다 한들 하등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2019년 10월부터 지금까지 L 사장은 계속적으로 영양요법을 해 오고

있음은 물론 일정 간격으로 체크하는 A 병원의 결과도 양호한 상태로

바뀌었음도 물론이다. 얼굴 색도 예전의 그 누르스름하고 검은빛이

도는 게 아니라 거의 밝은 정상의 칼라를 보여 준다. L 사장은 자신의

건강을 염두에 둔 듯 호주에 살고 있던 아들을 귀국시켜 곁에 두고 있

지만 어쩌면 그가 염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 조심스런 예측을 해 보는 중이다. 건강이 사라지는 마당에 재산

도 명예도 다 소용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신장 투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물어물하다 투석으로 가는 것과 적극적으로

대비하여 투석을 면하는 길,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매우 크다

 

 

구체적인 검사 수치를 함께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그가 신장 문제뿐

아니라 녹내장, 관상동맥 막힌 문제와 통풍까지도 좋은 상태로의 회복을 기

원해 본다. 왜냐 하면 그 모든 증상들은 혈관의 병변을 같은 원인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 요법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그리운 얼굴/(그 옛날 덮치기로 새 잡던 시절 유행하던 노래)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시골에서 겨울이란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지독히도 춥고 배고픈

시기였다. 이제 와서 그 긴 겨울을 끄집어내는 건 단지 그 시절이

아름답다고 느껴서도 아니요, 나 개인의 추억을 할 일 없이

공유해 보려 함 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릴 적 성장기에 그것이 내 삶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 하나요, 손에 전해져 오던 그 촉감과 추위를 무릎쓰고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벌판을 달렸던 그 기상이 또한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와

마지막으로 놀이 겸, 새 와의 싸움이 약간의 창의력 신장에 영향을 준

건 없을까? 등을 조금 반추해 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손주 손녀를 두신 많은 분들이 혹시 아이들 교육에

참고로 하실 내용은 없을까? 해서 이다.

 

새를 잡는 덮치기란 아래 사진과 같은 기구이다. 혹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이 좀 어설프게 표현되긴 했지만 활 모양으로 굵은 나무를 구부려 끝에

새끼를 서너 겹으로 연결한 후 그물망을 짠 작은 반 원형의 포집기를 새끼에

끼워 몇 바퀴 돌려주면 새끼의 뒤틀림에 의해 포집기가 볏 집 쪽으로 강하고

빠르게 원 위치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포집기 중앙에는 아래와 같이 벼를 달아 놓는데 그 벼를 새가 쪼는 순간

포집기가 앞으로 덮쳐지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이런 덮치기를 사용해 본 분들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이다.

 

 

이런 덮치기를 3-4개 혹은 더 많이 만들어 눈만 오기를 기다리는 게

시골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는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건 순전히

저걸로 새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이 듬뿍 내리면 새들은 먹이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혹여라도 눈이

좀 덜 쌓인 논둑 옆이나 큰 나무 아래 혹은 벌판의 풀 더미 옆을 찾아

날아다니게 되는데, 하얗게 눈이 쌓인 들판에서 저렇게 만들어져

놓인 덮치기는 아주 쉽게 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고기 반찬은 예삿일이 되었지만 50년대 후반에는 사실 1년에

설 추석에도 만만히 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고기는 커녕 닭도 거의

구경을 하기 힘들어서 어느 한 집에서 닭이라도 잡는 날이면 온 동네에

닭고기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었다.

 

 그래서 한창 자랄 어린 나이에 그나마 눈 덮인 겨울은 고기를 먹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던 것이다.

 

새 고기라 해봐야 손바닥만도 못해서 화롯불에 구우면 한 입 거리도 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그 맛은 천하에 둘도 없이 기가 막혔다.

 

내가 만든 덮치기는 4개 정도였다. 더 많아도 한 번에 들고 이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양손에 두 개씩 들고 눈 벌판을 신속히 이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일단 봉창 밖으로 간밤에 눈이

왔나 부터 확인하는 거였다. 만일 뽀얗게 눈이 쌓였으면 부리나케 옷을 입고

미리 마련해둔 덮치기를 들고 집 앞에서 2-300미터 떨어진 뽕나무 숲으로

내 달리는 거였다. 두 줄로 심어져 꽤 크게 자란 뽕나무 숲은 이런 날

새들이 먹이를 찾아오는 좋은 포인트였다.

 

일단 그곳에 덮치기를 설치해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뽕나무 밭으로 흰 눈을 헤치며 간다. 덮치기 주변에는 이미 촉새며

몇가지 새들이 푸드덕거리고 아주 요새 말로 하면 난리 부르스가 났다. 그리고

문제의 덮치기를 들여다 보면 여지없이 촉새가 한 마리 들어가 눌려 있게

마련이다. 각 덮치기에서 꺼낸 새를 준비해간 새끼 고리에 목을 꾀어 놓고

덮치기를 재 셋팅한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렇게 1차전은 끝나게 된다. 잡아온 새를 한두 마리 불에 구워서 먹는다.

참새가 황소 궁둥이에 앉아서 너 한 마리 다 해도 나 한 마리만큼 맛이 없을걸!

했다는데 참새, 혹은 촉새의 그 맛은 가히 천하 제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맛이 일품이다.

 

그런 식으로 오전을 보내게 되는데, 새는 무한정 잡히는 게 아니다. 계속 집

앞 뽕밭만 왔다 갔다 하면 될 거 같지만 한 장소에서 연속 새는 잡히지 않는다.

결국 장소를 옮겨야  된다. 이제 동네 어귀 철길 변으로 혹은 아예 동네

넘어 저쪽 새댕이 산 벌판 쪽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오후쯤 되면 눈이 펄펄 바람을 타고 날린다. 바람도 분다. 벌판에 덮치기를

세팅해 놓고 추위를 피해 어린이 몇 명이 옹기종기 볏단 아래 몰려있다.

이제 좀 시간이 더 지나면 새는 안 잡힌다. 바지 혁대 고리에 걸린 새끼줄에

잡혀있는 새 숫자를 확인한다. 아직도 목표엔 미달이다.

 

내 기억으로는 하루 최대

8마리였는지 16마리였던지 정확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겨우내 눈이 오면 촉새를 잡고 또 잡았다. 비슷한 모양의 참새가

있으나 너무 영리해서 좀체 덮치기로 잡을 수가 없었다. 참새의 영리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가을철 다 익은 벼를 못 쪼아 먹도록

허수아비를 세워도 그들은 본 척도 안 한다. 일부 새들이 허수아비에

놀라 도망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이것이 겨울철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시골서 새를 잡는 애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과 달리

먹을게 많고 그 추운데 고생해서 새를 잡을 아이도 없을 것이다.

 

덮치기를 만들고 새와 수 싸움을 벌이는 건 또 어떤가? 따뜻한 방에서 겨우

내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과 비교해서 더 바람직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연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울철에 새만 잡은 게 아니다.바람이 불 땐

연을 만들어 높은 창공에 날렸다. 하늘에 연 날리는 게 뭐라고 그 시절엔 참

그것이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추수하고 쌓아 놓은 볕 집단 속에 바람을

피해 두 손을 호호 불며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바라볼수록 온 몸이 시려지는 파아란 겨울 하늘 높이 하얀 연이 하늘 끝에 보일락

말락 떠 있는 걸 보는 마음은 통쾌하고 시원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연에

담아 날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맘에도 은연중 어떤 소원 같은 걸 빌어

보는 맘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부잣집에서는 연줄 감는 통이 6 각형 혹은 8 각형의 둥그런 나무를 짜서 만든 얼레를

사용했고 보통은 그냥 평면으로 납작한 얼레를 사용했다. 난 둥그런 얼레가 정말

갖고 싶었지만 희망 사항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어쩌다 그 둥근 얼레를

하나 장식품으로 구할 수가 있었는데,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 버린 것 같다

 

8각 얼레 / 출처 ; 대한 연 협회

 

 

새를 잡기 위해 덮치기를 만들고 새를 유인하기 위한 벼를 달아매는 도구로는 속이 빈

개나리를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이 나름 치밀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흰 눈

위를 달리고 바람과 싸워 이기고 새들과 수 싸움을 하고 추위를 견디는 훈련을

하고 그 모든 것이 온통 자연과의 한판 승부나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자연에는 온통 놀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 그 옛날 추억담으로만 남아있던 그런 놀이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아래 기사이다

 

 

 

한참 전 간단히 봤던 기사 한 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기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누렸

던 환경이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

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MRI로 분석했더니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를 많이 볼수록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자녀들을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로프' 학교에 보내고 부모에게 스마트폰 금지 약속을

받아 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안 줬고 빌 게이츠는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 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재산을 대물림

할 수 있다는 것~

 

 

(이하 중략! 디지털 뉴스 김의영 차장)

 

 

 

 

 

 

 

 

 

 

 

'나의 인생 노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비내리는 고모령)  (0) 2021.12.24
아직 안 풀리는 수수께끼  (0) 2021.12.23
과거를 묻지 마세요~  (0) 2020.12.26
내 유년의 초상(肖像)  (0) 2020.12.22
인터뷰 기사 - 약업신문 (2004.12.8)  (0) 2016.10.04

    

고향 雪 / 마로니에

 

 

 

겨울에 눈 안 오면 겨울 헛거지!

 

바쁜 요즘 사람들은 겨울에 눈이 오는지조차 어쩌면

잊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오면 오고 말면 말고다.

더구나 코로나 시국에선 그딴거 관심 둘 여유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난 주 눈이 왕창 내렸다. (1.6) 저녁 7시 30분경 눈이 하얗게

내리는 걸 보자 번개처럼 정리를 하고 조마조마 가슴을 조이며 차

를 휘몰아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정말 오랜만에 눈을 맞으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이런 눈 구경, 눈 맞음도 정말 오랫만이다

 

아니 눈 구경은 재 작년 니가타에 스키 타러 가서 실컷 보고 오긴

했다. 그러나 집 근처 동네에서의 이런 맛은 좀 특별하지 않은가!

 

미리내 성지 앞 미산 저수지에서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가 문제였다. 차는 모셔 두고 마을버스와 전철

을 바꿔 타는 출근이 시작된 것이다. 첫날 즉 목요일(1.7)엔 마을버스가

간신히 수 십 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영하 15도에 바람까지 휘 몰아치는

정류장에서 꼼짝없이 떨어야 했다

 

원체 갑자기 버스를 타 보다 보니 앱 같은걸 활용할 생각을 미처 못했다.

다음 날 금요일은 눈 앞에서 또 버스를 놓쳤다. 에혀~ 그리고 정류장 두

곳을 전전하다 보니 훌쩍 수 십 분이 날아갔다. 마을 버스란게 원체

출퇴근 시간이 살짝 지나면 드문드문 다니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면 4 정거장 10분이 걸리고 내려서 10분을 더 걸으면 약국에

도착하니 20여 분이면 되는데 문제는 전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였다

 

버스 안 타고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아예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어서 다니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매연 자욱한 도로 말고 새로운 루트가 있어야 하는데~

 

토요일 일찍 마치고 전철역에서 뒤쪽 산으로 돌아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기웃거리니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통로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약 6-700여 미터를 올라가는 산을 넘어가서 한적한 도로를

쭈욱 지나가면 되는데 대략 40분쯤 이면 집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일부 구간은 지나가는 차도 어쩌다 만나는 산 등성과 숲과 언덕을

넘는 한적한 길이었다.

 

아! 이런 길이 있다니! 5년이 지나도록 왜 아직 몰랐을까?

나는 무릎을 치며 환호했다.

 

"그래 이 길로 쭈욱 출퇴근을 하는 거야. 봄이면 진달래를 보며 벚꽃을

친구 삼고, 좀 더 계절이 가면 아카시아 꽃 향기도 듬뿍 맡게 되겠지~"

 

 

작년에 마스크 때문에 일찍 움직이다 보니 동네 앞산을 출근 전 30분 정도

걸을 수 있었는데,, 몇 달은 잘했지만 결국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걷는 운동이 몸에 좋다지만 인위적으로 계속하는 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매연이 거의 없는 이런 길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천천히 걸으면 편도 40분이 걸린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도합 하루

100분 정도를 걷게 되는 셈이다. 이걸 계속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혹여 갑자기 폭설이 쏟아진다 해도 아무 걱정이 없이 일할 수 있으니 개인적

으로는 맘껏 눈을 반길 준비도 된 셈이다

 

 

 

하지만 과연 승용차로 불과 2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그런 편한 방법을

두고 그 몇 배나 걸리는 불편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눈 때문에 불

가피한 선택이 됐다지만 정말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까?

 

걷는 게 그리 좋다고 카톡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왔고 또 수많은 경로를

통해 알고 있는 이 진리는 실천이 없으면 무용지물임을 잘 알고 있다

 

 

걸을 수 있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사실 감사할 일이다

 

걸어서 좋고 덤으로 건강도 챙기고 이래저래 이번 눈으로 인해 얻은 게

많은 새해 벽두였다

 

 

 

가을이면 으례 떨어져 쌓이는 이 낙엽이란 놈!

나이 60이면 적어도 50년 이상은 낙엽을 보며 살았으리라!

 

그런데 수십 번을 보고 또 봤던 그 낙엽이란 것이 갑자기?

새롭게 보일때가 있다니~ 아니 새롭다기 보다 갑자기 그

어떤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고나 할까?

 

 

 

세상에 단풍 여행 이란 말은 있어도 낙엽 여행, 또는 낙엽 밟기 여행~

이런 건 들어 본 적이 없구만요! 그니깐 낙엽은 어쩌면 단풍의 한수

아래! 아니 별 주목을 받는 그런  존재는 아닌것 같아요

 

2012년 가을에 처음 목도한 낙옆의 이름다움은 지금껏

쭈욱 그 감동을 이어 오고 있답니다. 해서 몇장 낙엽을 올려 드리며

 그 묘미를 함께 즐겨 보기로 합니다

 

분당 탄천 변의 바로 이 낙엽을 보면서 그 맛에 빠진 첫 풍광입니다

이날 아침 마치 신천지를 보듯 뭐에 홀린듯 갑자기 낙엽들이 손짓하는

걸 처음 느끼게 됩니다

 

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돌아 다닌게 시발점이 되었지요!

만일 그날 자동차로 쓱 주변을 돌아 봤다면 아직까지 낙옆의

감흥 뭐 이런 얘기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 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씩 낙엽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게 됩니다

 

 

민속촌의 이른 아침, 직원들도 출근하기 전, 밤새 내려 쌓인 단풍잎 이지만 출근하면

빗자루로 쓱싹 쓸어 버립니다. 아! 정말 낙엽의 멋이 어떠한지를 그들은 진정 모르는듯^

허기야 깨끗히 쓸고 정리 정돈을 잘 하라고 지시를 받았겠지만!

 

낙엽이 카펫처럼 두둑히 깔린 저 길을 걸으면 정말이지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원들이 쓸어 치우기 전에 고양이가 내달리듯 살금살금 미친듯

둘러 보았지요

 

그런가 하면 물 위에 떠 있는 낙엽도 있읍니다. 선운사의 명물이 된

도솔천의 낙엽!

 

그 며칠이 지나면 저 잎들은 물 밑으로 가라앉거나 물살에 쓸려 전부

떠내려 갑니다

 

내장산 입니다. 단풍은 져 가지만 나무밑에 예쁘게 내려 앉읍니다

 

동네 주변에선 이런 벚나무 낙엽을~

 

 

단풍도 단풍이지만 낙엽이 근사하게 받쳐 줍니다

저 위로 사람들이 얼마나 지나 갔을까?

사실 이런 낙엽 위는 밟고 가기가 좀 미안하지요!

 

 

만일 단풍의 최 전성기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하면 나무 밑은

이렇게 낙엽이 지천으로 깔려 있을터! 아쉬워 말고 낙엽을  감상

하면 될 일입니다

 

몇가지 나뭇잎이 형형 색색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른 아침!

햇살 비치는 이 풍광도 너무 좋읍니다

 

朱木은 살아 千年~ 죽어 千年이라 하지요! 단풍과 낙엽은 길어야

열흘에서 한달 정도 입니다. 가지 위에 예쁘게 물든 잎 들이 땅에 내려 앉아도

예쁜 모습을 유지하는듯 해요!

 

분당 마태오 성당 주변

그리고 저들 낙엽은 떨어질때도 질서 정연합니다. 뒤죽 박죽 지 멋대로가

절대 아닌듯 해요.. 차곡 차곡 순서가 있고~ 그래서 떨어진 낙엽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平和가 가득해 집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낙엽을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포토 에세이,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씽 어게인 최종전을 보며~  (0) 2021.02.10
걷느냐? 타느냐?  (0) 2021.01.13
나는 울었네 ~  (0) 2020.12.28
사진은 찍어 뭐한댜~ (가을단풍 이야기 -2)  (0) 2020.12.10
약사의 삶의 방식  (0) 2020.11.27

 

 

나는 트로트 가수다!!

그래 트로트 가수다!



허! 그래서 뭐 어쩔건데^^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트롯 하면
그냥 뽕짝, 정확한 시작이 언제부터 인지도 애매하고 그냥

우리 것은 뭐든 시원찮고 별 볼일 없는 뭐 그런 것쯤으로!

그래서 겨우 남은 우리의 전통 가요를 뽕짝이라고 무시하고
비하하고 가까이해서는 안될 무엇처럼 깔보고! 머리에
뭐 좀 들었다는 양반들은 입에 올리 길 꺼려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팝이 어쩌고,, 칸소네, 샹송이 어떻고, 이도 저도 아니면

하다 못해 가곡 정도로 한껏 수준을 높여 입에 올리고 했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TV 프로그램에 '명사 초청 무슨 밤? ' 인가

그런 게 있었는데 말미에 애창곡을 하나씩 소개하는 거였다.

거기 등장한 명사라는 이 들은 하나 같이 팝송, 가곡, 샹송 등을
주로 애창곡이라 말했다. 그중 딱 한 분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구주제약 회장을 지낸 김명섭 선배께서 '영등포의 밤' 이 자신의 애창

곡이라 말했다. 그때 난 뭔가 아주 솔직한 인간미? 같은 걸 느낄 수 있

었다. 그분은 원래 고향이 영등포였기도 했지만, 만일' 돌아오라 쏘렌

토로'가 애창곡이라고 한들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보는

방송이니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길게 서론을 적는 이유는 일단 입으로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 신토 불이' 등등 하면서도 실 생활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

인가를 짚어 보기 위함이다. 우리의 본질을 당당히 어디든 내놓지 못하

고 뭔가 부끄럽고 비천한 것쯤으로 여기게 된 풍토를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이런 풍토는 예전에 비해 확연히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은 땅덩이의 우리는 큰 나라를 받드는 사대사상이

생겨 가까이는 중국, 멀리는 유럽, 미국 것이면 무조건 우리 것보다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린 것인데,, 식자 층에 유독 이것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시대는 모화 사상,, 지금은 모양 주의(慕洋主義)라 부른다. 그리스,

로마, 프랑스, 영국, 독일등이면 무조건 제일로 찬미하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다. 뭐든 그들이 좋은 게 아니라 극히 일부의 어떤 것이 더 좋을

뿐인데 말이다! 당연, 우리 것이 그들보다 훨 더 좋은 것도 있다

암튼 소득 3만 달러를 넘기면서 이제 조금 우리도 이만하면~ 하는
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우리 것이 순 엉터리는 아니네,, 하는 생각도
좀 커지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 상에 트롯이 있게 된 건 아닐까? 갑

자기 2019년부터 트롯이 대세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왜 진작 그러

지 못했을까?

각종 트롯 경연에서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 등장했다. 저
렇게 잘하는 이들이 어디 숨어 있다 나온 거야? 그리고 경연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를 가리는 객관적인 무대이다. 여기서 배출되는 가수가
실력 있고 품질 좋은 가수임은 분명한데, 그동안 많은 가요제등이 있
었지만, 대체로 객관적 실력보다는 연줄로, 알음알음 가수가 되었던

게 사실 많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엇 이거 기성 가수들 밥줄 끊기겠네'라는 일말의 위기
의식이 생겼을 듯하다. 사람들이 트롯 경연대회에 너무 크게 열광했
기 때문이다. 해서 기성 가수들의 경연프로가 만들어진 듯하다. 물론
전에도 이 비슷한 프로는 있었지만, 기성 가수들이 새로 등장하는
신인들보다 과연 노래를 더 잘할까?라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시작했고 이제 대한민국은 노래에 있어서 만큼은 경연의 시대, 경쟁의

시대로 돌입했다.

어제 첫 방영된 프로에서 박서진이란 가수가 부른 '어매'다. 세상 살이
고달프다 보면,, 아이고 엄마! 왜 나를 낳았다요? 이럴 사람도 많을 것
이다. 또 아들 딸 낳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도 많다. 뭐할라고
날 낳았디요?라고 목 터지게 부르짖는 아들 딸도 정말 원망해서 그리
할까? 마는 이 노래 들으며 눈물짓는 많은 엄마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도 남는다


말이야 바른 말 이지만, 트롯의 이 느낌, 이 공감력을 세상 어느 나라
노래에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인이라면 말이다!

알프스가 좋다 하나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아온 내 고향 앞 뒷산보다
더 마음에 파고들 수 있을까? 그저 며칠 가서 보는거야 좋겠지만~

한 많고 탈 많은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날 낳아 주신 어매를 탓할 수야
있겠을까? 천 번 만 번 감사할 일이지! 혹여 탓할 맘이 있다 해도

어차피 이 세상 내 뜻대로 온 이 하나도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를 한번 포스팅해 보기로 한다.

2020년 2월경에 방영된 것으로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던 글을 블로그

에 가져온 것이다. 아마도 위의 트롯에 관련된 내용은 이미 블로그

어디엔가 한번 언급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트롯에 무조건적인 찬동과 자부심을 함께 가지시란 의미는 아니며

더 더구나 근거 없는 무시나 애써 외면하는 바보 같은 짓도 더 이상

안 했으면 해서 써 본 글이다

 

 

 

 

 

나는 울었네!! / 보현 스님


시방 울고 워쩌고 할때요? 때가 어느 때인디!!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카카오 스토리고 뭐고 눈에 들어 오지도
않읍네다~ 지구 전체가 비상시국인데 거 뭐 소소한 개인사 같은 게
어디 낄데가 있겠쓰까요~

이런 거 올리는 거 다 ~ 부질없는줄 알지만, 지금이 봄 아닙네까?
사람이 마음에 꺼풀이 씌워지면 개나리도 안 보이고 진달래도 안 보이고
매화도 안 보입지요! 지금은 코로나가 눈과 마음에 옴팡 씌워져서
암것두 안 보이지유^ 보이는게 이상허지 않것어요!

그런데 주말인 데다 약국 건너 야외 음악당 비탈엔 산수유도 매화도 살구도
다 피어나 찰랑거립니다.

" 나 봄이요!! 봄 왔시요! 나 좀 봐주시유! "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들리면 뭐합니까?

웬 스님이 노랠 저렇게 잘한댜? 뉘 귀여? 보현 스님이라고 ~ 박정희
시절에 연예인들 수난에 몸을 피해 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음, 이 봄에 그나마 좀 어울릴만한 옛 노랠 찾다 보니 이 노래가 띄긴 했는데,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던 그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새도록 나는 울었네

* *

이거이 봄 하고 무신 상관인데?


그런데 이 노래 1절만 들어도 가슴이 싸아해 지고 마치 봄바람이 휘날리는
언덕에 앉아 다시 온다던 님을 그리는 맘이 아련히 떠오르는 분은
복 받은 분이라니께요! 밤새도록 나는 울었지만 운 게 운 것이 아닌 !
거 왜 제목만 보고 울고 불고 그런 것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만,

* *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고 흐르고 강물도 흘러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여 어데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새워 울어 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무정한 봄바람에 속은 경험이 있는 분은 여기까지 글을 보시고 계시
것지요? 허긴 뭐 여기까지 글을 읽어 내려오신 분도 아마 거의 없으
실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 지금 모두가 마음이 급하고 초조하니께요~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가는 걸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요!

깊은 봄밤에 달이 기울어 가는 걸 보고, 별이 흘러 저쪽 산 등성이로 넘어
가는 것도 보고,얼음 풀린 강물이 유유히 흘러 가는 걸 볼 여유가 있는 분!
아마도 요즘 거의 없을 겁니다

요즘 트롯이 대세가 된 시대지만, 트롯의 참맛을 느끼려면 노래만 가지
고는 부족한 게 바로 이런 서정성! 봄을 봄으로 가슴에 껴안는 감성!
꽃과 바람과 달과 별과 구름과 강물을 함께 뒤섞어 내는 그 어떤 것이
가능해야 노래의 참 맛도 살아나고 느껴지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의견
을 올려 봅니다

허기사 마스크 전쟁에서 겨우 한숨 돌린 게 얼마 되지 않았구만유~ 솔직히
지난 두어 주간은 아무 생각도 없었지요!


여전히 아침에 기나긴 줄 서기와 한판을 치르고 나면 온종일 맥이 쫘악
빠지는 건 여전하지 말입니다^ 우리 동네는 유독 마스크 구하는 분 들이
많읍니다^ 너무 많아요! 하루 1천 장을 푼다 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나저나 내일은 앞산 진달래라도 함 보러 가야지 생각 중입니다.
무슨 목련이 벌써 하얗게 피어나질 않나! 시답잖은 겨울 끝에 봄마저도
이리 속절없이 후딱 지나간다면 영랑의 말처럼 봄을 여읜 슬픔에 삼백
예순 날을 슬퍼 울지도 모르지 않읍니까.

 

요새 사람들은 주식이 떨어져서 아니면 집 값이 떨어져서 울테지만
말입니다^ ㅎㅎ

 

자 ! 보현 스님의 옛 노래 한번 더 들으시면서 행복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중학교 졸업식날 / 마로니에 부름

 

과거란 무엇인가?

 

역사적 과거, 국가의 과거, 등 거창한 과거란 말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 개인에게 있어 중요한 건 바로 그 사람 즉 '나의 과거' 인 셈이다.

 

" 내가 누군줄 알어? 짜슥들이~ "

" 거 뭐 나의 과거는 묻지 말아 쥬쇼~"

" 에효 말도 마슈! 옛날 얘기하면 눈물 나요~ "

 

등등 천층 만층 구만층인 게 바로 개인의 과거사다!

 

그런데 1959년도에 나왔다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노래 가사는 이렇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의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잊을수가 없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도 풀렸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렀다.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도 풀렸다.

애닯은 가슴마다 햇빛이 솟았다.

 

그래 그런 것이 과거일 수 있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암튼 난 이 가사가 마음에 든다. 정성수란 분이 작사를 했고 나애심의 오빠

전오승이 작곡한 노래이며 나애심이 불러 당대 큰 힛트를 쳤던 곡이다.

 

그 옛날엔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이 콩쿨 대회란 게 있었다.당시 우리 큰 누

님이 그 콩쿨 대회에 출전을 하셨는데, 바로 이 노래를 불렀다. 해마다 추석때

쯤 농번기가 끝나면 행해 오던 가설무대에서였다.

 

김철은이란 친구 형님인 김철호 이 양반이 얼마나 노래를 잘했는지 기억 난다.

또 장암리 어디 살았던 젊은 처녀가 부른 대머리 총각도 기억이 난다.이 분들은

모두 1등상인 황소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철호형은 아마도 몇 마리는 되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를 부르는 도중 심사 위원이 '땡' 하고 종을 울린것이다.

나는 몇 십년이 지난후 이 얘길 큰 누님에게 했다.

헌데 누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난 절대 콩쿨대회에 나간 적이 없다고 펄쩍

뛰신다. 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내가 당시 뭘 잘못 본 겐가? 착각을 하고 있었나?

 

암튼 내 어릴적 기억엔 이 노래를 부르던 누님이었는데 말이다. 큰 누님이

노래를 잘하는지는 몰라도 8순이 다 되어가는 요즘에도 동네 노래 교실을

꾸준히 다니는 걸 보면 노래를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다.

 

 

여튼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잊을 수가 없는 곡이 되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다른 어느 누님뻘 되는 이가 이 노래를 부른 건지 확실치 않지

만 말이다. 그건 뭐 이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자! 그런데 여기서 과거에 대해 얘길 해보자. 흔히 과거를 묻지 말라 하면

힘들고 고생하던, 떠 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말하기 마련이다. 더러는 결혼 전

남녀가 가지고 있었던 로맨스를 과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암튼,

혹시 우리 친구중에

 

'내 과거는 쓸만했지, 그만하면 난 좋았어' 하는 이 몇이나 될까?

 

6.25 중 태어난 우리들은 거의 대개가 어렵게 살지 않았는가? 먹고 살 것이

넉넉한 집안이 별로 없었다. 다들 겨우 겨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소위 '불행 증후군' 이란걸 알게 모르게 가슴에 품고 산다.  

 '내가 제일 힘들게 살았고 불행했으며 제일 가난했다' 같은 것이다. 

 

" 나 만큼 고생한 놈 있으면 나와 봐! 내 고생은 말도 마! 우리 집이 제일 가

난했어! 어휴 나 같은 사람도 있을라구!! " 등등이다.

 

어쨋거나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했고 가난했고 힘들었고

이런 감정을 갖고 사는 이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을 마치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사는 이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해서 웬만한 남의 고생 얘길 들어도

 

" 까짓 그게 뭐 고생이라고 야단이야~ 흥^ "

 

이러곤 만다. 뭐 하나 끝까지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왜냐면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그 무엇도 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마이너스) 영향을 끼치

는지 잘 모르는 거 같다.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고  불행했으며 가장

힘든 삶을 살았다고 늘 생각하는 마음에 행복한 감정이 깃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또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일치감을 잘 느낄 수 있을까?

 

과거의 그런 나를 버리지 못하는 한 현재의 내가 정상적으로 균형있게 잘 살아

가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낮

게 될뿐 아니라 자칫 인생이 우울 모드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한참 전 까지는 그런 생각이 다소나마 좀 있었던 거 같다. 시골서

논 마지기 하나 변변히 없었지,친척도 없지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부모님도 일찍

돌아 가셨지~ 도대체가 뭐 하나 내세울만한게 아무것두 없었으니 나도 불행증후군

환자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려서 부유한것이 꼭 좋은것도 아닌 걸 많이 보았다. 그 부유가 사람을 나태하게

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하는것도 많이 보았고 유약한 심성으로 인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도 많이 보아 왔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만 인생이란 꼭 좋은것만이 다 좋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기 전 까지 나는 내가 누리고 살았던 즉 나에게 주어졌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행복했던 것인가를 잘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또 나중에 주변을

돌아 보니 다들 나 이상으로 어렵게 살았고 힘든 과정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세상 불행을 자로 잴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더 불행한지 더 가난했는지 측정

하기는 어렵다. 또 설령 측정했다손 쳐도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 마냥

자신이 최고로 불행했다고 느끼며 사는 인생이 과연 행복에 이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바로 이것이 '불행 증후군'에서 시급히 벗어나야할 이유이다.

 

나의 과거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불행하지만도 않았다. 나는 태어난

고향도 있고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도 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

으며 형제 자매간 꿈 같은 시절을 보냈었다. 그후 이런 저런 인생의 질곡은 있었지만

나름 잘 살아왔고, 어디 내어놓을만큼 뻐젓한 무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다.

 

 

내가 겪어 보니 어릴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마음도 넓고 사람도 잘 사귀고

하는거 같았다. 지독히 가난하거나 암튼 뭔가 너무 악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무언가

모르게 심성이 약간씩 비뚤어 지거나 성격이 모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설령 가난하게

살았다 한들 그게 뭐이 자랑이며 자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걸 내세울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상황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이 주변에는 많지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복한 인생은 누가 만들어 줄 수도 꾸어 올 수도 없다. 돈만 많으면,

지위가 높으면, 기타 뭐만 잘하면 행복하냐? 이런 바보같은 물음은 그만 집어 치자.

그럴 수도 안 그럴 수도 있는게 인생이다. 남 보기엔 우스워 보여도 나름 행복한 삶을 사는

이는 많다. 남 보기에 뻐젓해 보이지만 실제 불행하게 사는 이도 많다. 그러니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 할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 화성의 낚시터에서 (1980년대 후반)

 

 

과거를 물을테면 물어라!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다.

현재를 물어라! 역시 또한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 아주 많다.

 

 

행복이 무어냐고 묻지를 마라~ 그건 각자의 가슴 속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묻지 말라는 건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 정체가 무엇인지 잘 밝히고 오픈하여 투명

사회로 나아가는게 바람직한 미래의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뭐든 감추고 쉬쉬하며 회색빛 인간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때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과거의 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 대

한 신뢰성을 더하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현재가 중요하다고 하나 그의 과거에

지울 수 없는 흑 역사가 있다면 과연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쉬운 일례로 카페

에서 알게된 사람을 깊이 신뢰하기 까지는 난관이 많다. 당연하지만 그 사람의

과거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카페등에서 자신의 과거 인생을 소상히 밝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나의 블로그에 최대한 나의 과거부터의 기억을 살려 올려

두려 노력하였다. 물론 현재의 나란 사람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는 마찬 가지다.

 

그것은 '내가 누구요'~ 하는 명함 한 줄과는 게임이 안 되는, 명함 100장 1,000장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인생 고백서이기 때문이다. 여러 블로그를 보아 왔지만

나와같은 형식을 취하는 블로그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그런 방식이 꼭 좋다고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런 방식을 고수 하는 중이다. 

'나의 인생 노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 안 풀리는 수수께끼  (0) 2021.12.23
덮치기의 추억  (2) 2021.01.14
내 유년의 초상(肖像)  (0) 2020.12.22
인터뷰 기사 - 약업신문 (2004.12.8)  (0) 2016.10.04
고향 사람 얘기  (0) 2016.01.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