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 최대 모 온라인 교육 회사의 회장 제수씨가 주식이

폭등해 부자가 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한국 사교육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회사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그 옛날 사교육의 대표라 불리던 대성학원의 도움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지만 이 땅의 사교육 열풍이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지요

 

 

최근에 유튜브를 보면서 참 신기한 느낌이 들었지요. 겨우 이제야

그 프로를 본 게 좀 민망스럽긴 합니다. 그러나 유튜브가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이미 2009년도에 방영된 KBS 명작 다큐였으니까요

 

 

미국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 아이비리그 명문대 교수진의 40%,
법조계 엘리트의 50% 이상, 할리우드 영화계의 60% 이상이 유태인

이며 음악, 미술, 무용 등 다른 예술계도 마찬가지랍니다. 이미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지구 상 60억 인구 중 유태인은 0.3%도 안 되는

1500만 명 정도인데 말입니다

 

2009년에 이미 유태계 노벨상 수상자가 179명이었으니 지금은 더

많아졌을게 분명하고 이제 좀 선진국으로 발돋움을 시작하는 한국이

갈 길이 아직 먼 게 아닐까? 는 생각이 듭니다

 

하버드 재학생 중 30%, 예일대 재학생의 30%, 아이비리그 전체
재학생의 25%가 유태인입니다. 이렇게 하면 감이 좀 떨어지지만 하버드
총 2만 명 중 6천 명, 예일 1.2만 명 중 3,600명, 프린스턴 8천 명 중 2400명,


그니깐 아이비 리그 8개 대학의 총 학생수가 대략 12만 명쯤 되는데 그중

유태인 학생이 25% 정도라니까 어림잡아 3만 명 정도가 그들 이란 얘깁

니다. 말이 3만 명이지 이쯤 되면 미국 명문대학의 거의 대부분을 이들 유태

인이 휩쓸고 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듯합니다. 글쎄요! 한국, 한국계 학생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 현재도 전 세계 모든 영역을 쥐락펴락 하는 그들

인데 향후 날이 갈수록 더더욱 유태인들의 영향력은 커질게 틀림없습니다.

가끔 한국에서 어렵사리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학을 들어간 학생들이 과연

암기 위주의 우리 공부 스타일로 거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이제야 좀 듭니다. 그것은 통계가 증명합니다. 아이비리그 등 미국 명문대학

진학을 한 한국 학생 중 45%가 중도 탈락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령 어렵사리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했어도 그들 명문 교육의 DNA를

온전히 체득했다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과거와는 달리 그곳 명문 출신 한국인들에 대한 일종의 무조건적인 존경심

같은 것이 상당 부분 사라진 셈입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노벨상 180명 이상을 휩쓴 그들의 진 면목을 위시로 해서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주요 유태 인사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 물리학상)
알버트 에이브라함 마이컬 손(미국인 최초 노벨 물리학상)
어니스트 보리스 체인(노벨 의학상)
조슈아 리더 버그(노벨 의학상, 유전자 재결합과 박테리아의 유전적 형성)
알버트 센트 디외르디(노벨 의학상)
로살린 얠로(퀴리 부인 이래 여자로서는 자연과학분야에서 두 번째로 노벨상 수상)
아서 콘버그(노벨 의학상, DNA 형태와 활성 체계 규명)
프로이트(정신분석학 입문)


마르크스(자본론)
트로츠키(러시아의 혁명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
스피노자(포르투갈계 유태인 철학자)
멘델스존(작곡가)
벤자민 아이작 디즈 렐리(영국 19세기 수상, 신교로 개종 평생 유태인임을 숨김)
앙리 베르그송(1927년 노벨문학상, 시간과 자유, 창조적 진화)
에른스트 카시러(언어와 신화)
헤르만 엘리 코헨(철학자)
마틴 부버(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종교철학자)
에릭 프롬(sound society=건전한 사회)
마르쿠제(1차원적 인간)
한나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
레오 칠 라드(미국 핵폭탄 제조 맨해튼 계획의 멤버)
노 비트 위너(MIT 교수, 인공두뇌학)
이시더 래비(노벨 물리학상)
유진 위그너(핵물리학자)


셀먼 A. 왁스먼(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 개발)
조나스 설크(소아마비 백신 개발)
솔로몬 슈피겔만 (암 연구의 선구자)
카프카(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대표작 변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말테의 수기)
솔 벨로우(노벨 문학상)
아이삭 싱어(노벨 문학상)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닥터 지바고의 작가)
아서 밀러(세일즈맨의 죽음)
노만 베일러(모비 딕)
허만 워크(케인호의 반란)
루이스 브렌 다이즈(사학 명문 브렌 다이즈 대학 창립자이자 미연방 대법관)
노암 촘스키(언어학자)
헨리 키신져(미 국무장관, 노벨 평화상 수상)
캐서린 그래함(워싱턴 포스트, 뉴스위크 명예회장)
아돌프 오크스(뉴욕 타임스 오너)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러시아 주요 신문 모두 장악 푸틴과 대결 모드)
월리암 펠리(미국 CBS 창립)
바바라 윌터스(ABC 뉴스 앵커)
안톤 루빈스타인(음악가)
아서 루빈스타인(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웨스트사이드 스토리)
프랭크 로져(아가씨와 건달들)
쉘톤 하닉스(지붕 위의 바이올린)
리처드 로저스(사운드 어브 뮤직)
마르크 샤갈(러시아 태생 유태인 화가)
앨런 그린스펀(FRB의 장 4번 역임)
버냉키(현 FRB 의장)
매들린 울브라이트(미 국무장관)
안네(안네의 일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수, 영화배우, 연극배우)
퓰리처(퓰리처상의 기원)
스티븐 스필버그(영화감독)

록펠러(스탠더드 오일 설립, 록펠러 재단)
카네기(철강왕)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
마이클 델 (델 컴퓨터 창업)
앤드류 그로브 (인텔 공동 창업)
레리 앨리슨 (오라클 창업)
데이비드 사르 노프 (RCA 창업)
에드윈 랜드 (이스트만 코닥 창업, 폴라로이드 사진기 발명)
제럴드 슈워프 (GE)
스타벅스
GAP

유태인 금융자본은 세계 1위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를 비롯하여
베어스턴즈, 체이스 맨해튼, JP모건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 등.

(유태인 노벨상 통계등 글은 인터넷 카페 참조)

 

 

나열된 것은 개략적인 것이라 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세계 문명사를

거의 전부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 같습니다

 

그럼 과연 유태인은 무슨 교육법을 갖고 있기에 이러한 성과로 나타

날까? 만일 교육이 아니라면 그들의 타고난 재질, 천재성, 기타 유전자

등 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제가 파악한 그들의 교육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 첫째가 [하브르타 대화법]입니다. 그 요체는

 

네 생각은 어때?

왜? 그렇게 생각하니? 에서 출발하며

이들의 질문이란, 무작정 묻는 것이 아닌 상대, 즉 자녀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태인들은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유태인의 가정교육법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도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마는,

교육은 학교에 보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르죠!

 

저녁 식사만큼은 거의 반드시 부모와 자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하며 그 식사 시간에 긴밀한 대화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들은 꼭 이것을 지킨다 하네요. 하브르타 대화법에는

부모 자식 간에 인정, 존중, 해결책 모색, 위로, 등등 보통 우리네 가정

에서 행해지는 부모 자식 간의 대화방법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하브루타 대화법의 요체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REACH로 요약되며

 

1. Reflect -- 반영, 네 기분을 알 것 같아~

2. Encourage -- 존중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3. Accept--인정, 수용하며

4. Choice & Change --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조언해서

5. Hold & Hug -- 끌어안아 다독여 준다

 

참고로 여기서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예시해 보면

 

1, 좋은 질문이란 -- 관심과 애정을 갖고 생각하게 하고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질문입니다, 즉

 

1) 우호적으로 차분하게 질문하고

2) 구체적으로 질문하며

3) 생산적인 질문을 하고

4) 원인 방법을 찾고 새로운 관점을 시도하게 하는 질문을

5) 위대한 질문 - 호기심을 유발하고 때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질문을 한다입니다

 

반면 나쁜 질문이란 --

 

1) 답을 미리 정해놓고 아이에게 유도를 하는 질문

2) 부모의 유식함을 드러내고자 자신을 과시하는 질문 등인데

 

부모가 자녀들에게 질문을 하는 건 좋지만 위의 사항을 충분히 고려하여

질문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부모 자식 간 대화는 대체로

부모의 일방적 훈시나,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기가 다반사여서 결국 싸움

으로 끝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지요. 이것은 다분히 유교에서 기인한

가부장적 전통이 상당 부분 원인이 될 수도 있을듯합니다.

 

" 너 학교에서 오늘 뭐 배웠니? "라고 흔히 우리가 묻는데 반해 그들은

" 오늘 학교에서 무슨 질문을 했어? " 이렇게 묻는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결과는 큰 차이가 날 듯합니다. 우리는 보통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 걸 당연시 하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걸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5살부터 13살까지는 모세 5경을 통하여 속속 드리 가르치고 기본을

충분히 익히게 한 다음 13세 이후부터는 탈무드를 가지고 서로 토론을

벌이며 생각을 키워 나가게 한다고 하지요.

 

그 둘째는 그들의 도서관인 [ 예시바] 란 것입니다.

 

보통 도서관 하면 혼자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

하게 되는데 유태인의 예시바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시바에서 그들은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고 거의 반드시 둘 이상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형식의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 도서관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교환하며 그들은 배워 나가는 셈입니다.

 

이 두 가지가 유태인의 주된 교육법이라고 제가 파악한 내용입니다

각 나라마다 교육방법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권의 교육방법과 유태인의 방법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시바를 처음 알게 되기도 했지만 정말 기상 천외의 뜻밖의 도서관

공부법 이더군요

 

 

그러나 현세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분명 그들의 방법이 좋은 점이 더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암기 위주의 공부를 혼자 독립적

으로 하면 언젠가는 그 지식의 성장 속도는 멈추고 빨리 잊힌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생각하는 힘이 약해진다고 보지요. 상대와 더불어

묻고 답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야

생동감이 있고 오래가며 창의적 사고가 풍부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작금에 일방적 주장만 난무하고 상대의 의견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 풍토도 체질적으로 소통은 없이 혼자 공부하는 몸에

밴 교육의 결과는 아닐까요?

 

 

우리는 그렇게도 받기 힘든 노벨상을 180명 이상이나 다 방면으로 수상

했다는 실적이 그들의 교육방법이 좀 더 유효함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철저한 가정 교육과 그들의 교육 방식이 결과적으로 노벨상을 휩쓰는

성과로 나타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힘든 건 사실입니다

 

이웃 일본에서 노벨상을 로비에 의해 일부 수상해 왔다는 얘기도 있지만

180명 이상 받은 유태인과는 전혀 레벨이 다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웃 일본의 사례가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는 평화상 1개 외에

아직 여타 노벨상은 하나도 받은 적이 없으니 유태인과는 물론 일본과도

비교 자체가 불가일뿐더러 아직 이 부문에서는 우리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과 글을 써서 무슨 효용이 있을까? 를 자문자답해 봅니다.

 

세계적으로 점차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한국인은 지금 당장에도 국제무대

에서 유태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나름 좋은 공부방법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들의 방법을 일부

차용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양궁이 세계를

휩쓸자 다른 나라에서 앞다퉈 우리나라의 코치들을 영입하였고 이제

는 그들의 수준이 거의 우리를 따라왔음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 간에 질문 토론 대화를 대폭 늘려 가자는 것이지요

 

학교에서는 암기 위주의 공부에 플러스 묻고 답하기 토론하기, 왜?라는 의문

부호를 끊임없이 제기하기를 첨가하면 될 듯합니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울 수는 없고 오랜 시간과 제도적 개선이 뒤 따라야 가능할 테지만!

 

며칠 전 외암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오래된 한옥집이

었는데, 뻥 뚫린 마루 뒤편으로는 간장독과 돌담이 어우러진 곳이었지요.

마침 옆에는 어린이 2명을 데리고 온 가족이 식사를 마치고 잠시 식구끼리

대화중이었는데, 그들은 이런 집이 여름에 시원할까? 천장은 높은가? 등

간단한 대화였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나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만일 유태인 자녀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라면 어떤 대화를 이어갈까? 를

연상해 보게 되더군요!

 

물론 저도 그런 시기를 자녀들과 해 본다고는 했지만 많이 미숙하고

비 효율적인 대화로 세월을 낭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 대화'가 대체 무슨 책 제목이 될까? 늘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제야

그것이 교육의 중요한 방편이란 걸 알게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현재 무조건 외워서 점수를 높여야 인정을 받는 풍토에서 무슨

할 일없는 소리냐고 핀잔을 받을게 뻔하지만, 우리의 교육방법은 사실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50년 쯤에도 함석헌 선생님같은 분은 오죽 답답하셨으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라는 책을 내시기도 하셨지요.

 

정말 우리 민족이 생각이 없는 민족인지는 이견이 분분하겠지만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않고 자란 사람이 커서

도 생각을 깊이 잘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교육에 대한 근본 생각과 철학이 우리 세대부터 상당 부분 바뀌어야

하지 않을지요? 당장 교육부가 해결할 수도 초중고등학교에서 바뀔

수도 없는 문제이니 말입니다.

 

 

이것이 이 무더운 여름날 유태인의 비상함과 그 교육법에 대하여

단편적인 몇몇 유튜브 내용을 기초로 하여 생각을 정리해 본

이유입니다.

 

* 참고한 유튜브는

[KBS 명작 다큐 유태인의 공부법] 1~ 5 편 외 기타 몇 편과, 관련

인터넷 자료들입니다

 

 

큰 기대를 할 수가 없다보니 아마도 향후 100년, 아니면 2-300 년은

지나야 우리의 교육방법에 획기적 변화가 올 수도 있겠다~ 생각해

봅니다. 왜냐면 수천 년 이어져온 우리의 공부방법이 쉽게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요.

 

 

참고로, 아이비리그(Ivy League) 8개 대학에서 이제껏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

는 400명 이상이고 미국 대통령도 1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2019년 기준

전체 노벨상 수상자는 607명이고 그중 미국이 385명,일본은 28명입니다

 

아이비리그 8개 대학은 미국 북동부에 있는 하바드(Harvard), 예일(Yale),

프린스턴(Princeton), 콜롬비아(Columbia), 다트머스(Dartmouth),

브라운(Brown),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코넬(Cornell) 8개 대학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스탠퍼드(Stanford)를 합쳐 아이

비 플러스 리그(Ivy Plus League)라고도 부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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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연일 무더위 상종가를 기록하는데, 이 무슨 자꾸 연꽃 얘기요?

 

얼마 전 관곡지를 찾았으나 기대에 너무 못 미치는 연꽃을 본 지라

내심 외암리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외암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겨우 생각이 났다.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집에 그냥 두고 온 것을!

 

아 뿔싸~ 이게 웬 실수?

어차피 이리된 거 머리와 가슴에 연꽃을 꽉꽉 집어넣고 가면 되지!

뭐~

 

선글라스에 팔 토시 마스크에 모자를 눌러쓰고 연못에 이르자 휴일임

에도 별로 사람이 없다. 너무 더워 그런가? 생각보다 연꽃은 많이 피어

있었고 색감도 매우 곱다. 카메라가 있어봐야 무용지물인 게 영 가슴이

쓰리다. 에혀! 폰으로 몇 장 찍고 나니 더 이상 찍고 싶은 마음이 없다.

 

혹시 작년에 왔을 때 못 본 게 있을까 하고 동네를 들어간다. 마을 입구쯤

할머니 한 분이 집 앞 청소를 하시면서

 

" 이따 점심에 밥 먹으러 와요! 오천 원이야! 절대 후회하지 않아~ " 하신다.

 

나는 대충 대답을 하고 재빨리 동네를 둘러보지만 그다지 새로운 건 없다.

저쪽 산 위로 보니 절이 하나 있단다. 음 절이나 한번 올라가 볼까?

 

논둑길을 거쳐 쭈욱 올라가니 아주 단정한 사찰이 나온다. 인기척도 없고

안쪽으로는 무인 카페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 들어가니 냉장고 안에

오디 원액, 매실 원액, 등이 병에 들어있고 옆에는 원두커피 제조기와 얼음도

나온다. 일단 오디 한 잔을 만들어 마신다. 매실도 한 잔 마시고 커피도 한잔

내려 먹었다. 사찰 관련 책도 꽤 여러 권 꽂혀 있고 인근 안내서 등도 보인다.

입구에는 알아서 넣으라는 보시함도 있었다. 나는 여러 잔에 걸맞게 몇 장의

지폐를 넣었다.

 

카페 밖 대웅전 쪽에서 독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아! 이 평화로운 느낌!

사찰 앞쪽으로는 낙엽송이 울울 창창하고 그리 높지 않은 산 위로는 하얀 구름이

예쁘게 떠 있다. 청정한 이 느낌, 이 동네 생각보다 참 좋구나! 풍수지리적으로도

명당이구먼!! 정말이지 깨끗한 느낌이 든다.

 

차를 마시고 천천히 논 길을 내려온다! 그래 범이 내려올 때 이럴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옛날 들었던 노래가 생각난다. 물론 녹음도 해 본 곡이지만

 

" 하얀 원피스 입은 저 여자~ 저기 가는 저 여자~ 야윈 어깨에 뒷모습까지도

내가 사랑했던 그 여자 같아 ~ "

 

큰 소리로 벼가 무성히 자라 오르는 논둑 포장도로를 걸으며 불러 본다

물론 불러도 아무도 돌아볼 사람이 없다. 그저 적막만 감돌뿐!

 

동네 어귀에 100년은 넘은 직한 참나무와 소나무 숲 속 벤치에 앉아 목이 터져라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한없이 듣는다~ 거의 한 시간은 그렇게 앉아 있

었다. 시원하다! 이렇게 매미소리 듣고 오래 앉아 있기도 처음이다. 앞에는 고구마 밭,

그 앞에는 대나무가 드리운 기와집이 있다. 힐링이 뭐 별건가? 아까 할머니가 말씀하

신 게 생각이 나서 배가 고플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중이다.

 

반찬 10가지에 청국장 한 그릇~ 손님이 직접 셀프로 하면 5천 원, 서빙을 받으면

9천 원 이란다. 할아버지와 두 분이 사시는 한옥 집에서 식당을 하신다. 그니깐 5천

원 짜리 식사가 맞는다

 

마을 입구를 돌아 나오는데 이것저것 가판대에서 농작물 등을 판매하는 할머니 한분이

 

" 새벽 5시에 사진 찍으러 여러 사람이 와~ "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 그 이른 시간에 사진을 찍으러 온단 말이야?

 

올라오는 길에 평택 만기사에서 물 한 통을 길었다. 어휴! 이거라도 없었으면 오늘

말짱 꽝인 날인겨!!

 

이렇게 일요일은 끝났다.

 

 

* * *

 

자 월요일이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났다.

어제 일요일 메모리카드를 잊고 그냥 간 불찰을 만회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외암리를 가기 위함이다. 

 

외암리를 향해 달리는데 동편에 먼동이 튼다. 나름 괜찮은 황금 구름 색이다.

 

" 그래 이 맛에 새벽을 달리지~ "

 

외암리 연못 앞엔 벌써 여러 진사가 육중한 삼각대를 펼치고 진을 치고 있다.

일행인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카메라 뒤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마음 약한

사람은 감히 카메라를 내밀기도 좀 어쭙잖아 보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

나는 궁금해서 그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 대체 저 검은 천은 무엇에 쓰는 거요? "

 

" 음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으로만 사진을 찍습니다. 화이트 밸런스도 맞춰 줘야

하고 에~ 등등 , 그런데 해가 비치면 카메라 계기판이 안 보이므로 저렇게 하는

겁니다"

 

아! 그런가? 나도 시간이 좀 있다면 그 방법을 자세히 배우면 좋긴 하겠는데,

뭐 나는 순수 아마추어, 저들은 프로? 아닌감?

 

그런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열심히 촬영을 하고 계셨다. 프로 사진사들에

게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 연꽃이 참 색감이 좋네요! 너무 멋있어요~ " 하니 그분도 "네에,, 그렇지요" 한다.

그러면서 조용히 " 근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연꽃이 여기보다 훨씬 많고 꽃도

좋은 곳이 있어요~ " 하신다.

 

해도 떠서 올라왔고 더 찍을 것도 마땅치 않아 나는 서둘러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달리아, 능소화 등을 간단히 찍고 가르쳐준 동네로 향했다

 

아침 식사도 건너뛰고 비지땀을 흘리며 연꽃에 열중했다. 상당히 넓은 면적에 연꽃

도 매우 實하게 피어 있었다. 논산의 윤증 고택도 물론 공지가 된 장소이긴 하나 허용

된 관람 시간 외에 찍은 사진을 내려 달라는 후손들의 부탁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는 아니 다른 나라도 비슷할 걸로 생각은 되지만, 특정 장소가

유명해지면 얼마 안 가서 피폐해지는 나쁜 전례가 있다. 해서 장소는 밝히지 않기로

하니 양해 부탁드린다.

 

아침 9시가 넘어 약국에 도착해서 빵 한 조각과 우유 한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이 더운데

무슨 난리란 말인가? 누가 시켜한 짓도 아니고 순전히 내 의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어쩌랴!

 

생각보다 무척이나 몸이 피곤함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이토록 힘이 든단 말 인가?

코로나 2차 접종 때문인가? 아침 식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럴까?

 

암튼 이 한 여름 올해는 연꽃으로 인해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해가 뜨기전부터 기다려 몇 장 건진 외암리의 연꽃~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연꽃의 색감은 정말 신비로울 정도였다

 

 

여기부터는 어느 분이 가르쳐준 외암리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날 아침도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바람에 우연찮게 이런

좋은 곳을 알게 된 셈이다

 

 

 

바삐 촬영하느라 늘 삼각대도 없이 하던 것을 이번엔 꼼꼼하게

삼각대를 써서 촬영에 임했다. 역시 결과는 차이가 좀 나는 것 같다

 

 

 

 

이날 약간 흐린 상태였고 아침이지만 기온은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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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도 중순인데, 연꽃! 그래도 연꽃은 한번 보고 여름 지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연꽃으로 이름난 곳들을 이리저리 되짚어 봐도 그나마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시흥의 관곡지다

 

천안의 외암 민속마을 연꽃이 다소곳하니 좋았지만 일요일 낮 시간대에 볼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어중간하여 선뜻 나서기가 좀 그렇다.

 

외암리는 집에서 70km, 관곡지는 40여 km 아무렴 가까운 곳으로 가자!

 

날은 잔뜩 흐리고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까짓 연꽃이 뭐라고 이 더위에

간단 말인가? 관곡지는 벌써 두어 차례나 가 봤지 않은가?

 

 

 

 

세상사가 대개 그렇듯 언제나 촬영엔 미진함이 남는다. 좀 더 멋지게

찍을 순 없었을까? 그 시각이 아닌~ 좀 더 일찍 갔어야 하는 건데, 렌즈

를 다른 걸 사용했더라면~ 등등의 미련이 남게 마련이다. 허긴 당시엔 망원

렌즈도 없어 저 쪽 물속에 핀 연꽃을 좀 더 가까이 당겨 찍으려 해도 방법

이 없어 아쉽던 기억이 난다.

 

 

오후 4시 가까이 돼서야 도착했다. 주변 도로엔 예전처럼 자동차들로 꽉 차

주차도 어려웠다. 

 

겨우 차를 대고 논둑으로 들어가니 중년의 노 진사 한분이 열심히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 여기 어디 연꽃이 좋아요? "라고 말을 건넸다.

 

이미 두 번이나 와 본터라 연꽃은 중앙부 저쪽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내가 미처 모르는 좋은 포인트가 있나 해서 운을 떼

본 거였다. 연이어 나는

 

" 연꽃이 어째 별로 핀 게 없네요~ " 하니 그 양반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 아~ 연꽃이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피는 거니 지금 이 시간에는 다 입

다물고 없지요~ "

 

그것도 모르면서 연꽃 사진을 찍으러 왔소? 뭔가 그런 느낌으로

나에겐 들렸다. 나는 " 아! 예 감사합니다~ "라고 답한 뒤 부지런히

저 건너 연꽃 단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 연꽃 피는 시간은 그렇게

 되는구나~

 

 

 

그러나 오후 4시가 넘었음에도 꽃잎을 살짝 펼친 것들이 한두 개 보였다.

그런 곳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모여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세상에 예외 없

는 법칙은 없듯 연꽃도 역시나 그런 거 같았다

 

 

 

이제껏 본 연꽃 중 가장 적게 봤으며, 단 몇 송이를 겨우 촬영했음을

말씀드리며 그러나 나름 만족하기도 했다는 것!!

 

그것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본 듯해서 이기도 하다

 

 

 

 

 

 

 

철 지난 능소화는 여전히 저 나무에 매달려 피고 있다

 

오후5시 50분, 역시 모범생답게 꽃잎을 전부 오무리고

있다

 

사과는 이렇게 열심히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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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달개비 학명은 ' Tradescantia spathacea ' 로 닭의장풀 과에 속하고
여러해살이 초본 식물입니다. 양달개비, 자주달개비,라고도 하며 원산지는

북 아메리카 입니다


초 여름인 5월 경부터 피기 시작하며 아침에 피었다가 햇볕이 뜨거운
낮이 되면 봉오리가 아물어 들지요. 꽃 말은 ' 외로운 추억, 짧은 즐거움'

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뜻이 있군요.

 

무슨 꽃이든 다 이렇게 소속, 학명, 의미 등이 있게 마련이지만 사실 그런 거
에 누가 그리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그저 이쁘면 되고 자주 볼 수 있으면
만족하는 게 보통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토종 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색감이 곱고 느낌이 야리야리해 많은 분들이 나름의 추억이 얽혀 있을 듯

한 이 꽃이 오늘 아침 출근하며 동네 화단을 보니 거의 다 져 가고 있더군요!

 

해서 부랴 부랴 이 꽃에 얽힌 추억의 한 페이지를 한 장 작성해 보려 합니다

 

이 꽃을 처음 본 것은 어린 시절을 살았던 제 고향 안성의 우리 집 바로

옆집에서 입니다. 시골 우리 집은 담장이 없었지만 옆집은 흙벽돌로

쌓은 담장이 있었고 그 담장 안 한쪽 켠에 바로 저 자주달개비가 이만큼

한 묶음처럼 자라서 초 여름이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없으면서 자주색을 띤 꽃이니 당연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는 무슨 꽃인지 물론 이름도 몰랐고 막연히 참 예쁘다,, 정도로 생각

했던 꽃입니다. 화투장 중에 5 난초 열 끗짜리에 그려진 꽃이 이것과 아주

흡사해서 나이 들어 성인이 지나 한참까지도 저는 당시 그 꽃이 난초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딜 가다가 저 꽃이 눈에 뜨이면 언제나 어릴 적 옆집 담장 안의

그 꽃 ~ 난초를 연상했지요!

 

 

매우 곱게 자란듯한 제천 이에스 리조트 인근의 솟대 박물관에서

본 달개비입니다. 뭐랄까~ 달개비를 저리 잘 이쁘게 키우는 주인의

심성은 어떨까? 를 생각해 봅니다. 그도 나처럼 그 어떤 옛 추억이 저

꽃에 있어 그럴까?

 

 

금년 5월에, 2006년 대한민국의 예쁜 정원으로 선정된 오산의 서오랑 호수

에 위치한 안홍선 님의 정원을 가 보니 역시 정원에 달개비가 상당히

많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서오랑의 안홍선님 정원

 

글쎄요~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제가 자그마한 정원을

꾸미게 된다면 당연 1순위로 달개비를 심을 거 같긴 합니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이 있어서

이기도 합니다.

 

자주달개비를 볼 때마다 어릴 적 나의 고향과 초가집을 새삼

떠 올릴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크나큰 행복중의 하나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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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에 피는 꽃으로는 능소화와 연꽃이 있다. 물론 대표적인

이 2 가지 꽃 이외에 상당히 많은 꽃들이 이 시기에 피어날 것은

분명하지만~

 

3월, 4월 그 많은 꽃을 봤으면 됐지 뭐 더 이상 꽃을 보겠다고

동분 서주하는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앞서 에세이에서

도 적은 바 있지만 6월 중순 이후부터는 자연의 순리는 들판의 곡

식을 위한 계절임을 잊어서는 곤란할듯하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인간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무덥기만 한 나날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긴 하지만 간간이 보이는 꽃들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는 건

분명 삶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이미 수년간 인근 동네에서 능소화

를 관찰한 바 있어 이젠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될수록 깨끗한

깔끔한 꽃잎을 찾는 게 나의 관심사이다

 

 

 

그에 며칠 앞서 앞산을 산책하며 본 큰 까치수염이다. 과연

저 모습이 까치의 수염을 닮았을까? 그러나 무더운 산길에

저런 하얀 꽃을 보는 건 참 시원하다

 

비 오는 날 아침에 담아 본 능소화이다

 

이 역시 동네 화단에 핀 백합으로 생각되는데~

백합과 나리는 무엇이 다를까? 나리는 꽃이 좀 작고

백합은 이 보다 큰 것으로 추정되는데!

 

약국 동네 아파트 입구에 수년 전부터 기르는 머루로

생각되는 것인데, 출입구에 저렇게 열매를 키우고 있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건 정서적으로 차이가 많이 느껴진다

 

 

과연 이 능소화는 깔끔한가?

 

그렇다!

 

매우 깔끔한 꽃잎을 가지고 있다. 흔히 도로변 등에

많이 피는 능소화는 색감도 이것과 다르게 무척 진하고 꽃잎도

마치 나팔꽃처럼 뒤집어 보이는데,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는다.

 

그런 능소화만 보다 보면 아예 꽃 자체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을 것

이다. 능소화의 참 맛은 역시 강하지 않은 색감에 청순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것은 비단 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모름지기

사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전적으로 개인 생각

이긴 하지만~

 

 

 

 

 

옆 동네 출근길에 피어있는 루드베키아~

 

여름철 이맘때 동네 여기저기 화단에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전곡항에서 가까운 백미리란 해안 갯벌 체험지이다

이 무더운 뙤약볕에 어떻게 갯벌을 체험하겠다는 건지, 저 멀리

사람들이 보인다

 

 

발안에 있는 외사촌 여동생의 텃밭에서 발견한 꿩 알!

 

어릴 적 그 많은 세월을 새 알 찾는데 투자했지만 당시 꿩알을

발견한 건 딱 한 번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 제부가 들고 온 알을

보니 너무 작다.

 

원래 보금자리에 가져다 두는 게 좋겠다 해서 그리 했는데,

꿩이 인간의 손을 한번 탄 저 알을 다시 품을지는 미지수다.

 

텃밭 끝에서 꿩이 새끼를 데리고 올망졸망 기어가는 것이 훨씬 좋지 않

을까?

 

제발 꿩이 다시 저 집에 찾아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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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천년의 침묵외 30곡

 

 

일요일 아침 7 시대 승용차로 용인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난생처음 이런 확 뚫린 서울 도심길을

달려 본다. 불과 40여 분만에 40여 키로의 서울길을 주파

하다니!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네 그려!

 

그러나 일찍 도착한 경복궁은 9시부터 입장 티켓을 발매했다.

그 사이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광화문 누각 앞 뒤를 배회했다

 

경복궁이 무엔가?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라 한다

 

서울, 아니 서울 근처에 살면서 경복궁 한 번쯤 가 보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다들 "아~ 거기" 이렇게 말할게 틀림없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이는 드물듯한 경복궁!

 

사실 나 자신도 언제 거길 가 봤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최초의 경복궁 방문은 1968년이다. 당시는 희고 우뚝한 석조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을 때였다. 그걸 중앙청이라

불렀다. 중학교 때 광주의 모 육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덕에

 

( 당시 시골 중학교가 무얼 어찌해서 군 부대와 자매결연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 부대의 군용 차량으로 몇몇 학생들이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부대와 가까운 남한산성에 올라 서울 전경도 보았고 서울서 제일

높은 건물이라는 중앙일보 사옥 23층을 목이 젖혀지도록 올려 보았고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내부를 들어가서 위아래로 답사를 한 것은 물론

남산 순환도로에서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던 배우

김지미 씨를 보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로 왔고 광화문 중앙청 앞을 수도 없이 지나갔지만 막상

경복궁 내부를 들어간 건 몇 번 없었다. 아마도 문민정부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헐어 버린 후 한 두번 정도 들어갔었던 거 같다. 그러니까 내 평생

전부해야 몇 차례 방문한 것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허기사 일반인들이 경복궁을

자주 가 봐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이번에 자세히 보니 광화문을 넘어 들어가면 한참을 걸어야 흥례문에

다다르게 된다. 아마도 예전 총독부 건물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흥례문을 부수고 근정전까지 그 사이에 지어졌던 거 같다.

 

흥례문은 최근래에 증축된 것 치고는 정말 준수한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었다. 참으로 단아하고 멋지다

 

禮를 부흥시킨다는 의미 아닐까?(興禮) 남대문의 현판이 崇禮門 인걸 생각하면

조선의 건국이념은 첫째도 둘째도 禮 에 둔 건 분명해 보인다. 원래는 弘禮門

이었는데 고종 때 중건하면서 흥례문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누각의 추녀선이 목조인가? 시멘트인가?

나무라 하기엔 너무 결이 곱고 시멘트라 하기엔 너무 섬세하다

한때 시멘트로 광화문을 중수한 적이 있다 보니 헷갈리기도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목조가 분명하다

 

이른 아침 광화문 앞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앞 광장이

또다시 공사 중이긴 했지만 광화문 안쪽에서 서울 시내 1번지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해태상을 자세히 또한 들여다본다. 도대체 광화문 앞 저곳은

왜?허구한 날 뜯었다 고쳤다를 반복할까? 속된 말로 지랄도 풍년이란 말이

떠 오른다. 한번 손을 대었으면 백 년 정도는 가만히 좀 두어라!

이 사람들아 !

 

이 해태상은 조선 제작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걸까?

 

아주 잠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재빨리 궁 입구를 돌아보다 보니

9시 티켓을 발매하기 시작했고 거의 첫 번째로 내부에 입장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예기치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생과방은

10시부터 입장이 되는데 일일이 한 팀씩 안내를 해 들어가는 통에 우리

예약 번호가 11번이었지만 엄청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경복궁 입장 시간까지 1시간 여, 또 생과방 입장을 위해 다시 1시간 반을

줄곧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도합 2시간 반이다

 

사실 이 내용을 미리 좀 알았더라면 경복궁 내부를 조금 더 둘러볼 수도 있

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갖겠지만

조선왕들이 드셨다는 과자류 보다는 경복궁 자체에 나는 의미를 더 두다 보

니 막상 생과방에 입장해서는 불과 5-10분 만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여를 두고 충분히 느릿느릿 그 맛과 시간을 음미하라고 했지만~

 

 

혹시 생과방을 무슨 특별한 뭘 체험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나는 말릴

생각이다. 입장과 티켓 예약에 너무 과도한 시간이 소모된다는 걸 꼭 인지

하시길~ 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한 마디로 시간 대비 효용이 정말

꽝이라 말하고 싶다

 

 

그나마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에 혼자 잠시 이리저리 궁 내부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유난히 뜨락엔 살구나무가 많았다. 뒤쪽 후원쯤에는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시골 살던 추억이 있는 분들은 이 살구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요즘엔 살구 맛이 거의

없어졌다는 걸 잘 알지만 노랗게 익은 살구를 보면 추억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느낌이다. 풀숲에 떨어진 살구를 열심히 찾아본다

 

자경전과 바로 옆에 청연루가 우아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1888년 중건된 대비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연침(燕寢)-- 한가롭게 거처하는 곳

 

그리고 淸讌樓(청연루) 글자 뜻은 맑은 잔치를 여는 누각 이라는데 여름철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 만든 곳이라 한다

 

 

 

근정전 뒤쪽으로 있는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로 사용되었는데

수차례 불이 나 전소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역시 불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의 부 재료로 헐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지붕 위

용마루가 지나는 곳 처리가 여늬 건물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전각들은 왜 그리 자주 불이 난 걸까? 물론 왜란, 동란 등 전쟁이 원인이

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너무 자주 불에 타 버렸으니 말이다

 

교태전의 측면 모습-- 매우 화려하다

 

그리고 교태전 뒤 후원의 아미산~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가져다 후원의 뒷 산을 만든 것이라

하는데,

 

 

얼핏 보아도 눈에 확 뜨이는 단아한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굴뚝들은 최초 만들어진 원형일까?

아무래도 근래에 다시 쌓아 올린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굴뚝 치고는 대단히 화려한 치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굴뚝에

이런 공을 들인 나라가 또 있을까?

 

 

한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생과방을 들어갔다.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릴 줄 알았으면 궁 내부로 더 들어가 나머지 궐들을 충분히 보는

건데 정말 아쉽다. 이번에 못 본 부분은 교태전 바로 옆인 경회루 쪽과

윗부분의 향원정인데(물론 그 외 부속 건물들이 아주 많지만) 계절적으로

썩 그리 경관이 좋은 시기는 아니어서 가을 정도나 꽃피는 봄쯤을

다시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경복궁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긴 하나 궁 전체를 다 들여다

보려면 하루 온종일을 봐도 부족하리만큼 상당히 범위가 넓은 곳이다.

 

아마도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과방을 온 것도 처음이지만, 입장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 지금부터 대략 몇 십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니 그 사이에

궁을 충분히 관람하고 오세요~ "

 

이런 멘트는 좀 해줄 수 없는 걸까? 허기사 여기 근무하는 이들은

공무원 아닌가? 기대할걸 기대해야지!~ 쯧!

 

 

참새 목욕하듯 생과방을 마치고 나오니 여늬 오동나무 꽃 과는 다른

흰 오동꽃이 이렇게 만발을 하였다. 이날 껏 보라색 꽃만 보아 왔는데

이건 특별한 종자일까?

 

 

 

인근 청수정 돌솥밥 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길가엔

백합 등 꽃들이 많았고 매우 정돈된 느낌을 주는 동네였다

거리에 한복을 입은 청년들! 백합이 피어 있고 이 동네 특유의

회화나무가 상당히 많이 보였다. 서울 전체가 이 정도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매우 좋을 텐데! 희망 사항이지만~

 

보통 일반 동네에서 이 정도의 꽃을 보기는 쉽지 않다

지역 주민들의 웬만한 정성이 없으면 불가한 일이다. 하지만

이날 한낮의 더위가 엄청 심하여 이런 꽃들을 제대로 감상

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부근 동네엔 잘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의 집터가 많다.

끝으로 길가에서 발견한 예쁜 꽃 한 무리를 올리며 무더웠던

휴일의 경복궁 방문기를 마친다. 비록 충분치는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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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산채를 풍성히 먹어 볼 시기이다

 

몇 년 전에는 양평 용문산 입구로 산채를 먹으러 몇 번 갔었다

헌데 휴일 그 일대가 교통 요지경이 된지는 오래다. 저녁 시간에

이쪽 서울 근교로 돌아올라치면 어마 무시한 교통 체증을 각오

해야 한다

 

그러니 양평 쪽은 생각을 접어야 했고 그 대체 후보지를 물색하다

보니 진천 쪽을 택하게 되었다. 더구나 유튜브에 산나물 등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산채 정식집이 마침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 탄생 유적지 인근인 그곳에 약속 시간을 잡고 마침 대전에

사는 집사람 여 동창 부부와 만나기로 했다. 집에서 한 시간 여! 대전에서도

비슷한 시간이 걸린단다.

 

안성 고삼을 지나 입장을 끼고 서운산을 돌아 올라간다. 예전에 산삼을

캤다는 서운산은 푸르고 청청했다. 이 산을 넘어가면 히든밸리라는 골프

장이 그야말로 숲 속에 감춰져 있는 곳이다.

 

히든밸리를 지나면 앞서 안성 땅과 확연히 달라지는 충청도 땅이 느껴

진다. 산속 골은 깊고 숲은 울창하다. 인적은 드물고 집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백곡 저수지 3거리에서 천안 쪽으로 한참을 돌아 나가면 유명한 사찰인

보탑사 삼거리가 나온다. 보련산 중턱에 자리 잡은 보탑사는 전에도 두어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절터에 비구님 스님 3분이 1996년도

에 대목수 신영훈이 참여하여 창건한 사찰이라 하니 연혁은 비교적 짧은

편이지만, 그 풍모가 상당히 고풍스럽게 느껴진다.

 

김유신이 어찌하여 이 동네에서 태어나셨을까? 처음엔 매우 의아했으나

몇 번 와 보니 과연 충분히 그럴만한 곳이라고 생각이 된다. 인근 만뢰산

보련산 등의 산세는 깊고도 수려하다. 말하자면 충청의 오지 중의

오지라 할까?

 

"산골 맛집"의 산채밥을 넷이서 주문해 먹고 동동주도 한 사발 시켰다.

진천의 막걸리가 참으로 맛이 좋은데 그건 판매를 하지 않는단다. 그 좋은

자기 고장의 명물 막걸리를 외면하다니~ 마진의 문제일까?

 

동동주 한 잔에 기진맥진하여 나머지는 페트병에 넣어 달라해서 대전

사모님께서 챙겨 가져 갔다. 한 달 전쯤 제천의 한약 밥을 워낙 감명 깊게

먹은 터라 이제 웬만한 산채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깔끔하고도 수준급

이었지만 말이다

 

보탑사로 올라가니 때 마침 초여름 꽃들이 지천이다.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

하셔서 그런지 정말 꽃들이 다양하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큰 물통에 사찰 중

간쯤에서 콸콸 솟아 나오는 약수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사찰 주변에 흐드러

지게 핀 여름 꽃들을 분주히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와서 그런가

사찰 풍광은 둘째고 아름다운 주변 꽃만 보인다

 

 

요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다

 

그러나 산사에서 보는 꽃은 조금 느낌이 다르다

 

꽤나 많은 참배객들,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보탑사이다

예전엔 사찰 정문 앞쪽으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메꾸고 주차장 공간으로 만든 것 같다

 

혹시나 때 이른 연꽃이나 혹은 좀 일찍 피는 수련을 기대했는데

살짝 아니 꽤나 아쉬움이 남는다

 

 

소나무에 기댄 붓꽃!

 

"그래 내가 너의 쉴 기둥이 되어줄게~" 소나무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정말 본 적이 없는 디기탈리스가 요즘은

매우 흔하다. 강심제로 쓰이는 디기탈리스,, 그러고 보니 꽃 모양이

염통을 조금 닮은 거 같다

 

 

삼층 목조 건물의 맨 윗 단부터 이런 현판이,

대자보전, 수다라전 , 극락보전

 

 

 

 

 

 

도대체 절에 와서 꽃만 찍는 이유가 뭐요?

그렇게 물어볼 사람도 없겠지만~

 

그거야 뭐~ 글쎄 말입니다!

 

 

사찰 뒤편에 자리 잡은 이 방, 삼 소실~ 스님들의 수행 공간

이라는데, 대체 뭘 3번 웃는다는 의미일까?

 

 

20 L 물통을 끌고 옆 길로 겨우 내려오다 보니 이렇게 삼층 목조 건물의

모습을 담게 되었는데, 못 하나 쓰지 않은 전통 기법으로 축조하여 가히

1,000년은 굳건히 버틸 걸로 지은이는 장담을 했다는데~

 

허긴 천 년이 아니라 2천 년도 버틸 수 있을게다! 사찰 건물이

대체로 불이 나서 사라졌지 오래돼서 쓰러졌단 얘긴 들어 본 적이

없으니께~

 

 

 

인근 만뢰산 자연휴양림으로 가기 위해 보탑사를 떠나 밑으로 내려

가다가 커피숍을 발견 찾아들었다

 

시원한 냉커피 한 잔을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니 산나물로 씔 여러 풀

들과 뱀딸기가 수북이 자라고 있었고 뽕나무에는 검게 뽕이 익어가는

중이었다. 노랑붓꽃이 예쁘게 뒤뜰에는 피어 있었다

 

철 지난 매발톱도 이렇게~

 

 

커피숍 주인 아주머니는 눈에 보이는 산나물은 맘대로

뜯어도 좋다 했다. 아내와 친구는 한참을 돌며 여러 산나물을

뜯었다. 예전엔 미처 식용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던 풀들이 모두

산나물이란 사실도 최근 알게 되었다

 

 

비교적 꽃 모양이 온전한 한련화를 만뢰산 자연 휴양림에서

발견했다. 한련화는 왜? 꽃 모양이 온전한 게 그리 없을까?

 

 

 

위 사진은 이름을 모르겠고 아래는 꿀풀로 알고 있었는데

'숙근 사루비아' 란다

 

 

 

자연휴양림이 전국 곳곳에 분포되어 있지만 사실 이곳

만뢰산 중턱에 자리 잡은 건 좀 의외다. 주변으로부터 접근성

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과연 이런곳을 누가 찾아올까 싶었지만

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숲 속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와서 산채밥을 맛있게 먹고 인근 휴양림

에서 나머지 시간을 온종일 맑고 깨끗한 바람을 쐬며 쉰다!

 

그것도 하나의 좋은 힐링의 방편은 될 것이다. 나무 그늘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한숨 늘어지게 잔다 해서 뭐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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