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정으로 월정사를 기획한 건 순전히 아내였다.

새벽 일찍 출발해서 아침 식사는 용평 횡계리 황태회관에서

해장국을 먹고, 월정사를 들렀다,한국 자생식물원을 보고

근처에서 산채밥을 먹고 등등 ~

 

그렇게 딸과의 추억 하나 더 쌓기 여행이

시작되었다.

 

'황태회관'은 용평에서도 제일 유명한 식당이다. 거긴 내 친구의 초등

여동창이 오래전부터 터를 잡은 곳이라는데, 역시나 아침 시간임에도

손님이 꽤나 많았다. 코로나 시국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업이다.

 

그러나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엄청 추웠다. 원체 우리 동네가 아직

더위가 심한지라 깜빡 용평의 기온을 생각을 못한 거다. 아! 겉옷을

하나 챙겨 오는 건데~ 아내는 근처 어디서 얇은 잠바를 하나 사자고

했지만, 밥을 먹고 나오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역시 친구가 운영하는 대단위 펜션 ' 르꼼떼 블루'

를 잠시 차량으로 휙 둘러 보았다. 용평에서 30여 채가 넘는 2층 단독

주택형 펜션은 아마도 거의 없지 싶다. 물론 친구는 유명 건설 업체를

운영하니 이건 순전히 부업겸 휴식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월정사는 입구부터 차가 꽉 밀린다. 입장료 징수 때문에

그런 것인데, 차 1대당 운전자 포함 1 만원을 받으니 3인이면 2만 원을

내야 한다. 나는 경로 우대로 면제를 받았다. 근데 여타 국공립 공원에

비해 좀 비싸지 않나?

 

허긴 입장료로 경내 시설물 관리도 잘하면 좋을 것이다.

재작년 나가사키의 하우스 텐보스를 가 보니 1인당 입장료가 대략

8만 원쯤 했다. 4인 가족이면 30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야 했다. 그에

비하면 아직 매우 저렴, 고마운 일이다.

 

이번에 좀 자세히 보니 월정사는 그리 큰 사찰이 아니었다. 주변 상원사

등을 제외한 월정사 경내 자체는 매우 협소한 편이다. 이 날 방문객은

엄청 많았다.

 

 

 

우선 기와 선이 멋져 몇 장 찍어 본다. 적광전 뒤의 소나무 숲도

매우 출중하다. 딸도 그걸 얘기했다.

 

"저 너머 숲이 아주 멋지다고~"

 

 

9층 8각석탑을 정면에서 본 적광전 모습이다.

 

석탑 앞에 저렇게 구도하는 석상이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우린 위쪽 지장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은 위쪽으로

계곡을 넘어 다리를 건너 숲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간

것인데,

 

지장암 입구에 걸려있는 글씨!

 

그렇지~ 세상에 태어나 뭔가 기여한 삶을 살고 있나?

 

 

지장암 올라가는 오솔길을 걷는데 갑자기 다람쥐가 나타났다.

이 녀석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손짓을 하면 곧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다람쥐도 깊은 사찰 안에 살면 도를 깨우쳐서 일까?

 

한 부부가 지장암 숲길을 걸어 들어가고 있다

 

지장암을 돌아보고 나가는 아내와 딸~

 

역시 지장암으로 올라가는 스님 일행

 

 

 

우리 각자의 삶은 그 걸음 스타일 만큼이나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쪽 상원사는 너무 멀어 아예 처음부터 예정에 없었고 다시

월정사 경내로 내려왔다

 

찻집 근처에 이르자 호랑나비가~

 

 

전나무 숲을 걷는데 역시나 다람쥐가 또 가까이 다가온다

아이들은 손에 해바라기 씨를 몇 개 들고 열심히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다람쥐가 도를 깨우쳐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이나 다람쥐나 먹을것 앞에 약해 지기는 매 한 가지인 듯싶다

道는 무슨! 그러면 그렇지~

 

그러나 깊은 산중의 다람쥐는 도회지 근처 숲의 다람쥐에 비해

매우 순수해 보였다

 

 

이날 전나무 숲은 인파가 빼곡했다. 사실 이런 곳은

이른 새벽에 호젓이 맨발로 혼자 걸어야 제맛이다

 

 

 

 

전나무 숲길을 되돌아 올라가니 월정사 입구에 정말

수려한 소나무가 보인다. 속리산 정 이품 소나무와 체형이

비슷해 보인다.

 

 

둔내 부근부터 쭈욱 보아 온 거지만 정말 강원도엔 소나무가

쭉쭉 빵빵 참으로 빼곡하고 멋있다. 올핸 병충해도 그다지 없는 것

같아 푸르디푸르다. 월정사 주변은 말할 것도 없이 더 멋지다

 

강원도는 우리 국토의 보배 중의 보배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좋은 곳에 소나무 향이 그윽한 이런 곳에 왜? 사람들이 와서

더 많이 살지 않을까?

 

옆에서 딸이 한마디 거든다

 

" 산수만 좋으면 뭐해요~ 먹고 살 뭐가 있어야지요~ "

 

그렇지! 결론은 먹고 사는 거지~

 

 

 

 

' 산들 산채' 식당으로 찾아 들어 우선 도토리묵과 감자전을

주문한 다음 산채밥 2인 분을 해서 3명이 나눠 먹었는데, 이 동네는

온통 홍당무 천지 답게 도토리 묵에 양념으로 섞여 나온 홍당무가

아주 맛이 신선하고 좋았다

 

 

한국 자생 식물원은 딸아이가 중학 시절쯤 왔던 곳인데, 그 사이에

불이 한번 났다 하고 이제 겨우 정비해서 일반에 공개 중이었다

 

 

이런 팻말을 찍어 두긴 하지만 사실 식물원에서

생소하게 처음 본 꽃들은 여간해서는 기억하기

쉽지 않다

 

눈에 좀 띄는 꽃은 이런 것들입니다

 

용담이 이런 꽃인지도 처음이다. 학교 때 학명 외운다고

애쓰던 기억도 나고! Gentiana scabra라고~

[용담 사간탕]이라고 소변에 열이 차고 잘 안 나올 때 또는

염증이 있을 때 사용하는 君약이다!

 

이 꽃 역시 매우 흔하고 눈에 자주 띄는데 ~

 

 

식물원은 나름 꽤 넓어 한참을 둘러봐야 하고

본 건물에는 많은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 차나 커피 등을

구입해 마실 수 있는 쉴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자~ 이제 다음은 무얼 하지? 아내가 계획한 건 여기 까지였다

 

어차피 천천히 올라가기로 하고 왔으니 아예 저녁까지 해결하고

가자~ 그러려면 올라가는 길에 봉평은 어때? 해서 이효석 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 ^ ^

 

봉평 가는 국도 변도 풍광이 좋기는 매한가지~! 소나무는 여전히

울창했고 국도도 너무 포장이 잘되어 있었다!

 

 

일단 효석 문학공원을 간다. 두어차례 와 봤지만 그때도 주마 간산 격

으로 대충 훑어 본 지라 이번엔 찬찬히 둘러 보자고 다짐을 한다.

 

 

 

1907년 출생의 이효석은 평창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추천으로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 ( 현 경기고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영문과를 졸업한 사실 당대의 수재라 할만한 사람입니다. 인텔리 중의

인텔리로 졸업 후 잠시 총독부에 근무했다가 사직하고 평양의 숭실고 보

경성전문대학의 교수로 재직을 합니다

 

그의 화려한 학교 이력을 굳이 올리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즉 수재형 인간이 동시에 서정성이 풍부한 글을 쓴다는 게 현실적

으로는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뇌라는 게 동시 다발적으로

양면에 걸쳐 능하기는 쉽지 않은 까닭인데, 이효석은 그것이 가능한

조금은 특별한 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효석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건 그가 너무

일찍 요절을 해서 입니다. 불과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더구나 33세인 1940년에 부인을 복막염으로 잃고 또한 둘째 아들

마저 동시에 잃었고 불과 2년 후 그 자신마저 결핵성 뇌막염으로 돌아

가셨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그리 빨리 세상을 따나신거요?

 

 

문학관을 후세에 이리 멋지게 남긴 건 아무리 봐도

잘된 것 같았습니다. 공기 좋고 평화가 넘치는 이곳에서

될수록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래 생가 복원터로 내려갔는데, 아내와 딸은 피로하다고

근처에서 쉬고 저 혼자 올라갑니다. ㅎ

 

첫눈에 띈 이 생가는 그러나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런 세트장 같은 생가 보다 될수록 옛날 맛이 나는 초가집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는 건지?

 

지붕의 모양하고 전체적으로 이 집은 좀 다르게 다시 만들어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 집이 평양에 거주할 때 사셨던 벽돌집 이랍니다.

 

 

'찰나를 영원으로기록한 것이 사진'이라고 제가 늘 생각하는 건데

여기 그 비슷한 문구가 있군요~ ㅎㅎ

 

이 집에서 단란한 생활을 하셨고 메밀꽃 필 무렵도 집필하셨다네요~

담쟁이가 무성한 이 벽돌집은 그나마 옛날 느낌이 좀 납니다

 

그런데 자료를 좀 찾아보니 이효석은 단편 문학에서는 발군의 서정성을

발휘한 반면 장편소설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는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철저히 짧은 단편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효석이 한국 서정 문학의 거두로 올라온 이면에는 경성 제일

고보 동창인 유진오 박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내용도 있네요.

 

 

 

한편 이효석은 매우 토속적인 글을 저술한 반면 그 자신은 버터에 빵에

커피를 즐기고 서양 음악,영화에 심취했으며 말하자면 서구 생활을 무척

동경한 면이 있다 합니다.

 

글쎄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 순전히 개인의 사생활이니

후세에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 봅니다만,

 

 

생가 입구 멀찍이 피어있는 한쌍의 해바라기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군요! 혹시 이효석의 내면도 이와 비슷하지는 않았을지,,

어쩌면 우리 대부분도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나요?

 

 

그러나 문학관과 생가터 그리고 평양에 있었다는 벽돌집을

보고 내려오는 내내 아무튼 제 마음은 무척 안타까운 부분이

컷고 반면 봉평과 강원도에 대한 애착은 좀더 깊어가고 있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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