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천년의 침묵외 30곡
일요일 아침 7 시대 승용차로 용인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난생처음 이런 확 뚫린 서울 도심길을
달려 본다. 불과 40여 분만에 40여 키로의 서울길을 주파
하다니!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네 그려!
그러나 일찍 도착한 경복궁은 9시부터 입장 티켓을 발매했다.
그 사이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광화문 누각 앞 뒤를 배회했다
경복궁이 무엔가?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라 한다
서울, 아니 서울 근처에 살면서 경복궁 한 번쯤 가 보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다들 "아~ 거기" 이렇게 말할게 틀림없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이는 드물듯한 경복궁!
사실 나 자신도 언제 거길 가 봤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최초의 경복궁 방문은 1968년이다. 당시는 희고 우뚝한 석조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을 때였다. 그걸 중앙청이라
불렀다. 중학교 때 광주의 모 육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덕에
( 당시 시골 중학교가 무얼 어찌해서 군 부대와 자매결연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 부대의 군용 차량으로 몇몇 학생들이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부대와 가까운 남한산성에 올라 서울 전경도 보았고 서울서 제일
높은 건물이라는 중앙일보 사옥 23층을 목이 젖혀지도록 올려 보았고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내부를 들어가서 위아래로 답사를 한 것은 물론
남산 순환도로에서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던 배우
김지미 씨를 보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로 왔고 광화문 중앙청 앞을 수도 없이 지나갔지만 막상
경복궁 내부를 들어간 건 몇 번 없었다. 아마도 문민정부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헐어 버린 후 한 두번 정도 들어갔었던 거 같다. 그러니까 내 평생
전부해야 몇 차례 방문한 것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허기사 일반인들이 경복궁을
자주 가 봐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이번에 자세히 보니 광화문을 넘어 들어가면 한참을 걸어야 흥례문에
다다르게 된다. 아마도 예전 총독부 건물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흥례문을 부수고 근정전까지 그 사이에 지어졌던 거 같다.
흥례문은 최근래에 증축된 것 치고는 정말 준수한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었다. 참으로 단아하고 멋지다
禮를 부흥시킨다는 의미 아닐까?(興禮) 남대문의 현판이 崇禮門 인걸 생각하면
조선의 건국이념은 첫째도 둘째도 禮 에 둔 건 분명해 보인다. 원래는 弘禮門
이었는데 고종 때 중건하면서 흥례문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누각의 추녀선이 목조인가? 시멘트인가?
나무라 하기엔 너무 결이 곱고 시멘트라 하기엔 너무 섬세하다
한때 시멘트로 광화문을 중수한 적이 있다 보니 헷갈리기도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목조가 분명하다
이른 아침 광화문 앞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앞 광장이
또다시 공사 중이긴 했지만 광화문 안쪽에서 서울 시내 1번지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해태상을 자세히 또한 들여다본다. 도대체 광화문 앞 저곳은
왜?허구한 날 뜯었다 고쳤다를 반복할까? 속된 말로 지랄도 풍년이란 말이
떠 오른다. 한번 손을 대었으면 백 년 정도는 가만히 좀 두어라!
이 사람들아 !
이 해태상은 조선 제작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걸까?
아주 잠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재빨리 궁 입구를 돌아보다 보니
9시 티켓을 발매하기 시작했고 거의 첫 번째로 내부에 입장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예기치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생과방은
10시부터 입장이 되는데 일일이 한 팀씩 안내를 해 들어가는 통에 우리
예약 번호가 11번이었지만 엄청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경복궁 입장 시간까지 1시간 여, 또 생과방 입장을 위해 다시 1시간 반을
줄곧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도합 2시간 반이다
사실 이 내용을 미리 좀 알았더라면 경복궁 내부를 조금 더 둘러볼 수도 있
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갖겠지만
조선왕들이 드셨다는 과자류 보다는 경복궁 자체에 나는 의미를 더 두다 보
니 막상 생과방에 입장해서는 불과 5-10분 만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여를 두고 충분히 느릿느릿 그 맛과 시간을 음미하라고 했지만~
혹시 생과방을 무슨 특별한 뭘 체험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나는 말릴
생각이다. 입장과 티켓 예약에 너무 과도한 시간이 소모된다는 걸 꼭 인지
하시길~ 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한 마디로 시간 대비 효용이 정말
꽝이라 말하고 싶다
그나마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에 혼자 잠시 이리저리 궁 내부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유난히 뜨락엔 살구나무가 많았다. 뒤쪽 후원쯤에는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시골 살던 추억이 있는 분들은 이 살구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요즘엔 살구 맛이 거의
없어졌다는 걸 잘 알지만 노랗게 익은 살구를 보면 추억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느낌이다. 풀숲에 떨어진 살구를 열심히 찾아본다
자경전과 바로 옆에 청연루가 우아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1888년 중건된 대비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연침(燕寢)-- 한가롭게 거처하는 곳
그리고 淸讌樓(청연루) 글자 뜻은 맑은 잔치를 여는 누각 이라는데 여름철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 만든 곳이라 한다
근정전 뒤쪽으로 있는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로 사용되었는데
수차례 불이 나 전소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역시 불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의 부 재료로 헐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지붕 위
용마루가 지나는 곳 처리가 여늬 건물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전각들은 왜 그리 자주 불이 난 걸까? 물론 왜란, 동란 등 전쟁이 원인이
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너무 자주 불에 타 버렸으니 말이다
교태전의 측면 모습-- 매우 화려하다
그리고 교태전 뒤 후원의 아미산~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가져다 후원의 뒷 산을 만든 것이라
하는데,
얼핏 보아도 눈에 확 뜨이는 단아한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굴뚝들은 최초 만들어진 원형일까?
아무래도 근래에 다시 쌓아 올린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굴뚝 치고는 대단히 화려한 치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굴뚝에
이런 공을 들인 나라가 또 있을까?
한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생과방을 들어갔다.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릴 줄 알았으면 궁 내부로 더 들어가 나머지 궐들을 충분히 보는
건데 정말 아쉽다. 이번에 못 본 부분은 교태전 바로 옆인 경회루 쪽과
윗부분의 향원정인데(물론 그 외 부속 건물들이 아주 많지만) 계절적으로
썩 그리 경관이 좋은 시기는 아니어서 가을 정도나 꽃피는 봄쯤을
다시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경복궁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긴 하나 궁 전체를 다 들여다
보려면 하루 온종일을 봐도 부족하리만큼 상당히 범위가 넓은 곳이다.
아마도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과방을 온 것도 처음이지만, 입장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 지금부터 대략 몇 십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니 그 사이에
궁을 충분히 관람하고 오세요~ "
이런 멘트는 좀 해줄 수 없는 걸까? 허기사 여기 근무하는 이들은
공무원 아닌가? 기대할걸 기대해야지!~ 쯧!
참새 목욕하듯 생과방을 마치고 나오니 여늬 오동나무 꽃 과는 다른
흰 오동꽃이 이렇게 만발을 하였다. 이날 껏 보라색 꽃만 보아 왔는데
이건 특별한 종자일까?
인근 청수정 돌솥밥 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길가엔
백합 등 꽃들이 많았고 매우 정돈된 느낌을 주는 동네였다
거리에 한복을 입은 청년들! 백합이 피어 있고 이 동네 특유의
회화나무가 상당히 많이 보였다. 서울 전체가 이 정도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매우 좋을 텐데! 희망 사항이지만~
보통 일반 동네에서 이 정도의 꽃을 보기는 쉽지 않다
지역 주민들의 웬만한 정성이 없으면 불가한 일이다. 하지만
이날 한낮의 더위가 엄청 심하여 이런 꽃들을 제대로 감상
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부근 동네엔 잘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의 집터가 많다.
끝으로 길가에서 발견한 예쁜 꽃 한 무리를 올리며 무더웠던
휴일의 경복궁 방문기를 마친다. 비록 충분치는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