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고모령 / 춘강 마로니에  

 

 

 

엄마에 대한 기억~

 

그 희미한 몇가지나마  마치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걸 겨우

가느다란 실 하나로 잡아 당기듯 그렇게 더 늦기 전에 기억 속에

매달아 놓는 중이다. 

 

 

울 엄마는 생전 큰 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왜냐면 나에게 뭘 야단을 치신 적도, 지적을 하신 적도, 명령을 내린

적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한 시간은 고작 12년~

그 중에도 내가 세상을 인식한 때를 5살로 본다면  대략 7년 여에 불과하다. 

 

청미천(안성 일죽면에 있음) 큰 개울 밭!  그 밭에서 여름 뙤약볕에

김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린 내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잠시

나를 업어서 가시곤 하던 것과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쓰고 일하시던 것이

어렴풋 기억 난다.

 

' 앞산 노을 질때까지 호미 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며 흙에 살던

어머니~ ' 

 

딱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겨울이면 대개의 또래 친구들의 엄마는 집에서 겨울을 나시는데 반해

울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인근 동네로 장사를 나가시어 저녁 늦게나

돌아 오시던 것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쌓여도 엄마는 매일 장사를

나가셨다. 집에서 30여 리의 길을 그렇게 오고 가셨다.

당시엔 어린 나로서는 그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우리 엄마는 이 추운 날에도 집에 없는 거야? "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는,

 

" 오늘은 가리울 누구네 집에서 점심을 한 술 떴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는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가 힘든 때였는데,

점심 한술 얻어 먹는다는 것이 그리 녹록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눈치가 보였을까? 순박했던 시골이니 가능한 것이었을 터, 

가리울은 장호원 근처 방추리 옆에 있는 작은 동네로 우리 집에서는 30리도

더 되는 꽤나 먼 곳이었다. 

 

그렇게 한 겨울 내내 인근 마을 사방 삼십여 리를 돌며 장사를 하시고 몇 푼 돈을

버셨던 거다.

 

194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엄마 사진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대략 194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먼저 일본에 가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머리에 꽃을 꽂아 표식을 하여 상봉을

하셨다는 엄마! 

 

오사카에서 형님과 큰 누님을 낳으시고 그런대로 사시다가 해방이 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건데, 아버지의 누님 즉 엄마에게는 시누이가 될 터이고

나에게는 고모가 사시는 합천 덕곡면 옆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정터,

라는 동네~

 

그 동네로 다시 오신 거다. 사실 그 곳은 엄마가 태어나 살던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인근 합천이었다. 

 

그 고모가 사는 집이라고 여유가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6개월을

버티시다 보따리를 싸서 흘러 흘러 오신게 지금의 안성 일죽이다. 기왕 고향을

떠나는 거  왜? 서울로 그냥 가시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다시 정착을 하신

건지는 이제 풀 길 없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당시의 철도는 서울로 쭈욱 이어지는 경부선이 있었고 평택에서 갈라져

안성을 거쳐 장호원, 여주로 가는 지선이 있었다. 

 

오사카도 그렇고 안성 일죽도 그렇고 어차피 산 설고 물 설고 아는 이 없는

타향이다. 내가 태어난 일죽은 나에겐 고향이지만 엄마 아버지에겐 시리기만

한  타향일 뿐이다.

 

'타향살이'  노래를 부를 땐 항상 울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향인 일죽을 떠나 떠나 50년 이상 살고 있는 타향은 타향이라 할 것도 없다.

자동차로 30-40분 이면 닫는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특별히 어떤 노래를 부르신 걸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

가지다. 당시 시골에서는 노래를 부를 일도 없었고 아무데서나 노래를 흥얼

거릴 그런 형국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이 고될 때 불렀다는 농요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며 살 만큼 당시 삶에 흥이 있었을까? 집집마다 라디오는 커녕

좀 사는 집에는 축음기가 있긴 했지만 우리 집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확실한 기억!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음력 4월 초나흘 밤이다. 그 며칠 전 나는 우리집 뒤

작은 동산 너머의 풀숲에서 마침 뜸부기가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걸 발견

했었다. 오랜 투병에 쇄약 해질 대로 쇄약 해져 경각에 달한 엄마는 내가 말하는

뜸부기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 그 뜸부기 좀 잡아 오너라~ " 하셨다.

 

초승달이 실 눈썹처럼 희미하게 비추던 그 밤에 나는 누님(당시 17세)과 함께

큰 광주리를 들고 컴컴한 뒷동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덤이 몇개 있어 밤에는

혼자는 무서워서 가기 힘든 곳이었다. 낮에 봐 두었던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억새풀

둥지를 가늠하여 광주리를 덮쳤다.

 

뜸부기는 알을 품고 있다 광주리와 뜸부기 집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조그마한 중닭 정도의 뜸부기를 손질하여 누이는 밤새 불을 때서 솥에 넣고 푹~고았다.

야생 뜸부기는 살이 질겨 웬만큼 고아서는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엄마는 뜸부기 국물을 한 모금 겨우 드셨을 뿐이다. 더 이상

살코기도 드시지 못했다. 

겨우 누워 계시는 엄마를 뒤로한채 나는 학교를 갔고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학교를 마쳤다. 학교문을 나서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날 찾았다. 

 

최대한 빨리 나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오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엄마가 그 사이 돌아가셨다는 걸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약 2km 남짓 되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 좌우로는 모내기가

한창 이었다.

간간이 제비가 날고 봄날의 따스한 열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 아! 이제 엄마와 이별인가? '

 

그러나 특별한 슬픔이나 애절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딱 1년 전 이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연이어 닥치는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였을까?

 

뜸부기 사건은 나와  엄마의 마지막  이생에서의 인연이었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었고 열 세살,열 일곱살 두 남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눈 감으면 고~ 오 향  눈 뜨면 타향~ "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안 하게 떠 오르는 고향! 고향의 골목, 나무, 우물가, 짚 앞

저 멀리 먼지가 뽀얗게 나던 신작로~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  

아무리 고향을 최근에 다녀와도 뒤돌아 서면 방금 본 변한 풍경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그 옛날 정경만 기억나는 참으로 이상한 그런 경험이 아마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니 천리 타향, 만리 이국에 가서 산들 어찌 어릴적 내 고향을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곳이 뻐젓이 좋은 곳이던 어디 내놓을 그런 곳이 못 되던 그건 중요하지 않

다. 내노라하는 인물이 나왔건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고향은 고향일 뿐이다

 

엄마는 마치 후광처럼 은은하게 내 기억을 감싸고 있다.  마치 어떤 풍경화의 뒷

배경처럼, 연주회의 배경 음악 같이~  

 

엄마와 고향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찬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 모틍이를 돌아 하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시던

엄마가 너무나 그립다^* 

 

그때가 나에게는 무한 행복의 시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항상 거기 계시는 그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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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0년도 초반 , 정확히는 72년 73년 그 즈음이다.

 

가까스로 대학은 갔지만, 그 넘의 학비가 자나 깨나 걱정이어서 

어떻게 하면 학비를 벌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한 학기 등록금은 4만 원 정도

였고 한 달 과외비는 대략 2만원 이었으니 잘만 하면 학비는 충분

하고 용돈까지 되고도 남는 괜찮은 장사였다. 

 

실제로 과외비 벌어서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세고비아 통기타를

종로 2가에 가서 덜컥 사기도 했으니까~ 

 

당시는 유신 반대 데모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해서 하루도

캠퍼스가 평화로운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학비 걱정으로

나날을 지새우는 처지에 무슨 데모인들 눈에 들어올까? 

거 뭐 데모도 다 먹고살만하니 하는 거지~  흠! 

 

일간지 광고란에 엄지 손톱만한 크기로 '과외' 광고를 특별히 싼 값에 

낼 수가 있었다. '과외, 전화번호, 어느 학교 '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돈 없는 학생이라고 특별히 봐준 것이다. 그때 돈으로 한 천원 정도지

싶다. 

요즘처럼 다른 일거리를 해 볼 수도 없었고 오직 과외 외에는 학비 충당

의 기회가 전무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어이쿠 이게 웬 떡이냐~~ 

 

나는 보문동인가 하여튼 어느 허름한 다방 약속 장소로 학교 마치고 

부랴부랴 나갔다. 테이블에는 중년의 잠바 차림의 수수한 분이 앉아

있었다. 통상 학교 어쩌고 등의 소개가 끝나자,

 

" 우리는, 아니 나는 공화당의 자제들 모임인 ' 송아지 회' 란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요! 그런데 당신의 할 일이란 게 공부를 가르치는 그런

게 아니고 안성에 가면 안법 고등학교가 있지. 거기 가서 학교 선생들이

어떻게 수업을 잘하고 있는지, 거 뭐 어려울 것도 없소. 수업할 때 복도에서

슬쩍 한번 들으면 대충 파악이 가능할 거 아니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또 학교 분위기나 운영 사정 같은 것도 좀 봐 가면서~  

그런 거 슬슬  관찰해주면 되는 거요! "

 

" 아니 과외 때문에 저를 보잔거 아니었나요? " 

 

" 그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것도 공부에 관련된 일이잖소? 그리고 음 

이걸 잘 해결해 주면 말이지  까짓 학비 정도는 껌값도 안되게 될 거야~

또 송아지회에도 좀 관여 할 수 있고~ 그러니 어떻게 한번 해 볼 생각이 있소?" 

 

그러나 나는 선뜻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고 이게 대체 나 보고 뭘 하라는

소린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내가 뭘 학교에 가서 염탐꾼이 돼라

는 얘긴가?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더니 그 사람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 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1분이 지나 5분이 지나 10분이 지나 30분이 지나도

도통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아니 그 사람은 영영 자리에 안 돌아오고 말았다

하염없이 다방 구석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하다 결국 집으로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에잇 오늘도 과외는 또 허탕이군~ " 

 

나는 왠지 그가 제안했던 그것이 갑자기 매우 괜찮은 조건인 듯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냥 무조건 해 본다고 할걸 그랬나?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고~

그런데 뭔지도 모르고 덜컥 한다고 하기도 그렇잖아?

 

혹시 그 사람 어디 간첩은 아닐까? 순진한 학생들 데려다 소위 학교 내에

프락치를 심으려는 건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는 무엇을 위하여 나를 만났는지 그게 궁금하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새털 하나만큼도 모르는 쑥맥 같은 나를 보고

아예 틀렸다 하고 때려치운 건 아닌지! 

 

아마도 그 일이 진짜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분이 나 외에도 다른 학생들을 

만나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간혹 이 나이에도 이상하리 만치 특정

집단에 충성을 바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혹시 저 친구 그때 저런 일로 학비를 충당했

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뭐 이건 추측일 뿐이다 

 

그때 그 일이 결론적으로 잘 된 건지, 잘 못된 건지, 새옹지마의 고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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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를 비롯한 너무나 훌륭한 팀들이 즐비한 이번 풍류 대장을 띄엄 띄엄

어떤 週는 보다가 또 어떤 週는 빼먹기도 하며 그럭저럭 시청을 이어 갔는데,

드디어 어젯밤(12.21)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국악의 크로스오버, 순수 국악만이 아닌 팝과 블루스 재즈 발라드 등이

함께 결합된 어쩌면 세계 시장을 넘보기 위한 시도라 보이는 풍류 대장~

 

사실 그동안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캐치프레이즈로만 끝난 감이 있는 이 우리 것~  좋으면 뭐하나? 즐기지를

않고 찾지도 않고 은연중  무시하고 그저 흘러간 옛 시절의 유물 정도로만

여기던 창, 판소리 등등!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이 별 재미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춘향가,

심청가, 등 몇 가지로 소재가 한정되어 늘상 그것만 우려먹는 느낌이었다.

대중의 취향은 날로 새로움을 찾아 다양화 해 가는데, 재료는 100년 200년

전의 것 그대로를 테이블에 늘 올렸던 것은 아닐지~(국악 장르에 얼마나

많은 영역이 있는지 저 자신도 잘 모름)

 

그것을 탈피하고자 함이랄까? 그렇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송가인 조차 

저들이 그냥 국악 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런 자리로 불러내게 된

그 자체에 미안함을 표하고 있었다. 저 수많은 국악 후예들이 그 본래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은 변해가는 시대의 외면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음이리라. 

 

국악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몸부림을 쳐 왔는지는 그저 말끝마다

 

"이제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

 

로 표현된다. 얼마나 엉성한 공연 수준이면 그들이 탈의실 하나 없는 공연장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까? 그동안 우리 국악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하겠다. 

 

우리 것이 좋다는 것은 태어난 이 땅과, 물과, 하늘과, 곡식과, 그 모든 것이

애당초 우리 몸에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출발한 노래, 글, 그림,

기타 그 모든 것이 당연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잘 맞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의 것이 더 좋게 보이는 세월을 살아왔을까? 

 

국악이든 크로스오버 국악이든 그 외면의 본질은 이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 以下의 글은 저 자신의 판단입니다. 우리 것이 외면당한 이유가 이것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

 

그건 조선 500년의 모화(慕華) 사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우리보다 

큰 대국, 중국의 것은 뭐든 좋다는 생각~ 그저 왕을 포함 고위 대신들이 자나깨나

중국을 칭송하는데 백성인들 별 수 있었을까? (그중에 몇몇은 반대의 생각을 했다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 36년간 저들의 조선인 비하 정책이 또 한 번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제국보다 뭐든 열등한 조선~ 그저 엽전들은 해봤자 벼룩이지~ 거 뭐 니들이 

잘하는 게 뭐야? 이름하여 식민사관~

앞다퉈 일제에 빌붙기 바빴던 좀 배웠단 식자층들! 그중엔 역사학자도 많다.

조선 500년도 모자라 다시 한번 자기 비하의 수난을 겹쳐 받아야 했다. 

 

그리고 해방 후 이젠 그 대상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으로 범위가 넓혀졌다. 

 

"뭐든 미국 것은 좋은 것이여~ 유럽? 그야 하나마나한 얘기지~ 우린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을 따라잡을 수 없어~ 쟤들 것은 뭐든 우리보다 훌륭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이~ "

 

이름하여 모양(慕洋) 주의다. 대상이 예전 중국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양 제국으로

바뀐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서구 문물에 흠뻑 빠져 그들을

칭송하기 바쁘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실은 나 자신도 이 慕洋주의란 얘기는 김갑수(꽁지머리 그분 아님) 선생으로부터

불과 1-2년 전 처음 들었으니 말이다. 당연 慕美 주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서양 유럽 제국들의 수려한 자연환경, 유수한 건축물, 문화 예술, 거기에 더해 앞선

복지정책 등을 보면 분명 우리와 다른 탁월한 면이 있고 도저히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엄연히 있는 게 사실이다.

 

자연환경이나 수백 년 걸려 지어진 건축물들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갑자기 그들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의 것이 더 좋게 보이거나 생각되는 건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중국도 미국도 서양 여러 나라에도 일정 부분  당연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본다.

그들이라해서 한국의 어떤 부분에 빠져들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땅에 상당 세월을 약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그 비율이 좀 더

높지 않을까 가정을 해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서양 숭배는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충분한 이유가 있는 존중은 마땅히 표해야겠지만~ 

 

그저 그리스 로마 하면 껌뻑 죽고, 스위스의 자연환경에 기가 팍 죽어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그동안 뭐 한 거야?  독일의 철학자, 클래식 음악 얘기만 나오면

그냥 꼬랑지가 척 내려갔던 건 아닐지! 만에 하나 그런 이유로 그들의 문학, 예술,

기타 문물에 애써 잘 맞는 척, 아는 척, 즐기는 척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물론 척 에 그치지 않고 실제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한번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테스 형을 목청 빠지게 부르짖던 이 노래! 도 그렇다. 왜? 하필 소크라테스인가?

세상이 왜 이런지~ 사랑이 왜 이런지~를 구태어 아테네에 물어봐야 하나?  

 

가까운 우리 나라에 원효~ 성철을 비롯해서 혹 발음이 시원찮으면 퇴계~ 퇴계 형!

발음도 비슷하네!  원효 형~ 성철 형~ 이렇게 물으면 안 되나? 뭐 이 정도를 모양주

의의 발로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우리의 인식이 하여간 이쯤 어디엔가 있다는

의미다! 

 

"거참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오!  ㅎㅎ "

 

그렇다고 아무런 실력이나 근거도 없이 우리가 최고라는 똥 배짱만 부린다고 될 일

은 물론 아닐 것이다. 

 

'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길이 따로 있구나~' 란 박일남의 노래가 있다. 어쨌든

모양 주의자는 그 길을 갈 것이고 그건 아니지! 하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할 것이다.

 

 

 

 

국악이 좋은지 어떤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건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실제

대중 속으로 파고들 만큼 매력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 것을 소홀히 했다고

책망하기 전에 그것이 대접받을 만큼 우수해야 함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풍류 대장을 본 소감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퍼커션으로 이루어진 구성에 거문고, 꽹과리, 대금 등이

함께하는 악기의 조합~  그러나 단순히 악기를 조합만 한다고 기대하는 작품이

될 수는 없다. 서도의 탁월한 보컬은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보여줄까?  

대체로 이번 풍류 대장 출연진을 보면 그 탁월한 목소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판소리의 성악이라는 '정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마치 피리를 불때 나오는

소리와 같은 정가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어떤 이는 국악 그 특유의 목소리 패턴을 약간은 식상한 듯 얘기하는데, 다른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에 비해 그 두터움, 미묘한 연결음, 탁월한 고음, 등등은 과연 이들이

어떻게 훈련을 했기에 저런 소리를 낼까? 흥미롭기만 하다 

 

우리 것이 좋아지기 위한 몸부림도 날이 갈수록 구체화되고 있지만, 그에 발맞춰 우리의

의식도 차츰 예전의 그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 둘의 접점이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듯한 일련의 현상을 점차 감지하게 된다 

 

아직 부족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부지기수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한류 열풍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한류가 실제 어느 정도로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

겠다 

 

다수의 심사위원이 한 목소리로 칭찬을 했지만 박정현은 하루빨리 이들을 세계

무대로 내보내야 한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BTS 가 세계 무대를 주름잡지만 사실 그들의 음악이 진정 한국의 어느 부분을

보여주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국악의 크로스오버를 표방하는 서도밴드의

그것은 분명 한국적인 독보적 그 무엇이 있다.

 

꼭 우리 것이 들어가야 세계적인 것이 될 이유는 없지만, K-pop을 위시한

K-culture의 주축으로 국악의 크로스오버가 일정 부분을 담당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p.s

그리고 심사위원인 김종진, 이적, 박정현, 성시경, 송가인, 우영, 솔라, 박칼린은

하나같이 그 심성이 착해 보이고 감동을 숨기지 않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찌 보면 이들의 뭔가 가족적이고 풋풋한 인간 냄새에 풍류 대장을 자주

보게 된 건 아닌지 생각되기도 한다. 특히 솔라의 얼굴 표정을 보는 건 참 재미

를 배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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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는 바보야 그를 잡고 말을 못 하면
너는 바보야
사랑한단 한 마디 그를 잡고 말을 못 하면
떠나가 버려 어서 말을 해


흔적 없는 거리거리마다
말 못 하는 사람들뿐이야
정만 주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울고 말 것을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말을 못 하고 그냥 떠나 버리고

말면 무슨 소용있나? 를 말하는 그런 것인데,

 

몸을 치료하는데도 여기에 딱 맞는 경우가 있다. 

 

' 그거 말일세~  이렇게 하면 충분히 몇 달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뭐가? 

 

골프나 테니스나 기타 과격한? 운동을 하다 보면 평소 보다 많은 하중이

실리게 되고 따라서 근 골격계에 무리가 중첩되다 보면 엘보니, 어깨 통증

같은 고장이 발생하게 된다. 그 양상은 천차만별이라서 어떤 경우는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몇 달이면 원상 복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부위에

계속해서 무리를 주면 다시 재발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면 또 전 보다

훨씬 긴 시간을 더 소요해야 그럭저럭 원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 

 

'아! 그거, 그냥 놔두면 저절로 낫는 거야~ 

 

저절로 놔둔다는 게 3년, 5년, 그러고 질질 끌며 가는 게 다반사다!

물론 처음엔 6개월 1년에 되기도 하는 거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그 기간이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신체기능이 젊을 때와 같지 않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에는 분명 좀 놔두면 그럭저럭 회복이 되던 것들이 서서히 말을 안 듣게

되기 시작한다. 혹시나, 하고 미련을 둬 봐도 역시나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수많은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는 질환 중에서 엘보나 어깨 통증은 사실 다른

특별한 원인이 없을 경우에 원상 복구하는 건 매우 쉬운 편에 속한다.

다른 특별한 원인이란 심장이나 폐 에 문제가 생겨 그 통증이 어깨로 느껴지는

경우이다. 당연 이럴 경우는 확실한 진단이 필수라 하겠다.

 

개중에는 이를 고치기 위해 몇 년을 헤매고 비용도 어마하게 날려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직접 체험해 본 경험에 의하면 약간의 비용과 몇 달간의 꾸준한 인내심만

있다면 큰 걱정을 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다는 것이 나의 관점에서 볼때 그렇다는 것이지 실은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다들 아실것이다.  

 

그런데, 늘 만나는 친구 중에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 친구들은 뭔가 또 다른

친구가 추천하는 방법을 쫓아 열심히 치료를 해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하는 방법이 아주 간단하고 부작용은 0 이라 할 수 있고 이제 중

노년으로 가면서 필수적인 근 골격계의 리모델링에도 안성맞춤인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해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실제 치료된 나의 경험 및 다른 이들의 예를 보여 주어도

좀체 응할 생각을 안 한다. 허! 이거야 원~ 

 

도대체 그 친구들은 뭘 더 원하고 있을까? 

 

좀 더 빠른 방법? 좀 더 저렴한 비용? 좀 더 쉬운 방법?  좀더 믿음이 가는 방법?

 

뭘까?

 

이것이 참 답답한 노릇이다. 세상 무슨 일이든 단언은 금물이고 확신을 함부로 할것도

아니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근 골격계의 고장 중 엘보, 어깨 통증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하고 있고 또 이건 다른 치료에 비하면 치료 난이도가 저 아래 하급에? 속한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이 보다 훨씬 더 비용도 많이 들고 치료 난도가 높은 질환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답답하지만, 그래서 이게 참 몸을 고치는 것도 각 개인의 팔자소관이라고 밖엔 더

할 말이 없다. 

 

" 아니 어떻게 몸 고치는 걸 팔자소관이라 한다 말이요? " 흠! 

 

믿고 안 믿고가 다 그 개인의 어떤 시기에, 기회에 번개처럼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좌지우지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나의 어떤 설득력, 믿음 등이 일부

관여할 것은  틀림없지만, 

 

" 그래 몸을 고치는 것도 다 팔자여~ 암 그렇고 말고~ 

 

관세음보살 나미아미타불 ~ 은 이럴 경우에 하는 말일까?

 

안타깝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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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직장- 집을 다람쥐 쳇바퀴 이상으로 반복하는 시절에 국민가수와

풍류 대장을 보는 건 큰 재미이자 위안이다. 

 

한류 열풍이 세계의 중심에 선 건 이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경연을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출중한 신인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지도 신기할 따름이다

 

각설하고 어젯밤(12.16) 생 중계로 진행된 국민가수 탑 7 선발전은 흥미도 만발

이지만 2가지 점에서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음악 프로그램이야 각 개인의

취향 나름이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순전히 나의 관점이며 어쭙잖은 평가 같은 걸

하려는 의도는 당연 아니고 그저 소박한  개인적 느낌을 한 줄 적어보는 것 임을

말씀 드린다

 

 

1, 기상 천외한 박창근

 

그의 나이는 대략 50으로 알고 있다. 평균 수명 85세 시대에  50이 무슨 대수냐?

할 수 도 있지만, 가수 나이가 50을 바라본다는 건 양궁이나 축구 선수가 30-40대를

넘어간 것과 다를 바 없다 할 것이다. 운동선수도 그 전성기가 짧지만 특히 우리나라

에서는 가수의 전성기도 그에 못지않게 짧기 때문이다. 

 

20대 어린 후배들 속에서 그러나 박창근은 단연 독보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고음은 물론 깊은 감성적 보컬은 그 나이가 아니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깊은 심연

을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많으면 음성이 따라주지 않고 나이가 적으면 감성이 뒷받침

되기 힘드니 이 둘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기는 사실 거의 불가한 영역이다. 

 

나이 80이 훨씬 넘어 복면가왕에서 가왕을 한 전설적인 가수 쟈니리가 있기도 하지만

과연 조용필, 나훈아 등이 80이 넘어 쟁쟁한 후배들과 겨뤄 복면 가왕을 할 수 있을지는 

전혀 예단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나이 들어서 성대를 잘 유지해 갈 수 있다는 건

매우 대단한 일로 칭송해 마땅할 것이다 

 

경연 초기 '미련'을 열창할 때 이미 그의 탁월함을 감지하긴 했지만, 어제 열창한

' 다시 사랑한다면' 은 원 작곡자인 김태원도 최상의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를 폴 메카트니에 비견하였으니 말이다. 한류가 하늘을 찌르는 지금 이젠 그런

비교도 충분히 수긍이 가기 때문이다. 원창자인 도원경부터 부활의 멤버들이 부른

걸 쭈욱 찾아봐도 박창근의 이번 열창은 역시 압도적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그저 입으로만 외치고 있지만

박창근은 그걸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과연 나이가 숫자에 불과

하다는 걸 우리 자신들은 무얼로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박창근은 국민 문자 투표에서도 압도적인 1위를 했다. 전체 145만 표 중 35만 표

정도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전체 투표의 1/4을 차지한 것이다. 사실 중계를 보고

있던 우리 부부도 창근의 노래가 끝났을 때 서둘러 핸드폰을 찾았고 #4560,6을

눌렀다.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은 비슷한 것일까? 

 

평가 마스터와 참여 관객들의 점수보다 압도적으로 52%의 비중을 국민참여에

둔 것은 잘한 일일까? 그것은 매우 시의 적절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2, 박장현의 구제 

 

경연에서 가사를 잘못 부르거나 얼핏 스타트를 잘못하면 여지없이 탈락이다. 그것은

경연의 심사 룰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불문율과 같다. 왜냐면 피를 말리는 경연에서

우열을 가릴 때 그것은 어마한 큰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헌데 박장현은 그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동점 타수로 나가던 골프선수가

18번 마지막 홀에서 OB를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박장현은 최대한

전력을 다했고 아마도 그는 탈락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청자인 국민들이 그를 구제한 것이다. 비록 전문가들이 채점을 하는 방식

은 그들만의 리그라 할지라도 청중인 시청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다. 내 기억으로는 이것은 한국의 경연프로에서 발생한 최초의 사례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제 우리 국민들은 내용이 좋으면 다소의 형식적 흠에는 관대해진 안목을 

갖춘 것이라 판단해 본다. 실질 내용이 형식에 앞선다는 이 주창은 實事求是 정신의

구현이요 한 발짝 더 나간다면 허례허식의 탈피에 진일보 해 가는 게 아닐까,, 라는 

섣부른 예단도 해 보는 중이다

 

무엇보다 동종 전문가 집단의 영역에 머물던 경연이 이제는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이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우리가 예측한

몇몇 선수는 역시 탈락의 고배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52%의 절대적 판정에 참여한

국민들의 안목이 별 이변 없이 대체적으로 적중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민가수란 게 뭔가? 

 

국민 대다수가 들으면 좋고 가슴에 절대적으로 큰 감동을 주는 가수가 아닌가?

물론 노래란 부르는 이의 그날의 컨디션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지만, 이미 박창근은

국민들 가슴속에 들어와 준 그런 가수이다. 

 

다음 주 결승전에 관계없이 그는 국민가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

 

다시 사랑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조금 덜 만나고 조금 덜 기대하며
많은 약속 않기로 해요


다시 이별이 와도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만
서로의 가슴에 만들기로 해요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나~  ~  ~ ~ ~
꼭 나보다 더 행복해져야만 해


많은 시간이 흘러 서로 잊고 지내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때도 이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이젠 알아요 영원할 줄 알았던
그대와의 사랑마저 날 속였다는 게
그보다 슬픈 건 나 없이 그대가
행복하게 지낼 먼 훗날의 모습
나 ~  ~  ~  ~  ~
내 마음을 하늘만은 알기를

 

 

*    * 

 

그런데 이 가사는 어디서 먼저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아래 詩이다.  물론 노래 가사와 '공존의 이유'는 느낌상

좀 차이가 나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한번 숙고할 숙제를 주었고 

노래에서 한번 더 감동을 주었으니 그만하면 훌륭하지 않은가?

덕분에 詩도 한번 더 음미해 볼 수 있었고!! 

 

 

 *  *

 

공존의 이유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 들 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이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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