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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키로로스키장 北國の春 - (元唱 ; 千昌夫) / 마로니에 부름 시라카바 아오조라 미나미카제 白 樺 靑 空 南 風 자작나무 파란하늘 마파람 코부시 사쿠 아노오카 키타구니노 아아 키타구니노하루 こぶし さく あの丘 北國の ああ 北國の春 목련이 피는 저언덕 북녘 아아 북녘의 봄 키세쓰가 토카이데와 와카라나이 다로우토 季節が 都會では わからない だろうと 계절은 도시에서는 알수없을거라고 토도이타 오후쿠로노 치이사나 쓰쓰미 とどいた おふくろの 小さな 包み 보내준 어머니의 조그마한 소포 아노후루사토헤 카에로카나 카에로카나 あの故鄕へ かえろかな かえろかな 그 고향으로 돌아갈거나 돌아 갈거나 유키도케 세세라기 마루키바시 雪どけ せせらぎ 丸木橋 눈녹음 개울물 외나무다리 카라마쓰노 메가후쿠 키타구니노 아아 키타구니노하루 落葉松の 芽がふく 北國の ああ 北國の春 낙엽송 싹이트는 북녘의 아아 북녘의 봄 스키다토 오타가이니 이이다세 나이마마 好きだと おたがいに 言いだせ ないまま 좋아한단말 서로 서로 말도 못한채 와카레데 모우 고넨 아노코와 도우시테루 別れて もう 五年 あのこは どうしてる 헤어져 벌써 5년 그애는 어찌 지낼까 아노후루사토헤 카에로카나 카에로카나 あの故鄕へ かえろかな かえろかな 그 고향으로 돌아갈거나 돌아갈거나 야마부키 아사기리스이샤고야 山吹 朝霧 水車小屋 황매화 아침안개 물래방아간 와라베 우타 키코에루 키타구니노 아아 키타구니노하루 わらべ 唄 聞こえる 北國の ああ 北國の春 꼬마들노래들리는 북녘의 아아 북녘의 봄 아니키모 오야지니테 무구치나 후타리가 あにきも おやじ似て 無口な ふたりが 형아도 아빠닮아 말이없는 둘이서 타마니와 시케데모 논데루 다로우카 たまには 酒でも のんでる だろうか 가끔은 술이라도 마시고 있을까 あの故鄕へ かえろかな かえろかな 아노후루사토헤 카에로카나 카에로카나 그 고향으로 돌아갈거나 돌아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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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 김영랑 생가 동백!! 솔직히 몇년전가지만 해도 나는 동백이란 존재를 잘 몰랐다^ 중부 지방만해도 겨우 화분에 어쩌다 심어져 있는 동백이란걸 본적은 있지만 그리 매력적이지도 멋져 보이지도 않은 별 주목을 끌지 못하던 꽃이었다. 헌데, 한참전에 겨울 일본여행을 가서 북쪽에서 버스로 쭈욱 내려오는데 동경 근처에 이르자 길가에 온통 붉은 동백 이 꽃을 피우고 있는게 아닌가? 아! 이래서 동백아가씨가 倭色 노래니 뭐니 수난을 당한게 아닌가? 하고 나름 생각을 해보았다. 수년전 강진땅에 봄여행을 하면서 백련사와 김영랑 生家를 찾았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랑생가의 뒤편은 온통 동백으로 둘러쳐 있었고 떨어진 동백이 뒷마당에 흐드러지게 나뒹굴고 있었다. 모란은 아직 몽우리만 잡혀 앞마당에 자라고 있고!! 목이 툭 잘려나가듯 떨어진다해서 예로부터 사대부들은 금기 시하던 꽃이라는데!! 허나~ 늦겨울 에서 초봄에 이 동백을 못보고 간대서야,,어찌 매화의 지조만 높이 평가할수 있을소냐? 그 정취로만 보건데 결코 매화는 동백을 따라올 수 없을것이다^ 자! 그 동백을 이렇게 노래와 함께 느껴볼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창인 동백을 찾으러 남도로 가볼것이다^ 아쉬운대로 선운사 까지라도 가볼것이다! maro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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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생태마을
기다려요 한마디 남겨놓고 떠나버린 무정한 사람 잊지말라는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면은 차라리 말이나 말지 기다리라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사랑해요 한마디 남겨놓고 뒤돌아선 무정한 사람 그 한마디가 가슴에 남아 행여올까 기다린 날들 책임지지 못할 말이라면은 차라리 하지나 말지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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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죽 시골에 사실때의 어머니.. 30대 중반이실듯 (도민증을 만드느라 찍어둔 사진이다,엄마 사진중 그나마 제일 잘 보존된 것이다) 엄마의 보따리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는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당시 우리는 원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을
떠나 안성의 일죽에 정착한터라 마땅히 농토도 없었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은 더구나
생각할수도 없는 터라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다. 다섯식구의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던 셈이다.해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개나리봇짐을 꾸려머리에 이고 인근 동네로 겨울한철 내내 물방구 장사를 나서야만 했다. 외로운 타향에 정착하여 추운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인근 동네를 하루도 쉬지않고 장사를 나서야 했을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봄 여름 가을 농사 일하면 겨울 한철 좀 쉬는게 유일한 낙인게 시골 아닌가? 아침에 나가서 해가 뉘엿뉘엿 할때 저 멀리서 오시는 엄마를 집 마당에서 볼 수 가 있었다. 그때 철없는 나는 생각하기를 어째서 울 엄마는 남들 엄마처럼 집에 있질 않고 저리
저녁때나 돼야 오는 걸까? 그게 늘 아쉬웠다. 어릴적엔 그저 엄마와 아버지랑 같이 있는게제일의 보약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긴긴 겨울 방학 내내 엄마랑 같이 있지 못하는것이 못내 서운했던 어린 시절,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몇십리 길 추운 겨울에 다니며 점심은 간신히 동네 이집 저집에서 한술로 때우시던 엄마! 몇년전 나는 어릴적 바로 옆집에 살던 나보다 4살위인 작은 누나와 친구인 누님이 사는 장호원 인근 동네에 우연히 간적이 있었다. 그 동네 사람중 몇분이 우리 약국에서 약을 드시고 기적적으로 위장병을 고친 이후 해마다 동네 사람들이 가을 걷이가 끝나면 한약을 지어 드시곤 해서 그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네옆으로 돌아 가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산 너머에 [가리울] 이란 동네가 있노라고 했다. 순간 나는 아! 바로 그 동네구나! 어릴적 엄마가 가리울 얘길 더러 하신걸 기억한다. 가리울,,우리 고향 빼나골에서 약 12키로쯤 떨어진 곳이다. 삼십리 정도이다. 어머니는
그 옛날 추운 겨울에 삼십리길을 걸어서 물건 보따리를 이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가리울 동네 얘길 듣는 순간 눈앞이 희미해지며 그 동네를 걸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아픈 다리로 걸어 다니든 동네를 나는 이제 차를 타고 와서 인근 장호원 일대 동네 주민들에게 한약을 지어 드리고 있다니 ~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모틍이를 돌아 집으로 오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 ************* 용꿈 엄마가 나를 가지셨을때 특이한 꿈을 꾸셨다한다. 어머니의 태몽에 용(龍)두마리가 치마폭에 들어 왔는데,,그중 한마리가 품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다. 아하,,,이런,,, 우선 태몽으로 용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문제는 나와 우리형이 딱 12년차 형도 용띠였던 것이다. 형은 내가 5살 되던해 그러니까 17세를 일기로 그만 하늘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용꿈..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요즘 같으면 복권1등에 당첨될 확률이 클것이고 그렇찮으면 무슨 큰 일을 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크게 빛내거나 뭐 그런걸까? 그런거 하나도 해당되지 않지만,, 이날까지 건강하게 나름 깡 시골에서 누구나 부러워 하던 서울대까지 나오고 잘 살고 있으니,, 일단은 엄마의 용꿈에 약간은 부합하게 살고 있는걸까? 단지 나와 띠동갑 용띠였던 형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것이 못내 아쉽다, 어찌 그리 엄마의 용꿈은 정확히 맞는단 말인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해이던가 물방앗간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maro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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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찾았을때도 땅콩이 길러지고 있던 우리 옛날 밭
시골의 우리땅은 논 두어마지기와 밭 3000 여평이 전부였다. 3000평하면 꽤
되는거 같지만 큰 개울가 쓸모없는 땅을 개척하여 만든 밭은 사실 재배할
작물이 몇가지로 한정되어 있어 주로 고구마,땅콩등을 심었다.
물론 배추나 무우등도 심고 들깨나 호밀도 심긴 했지만,,
고운 모래가 주 성분인 개울가 밭이라 다른 특이한 작물은 심질 못했다.그러다 보니 가을이면 땅콩과 고구마를 많이 수확하게 되었다.
땅콩은 부피가 비교적 적어 저장이 용이했지만 고구마가 문제였다.고구마는 수확철에 내다 팔면 값이 별로 안되어 뒷방에 커다랗게 볕짚으로
보관 창고를 만들어 그곳에 겨우내 저장을 한후 이른 봄 쯤에 내다 팔곤했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겨우내 긴긴 밤을 뒷방에 저장된 고구마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먹거나 땅콩을 가져와 볶아 먹기 일쑤였다. 지금 들으면 아이구,,그런
횡재를~ 하실지 모르지만 이게 간식이기도 했지만 고구마가 거의 주식이기도
했던 것이라서 어쩌면 부족한 밥대신 먹던 식량이었던 것이다
.
쌀이 귀하니 밥을 지을때는 쌀 약간에 고구마와 무우를 썰어 넣어 밥을 했다.
다된 밥을 휘~섞어 고구마 무우밥을 주로 먹고 살았다. 나는 그 무우밥이 참 먹기
싫었다. 그러나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암소리 안하고 그 맛없는 무우밥을 먹곤했다.
쌀은 거의 없고 무우와 고구마로 만든 밥을 먹었으니 그 배고픔이 오죽했을까?
허나 그 시절에는 그나마도 못먹고 배를 곯은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뭐 그닥 애닯아
할일도 아닌지 모르겠다
헌데,,땅콩은 식물성 기름이 풍부하여 아마도 뇌세포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리라생각된다. 지금은 간식으로 심심풀이 땅콩이란 말이 있지만, 당시 겨우 내내
볶아먹은 땅콩의 양은 상당 량이었다. 주식인 밥이 부족해서 먹게된 고구마와
땅콩이 결국은 괜찮은 두뇌를 만드는데 일조를 한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과연 그게 맞는지 어떤지는 확인 불가지만, 좋게 생각하면 좋은게 아닐까?
세상은 그래서 새옹지마라고 하는말이 있는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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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집에서 논둑을 따라서 1.5킬로 정도 나가면 우리의 밭이 있었다. 우리 밭은
원래 넓은 하천 부지였는데 아버지가 그곳을 일일히 손으로 일구워 밭을 만든것이다.
그리고 우리 밭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넓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백암쪽 멀리 큰 청미천
상류에서 퍼올린 물을 벌판으로 이송하는 수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수로의 물은 아주 깨끗하지도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은 적당한 수질의
물줄기였다.
그 수로에 자라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라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놈이 수로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교 갔다 올때는 가끔 큰 개울을 넘어 우리 밭을 지나 논둑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여름 날이 더위지면 자라란 놈이 그 수로 옆으로 나와서 뭘하는건지 앉아
있곤했다. 자라는 쇠 젓가락도 물면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어서 국민 학교생인 내가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잡기는 커녕 슬슬 피해 도망을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와 아버지를 찾았고 그 즉시 아버지는 부리나케 수로로
달려가 수로 옆에서 쉬고 있는 자라를 잡곤 하셨다.
자라는 서른 아홉 엄마가 낳은 늦둥이인 내가 젖을 먹지 못해 항상 몸이 약할
거라는 염려를 불식시키기에 좋은 보약 노릇을했다. 그렇게 잡아다 고아 먹은 자
라가 아마도 수십마리는 될것이다.
자라와 더불어 보신제 역할을 한것이 두더지였다. 깨끗한 모래가 주 토양인 밭에서
잡힌 두더지는 생각보다 아주 깔끔한 놈이다. 두더지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들쥐를
연상 하는듯 하지만, 두더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두더지도 몇백 마리는
구워먹지 않았을까..추산해 본다.
큰 솥에 넣어 푹 고아 먹고 남은 임금왕자가 선명한 자라의 뼈는 새끼줄에 달아서
안방 뒷쪽에 걸어놓곤 했다. 자라의 뼈는 음(陰)을 補하는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다.
어릴적 보음제를 그나마 충분히 먹고 자란 나는 덕분에 키가 또래들 보다 훨씬 크게
자랐던 것이다. 180센치 이상을 유지한 키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흔치않은 일이었다.
엄마 젖은 못먹고 대신 자라를 먹은것이 오히려 키가 크는 동기가 된 셈이다. 초등
동급생 180명 중에 내가 두번째로 키가 컷으니 말이다.
그렇게 잡아서 고아 먹은 자라인데, 2009년도에 일본 오사카에 가서 보니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꽤 넓은 강이 있었는데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강물에서 노니는 자라를
보게 된것이다. 상당히 숫자가 많았는데,,오사카 시민들은 아마도 자라를 잡아먹지
않는가 보다. 물론 강물이 오염이 되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옛날 오사카에서 쭈욱 사셨던 아버님이 어쩌면 그 당시 자라에 대한 효능 같은걸
인지하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해서 훗날 시골 동네에서도 자라를 잡아 먹이면 키도
크고 몸에 좋다고 생각 하신건 아닐지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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