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모습

 

 

아버지는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2012년을 기준으로 대략 110세 쯤 되신다

왜냐면 아버지 50세에 늦둥이로 나를 낳았으니까..지금 내 나이가 만 60이다.

 

  허긴 그 시절은 60 정도면 대략 돌아가시던 시절이니,

나는 참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자식들과 할아버지가 함께한 즉 3대가 시간을 공유할수 있는 이는 많이 행복

하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허나 그렇지 못한 분도 많이 계실것이다.  

 

해서 자식들이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분 이셨을까?"

 

라고 혹시라도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억룡(億龍)이라는 함자를 가지고 계셨고

호는 해창(海唱) 으로 쓰셨다. 문패는 해창으로 하셨고 동네에서도

항상 그렇게 불리셨다. 아버지의 어린시절 자세한 족적은

알 길이 없고 최근 누님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20대에는

중국으로 건너 가셔서 상해-북경-만주 등지를 전전하시며

지내셨다 한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 나셨다는데 1970년대에 합천 덕곡면을 가서 보니 나머지

형제들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고 흗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낙동강을 배로 저어 들어간 덕곡면 율원리 나의 본적지는 산골중의 산골

산에 밤나무가 많았다.

 

 

나의 할아버지 고향이 경북 청도이셨으니 아마도 청도에서 합천으로 이주하신

듯하다.몇년 전 가족과 함께 청도를 들러 지름길로 창녕군 이방면을 거쳐 합천

으로 가 본적이 있다. 자동차로 질러서 가니 얼마 멀지 않은 길이었다.

 

 

경기도 안성 일죽에서 내가 태어난 건 6.25가 한창인 와중이었다. 흙벽돌로<

지은 단칸 시골집에서 나는 특히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오십에<

얻은 막내 아들이었으니 귀하기도 하셨겠지만 유독 내가 해달라는 것은 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주셨다.

 

 

별스런 물자가 없었던 시골 촌 구석에서 썰매는 일제때 철거해간 철뚝에서<

소나무 를 잘라 낫으로 깍아 만들어 주셨다. 연도 만들어 날리게 해주셨고

겨울철이면 새도 잡을 수 있게 덥치기라는 도구도 만들어 주셨다. 뭐든

해 달라고 하면 전부,.. 우리 아버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허긴 세상의 어느 아버지인들 그렇지 않았을까 마는 아버지의 사랑이

유독 나에겐 좀 특별했다고나 할까~~

 

 

성격이 불 같아서 때론 화도 내시고 쓰잘데 없이 몰려다니는 아랫 동네 처녀들

을 혼내키시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막내인 나에게는 화를 내신적이 거의

없으셨다.

 


허지만 위로 한분 계신 형에게는 상당 부분 역정을 내시고 때론 미워하기

까지 한 게 내 어린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한분 계셨던 형님은 나와 12년 차이

로 띠 동갑인데 그 당시 허리가 좀 좋지 않았었다. 해서 학교도 못다니고 일도

못하고 거의 집에만 있는 편이었다. 다섯살 때의 기억으로 형이랑 아랫마을이

보이는 언덕으로 매미를 잡으러 갔던 것이 유일하다. 학교를 못 다닌 형은 대신

혼자 독학으로 천자문을 독파하고 그걸 미농지에 붓으로 써서 마치 한석봉의

천자문 책처럼 만들기도 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결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본에서 어느정도 기반이 잡히자 아버님은 결혼을 하기로 작정하고 합천의 옆

농네 고령군으로 시집 가신 아버님 누님에게 전갈을 보낸다. 마침 한 동네 강씨

집안의 어머니를 추천하여 결국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만나기로 하셨다.

 

워낙 배 타고 오가는 사람이 당시에 많으니 어머니는 한복을 입으시고 머리 비녀

옆에 무슨 꽃을 한 송이 꽃아서 표식을 하기로 했다. 암튼 그렇게 해서 시모노세키에서

만나서 결혼을 하고 주로 오사카에서 아버지는 일하셨다.

그곳에서 형님과 큰 누님 두분을 낳으시고 사셨다

 

 

오사카 거주시절의 아버님과 어머님,,그리고 형님의 단란했던 모습~

(1940년대 초반 촬영 추정)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나오셔서 고향인 합천으로 가셨는데, 합천에서 경북 고령

고모님 댁으로 옮겨 6개월인가를 계시다 마땅치 않아 결국 방랑길에 오르셨다 한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당시로서는 천리길이 되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죽'이다.

 

일제치하에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 갔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으리오

마는 우리 아버지도 그중의 한 분인 셈이다. 그러나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도 역시나

특별히 갈곳이 없어 천리타관 낮선 곳 일가친척이 있을리 만무한 타관객지에서

새 삶을 꾸려야 했을 터이니 그 고생을 말해 무엇할까?

 

 

일찌기 일본에 건너가 그쪽 문물을 맛본 아버지가 타관에서 서툴은 농사를

겨우 겨우 지어나가는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농한기에 접어드는

한겨울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우리집으로 밤이면 항시 모여 오곤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본 사시던 얘기며 기타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러 오는것이었던 것이다.

시골 농부들은 밤이 깊도록 아버지의 옛 일본 얘기를 경청하였다. 어린 나도 방

뒷편에 쭈구리고 앉아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듣곤 했는데,,그중의 하나가 북해도의

눈 얘기였고 이야기 책들을 동네분들에게 읽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정식 학교 교육은 어떻게 된건지 알 수가 없으나 한문에 능통하셨고 필적이

좋았다. 면 서기들이 모르는 한문이 있으면 우리집으로 달려와 아버지한테 의견을 구하곤

했었다고 누님이 얘기 하시니,글 공부도 상당수준 이셨지 않나

생각이 든다.

 

 

또한 달변가여서 어떠한 상대 앞에서도 결코 주눅이 들거나 말로서 꿀리는

적이 없으셨다.강단이 쎄고 매사에 결코 어물쩡 타협이란건 없었으니 남자로서

기상은 출중하였으나, 현실에서는 모함도 많았고 거기다 시골 빈농의 서름을

많이 받으셨을 것으로 나름 추측해본다.

 

 

대표적인 예가 6.25 막바지에 뒷산으로 몇몇 동네 분 들과 끌려갔을

때이다. 전해 듣기로는 무슨 부역 문제로 아버지를 좌익인지 우익인지로 몰려는

협박이었다는데,,아마도 뭘 협조하라는 강압이 아니었을지로 추정해 볼 뿐이다

아버지는 단호히 노오..라 하셧고 동네에서 좀 산다는 어떤 이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네네,,했다는데 그후 그 집의 자손들에게는 상당한 멸시를 하셨고 시원찮은 집안이라고

상대도 안 하려 하신걸 기억한다. 이게 용감한건지 대책없이 자존심만 세우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오싹한 일이다.

 

대쪽같은 경상도 성격으로 생전 타협을 모르시던 아버지!!

지금 시대엔 그것이 맞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도

아버지의 그 추상같던 성품을 존경한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 강산에 봄맞이 가세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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