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집에서 논둑을 따라서 1.5킬로 정도 나가면 우리의 밭이 있었다. 우리 밭은

원래 넓은 하천 부지였는데 아버지가 그곳을 일일히 손으로 일구워 밭을 만든것이다.

그리고 우리 밭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넓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백암쪽 멀리 큰 청미천

상류에서 퍼올린 물을 벌판으로 이송하는 수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수로의 물은 아주 깨끗하지도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은 적당한 수질의

물줄기였다.

 

그 수로에 자라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라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놈이 수로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교 갔다 올때는 가끔 큰 개울을 넘어 우리 밭을 지나 논둑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여름 날이 더위지면 자라란 놈이 그 수로 옆으로 나와서 뭘하는건지 앉아
있곤했다. 자라는 쇠 젓가락도 물면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어서 국민 학교생인 내가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잡기는 커녕 슬슬 피해 도망을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와 아버지를 찾았고 그 즉시 아버지는 부리나케 수로로

달려가 수로 옆에서 쉬고 있는 자라를 잡곤 하셨다.

 

자라는 서른 아홉 엄마가 낳은 늦둥이인 내가 젖을 먹지 못해 항상 몸이 약할

거라는 염려를 불식시키기에 좋은 보약 노릇을했다. 그렇게 잡아다 고아 먹은 자
라가 아마도 수십마리는 될것이다. 

 

자라와 더불어 보신제 역할을 한것이 두더지였다. 깨끗한 모래가 주 토양인 밭에서

잡힌 두더지는 생각보다 아주 깔끔한 놈이다. 두더지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들쥐를

연상 하는듯 하지만, 두더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두더지도 몇백 마리는

구워먹지 않았을까..추산해 본다.

 

큰 솥에 넣어 푹 고아 먹고 남은 임금왕자가 선명한 자라의 뼈는 새끼줄에 달아서

안방 뒷쪽에 걸어놓곤 했다. 자라의 뼈는 음(陰)을 補하는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다.
어릴적 보음제를 그나마 충분히 먹고 자란 나는 덕분에 키가 또래들 보다 훨씬 크게

자랐던 것이다. 180센치 이상을 유지한 키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흔치않은 일이었다.

 

엄마 젖은 못먹고 대신 자라를 먹은것이 오히려 키가 크는 동기가 된 셈이다. 초등

동급생 180명 중에 내가 두번째로 키가 컷으니 말이다.

 

그렇게 잡아서 고아 먹은 자라인데, 2009년도에 일본 오사카에 가서 보니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꽤 넓은 강이 있었는데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강물에서 노니는 자라를

보게 된것이다. 상당히 숫자가 많았는데,,오사카 시민들은 아마도 자라를 잡아먹지

않는가 보다. 물론 강물이 오염이 되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옛날 오사카에서 쭈욱 사셨던 아버님이 어쩌면 그 당시 자라에 대한 효능 같은걸

인지하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해서 훗날 시골 동네에서도 자라를 잡아 먹이면 키도

크고 몸에 좋다고 생각 하신건 아닐지 추정해 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