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큰 개울가에 우리는 약 3000 여평에 달하는 모래가 주 성분인
밭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 밭이 생긴 건지 또 개간을 한 건지는
잘 알 수가 없고 암튼 그건 우리 다섯 식구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 밭에는 호밀을 비롯 하여 감자 고구마 땅콩 무우 배추 참깨 들깨 목화
보리 등 다양한 곡식을 심어 키웠다. 헌데 옛날 시골에는 이렇다 할 진통제나
藥이 귀했다. 간혹 배가 아프면 아버지는 조그만 양철곽에서 노란 액체 비슷한
걸 조금 떠서 먹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양귀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밭 곡식 사이에 양귀비
몇 그루를 심어 즙을 내어 진통제등 상비약으로 쓰신거였다. 허나 난 어릴적
그 양귀비를 본 기억이 없다. 헌데 누군가 그걸 찔렀던 모양이다.
워낙 곧이곧대로 원칙주의자인 아버지는 동네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고
더러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된듯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인해 수원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일죽에서 수원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셨는데 그 당시
교통 수단도 불비했겠지만 아버지는 재판 받으러 가시기 얼마전부터 집신을
넉넉히 짜시곤 했다.
그 집신 만들기는 당연 먼 길을 오가야 했던 신발 대용이었고 당시 안성읍에
수원 지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일죽-안성, 아니면 일죽-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오시곤 했다 한다 (일죽-안성 =26km,일죽-수원= 약 50km )
먼 길을 걸어서 재판 받으러 올라 온 시골 촌로의 양귀비 재배사건~ 그것도
응급용 약으로 쓰겠다고 기른걸 두고 당시 판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배가 아플때 먹을라고 몇포기 기른 양귀비인데 뭐가 잘못이냐?
할일이 없어 이런걸 가지고 날 오라 마라 하느냐? "
그렇게 하시고도 남을 분이 우리 아버지다.
당시 무슨 변호사 도움을 받았을리도 만무하고 순전히 혼자 재판을
받았지만 아무 탈없이 재판은 무혐의로 끝났고 그 이후로도 아주
소량이지만 양귀비를 한 두포기 심으신 걸로 기억을 한다. 당시
아버지가 걸어서 오갔다는 그 수원에서 나는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
약국을 하고 있으니 이것도 어떤 인연이라
할수 있지않을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3) 도개비 불 이야기
우리집은 약간 평지에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큰 동네에서 약간은 떨어져
자그마한 야산 턱에 위치해 이름 조차도 [빼낙골] 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전부
합쳐 여섯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이다.
집 앞에서 밭을 수십고랑 지나면 약 300며 미터 앞으론 일제때 지나던 안성-여주간
철도가 있었다. 그 철도 부지에 자갈을 힘들여 개간한 우리 논도 천수답이지만
한마지기 정도 있었다. 헌데 이곳 철도가 지나던 곳이 문제였다. 6.25 사변때
그 철둑길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었고 그때 공습이 수시로 있어 그곳 철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길 듣곤 했었다.
여름철 비가 줄줄 내리던 어느날의 일이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밤이 깊어 나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갑자기 아버지가 일어 나시더니
[저것좀 봐라~ 내 이놈의 도깨비 녀석 가만 안 둘테다]
하셨다.나도 잠이 깨어 봉창으로 앞을 보니 저 멀리 철길쯤에 웬 등불 같은것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게 아닌가?
아버지는 "저거이 도깨비 불이라고들 하는데 필시 저건 사람이 그러는 거다.
내가 가서 어느놈이 장난을 치는지 요절을 내고 올테다 ~" 하시면서 큰 작대기를
챙겨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난 무서워서 맘을 조리며 그 등불 같은 것이
어찌 되나..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헌데,,아버지가 그쪽으로 다가
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등불은 갑자기 없어 지고 칠흙같은 어둠만 깔리고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다니는 어떤 인간을 작대기로 두들겨 패
버린건 아닐까? 무슨 일일까? 한참 만에 되돌아온 아버지 말씀이
" 거 참 이상하네,,분명 어느 놈이 있는거 같은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으니,원"
하시는게 아닌가. 일설에는 여름철 도깨비불의 정체는 인(燐) 이 발광하는 것이라
하는데,,그게 사람이 아닌게 맞긴 맞는거 같다. 꼭 사람이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던 비오는 여름밤의 불...또 그걸 정체를 파헤쳐 보겠다고
칠흑같은 밤에 맞장을 떠 보시던 아버지.. 물론 꽤 옛날 얘기긴 하나 지금 나
같으면 밤에 도깨비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용감하기도 하고,,어찌보면 호기심이 발동하면 위험도 불사하고 끝장을
보고야 마시던 성격의 아버님 이시다. 아마도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한번
시작하면 그 정점까지 추구하는 성격은 아버지의 그런면을 딞은 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그 여름밤 비오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 어느 땐가 그 언젠가 비오든 그날 밤
그대와 단둘이서 우산을 같이 받고 ~"
안정애가 부른 '밤비의 부르스' 이다
이 노래가 당시 상황과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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