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의 얼크러진 나무뿌리길을 어수룩한 저녁에 내려오는데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 저위에 백련사 넘어가다 시간이 늦어 그냥 내려오는길입니다. " "아이구 그래요?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못보면 후회가 될겁니다" " 앗! 그런가요? 이런,,그럼 차를 돌려 얼릉 가봐야겠구만요"
그는 대전서 왔다하면서 근데 영랑 생가같은덴 가보시면 후회할겁니다. 별 볼게 없어요...했다.
백련사 입구부터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 숲
부랴부랴 어둑해지는 백련사에 당도해 동백숲을 보러 올라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한 아내는
차에서 쉬겠다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동백꽃이야 아까도 보질 않았느냐고,,,하며,,,
백련사의 목백일홍 나무
올라가는 길은 동백과 비자나무숲이 빽빽했다. 숲에서 우는 새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부랴부랴 오르니
눈앞에 저런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목백일홍나무가 저렇게 멋지게 생긴거는 아무튼 나는 처음이다.
나무의 얼키설킴이 저렇듯 대단하다. 아! 정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련사의
역사를 백년은 족히 기억하고 있음직한 나무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멀리 구강포구 를 바라보니 으스름 저녁인데도 해안도로주변에 벛꽃이 만발한게 끝도 없이
펼쳐진다. 숙박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우선 저 길을 달려보고싶다.
해는져서 어두운데,,저 건너 칠량의 불빛과 산세가 어렴풋 다가온다. 아..이토록 멋진 저녁풍경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니,,,적막한 저녁 방파제를 조용히 달려본다.
포구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곳이 강진 시내 쪽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 으시시해서 얼른 차를 돌려 강진 시내로 향한다. 올때 봐두었던 남도장 여관을 연락하니
그만둔지 10년이란다. 근데 전화는 ..우째 받을꼬~ 이런,,결국 유명하다던 한정식집 해태식당도 시간이 늦어
안되고,,암튼 간신히 저녁을 어느식당에서 해 치우고 겨우 숙박도 해결했다. 더러 보이는 관광버스 손님들이
시내 숙박업소를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왕창 들었다. 어디갈땐 제발 좀 예약
좀 하고 댕기라고^^
무화과 나무의 덩쿨모습
묵었던 온천장 여관 앞집에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하도 신기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저게
무화과나무란다. 사진은 그저 그러해보이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자 드디어 영랑의 생가이다. 강진 시내의 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꽤 면적이 넓고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쳐 있는 뒷담을 끼고 자리잡은 생가는 한눈에 봐도 명당임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여기서 멀리 구강포구가 어렴풋이 눈에 잡힐 그런곳이니 말이다.
한눈에 봐도 얼마나 좋은 곳인지 ~~
뒷뜰에 흐드러 지게 피어 떨어진 동백꽃들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방문틀에 끼워 놓은 동백꽃!! 이곳은 동백이 함박눈처럼 날린다^^*
별채 앞에 피어있는 겹동백의 어여쁜 모습
은행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자란게 있다^^*
동백 한 닢을 손에 들고 영랑의 집 손님이 되어본다.
뒷뜰의 동백,,,백련사의 동백에 전혀 뒤지지않는 멋진 자태다.
생가 우측 높은 곳에 자리잡은 금서당(琴書堂)..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소학교 였다는데,,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도 씌였다 한다.
금서당 뜰에 피어있는 꽃
이곳 언덕에 누워 멀리 포구를 바라보면,,, 영랑 시인의 한분 누님이 떠오른다 했든가??
이제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란이 생가 뜰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면 저 모란이
벌겋게 만개할것이다. 지금도 저리 멋진집인데,,모란이 피면 정말 영랑의 생가는 詩로 만발할것이다. 그때의
생가를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다산 초당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가 말한 " 별거 없어요..실망 할겁니다" 란 말이 전혀 틀렸다는걸 실감하며 동백과 대나무가
어울러진 이땅에서 볼수있는 정말 멋진 집을 나는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1948 년도에 이집에서 떠나 서울로 향했다던 영랑!! 그는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서울을 택했을까? 서울로 간 그는
1950년 6.25 동란에 부상을 입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강진이 낳은 천재 서정시인이 그렇게 사라질 줄
이야^^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전체 글
- 남도 기행--(4) 김영랑 생가 2012.03.13
- 남도 기행--(4 ) 김영랑 생가 2012.03.13
- 남도 기행--(3 ) 다산과 사의제 201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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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유년시절 -- 우리 아버지 얘기 (2) 2012.03.10
- 나의 유년시절--- 우리 아버지 얘기 --(1) 2012.03.10
- 나의 유년시절 -- 내가 살던 집 -1 (빼낙골 얘기) 2012.03.10
남도 기행--(4) 김영랑 생가
남도 기행--(4 ) 김영랑 생가
다산 초당의 얼크러진 나무뿌리 길을 어수룩한 저녁에 내려오는데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 저 위에 백련사 넘어가다 시간이 늦어 그냥 내려오는 길입니다. "
하고 내가 말하니~
"아이구 그래요?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못 보면 후회가 될겁니다"
라고 말한다
" 앗! 그런가요? 이런,,그럼 차를 돌려 얼릉 가봐야겠구만요"
대전서 왔다는 그 분은 동백나무숲은 찬양을 했지만
"근데 영랑 생가같은덴 가 보시면 후회할겁니다.
별 볼게 없어요 "
했다.
백련사 입구부터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 숲
부랴부랴 어둑해지는 백련사에 당도해 동백숲을 보러 올라 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한 아내는 차에서 쉬겠다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동백꽃이야 아까도 보질 않았느냐고 하며,
이런^
백련사의 목백일홍
올라가는 길은 동백과 비자나무숲이 빽빽했다. 숲에서 우는 새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부랴부랴 오르니 눈 앞에 저런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목백일홍 나무가 저렇게 멋지게 생긴거는
아무튼 나는 처음이다.
😛
나무의 얼키설킴이 저렇듯 대단하다. 아! 정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련사의 역사를 백년은 족히 기억하고 있음직한 나무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멀리 구강포구 를 바라보니 으스름 저녁인데도 해안도로
주변에 벛꽃이 만발한게 끝도 없이 펼쳐진다. 오늘 숙박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
우선 저 길을 달려보고 싶다.
해는져서 어두운데,,저 건너 칠량의 불빛과 산세가 어렴풋 다가온다.
아..이토록 멋진 저녁 풍경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니,,, 이곳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적막한 저녁 방파제를 조용히 달려 본다.
포구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곳이 강진 시내 쪽이다.
(당시 카메라가 시원찮은 것이라 저녁 사진이 이렇다)
아무도 없는 길이 으시시해서 얼른 차를 돌려 강진 시내로 향한다. 올때 봐두었던 남도장 여관을 연락하니
그만둔지 10년 이란다. 근데 전화는 우째 받을꼬~ 이런,,결국 유명하다던 한정식집 해태 식당도 시간이 늦어
안되고,,암튼 간신히 저녁을 어느 식당에서 해치우고 겨우 숙박도 해결했다. 더러 보이는 관광버스 손님들이
시내 숙박업소를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왕창 들었다. 어디갈땐 제발 예약
좀 하고 댕기라고^^
무화과 나무
묵었던 온천장 여관 앞집에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하도 신기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저게 무화과 나무란다. 사진은 그저 그러해 보이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자 드디어 영랑의 생가이다. 강진 시내의 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꽤 면적이 넓고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쳐 있는 뒷담을 끼고 자리잡은 생가는
한 눈에 봐도 명당임이 틀림 없었다.거기다 여기서 멀리 구강포구가 어렴풋이
눈에 잡힐 그런 곳이니 말이다.
척 봐도 얼마나 좋은 곳인지 ~~
뒷뜰에 흐드러지게 피어 떨어진 동백 꽃들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방문 틀에 끼워 놓은 동백꽃!! 이곳은 동백이 함박눈처럼 날린다^^*
별채 앞에 피어있는 겹동백의 어여쁜 모습
은행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자란게 있다^^*
동백 한 닢을 손에 들고 영랑의 집 손님이 되어 본다.
뒷뜰의 동백,백련사의 동백에 전혀 뒤지지않는 멋진 자태다.
생가 우측 높은 곳에 자리잡은 금서당(琴書堂).. 독립 운동의
산실이자 소학교 였다는데,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도 씌였다 한다.
금서당 뜰에 피어있는 꽃
이곳 언덕에 누워 멀리 포구를 바라보면,
영랑 시인의 한 분 누님이 떠오른다 했든가??
이제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란이 생가 뜰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면 저 모란이 벌겋게 만개할 것이다. 지금도 저리 멋진 집인데,,
모란이 피면 정말 영랑의 생가는 詩로 만발할 것이다. 그때의 생가를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다산 초당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가
" 별거 없어요..실망 할겁니다"
란 말은 전혀 틀렸다!!
동백과 대나무가
어울러진 이 땅에서 볼수 있는 정말 멋진 집을 나는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1948 년도에 이집에서 떠나 서울로 향했다던 영랑!! 그는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서울을 택했을까? 당시 많은 시인 문인들의 주 활동 무대가 서울이라서
그랬을까?
서울로 간 그는
1950년 6.25 동란에 부상을 입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강진이 낳은 천재 서정 시인이 그렇게 사라질 줄
이야^^ 너무나 아쉬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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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3 ) 다산과 사의제
김영랑 생가를 돌아본후 얼핏 보니 부근에 사의재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땅으로 유배되어
왔을때 모두들 피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둥 마치 외계인 대하듯 할때 따뜻히 그를 맞아준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문밖(당시는 강진에 성곽이 있었다) 사의재라는 주막집이었다. 이곳 주모되는 할머니가 다산을
측은히 여겨 그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는데~
90년대만 해도 이곳을 찾을수없어 안타가워 했던 곳이다. 아마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 청장이 된후 사의제를 포함한 몇곳을 복원한게 아닐까..추측을 해본다.
왜냐면 그의 저서에 사의재의 유적지를 찾지못한 걸 못내 아쉬워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자그마한 초가집에 방 한칸을 다산 선생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막주인 할머니!!
아마도 하늘이 도움을 주러 내보낸 이가 아닐까..
이젠 이곳이 실학의 4대 성지로 불려지는 곳이 되었다. 1801년 11월 23일 날도 차고 바람도
심했을 11월 말의 강진 땅에 간신히 거처할 곳을 마련했을 때의 다산 선생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더구나 실의에 빠진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는가? ]
라는 주막 할머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아 경세유표 같은 불후의
명저를 남긴 곳이 바로 이 골방이었다니....참으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사의재...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나는 고려 청자 도요지에 가서 결국 사의재가 적힌 청자 판을 하나 구입했다. 그
냥 식탁 옆에 두고 수시로 읽어볼 요량이었다.
사의재에 걸려 있는 다산의 시 한수입니다. 당시나 오늘이나 세상 사정은 늘
비슷한가 봅니다. 그래봐야 불과 200년 전 일이니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셈이군요^^*
그런 세상이었건만 오늘같은 나라로 성장한 걸 보면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음,,여기에 잘 나타나 있네요^^* 1803년 12월 초열흘이니 1801년11월 23일
처음 이곳에 정착한지 대략 2년쯤 경과한
때입니다. 다산선생도 주역을 읽고 계셨군요!!
물론 최근에 복원시킨 거겠지만,,아담한 우물이 여기도 있읍니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들여다 보니 식음으로 사용은 못하겠드라구요.
다산 선생에게 힘을 주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는 주막집 할머니와 그의 외동딸
기념 동상입니다.
저는 주막집 뒷편에 있는 저 할머니 동상을 두손으로 어루만져 드렸읍니다.
" 할머니...고맙습니다^^ " 하면서 ~ 물론 다산과 저 딸과의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요?
주막집 입구에는 이렇듯 앵두가 피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참으로 이곳 사의재를 복원한것은 정말 잘한 일 같읍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이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요^^
비록 작은 주막집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둘러 보고 나오는 강진의 하늘과 동네는
더없이 청량하고 맑게 느껴 졌읍니다^^*
무소의 뿔처럼 - 범능 스님 고규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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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시절 -- 우리 아버지 얘기 (2)
시골 큰 개울가에 우리는 약 3000 여평에 달하는 모래가 주 성분인
밭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 밭이 생긴 건지 또 개간을 한 건지는
잘 알 수가 없고 암튼 그건 우리 다섯 식구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 밭에는 호밀을 비롯 하여 감자 고구마 땅콩 무우 배추 참깨 들깨 목화
보리 등 다양한 곡식을 심어 키웠다. 헌데 옛날 시골에는 이렇다 할 진통제나
藥이 귀했다. 간혹 배가 아프면 아버지는 조그만 양철곽에서 노란 액체 비슷한
걸 조금 떠서 먹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양귀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밭 곡식 사이에 양귀비
몇 그루를 심어 즙을 내어 진통제등 상비약으로 쓰신거였다. 허나 난 어릴적
그 양귀비를 본 기억이 없다. 헌데 누군가 그걸 찔렀던 모양이다.
워낙 곧이곧대로 원칙주의자인 아버지는 동네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고
더러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된듯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인해 수원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일죽에서 수원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셨는데 그 당시
교통 수단도 불비했겠지만 아버지는 재판 받으러 가시기 얼마전부터 집신을
넉넉히 짜시곤 했다.
그 집신 만들기는 당연 먼 길을 오가야 했던 신발 대용이었고 당시 안성읍에
수원 지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일죽-안성, 아니면 일죽-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오시곤 했다 한다 (일죽-안성 =26km,일죽-수원= 약 50km )
먼 길을 걸어서 재판 받으러 올라 온 시골 촌로의 양귀비 재배사건~ 그것도
응급용 약으로 쓰겠다고 기른걸 두고 당시 판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배가 아플때 먹을라고 몇포기 기른 양귀비인데 뭐가 잘못이냐?
할일이 없어 이런걸 가지고 날 오라 마라 하느냐? "
그렇게 하시고도 남을 분이 우리 아버지다.
당시 무슨 변호사 도움을 받았을리도 만무하고 순전히 혼자 재판을
받았지만 아무 탈없이 재판은 무혐의로 끝났고 그 이후로도 아주
소량이지만 양귀비를 한 두포기 심으신 걸로 기억을 한다. 당시
아버지가 걸어서 오갔다는 그 수원에서 나는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
약국을 하고 있으니 이것도 어떤 인연이라
할수 있지않을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3) 도개비 불 이야기
우리집은 약간 평지에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큰 동네에서 약간은 떨어져
자그마한 야산 턱에 위치해 이름 조차도 [빼낙골] 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전부
합쳐 여섯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이다.
집 앞에서 밭을 수십고랑 지나면 약 300며 미터 앞으론 일제때 지나던 안성-여주간
철도가 있었다. 그 철도 부지에 자갈을 힘들여 개간한 우리 논도 천수답이지만
한마지기 정도 있었다. 헌데 이곳 철도가 지나던 곳이 문제였다. 6.25 사변때
그 철둑길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었고 그때 공습이 수시로 있어 그곳 철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길 듣곤 했었다.
여름철 비가 줄줄 내리던 어느날의 일이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밤이 깊어 나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갑자기 아버지가 일어 나시더니
[저것좀 봐라~ 내 이놈의 도깨비 녀석 가만 안 둘테다]
하셨다.나도 잠이 깨어 봉창으로 앞을 보니 저 멀리 철길쯤에 웬 등불 같은것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게 아닌가?
아버지는 "저거이 도깨비 불이라고들 하는데 필시 저건 사람이 그러는 거다.
내가 가서 어느놈이 장난을 치는지 요절을 내고 올테다 ~" 하시면서 큰 작대기를
챙겨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난 무서워서 맘을 조리며 그 등불 같은 것이
어찌 되나..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헌데,,아버지가 그쪽으로 다가
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등불은 갑자기 없어 지고 칠흙같은 어둠만 깔리고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다니는 어떤 인간을 작대기로 두들겨 패
버린건 아닐까? 무슨 일일까? 한참 만에 되돌아온 아버지 말씀이
" 거 참 이상하네,,분명 어느 놈이 있는거 같은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으니,원"
하시는게 아닌가. 일설에는 여름철 도깨비불의 정체는 인(燐) 이 발광하는 것이라
하는데,,그게 사람이 아닌게 맞긴 맞는거 같다. 꼭 사람이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던 비오는 여름밤의 불...또 그걸 정체를 파헤쳐 보겠다고
칠흑같은 밤에 맞장을 떠 보시던 아버지.. 물론 꽤 옛날 얘기긴 하나 지금 나
같으면 밤에 도깨비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용감하기도 하고,,어찌보면 호기심이 발동하면 위험도 불사하고 끝장을
보고야 마시던 성격의 아버님 이시다. 아마도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한번
시작하면 그 정점까지 추구하는 성격은 아버지의 그런면을 딞은 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그 여름밤 비오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 어느 땐가 그 언젠가 비오든 그날 밤
그대와 단둘이서 우산을 같이 받고 ~"
안정애가 부른 '밤비의 부르스' 이다
이 노래가 당시 상황과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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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모습
아버지는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2012년을 기준으로 대략 110세 쯤 되신다
왜냐면 아버지 50세에 늦둥이로 나를 낳았으니까..지금 내 나이가 만 60이다.
허긴 그 시절은 60 정도면 대략 돌아가시던 시절이니,
나는 참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자식들과 할아버지가 함께한 즉 3대가 시간을 공유할수 있는 이는 많이 행복
하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허나 그렇지 못한 분도 많이 계실것이다.
해서 자식들이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분 이셨을까?"
라고 혹시라도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억룡(億龍)이라는 함자를 가지고 계셨고
호는 해창(海唱) 으로 쓰셨다. 문패는 해창으로 하셨고 동네에서도
항상 그렇게 불리셨다. 아버지의 어린시절 자세한 족적은
알 길이 없고 최근 누님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20대에는
중국으로 건너 가셔서 상해-북경-만주 등지를 전전하시며
지내셨다 한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 나셨다는데 1970년대에 합천 덕곡면을 가서 보니 나머지
형제들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고 흗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낙동강을 배로 저어 들어간 덕곡면 율원리 나의 본적지는 산골중의 산골
산에 밤나무가 많았다.
나의 할아버지 고향이 경북 청도이셨으니 아마도 청도에서 합천으로 이주하신
듯하다.몇년 전 가족과 함께 청도를 들러 지름길로 창녕군 이방면을 거쳐 합천
으로 가 본적이 있다. 자동차로 질러서 가니 얼마 멀지 않은 길이었다.
경기도 안성 일죽에서 내가 태어난 건 6.25가 한창인 와중이었다. 흙벽돌로<
지은 단칸 시골집에서 나는 특히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오십에<
얻은 막내 아들이었으니 귀하기도 하셨겠지만 유독 내가 해달라는 것은 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주셨다.
별스런 물자가 없었던 시골 촌 구석에서 썰매는 일제때 철거해간 철뚝에서<
소나무 를 잘라 낫으로 깍아 만들어 주셨다. 연도 만들어 날리게 해주셨고
겨울철이면 새도 잡을 수 있게 덥치기라는 도구도 만들어 주셨다. 뭐든
해 달라고 하면 전부,.. 우리 아버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허긴 세상의 어느 아버지인들 그렇지 않았을까 마는 아버지의 사랑이
유독 나에겐 좀 특별했다고나 할까~~
성격이 불 같아서 때론 화도 내시고 쓰잘데 없이 몰려다니는 아랫 동네 처녀들
을 혼내키시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막내인 나에게는 화를 내신적이 거의
없으셨다.
허지만 위로 한분 계신 형에게는 상당 부분 역정을 내시고 때론 미워하기
까지 한 게 내 어린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한분 계셨던 형님은 나와 12년 차이
로 띠 동갑인데 그 당시 허리가 좀 좋지 않았었다. 해서 학교도 못다니고 일도
못하고 거의 집에만 있는 편이었다. 다섯살 때의 기억으로 형이랑 아랫마을이
보이는 언덕으로 매미를 잡으러 갔던 것이 유일하다. 학교를 못 다닌 형은 대신
혼자 독학으로 천자문을 독파하고 그걸 미농지에 붓으로 써서 마치 한석봉의
천자문 책처럼 만들기도 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결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본에서 어느정도 기반이 잡히자 아버님은 결혼을 하기로 작정하고 합천의 옆
농네 고령군으로 시집 가신 아버님 누님에게 전갈을 보낸다. 마침 한 동네 강씨
집안의 어머니를 추천하여 결국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만나기로 하셨다.
워낙 배 타고 오가는 사람이 당시에 많으니 어머니는 한복을 입으시고 머리 비녀
옆에 무슨 꽃을 한 송이 꽃아서 표식을 하기로 했다. 암튼 그렇게 해서 시모노세키에서
만나서 결혼을 하고 주로 오사카에서 아버지는 일하셨다.
그곳에서 형님과 큰 누님 두분을 낳으시고 사셨다
오사카 거주시절의 아버님과 어머님,,그리고 형님의 단란했던 모습~
(1940년대 초반 촬영 추정)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나오셔서 고향인 합천으로 가셨는데, 합천에서 경북 고령
고모님 댁으로 옮겨 6개월인가를 계시다 마땅치 않아 결국 방랑길에 오르셨다 한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당시로서는 천리길이 되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죽'이다.
일제치하에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 갔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으리오
마는 우리 아버지도 그중의 한 분인 셈이다. 그러나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도 역시나
특별히 갈곳이 없어 천리타관 낮선 곳 일가친척이 있을리 만무한 타관객지에서
새 삶을 꾸려야 했을 터이니 그 고생을 말해 무엇할까?
일찌기 일본에 건너가 그쪽 문물을 맛본 아버지가 타관에서 서툴은 농사를
겨우 겨우 지어나가는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농한기에 접어드는
한겨울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우리집으로 밤이면 항시 모여 오곤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본 사시던 얘기며 기타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러 오는것이었던 것이다.
시골 농부들은 밤이 깊도록 아버지의 옛 일본 얘기를 경청하였다. 어린 나도 방
뒷편에 쭈구리고 앉아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듣곤 했는데,,그중의 하나가 북해도의
눈 얘기였고 이야기 책들을 동네분들에게 읽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정식 학교 교육은 어떻게 된건지 알 수가 없으나 한문에 능통하셨고 필적이
좋았다. 면 서기들이 모르는 한문이 있으면 우리집으로 달려와 아버지한테 의견을 구하곤
했었다고 누님이 얘기 하시니,글 공부도 상당수준 이셨지 않나
생각이 든다.
또한 달변가여서 어떠한 상대 앞에서도 결코 주눅이 들거나 말로서 꿀리는
적이 없으셨다.강단이 쎄고 매사에 결코 어물쩡 타협이란건 없었으니 남자로서
기상은 출중하였으나, 현실에서는 모함도 많았고 거기다 시골 빈농의 서름을
많이 받으셨을 것으로 나름 추측해본다.
대표적인 예가 6.25 막바지에 뒷산으로 몇몇 동네 분 들과 끌려갔을
때이다. 전해 듣기로는 무슨 부역 문제로 아버지를 좌익인지 우익인지로 몰려는
협박이었다는데,,아마도 뭘 협조하라는 강압이 아니었을지로 추정해 볼 뿐이다
아버지는 단호히 노오..라 하셧고 동네에서 좀 산다는 어떤 이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네네,,했다는데 그후 그 집의 자손들에게는 상당한 멸시를 하셨고 시원찮은 집안이라고
상대도 안 하려 하신걸 기억한다. 이게 용감한건지 대책없이 자존심만 세우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오싹한 일이다.
대쪽같은 경상도 성격으로 생전 타협을 모르시던 아버지!!
지금 시대엔 그것이 맞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도
아버지의 그 추상같던 성품을 존경한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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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시절 -- 내가 살던 집 -1 (빼낙골 얘기)
노송산--해발 300여 미터~ 가 품고있는 능국리 전경~
저 산의 우측 중간 부근으로 쭈욱 내려와서 우리 동네가 끝에 붙어 있었다. 6,25가 한창인 1952년
가을 안성군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안성군 일죽면 능국리 389번지, 능국리 4개
부락중 제일 크다는 '동물' 이라는 곳 '분동' 이라고도 했다. 50여 호 되는 동네의 동쪽 언덕 너머 6
호가 전부인 바로 그 동네이다. 워낙 작은 동네 - 말하자면 미국의 하와이 같은곳 이라고나 할까, 그
곳을 사람들은 '빼낙골' 이라고 불렀다.
큰 동네 에서 빼놓은 곳이라는 설도 있고, 암튼 옛날 시골은 마을 규모가 작으면 은근히 무시당하던
풍토가 있었다. 허나 뒤로 노송산이라는 약 300M 짜리 산이 있었고 그 산의 줄기가 최종적으로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마지막 기착지가 된 곳이 바로 그 빼낙골 이라는 곳 이었다.아마도 풍수 지리
적으로 보면 나름 괜찮은 곳이 아니었을지^ 원래 능국리는 아버님의 고향이 아니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아버님은 일제시대 때 일찌기 일본으로 건너 가셔서 사셨다. 해방이 되자 위로
큰 형님과 큰 누님을 데 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옛 고향 합천은 잡풀만 무성했을터,,
엄마 고향인 인근 고령군 우곡면 고모집으로 가셔서 반년 정도를 버티시다 결국 고향을 떠나 다시
정착을 한 곳이 내가 태어난 경기 안성 일죽이란 곳이다.. 이것이 내가 일죽을 고향으로 두게 된
연유이다.
만일 아버지가 해방 후 다시 고국을 찾지않고 그냥 일본에 눌러 사셨다면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인가? 가끔씩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뭐 그런 의문이 안 드는 사람도 있을까? 십여년
전 내 가족들과 함께 바로 그곳, 경북 고령군 우곡면 엄마의 원 고향을 한번 찾아 보았더니,, 그곳은
낙동강의 주류와 합천에서 내려오는 황강이라는 지류가 딱 맞닿은 삼각주 같은 코너에 위치한 곳
이었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낙동강 수해를 피하기 힘든 그런곳 같았다.
1980년대에 찾은 고향 ~ 그나마 6 가구중 4 가구 정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최근엔 다 사라지고 한 가구만 남았다)
그 "빼낙골" 의 6번째 집 중에 다섯째에 위치한 초가집은 1946-7년쯤 이주하여
터를 잡은것인데 동네 사람들이 십시 일반으로 벽돌을 만들어 지어준 거라는
얘기를 수십년이 지난후 들었다. 안방 뒷방 부엌 한칸으로 이루어진 반자조차
없어 겨울이면 윗풍이 코를 얼리던 그 집!
허나 약간 높은곳에 위치해 아래로 논과밭 등이 좍 펼쳐보이고 아침이면
해가 들이던 그집, 먼 곳으로 충북 음성의 작은 산들이 부옇게 굽이굽이 보이던
집을 나는 차마 잊을수가 없다. 우리 땅도 아닌 남의 땅에 지은 흙집 초가지만 그곳에서
살던 때가 너무 그립다. 비록 형은 내가 다섯살때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곳에서
엄마 아버지 그리고 두분 누님과 단촐하게 십여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집에서 내려다 보이던 장호원 쪽과 충북 음성 쪽의 들판 (1980 년대 촬영)
다섯 여섯살 까지는 밑에 큰 동네를 내려가 볼 엄두를 못냈기 때문에 그냥 여섯집 마을의
몇몇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밖에 없었다. 처음 큰 동네를 내려갔더니 또래 애 들이
'욕' 이라는걸 하는걸 첨 알았다.
** 새끼 니 하는 용어를 처음 듣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놀랬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외에도 인근엔 '물탕골'이니 '능냇골'이니 '가릿골' '국골' 등이 있었고 장호원쯤으로 가면
'분디기' '반월성''가리울'같은 동네가 있었다. 뭐 대개 이름들이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빼낙골'이란 동네 이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부 친구들은 이제 와서' 빼어난 골' 이란 뜻이 아니냐..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고 많은 동네 이름중에 빼낙골이 무언가? 허나 억지로라도 나는 빼어난 골
이란 뜻으로 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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