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죽 시골에 사실때의 어머니.. 30대 중반이실듯
(도민증을 만드느라 찍어둔 사진이다,엄마 사진중
그나마 제일 잘 보존된 것이다)
 
 
엄마의 보따리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는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당시 우리는 원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을
떠나 안성의 일죽에 정착한터라 마땅히 농토도 없었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은 더구나
생각할수도 없는 터라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다. 다섯식구의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던 셈이다.
 
 해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개나리봇짐을 꾸려머리에 이고 인근 동네로 겨울한철 내내
물방구 장사를 나서야만 했다. 외로운 타향에 정착하여 추운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인근
동네를 하루도 쉬지않고 장사를 나서야 했을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봄 여름 가을 농사 일하면 겨울 한철 좀 쉬는게 유일한 낙인게 시골 아닌가?
 
아침에 나가서 해가 뉘엿뉘엿 할때 저 멀리서 오시는 엄마를 집 마당에서 볼 수 가 있었다.
그때 철없는 나는 생각하기를 어째서 울 엄마는 남들 엄마처럼 집에 있질 않고 저리
저녁때나 돼야 오는 걸까? 그게 늘 아쉬웠다. 어릴적엔 그저 엄마와 아버지랑 같이 있는게
제일의 보약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긴긴 겨울 방학 내내 엄마랑 같이 있지
못하는것이 못내 서운했던 어린 시절,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몇십리 길 추운
겨울에 다니며 점심은 간신히 동네 이집 저집에서 한술로 때우시던 엄마!

 
 몇년전 나는 어릴적 바로 옆집에 살던 나보다 4살위인 작은 누나와 친구인 누님이 사는
장호원 인근 동네에 우연히 간적이 있었다. 그 동네 사람중 몇분이 우리 약국에서 약을
드시고 기적적으로 위장병을 고친 이후 해마다 동네 사람들이 가을 걷이가 끝나면 한약을
지어 드시곤 해서 그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네옆으로 돌아 가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산 너머에 [가리울] 이란 동네가 있노라고 했다. 순간 나는 아! 바로 그
동네구나!

어릴적 엄마가 가리울 얘길 더러 하신걸 기억한다. 가리울,,우리 고향 빼나골에서 약
12키로쯤 떨어진 곳이다. 삼십리 정도이다.
어머니는
그 옛날 추운 겨울에 삼십리길을 걸어서 물건 보따리를 이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
가리울 동네 얘길 듣는 순간 눈앞이 희미해지며 그 동네를 걸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아픈 다리로 걸어 다니든 동네를 나는 이제 차를 타고 와서 인근
장호원 일대 동네 주민들에게 한약을 지어 드리고 있다니 ~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모틍이를 돌아 집으로 오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
 
 
*************
 
 
용꿈

엄마가 나를 가지셨을때 특이한 꿈을 꾸셨다한다.
어머니의 태몽에 용(龍)두마리가 치마폭에 들어 왔는데,,그중 한마리가
품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다. 아하,,,이런,,, 우선 태몽으로
용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문제는 나와 우리형이 딱 12년차 형도
용띠였던 것이다.

 
형은 내가 5살 되던해 그러니까 17세를 일기로 그만 하늘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용꿈..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요즘 같으면 복권1등에 당첨될 확률이
클것이고 그렇찮으면 무슨 큰 일을 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크게 빛내거나
뭐 그런걸까? 그런거 하나도 해당되지 않지만,, 이날까지 건강하게 나름
깡 시골에서 누구나 부러워 하던 서울대까지 나오고 잘 살고 있으니,,
일단은 엄마의 용꿈에 약간은 부합하게 살고 있는걸까?


단지 나와 띠동갑 용띠였던 형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것이 못내
아쉽다, 어찌 그리 엄마의 용꿈은 정확히 맞는단 말인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해이던가 물방앗간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maro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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