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 공판장에서 감성돔을 사서 포장하고 나니 벌써 3시가 넘었다.
이런,갈길은 먼데 이렇게 시간이^^
다시 강진쪽으로 되돌아서 보성을 향한다.
 
    강진 다 와서 보성으로 차를 틀어 나가는 순간,아니 이게 무슨 느티나무??
차를 세우고 다가가 보니 130년 된 것이란다. 균동 교차로에 있는 나무!! 수령에 비해 나무 가지의
기하학적 형상이 정말 기가 막히다.
  
   좀 더 다가가 찍어 보니 저렇다. 정말 나무는 백년이 지나면 저리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구나!!
 

 

 드디어 목적지인 보성 의 대한 녹차밭에 도착하니
하늘을 찌를듯한 삼나무!!
일본에 가면 흔히 볼수있는 바로 그 나무다.
아마도 기온이 비슷해서 이곳에도 많이 자라나부다. 

 

참으로 절묘한 콘트라스트다. 차나무는 50센티 미터 -

길어야 1미터 내외인데,,

 

여기에 50미터는 족히 되는
저런 나무가 있다니..
누군가 차밭을 일굴때,저런 기막힌 대비를 어찌 생각했을꼬^
나는 입구부터 카메라 셧터 누르기에 바빳다.
 
        매표소 부근에 핀 능수버들과 진달래,,그리고 삼나무
 

 

 

( 차밭 아래서 본 등선의 실루엣) 
 
   4월의 차밭은 아직 새 순이 나기 전이라 색감이 흐리다.
대신 마침 피어난 목련의 화사함이 건조한 느낌을
조금 누그려뜨려 주고 있었다

 

 

온 산이 다 불그레~ 하다

 

 

누가 청춘을 봄이라 햇든가?? 봄은 또 꿈 나라라 했든가?
아니 봄은 꽃 나라이다^^*  
산등성이에 펼쳐진 녹차밭을 내려오며 이제껏 경험 해본적없는 신선함을 느낀다.
우리나라에 정말 좋은 곳이 이렇게 많구나^
이제 해가 져가는지 어두움이 살짝 밀려 온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쩌랴^ 마지막
목적지인 낙안읍성으로 가보자^^
 

 

 
 보성을 지나 순천쪽으로 부랴부랴 달리는데,,  문득 길가에 딸기를
파는곳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벌써 하우스 딸기가?
차를 세우고 보니 길 옆 밭에는 딸기밭이 줄지어 있다.
얼굴도 까맣고 손도 검게 탄 아주머니가 딸기를 먹어 보라고 건넨다.
여기 딸기는 무농약이라 씻지않고 먹어도 된단다.
아! 참 부드럽다.
저거 한 다라에 만 오천원, 두 다라엔 이만 오천원.. 첨에 한
다라만 샀다가 다시 한 다라 더 주세요~ 했다.
이제 횟감도 챙겼겟다. 딸기까지 넉넉히 준비했으니 웬지
맘이 뿌듯해진다.
 
 
 어둑해진 길을 속력을 내어 달려 낙안읍성에 도착한다.
이미 매표소 직원도 퇴근하고 없어 우린 그냥 성읍내로 들어갔다
이제 구경을 마친 한무리의 아낙들이 한마디 한다.
[우리도 늦게오면 표 안사고 들어가는건데...]
그래,,늦게 오면 대신 충분히 볼수 없잖소? 에끼 이사람들아..
암튼 표 값 굳었다.
배꽃이 이미 이곳엔 피어 있엇다.
누구는 천하 제일의 타임머신이라 했고 누구는 가보나 마나한
별볼일 없는 곳이라하고,,,
모두가 볕집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이다. 
 
 성내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은행나무다. 앞에 사진처럼 이곳엔
복사꽃이 집집마다 많이 피어 있다.
복사꽃,,,향수를 자아내는 추억의 꽃이긴 하지만,,저건 사실 자세히
보면 무섭게 생긴 꽃이다. 웬지 꽃잎이
매섭고 뾰죽하며 으시시한 기분을 자아낸다. 부지런히
돌고돌아 성을 한바퀴 다 돌아본다. 혹시 다음에
올때 민박할 곳이 없나 유심히 살핀다. 

 

영락없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다.
 

 

 
  저런 민박집이 수십채는 족히 됨직했다. 배도 고프고 하여  주막집에 들러 국밥을 시켰다.
보성에선 꼬막을 먹어 봐야 한다 해서 꼬막도 한 접시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 한 병도 더 가져오라 했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시간이 되어 간다.
 
8시경이 되니 주인과 일하는 사람들이
[ 우린 먼저 가니 나중에 다 드시고 불끄고 가소] 한다.
헛,,이거야...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현관의 불을 꺼주고 동네를 나섰다.
성 밖으로 나와 휘발유를 채우고 네비에 의존해 집사람에게
운전을 맡기고 밤 길을 달린다. 산 길을 올라 선암 IC 로
진입하니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세찬 소낙비를 뚫고 광주를 지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1박 2일의 짧은 남도 여행이 이제 다 끝나간다.
 
 
4월말의 영랑생가엔 목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고,,
8월초의 백련사엔 배롱나무의 꽃이 진한 핑크빛을
발하고 있을게다. 마량포구엔 언제나 싱싱한 바닷고기들이
펄떡이고 있을테고,, 다산초당엔 언제나 처럼
글읽는 소리가 하늘로 울려퍼질게다!
 
생전 처음 가 본 남도 여행^^ 언제 또 어떻게
다시 가 볼 수 있으려나!
2010년의 봄은 이렇게 남도의 봄으로
채색되어 남아 있을것이다.
 

 

아득히 먼곳 /maronie

 

 

 

 

 
 맑은 바닷물은 아니지만,,얼른 차를 세우고 사진을 한장 찍어 본다^^*
곧 이어 도요지에 도착을 한다. 
 
 
 
입장권을 끊고 서둘러 청자 박물관에 입장을한다. 청자는 가까운 이천
도요지에서도 더러 봐 온터라
실상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다. 뭐, 청자가 다 그렇지.
헌데 강진의 청자는 그 느낌이 이상하게 많이 달랐다.

 

청자는 나무를 태워 굽는것이 제일로 치고 값도 많이 나간다.
그냥 기름을 때서 굽는건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위의 청자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가격은 만든 공에 비해 그리 비싸 보이지
않았다.
 
위의 작품은 언뜻 보아도 품이 엄청 많이 들어가 보인다.
단 한번에 도공의 손끝으로 저런 무늬를
만들고 굽고 또 거기서 잘 못된거 솎아내고 온전한
제품중 저렇게 하나 만들려면 그게
어디 간단한 일인가?
청자를 잘 모르는
필자가 보아도 저건 귀해 보인다.
 
이 작품도 국보 무슨 청룡모양 청자라는데  밑에
가격을 보면 120마넌 정도 하는 거란다.
색감이 약간 청자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유약의 재료가 틀리나부다.
 

 

여기 꽤 근사한 청자들이 보통 저런 가격에 경매를 하여
팔린다고 했다. 매주 토요일엔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청자 경매를 실시한다고 하니 ,
가급적 토요일에 강진을 방문하시면 잘하면
저렴한 가격에 고려청자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거 같다.
우리집에도 청자 비스므리한게 있지만,
이곳 청자의 색감과는 거리가 먼것 같았다.
 
작품 하나 더 감상^^
 
이건 중국것인지~ 암튼 좀 색감이^^
 

 

이것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사의재를 새겨넣은 저 청자를 기어히 하나 구입했다.
조상님께 따를 약주 주전자도 하나 구입하고
막걸리용 청자 잔을 두개 샀다. 아무래도 막걸리도
맛이 다르지 않을까?
박물관 밖에도 청자를 판매하는 가게가 많았다. 거기에 들러
밥공기와 국 그릇용으루 청자를 다섯
세트씩 구입했다. 청자 밥공기라 ㅎㅎ
완전한 제품은 개당 만원씩 받는데
아주 미세하게 틘제품은 3천원이다. 
어차피 쓰다 깨질거~우린 3천원짜리로 구입을
완료했다. 

 

무슨 나무인가.. 멋지게 자라고 있었다.  
이제 마량항구로 향할 차례다. 엊 저녁 강진읍내의 한
약국에 들러 씨즈날을 한통 사며
70은 족히 넘었음직한 약국장님한테 조언을 구하니,
청자 도요지와 마량항을 꼭 들러 보라 하신다.
대체 마량이 무엇이길래 그럴까??
 
마량항 가기 전에 보이는 동그란 섬이다. 까막 섬이라 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꽤 운치가
있을거 같은 섬이다.

 

 

마량에 도착하니 흿뿌연 하늘이 더욱 을씨년 스럽다. 포구에 차를 주차하고
늘어선 횟집 중 완도 횟집이란델
찾았다. 어디서 본 글에 거길 추천하는걸 보았기 때문이다.
주인 할머니는 아주 커다란 감성돔을 집어
올리며 20마넌이라 한다. 크~둘이서 먹긴 너무 크다.
좀 작은걸~요 하니 우럭을 들어 올린다.
그건 10마넌 이란다. 됐다. 그 정도면,
낙찰을 보고 2층 방에 올라와 기다린다.
단출한 밑반찬이지만 하나 하나가
모두 기막히게 감칠맛이 있다.
 
음식이 올려지자마자 사진을 찍지 못해서,좀 그렇지만
예전에 군산에 가서 저것보다 다섯배 이상되는
소위 쓰끼다시를 대해본 적도 있지만 음식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이곳에서 다시 절감한다.
주인 할머니가 2층 계단을 숨차게 오르내리며 몹시 힘들어 하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사위가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주겠다 하는데
할머니가 그냥 두라했다고^^
[할머니! 좀 힘드시드래두 오르락 내리락 하시면 운동되고 좋을거예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아무래두 맘에 그게 걸린다. 해서
[약국에 가셔서 이런걸 좀 구입해 드세요]
 
하니..딸이 약사랜다. 이 동네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아하,이런 그래도 뭔지
그거 처방좀 써 달랜다. ㅎㅎ 나오면서 종이에
[콘드로이친 300 미리그람]이라고 써드렸다.
이보다 단위가 높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낮으면
효과가 적어진다 면서
 
식사를 마치고 포구로 다시 나가니 앞에 수협 공판장이란데가
보인다. 아내는 저곳을 들르자고한다.
원체 우리집 딸래미가 바다회를 좋아해서 마음에 좀
걸리는 모양이다. 공판장 맨 뒤로 들어가니
아줌마 한분이 30호 경매사란 모자를 쓰고 횟감을
다루고 있다.
식당에서 못 먹고 온 감성돔을 가르키니
꽤 큰 놈 3마리에 5마넌 이란다. 눈이 번쩍 띄인다.
더구나 여기는 養植이란 말 자체가
없는 곳이라니... 자연산 싱싱한 감성돔 3마리!! 크^^
포장해서 일단 집 주소로 택배를 부쳤다.
 
 
 

다산초당의 얼크러진 나무뿌리길을 어수룩한 저녁에 내려오는데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 저위에 백련사 넘어가다 시간이 늦어 그냥 내려오는길입니다. " "아이구 그래요?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못보면 후회가 될겁니다" " 앗! 그런가요? 이런,,그럼 차를 돌려 얼릉 가봐야겠구만요"

그는 대전서 왔다하면서 근데 영랑 생가같은덴 가보시면 후회할겁니다. 별 볼게 없어요...했다.

 

 

백련사 입구부터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 숲

 

 부랴부랴 어둑해지는 백련사에 당도해 동백숲을 보러 올라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한 아내는

차에서 쉬겠다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동백꽃이야 아까도 보질 않았느냐고,,,하며,,,

 

백련사의 목백일홍 나무

 

올라가는 길은 동백과 비자나무숲이 빽빽했다. 숲에서 우는 새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부랴부랴 오르니

눈앞에 저런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목백일홍나무가 저렇게 멋지게 생긴거는 아무튼 나는 처음이다.

 

 

   나무의 얼키설킴이 저렇듯 대단하다. 아! 정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련사의

역사를 백년은 족히 기억하고 있음직한 나무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멀리 구강포구 를 바라보니 으스름 저녁인데도 해안도로주변에 벛꽃이 만발한게 끝도 없이

펼쳐진다. 숙박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우선 저 길을 달려보고싶다.

 

 

해는져서 어두운데,,저 건너 칠량의 불빛과 산세가 어렴풋 다가온다. 아..이토록 멋진 저녁풍경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니,,,적막한 저녁 방파제를 조용히 달려본다.

 

                    포구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곳이 강진 시내 쪽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 으시시해서 얼른 차를 돌려 강진 시내로 향한다. 올때 봐두었던 남도장 여관을 연락하니

그만둔지 10년이란다. 근데 전화는 ..우째 받을꼬~ 이런,,결국 유명하다던 한정식집 해태식당도 시간이 늦어

안되고,,암튼 간신히 저녁을 어느식당에서 해 치우고 겨우 숙박도 해결했다. 더러 보이는 관광버스 손님들이

시내 숙박업소를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왕창 들었다. 어디갈땐 제발 좀 예약

좀 하고 댕기라고^^

 

 

  무화과 나무의 덩쿨모습  

 

묵었던 온천장 여관 앞집에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하도 신기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저게

무화과나무란다. 사진은 그저 그러해보이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자 드디어 영랑의 생가이다. 강진 시내의 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꽤 면적이 넓고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쳐 있는 뒷담을 끼고 자리잡은 생가는 한눈에 봐도 명당임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여기서 멀리 구강포구가 어렴풋이 눈에 잡힐 그런곳이니 말이다. 

 

 

한눈에 봐도 얼마나 좋은 곳인지 ~~

 

             뒷뜰에 흐드러 지게 피어 떨어진 동백꽃들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방문틀에 끼워 놓은 동백꽃!! 이곳은 동백이 함박눈처럼 날린다^^*

 

 

              별채 앞에 피어있는 겹동백의 어여쁜 모습  

 

 

은행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자란게 있다^^*

 

 

       동백 한 닢을 손에 들고 영랑의 집 손님이 되어본다.

 

 

뒷뜰의 동백,,,백련사의 동백에 전혀 뒤지지않는 멋진 자태다.

 

            생가 우측 높은 곳에 자리잡은 금서당(琴書堂)..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소학교 였다는데,,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도 씌였다 한다.

 

금서당 뜰에 피어있는 꽃

 

 

                    이곳 언덕에 누워 멀리 포구를 바라보면,,, 영랑 시인의 한분 누님이 떠오른다 했든가??  

 

 

 

 이제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란이 생가 뜰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면 저 모란이

벌겋게 만개할것이다. 지금도 저리 멋진집인데,,모란이 피면 정말 영랑의 생가는 詩로 만발할것이다. 그때의

생가를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다산 초당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가 말한 " 별거 없어요..실망 할겁니다" 란 말이 전혀 틀렸다는걸 실감하며 동백과 대나무가

어울러진 이땅에서 볼수있는 정말 멋진 집을 나는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1948 년도에 이집에서 떠나 서울로 향했다던 영랑!! 그는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서울을 택했을까? 서울로 간 그는

1950년 6.25 동란에 부상을 입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강진이 낳은 천재 서정시인이 그렇게 사라질 줄

이야^^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maronie

다산 초당의 얼크러진 나무뿌리 길을 어수룩한 저녁에 내려오는데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 저 위에 백련사 넘어가다 시간이 늦어 그냥 내려오는 길입니다. "

하고 내가 말하니~

 

"아이구 그래요?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못 보면 후회가 될겁니다"

라고 말한다

 

" 앗! 그런가요? 이런,,그럼 차를 돌려 얼릉 가봐야겠구만요"

 

대전서 왔다는 그 분은 동백나무숲은 찬양을 했지만

 

"근데 영랑 생가같은덴 가 보시면 후회할겁니다.

 

별 볼게 없어요 "

했다.

 

 

백련사 입구부터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 숲

 

 

 부랴부랴 어둑해지는 백련사에 당도해 동백숲을 보러 올라 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한 아내는 차에서 쉬겠다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동백꽃이야 아까도 보질 않았느냐고 하며,

이런^

 

 

백련사의 목백일홍

 

올라가는 길은 동백과 비자나무숲이 빽빽했다. 숲에서 우는 새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부랴부랴 오르니 눈 앞에 저런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목백일홍 나무가 저렇게 멋지게 생긴거는

아무튼 나는 처음이다.

 

 

 

😛


 

   나무의 얼키설킴이 저렇듯 대단하다. 아! 정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련사의 역사를 백년은 족히 기억하고 있음직한 나무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멀리 구강포구 를 바라보니 으스름 저녁인데도 해안도로

주변에 벛꽃이 만발한게 끝도 없이 펼쳐진다. 오늘 숙박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

 

우선 저 길을 달려보고 싶다.

 

 

 

해는져서 어두운데,,저 건너 칠량의 불빛과 산세가 어렴풋 다가온다.

 

아..이토록 멋진 저녁 풍경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니,,, 이곳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적막한 저녁 방파제를 조용히 달려 본다.

 

 

      포구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곳이 강진 시내 쪽이다.

 

(당시 카메라가 시원찮은 것이라 저녁 사진이 이렇다)

 

아무도 없는 길이 으시시해서 얼른 차를 돌려 강진 시내로 향한다. 올때 봐두었던 남도장 여관을 연락하니

그만둔지 10년 이란다. 근데 전화는 우째 받을꼬~ 이런,,결국 유명하다던 한정식집 해태 식당도 시간이 늦어

안되고,,암튼 간신히 저녁을 어느 식당에서 해치우고 겨우 숙박도 해결했다. 더러 보이는 관광버스 손님들이

시내 숙박업소를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왕창 들었다. 어디갈땐 제발 예약

좀 하고 댕기라고^^

 

 

무화과 나무

 

 

묵었던 온천장 여관 앞집에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하도 신기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저게 무화과 나무란다. 사진은 그저 그러해 보이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자 드디어 영랑의 생가이다. 강진 시내의 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꽤 면적이 넓고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쳐 있는 뒷담을 끼고 자리잡은 생가는

한 눈에 봐도 명당임이 틀림 없었다.거기다 여기서 멀리 구강포구가 어렴풋이

눈에 잡힐 그런 곳이니 말이다. 

 

 

 

척 봐도 얼마나 좋은 곳인지 ~~

 

 

             뒷뜰에 흐드러지게 피어 떨어진 동백  꽃들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방문 틀에 끼워 놓은 동백꽃!! 이곳은 동백이 함박눈처럼 날린다^^*

 

 

              별채 앞에 피어있는 겹동백의 어여쁜 모습  

 

 

은행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자란게 있다^^*

 

 

       동백 한 닢을 손에 들고 영랑의 집 손님이 되어 본다.

 

 

 

뒷뜰의 동백,백련사의 동백에 전혀 뒤지지않는 멋진 자태다.

 

           

생가 우측 높은 곳에 자리잡은 금서당(琴書堂).. 독립 운동의

산실이자 소학교 였다는데,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도 씌였다 한다.

 

 

금서당 뜰에 피어있는 꽃

 

 

                   

이곳 언덕에 누워 멀리 포구를 바라보면,

영랑 시인의 한 분 누님이 떠오른다 했든가??  

 

 

 

 이제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란이 생가 뜰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면 저 모란이 벌겋게 만개할 것이다. 지금도 저리 멋진 집인데,,

모란이 피면 정말 영랑의 생가는 詩로 만발할 것이다. 그때의 생가를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다산 초당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가

 

 " 별거 없어요..실망 할겁니다"   

 

란 말은 전혀 틀렸다!!

 

동백과 대나무가

어울러진 이 땅에서 볼수 있는 정말 멋진 집을 나는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1948 년도에 이집에서 떠나 서울로 향했다던 영랑!! 그는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서울을 택했을까? 당시 많은 시인 문인들의 주 활동 무대가 서울이라서

그랬을까?

 

서울로 간 그는

1950년 6.25 동란에 부상을 입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강진이 낳은 천재 서정 시인이 그렇게 사라질 줄

이야^^ 너무나 아쉬운 결과이다.  

 

 

 

 김영랑 생가를 돌아본후 얼핏 보니 부근에 사의재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땅으로 유배되어

왔을때 모두들 피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둥 마치 외계인 대하듯 할때 따뜻히 그를 맞아준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문밖(당시는 강진에 성곽이 있었다) 사의재라는 주막집이었다. 이곳 주모되는 할머니가 다산을

측은히 여겨 그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는데~

 

 

90년대만 해도 이곳을 찾을수없어 안타가워 했던 곳이다. 아마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 청장이 된후 사의제를 포함한 몇곳을 복원한게 아닐까..추측을 해본다.

왜냐면 그의 저서에 사의재의 유적지를 찾지못한 걸 못내 아쉬워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자그마한 초가집에 방 한칸을 다산 선생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막주인 할머니!!

아마도 하늘이 도움을 주러 내보낸 이가 아닐까..

 

 

 

이젠 이곳이 실학의 4대 성지로 불려지는 곳이 되었다. 1801년 11월 23일 날도 차고 바람도

심했을 11월 말의 강진 땅에 간신히 거처할 곳을 마련했을 때의 다산 선생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더구나 실의에 빠진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는가? ]

 

라는 주막 할머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아 경세유표 같은 불후의

명저를 남긴 곳이 바로 이 골방이었다니....참으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사의재...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나는 고려 청자 도요지에 가서 결국 사의재가 적힌 청자 판을 하나 구입했다. 그

냥 식탁 옆에 두고 수시로 읽어볼 요량이었다.

 

 

 

 사의재에 걸려 있는 다산의 시 한수입니다. 당시나 오늘이나 세상 사정은 늘

비슷한가 봅니다. 그래봐야 불과 200년 전 일이니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셈이군요^^*

 

그런 세상이었건만 오늘같은 나라로 성장한 걸 보면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음,,여기에 잘 나타나 있네요^^* 1803년 12월 초열흘이니 1801년11월 23일

처음 이곳에 정착한지 대략 2년쯤 경과한

때입니다. 다산선생도 주역을 읽고 계셨군요!!

 

 

 

  물론 최근에 복원시킨 거겠지만,,아담한 우물이 여기도 있읍니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들여다 보니  식음으로 사용은 못하겠드라구요.

 

 

 

 

다산 선생에게 힘을 주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는 주막집 할머니와 그의 외동딸

기념 동상입니다.

 

저는 주막집 뒷편에 있는 저 할머니 동상을 두손으로 어루만져 드렸읍니다.

 

" 할머니...고맙습니다^^ " 하면서 ~ 물론 다산과 저 딸과의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요?

 

 

 

 주막집 입구에는 이렇듯 앵두가 피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참으로 이곳  사의재를 복원한것은 정말 잘한 일 같읍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이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요^^

 

비록 작은 주막집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둘러 보고 나오는 강진의 하늘과 동네는

더없이 청량하고 맑게 느껴 졌읍니다^^*

 

무소의 뿔처럼 - 범능 스님 고규태 시
1.가라 좋은 벗 있으면 둘이서 함께 가라 가라
좋은 벗 없으면 버리고 홀로 가라
달빛엔 달처럼 별빛엔 별처럼 바람불면 바람처럼 가라
<후렴>내가 나에게 등불이 되어 그대 홀로 등불이 되어
함께 못 가도 같이 못 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가라 나의 맘 고우면 나누며 함께 가라 가라
나의 맘 탁하면 버리고 홀로 가라
꽃길엔 꽃처럼 물길엔 물처럼 천둥치면 천둥처럼 가라

 

 

무위사 경내를 부랴부랴 둘러보고 나니 벌써 저녁 6시 가까이 되어 버렸다.
얼른 강진 시내를 거쳐 귤동 정약용 선생의 초당으로 가야하는데,,시간이 빠듯했다.
강진을 왼쪽으로 끼고 포구를 보며 가는 길은 평지 시골 논밭길이다. 예전엔 포장이
안되어 진흙탕길 이라는 바로 그 길이다. 백련사라는 간판을 우측으로 보며 조금더 가니
자그마한 동네가 나온다.
여기가 그 '귤동' 이란 데구나!
차 한대만 겨우 들어가는 마을길을 조금더 올라가니 주차장도 아닌 겨우 차 몇대 세울수
있는 공간이 막다른 끝이다. 무슨 매표소 같은거라도 있나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걸어서 몇백 미터만 가면 초당이 나온단다.
참고로 정약용 선생은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며
선생님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고 또한
윤두서는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 된다.
고산 윤선도라~~ 어쩐지,

 

( 귤동 끝에 자리잡은 아담한 집 한채..벛나무가 고목이 되어 있다)
 
이 집을 끼고 위로 천천히 올라가 본다. 그냥 산 초입은 여느 동네의 야산과
다르지 않다. 몇발자국 올라가자 나무 등걸이 얼키고 설킨 산 길이 나온다.
정호승 시인이 이 길을 오르며 쓴 싯귀가 옆에 걸려 있다.

 

 

앙상하게 뿌리가 드러난 산길을 보는 시인의 마음은 저러했다.
다산이 유배지인 이곳 산길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지는
어렴풋 짐작은 되는데^
고속도로 자동차로 오는데도 허리가 휠것같이 먼 그 길을
조선시대 말을 타거나 걸어서 왔을 터이니,
당시 유배자에 대한 대접은 어떠했을까?
 
  조금 더 오르자 대나무와 삼나무가 곧고 길게 자라 오른 틈새에 동백이
간간이 섞여 무성한 숲을 이루기 시작한다. 바닷가 근처
야산 치고는 울창한 수목이다.
나무 등걸에 떨어진 동백꽃이 보이시나요?
 
 
 조금더 올라가니 초막 한채가 눈에 띈다.차성각 이라고 하는 서암 이란 곳으로
초당의 주인인 윤단과 그의 아들들 및 제자들이 거처하든 곳이란다.바로 옆에
약간 우측으로 비로서 다산초당이라는 집이 보인다.
초의선사의 다산초당 옛모습 그림 
저 초당위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원래 다산 유배 시절에는 이보다 작은 초당이었는데 후세에 조금 규모를
키워 지었다고도 한다
아, 이것이 다산초당이구나^^* 
초가  지붕이 아니고 기와 지붕이다.

 

    약천이라 불리우는 약수터가 바로 집옆에 있었다. 옆에 바가지로
시원하게 한모금 마셨다. 아마도 다산도 이 물을
마시며 여러 책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을게다. 
 
 
   초당 모서리 방 위에 쓰여진 관어제..바로 옆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여기에 붕어 잉어등 물고기를 키우던 곳이란다. 이 방 툇마루에 앉아
노니는 고기들을 바라보는 곳이었단 얘기 같다.
 
  
   이 글씨가 다산초당 바로 옆에 지어진 다산동암에 걸려있는 것인데,,
다산보다 24년 밑인 추사 김정희가 나중에 써 보냈다는
얘기가 있는 바로 그 글씨이다.
寶丁山房 !! 
 
 
 같은 건물 옆방에 걸려있는 다산동암..다산이 직접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 글씨에 대해선 일찌기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이곳에 유배당시 2000 여 권의 장서를 가져다
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니..숙연한 마음이 든다
 
 

 

 
 원래 다산의 유배시절엔 없던 정자인데,,,이 부근에 올라 멀리 강진 포구를
바라보며 흑산도에 유배를
당해있던 형 정약종을 기리며 상념에 젖던 곳이란다.
이곳을 올라보며 당시의 그 말할수 없는 다산의
회포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했다. 저 멀리 바다 건너가
칠량땅이고 그 너머가 마량이란 항구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청자 도요지가 그곳 가는 길에 있었다.

 

 
강진만으로 난 해안도로 저편에 벛꽃이 화사하게 줄줄이 피어있는게
백련사에서도,다산 초당에서도 보였든 바..어둑해진 도로를 따라 나서 보니,,
인적도 없는 저 멀리 마량 포구 쪽이 감감하게 다가 온다. 차를 길 옆에
세워두고 강진포구의 저녁 적막을 한동안 느껴본다.
 
아! 얼마만인가,,이렇듯 적막함에 물들어 가는 포구를 바라보는 것이^^*
다산 정약용이 다산 동암에서 썻다는 작품 하나를 소개해 올리면서
일단 여기서 글을 맺기로 한다.
------
 
 9월 12일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 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
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하니
그 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때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 버리니
이것은 인간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유홍준 저서에서 인용 -

 

 

 

울아버지에 대한 기억---(2) 앵속 재배사건
 
 

시골 큰 개울가에 우리는 약 3000 여평에 달하는 모래가 주 성분인

 밭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 밭이 생긴 건지 또 개간을 한 건지는

 잘 알 수가 없고 암튼 그건 우리 다섯 식구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 밭에는 호밀을 비롯 하여 감자 고구마 땅콩 무우 배추 참깨 들깨 목화 

보리 등 다양한 곡식을 심어 키웠다. 헌데 옛날 시골에는 이렇다 할 진통제나

 藥이 귀했다. 간혹 배가 아프면 아버지는 조그만 양철곽에서 노란 액체 비슷한 

걸 조금 떠서 먹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양귀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밭 곡식 사이에 양귀비

 몇 그루를 심어 즙을 내어 진통제등 상비약으로 쓰신거였다. 허나 난 어릴적 

그 양귀비를 본 기억이 없다. 헌데 누군가 그걸 찔렀던 모양이다.

 워낙 곧이곧대로 원칙주의자인 아버지는 동네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고

 더러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된듯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인해 수원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일죽에서 수원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셨는데 그 당시 

교통 수단도 불비했겠지만 아버지는 재판 받으러 가시기 얼마전부터 집신을

 넉넉히 짜시곤 했다.

 

그 집신 만들기는 당연 먼 길을 오가야 했던 신발 대용이었고 당시 안성읍에 

수원 지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일죽-안성, 아니면 일죽-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오시곤 했다 한다 (일죽-안성 =26km,일죽-수원= 약 50km )

 

먼 길을 걸어서 재판 받으러 올라 온 시골 촌로의 양귀비 재배사건~ 그것도

응급용 약으로 쓰겠다고 기른걸 두고 당시 판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배가 아플때 먹을라고 몇포기 기른 양귀비인데 뭐가 잘못이냐?

할일이 없어 이런걸 가지고 날 오라 마라 하느냐? "

 

 

그렇게 하시고도 남을 분이 우리 아버지다. 

 

당시 무슨 변호사 도움을 받았을리도 만무하고 순전히 혼자 재판을 

받았지만 아무 탈없이 재판은 무혐의로 끝났고 그 이후로도 아주 

소량이지만 양귀비를 한 두포기 심으신 걸로 기억을 한다. 당시 

아버지가 걸어서 오갔다는 그 수원에서 나는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 

약국을 하고 있으니 이것도  어떤 인연이라

할수 있지않을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3) 도개비 불 이야기

 

 

 

우리집은 약간 평지에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큰 동네에서 약간은 떨어져

 자그마한 야산 턱에 위치해 이름 조차도 [빼낙골] 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전부 

합쳐 여섯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이다.

 

집 앞에서 밭을 수십고랑 지나면 약 300며 미터 앞으론 일제때 지나던 안성-여주간 

철도가 있었다. 그 철도 부지에 자갈을 힘들여 개간한 우리 논도 천수답이지만 

한마지기 정도 있었다. 헌데 이곳 철도가 지나던 곳이 문제였다. 6.25 사변때 

그 철둑길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었고 그때 공습이 수시로 있어 그곳 철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길 듣곤 했었다.

 

여름철 비가 줄줄 내리던 어느날의 일이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밤이 깊어 나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갑자기 아버지가 일어 나시더니

 

[저것좀 봐라~ 내 이놈의 도깨비 녀석 가만 안 둘테다]

 

하셨다.나도 잠이 깨어 봉창으로 앞을 보니 저 멀리 철길쯤에 웬 등불 같은것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게 아닌가?

 

아버지는 "저거이 도깨비 불이라고들 하는데 필시 저건 사람이 그러는 거다. 

내가 가서 어느놈이 장난을 치는지 요절을 내고 올테다 ~" 하시면서 큰 작대기를

챙겨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난 무서워서 맘을 조리며 그 등불 같은 것이

 어찌 되나..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헌데,,아버지가 그쪽으로 다가 

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등불은 갑자기 없어 지고 칠흙같은 어둠만 깔리고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다니는 어떤 인간을 작대기로 두들겨 패

 버린건 아닐까? 무슨 일일까? 한참 만에 되돌아온 아버지 말씀이

 

" 거 참 이상하네,,분명 어느 놈이 있는거 같은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으니,원"

 

하시는게 아닌가. 일설에는 여름철 도깨비불의 정체는 인(燐) 이 발광하는 것이라

 하는데,,그게 사람이 아닌게 맞긴 맞는거 같다. 꼭 사람이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던 비오는 여름밤의 불...또 그걸 정체를 파헤쳐 보겠다고 

칠흑같은 밤에 맞장을 떠 보시던 아버지.. 물론 꽤 옛날 얘기긴 하나 지금 나

 같으면 밤에 도깨비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용감하기도 하고,,어찌보면 호기심이 발동하면 위험도 불사하고 끝장을

보고야 마시던 성격의 아버님 이시다. 아마도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한번

 시작하면 그 정점까지 추구하는 성격은 아버지의 그런면을 딞은 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그 여름밤 비오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 어느 땐가 그 언젠가 비오든 그날 밤

그대와 단둘이서 우산을 같이 받고 ~"

 

안정애가 부른 '밤비의 부르스' 이다

 

이 노래가 당시 상황과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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