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을 찾아오는 분들 중 가장 많은 경우는 무엇일까?

제1은 아마도 파스를 찾는 분들이 아닐까?

 


허리가 삐끗했다, 자고 일어 나니 목을 돌릴 수 없을 만큼아프다~

길 가다가 발목이 접질렸다, 주부들 중 상당수는 안 하던 일을 많이 해서

손목이 아프다, 등등

 

심지어는 강아지 데리고 가다가 목줄에 몸이 감겨 넘어져 갈비뼈가 금이 갔는지

의심스럽다는 이가 없나 참 다양하고 기기 묘묘한 환자가 많다.

 


그러나 파스의 종류는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케토톱으로 대변되는 살갗에 붙인 후

유효 성분이 시간에 정비례하여 쭈욱 흡수된다는 제품류부터, 한방을 이용한 한방파스,

동전 크기의 동전파스, 습포제를 동반한 제놀 종류의 제품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듯하다

 


나 자신도 오래 골프를 치다 보니 고질적인 손목 통증을 갖게되어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파스를 사용해 봤다. 거기다 최근엔 무거운 카메라를 왼손으로 지탱하다 보니

여전히 통증이 진행형인 셈이다.

 

나의 경우는 진통제 성분이 직접 들어가지 않은 한방 파스를 애용하는 편이다.

약간의 냄새는 나지만~

 


"냄새 없는 걸로 주세요~ " 허나 냄새가 없는 제품은 전부 진통제가 함유된 제품이다.

진통제가 되었건 뭐건 소비자들은 일단 빨리 안 아픈 걸 찾는다.

 

 

그런데 잇몸에 관련된 호소를 하는 분들도 의외로 많다.

젊은 사람들이야 잇몸의 문제가 뭔지 이빨이 무슨 속을 썩히는지 알 턱이 없지만,

틀니 소독제를 사러 오는 분들을 볼 때마다

 

" 아! 나는 제발 틀니 까지는 가지 말아야지~ "

 

차선책인 임플란트로 막을 수 있다면 훌륭하지 않을까? 를 늘 생각 중이다.

 

그런데 며칠 간격으로 연속 치과 처방을 들고 오는 분들을 보면

가끔씩 한마디 건네 본다.

 

" 왜 치과를 계속 오시나요? "

 

" 잇몸이 약해서 치료를 계속 받는데 영 안 좋아지네요~"

를 비롯해서 충치 치료를 하는 사람, 임플란트 시술 중인 사람, 사랑니를 뽑은 사람

, 등등 여러 경우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 60 정도가 넘어서 이유 없이 이가 나빠지고 잇몸이 약해지는

경우이다. 사실은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치아 자체는 그다지 튼튼하게 태어나지 않은 편이라

나름 조심을 해 오긴 했는데, 적어도 10년 이전부터라도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대비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불과 2-년 전부터 겨우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예전엔 편균 수명이 60이 채 안 되었고 그 마저도 칫솔질을 제대로 안 해 치아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나빴던 게 사실이다. 거기다 과도한 출산으로 인해 나이 40만

넘어도 칼슘 부족으로 이가 많이 빠지고 단백질 섭취가 부실해져 거의가 60 이전에 죽고

만 것이다. 그러니 치아의 문제가 오히려 지금 현세대보다 역설적으로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90세 100세로 가다 보니 뼈의 문제가 예전과는 달리 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인체의 대들보가 되는 척추와 팔다리 그리고 영양 섭취의 첨병인 치아는 대체 몇 살까지

버티도록 애초 설계가 되었을까?

 

60년일까? 70년일까? 아니면 90년일까? 100년일까?

분명한 건 특정한 기간 일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 받은 몸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나이 60 정도가 되기 전에 어떤 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예전 60년 살던 인간이 영양 상태가 좋아졌다고 아무 대비도 없는데 90년 100년을

무탈하게 갈 수는 없을 것이란 점이다. 물론 지금은 현저히 의료의 혜택을 많이 보고

있긴 하지만!

 

즉 뼈와 인대 근육에 필요한 원료를 충분량 공급해줘야 함은 물론 이것들이 복합하여

넉넉히 우리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도록 적절한 운동 등이 따라야 할 것은 물론이다.

 

 

오늘 이 동네 사시다가 멀리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신 70이 좀 넘은 고객분이

세 번째 치과 처방을 들고 오셨다.

 

" 도대체 왜 계속 치과를 오시나요? "

 

" 충치 이런 건 하나도 없는데, 잇몸이 좀 부실하대 "

 

나는 예의 위에 이런 문제를 한참을 설명드렸다. 그리고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을 또 말씀드렸다.

칼슘 마그네슘 복합체인 영양제품과 MSM 성분의 제품 2가지를 우선 꾸준히 1년도 좋고 2년도

좋으니 계속 드시라 했다. 사실은 향후 10년 이상이 된 들 하등 나쁠게 없는 일이지만~

 

물론 잇몸 염증과 부실한 치아를 보강하는데 위의 방법 외에 여러 좋은 방법이 당연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일단은 내가 하는 방법을 소개해 드렸다. MSM 은 Powder로 해외 직구를

해서 한 동안은 치약 대신 양치질에 사용해 보기도 했었다

 

비타민 D 나 골다공증 제품도 좋으나 일단 흡수율 높은 뼈의 원료인 Ca 이 충분히 공급되어야

하고 급성 심장질환에 좋은 예방제인 Mg 또한 나이 들어서는 필수이다. 콜라겐이 함유된 염증

제거에도 좋은 MSM 역시 물론 요긴한 제품이다. 문제는 급이 좀 낮은 Ca 복합제품의 경우

우리 몸에 흡수가 너무 조금만 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우유 칼슘에는 의외의 패러독스라는 게 있다.

어려서부터 뼈 = 우유라는 공식을 누구나 알고 왔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 이것이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 밝혀졌다.

 

즉 우유를 많이 먹는 덴마크, 스위스 등의 나라와 우유 섭취량이 현저히 적은 중국, 아프리카를

비교한 결과 고령층의 고관절 fracture(파손) 율이 덴마크나 스위스가 훨씬 높다는 것으로 밝혀

졌다. 이것은 단순히 우유를 많이 먹어 칼슘만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뼈의 건강을 무조건 담보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2019년 악성 어깨 통증을 거의 1년에 걸쳐 완전히 회복할 때도 위의 성분들은 필수였다.

물론 추가로 몇 가지 성분을 더 복용했지만,어깨가 회복되자 복용을 중단하려 했는데,

그 유익함을 알고는 지금껏 3년째 쭈욱 계속해 오고 있다

 

좋은 칼슘 마그네슘 제품은 배합 비율이 2;1 정도로 알고 있는데 Ca 은 단순히 뼈의 조성뿐

아니라 체액의 Ph 조절, 골격근 평활근의 수축력 조절, 면역기능 유지, 혈액 응고의 필수 인자,

충분한 숙면 등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매일 마시는 커피, 술로 인한 Ca, Mg의 과도한 배설

증가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칼슘만 섭취했을 때 올 수 있는 뇨로결석, 칼슘의 결정화 및 혈관내 침착을 막고

체액 중에 Ca을 액상 상태로 유지시키려면 K, Mg, Vit-K2, K-citrate 등이 함께 함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칼슘제품엔 이런 세밀한 성분 구성이 안 되어 있거나

부족한 실정이다. Ca-Mg과 V-D 가 함께 들어 있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잇몸, 치아의 문제를 손 놓고 보기만 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치과가 이런 예방적 차원의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먹는 음식으로 다 대응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잇몸이 약하신 분들은 이 점을 꼭 유념하셔야 할 것이다

 

 

 

 

 

 

 

 

 

 

 

 

 

 


학교 수업 시간의 홍문화 선생님은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전문적인 약학 지식 이외에 약학의 밑바탕이 되는 철학, 역사, 기타 약에

관한 비밀스런 스토리 같은 걸 많이 말씀하신 걸로 기억이 나는 분이다^

그런데 언제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 내가 말야 어쩌다 우리 졸업생들이 하는 약국엘 가 보면, 대체로 침침하고

어둑해~ 그런데 약국 구석으로 내 팔을 잡고 가서는 하는 말이


" 선생님 제가 공부를 더 해서 박사가 되어 연구를 하거나 교수가 되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약국을 해서 뵐 면목이 없읍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야~ 아니 왜 약국하는 게 어때서 떳떳하지 못하게

저렇게 말하는가 말이야!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면 안돼요! "


이렇게 말씀하신 걸로 기억을 하는데, 허나 당시엔 학교 다니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단 말씀 정도로, 또 아! 그렇다면 약국은 졸업 후 해서는 안 되겠군

쯤으로 단순하게 이해했었다. 아마도 선생님 말씀은 졸업 후 어떤 일을 하더

라도 떳떳하게 당당하게 살아가란 의미에 방점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느낀 바로는 서울대학 나와서 약국 같은 걸 해서야 되겠나?

서울대학은 그야말로 온통 아카데믹의 알파요 오메가요 그러니 교수 아니면

박사가 되어 연구자로서의 명성을 떨쳐야 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낀 것이

사실이고 또 그것이 서울약대의 자부심의 일부였다고 생각을 해 본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 내가 말이야 이제껏 주례를 선 게 1500여 쌍이 된다고~ "


당시는 도대체 주례 1500 쌍이라면 어느 만큼 대단한 정도인지를 실감하긴

어려웠고 아무튼 주례를 부탁하는 졸업생들이 엄청 많구나~ 정도만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사실 보통 일생에 주례를 서는 횟수라는 게 몇 번 되기도 어렵고

100번 200번도 엄청난 횟수인데 1000번 이상이라는 건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아닌가?


1주일에 한번 정도 주례를 보셨다 치고 1500번이면 이게 햇수로 얼마가 필요

할까? 1년이면 대략 50주 10년이면 500주, 1500번이 되려면 얼추 30년은

꼬박 주말에 주례를 서셨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혹여 1주에 가끔은 두어 번씩

보셨다 해도 암튼 25년 이상은 그 긴 세월 동안 주말을 몽땅 주례에 바치신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아주 특별한 선생님의 주례에 대한 철학이 없이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찌 보면 그만큼 선생님의 명망이 높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1979년 가을, 대학 동기인 김x식 군이 결혼을

하면서 나한데 결혼식 사회 부탁을 했다. 그리고 주례는 바로 그 엄청난 횟수를

자랑하시는 홍문화 선생님 이셨다. 당시 홍익대 미술 강사였던 김 군의 신부는

최연소 동양화 국선 입상 작가였고 미술계 선배가 가지고 있던 당시로는 최고급

승용차인 그라나다를 운전기사까지 딸려 보내서 흑석동에 거주하시던 홍문화

선생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주례를 많이 서신 선생님께 너마저 또 주례를 부탁드렸다는 거냐?

너무 평범하잖아! 선생님 좀 그만 괴롭혀 드리지~ "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암튼 나는 부탁받은 대로 선생님을 결혼식장으로 모시고

가야만 했다


대나무가 담장을 삥 둘러친 흑석동 山 중턱의 선생님 댁은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에 선생님의 전화 구두 안내를 따라 용케도 금세

댁을 찾았다. 선생님을 모시고 남산 쪽에 있던 호텔 식장으로 차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하얀 메모지에 볼펜으로 여덟 글자를 쓰신 후 건네주시면서 이렇

게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 이제 자네들 졸업 동기 중에도 일찌감치 출세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네, 높은 자리

에 올라갔네 뭐 그럴 거야~ 그렇지만 그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지! 이 글자의 뜻은

말이야 인간이 지나치게 어떤 사람에게 폭 빠지면 덕을 잃게돼~ 그리고 물질, 재물, 즉

돈에 너무 탐닉 하면 그 세운 바 뜻을 잃게 되지! 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써준 이 글의

뜻을 잘 새겨서 인생에서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게나~ "


대략 이런 말씀으로 기억을 하는데, 선생님이 써주신 글자는 딱 여덟 글자였다

玩人喪德 玩物喪志


나는 이 메모지를 공손히 받아 품에 깊이 간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도록 집을 십여 차례 이상 이사를 할 때도 이 메모지만큼은 내 책장 한편에 고이 간

직하고 다녀서 최 근래까지도 보관이 되어 있었는데, 막상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

아들에게 책장을 물려준 때문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해서 당시 선생님의 필적이 남

겨진 메모지 실물 사진을 올릴 수 없는 게 매우 유감이다


물론 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빠져 고생을 한적도 또 돈을 너무 벌어 아니면

고위직에 올라 뇌물 때문에 초심을 망칠 일도 없어 그다지 현실에서는 저 글자의 위력이

나 개인에게 발휘될 기회는 없었지만, 이 글의 출처는 서경(書經)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원전의 뜻을 덧붙여 보고자 한다


* * *


《서경(書經)》의 여오(旅獒)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주 나라 무왕이 어느 날 서방의

먼 곳에 자리 잡은 여(旅) 나라로부터 큰 개 한 마리를 선물 받고 그 개를 좋아했다. 이

것을 본 태보(太保) 소공(召公)(무왕의 동생) 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 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玩人喪德),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物喪志)

이 말을 듣고 무왕은 은 나라의 멸망을 교훈 삼아 그 개는 물론 제후국에서 보내온 獻上

品들을 모조리 다른 제후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

 

* * *

 

 


당시 신랑 신부는 선생님의 주례사의 어떤 부분을 기억하고 있을까? 솔직히 그 누군들

결혼식 주례 말씀을 고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는, 사회를 본 신랑 친구에게는

저런 글을 써 주시고 또 그 글귀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보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날의

주인공 신랑 신부에게는 글자로 뭘 남겨 주지 않으셨으니 어찌 보면 그날 결혼식에서 진짜

주례사를 받은 건 사회를 본 친구인 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허긴 저 글자는 인생을 막

새로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 해줄 말씀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혹시 그 많은 주례를 서 주실 때 선생님을 모시고 갔을 수많은 결혼식 사회자 등에게 저

비숫한 어떤 글귀를 써 주신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특별히 나에게만 저런

글자를 써 주셨는지 확인은 어렵지만 혹시라도 이와 유사한 선생님에 관한 일화를 누군

가가 올려 준다면 그것도 꽤나 흥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만큼 선생님은 박학다식하시고 성현들의 말씀을 읽고 몸소 실천하는 그런 삶이 아니

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선생님 생존 시에는 서울약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교수님들

중 유독 세상에 이름을 넓게 알리신 분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벌써 꽤나 오래전에 영면하신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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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인척 중에 나름 사업적으로도 성공적이고 상당한 재산도

축적해서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L이라는 인물이 있다. 벌써

2년 전이 되었다. 2019년 5월 경이었는데,

 

누님 두 분과 함께 가족 여행으로 제천의 E.S 리조트로 카니발 승용차

를 타고 가면서 첫 얘기를 들었다.

 

원래 L사장은 통풍으로 한참 전부터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백내장 수술도 했고 거기다 녹내장까지 겹쳤노라고 얘기를 했다. 얼굴색

은 매우 좋지 않았고 제천으로 가족 여행을 가는 내내 그의 표정은 수심

이 가득했다.

 

여행을 마치고 약국에 찾아온 L 사장과 면담을 해보니 백내장 수술 후 녹

내장 기가 있을 뿐 아니라 거기다 혈압, 당뇨가 원래 있었고 통풍은 이제

많이 호전되었지만 손발 저림이 심해졌고 병원에서는 신장기능이 저하

되어 있다고 했고 관상동맥 1개가 2/3 가 막혀 있다는 검사 결과를 갖고

있었다.

 

L 사장은 사실 이때만 해도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본인도 몰랐던 거 같다

왜냐하면 그 3개월 후 또 다른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심각히 나빠

진 혈관의 상태를 고려해서 오메가 3 7200mg ( 유효성분 기준), 레시틴

기타 2가지 추가 영양 성분을 함께 먹도록 했다. 그런 후 확인 결과 몸 상

태가 많이 좋아졌고 술은 일절 안 먹고 체중이 7-8kg 이 빠졌노라고 했

다. 그런데 그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무려 석 달이나 말이다

 

처음 복용 당시 급속도로 신체 컨디션이 좋아지자 그는 " 아 이러면 되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는지 나머지 성분은 생략하고 오메가 3 만 적정량을

복용하며 두 달을 더 버틴 것이다. 대개의 환자들이 그렇지만 뭔가 조금만

호전이 오면 곧바로 복용을 중지하고 자신의 몸 상태를 지켜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성 질환의 경우 이렇게 약간의 복용만으로 몸이 고쳐지는 경우는

없다. 왜냐면 만성 질환 자체가 수십 년에 거쳐 서서히 몸에 영향을 끼쳐

병변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10월 말에 나타나서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다니던 A 대학 병원 내과에서 "신장 상태가 안 좋으니 투석 준비를 하라"

는 얘길 했다는 것이다. 투석이라는 게 주변에서 흔히들 목격하는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이것

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 투석이라는 길로 한번 들어 가면 영영 다시 빠져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모른다. 비록 투석을 하며 생명을 겨우 연장은 한다 해도

그 후유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신장이 노폐물과 독소를 자체적으로 걸러주지 못할 때 그걸 체외로

꺼내서 세탁을 아무리 잘해 봤자 이미 혈액의 신선함은 공염불이 될 뿐

아니라 완벽한 세탁이 되기도 어렵다. 해서 심한 전신 가려움증은 기본

이고 원활한 일상을 기대하기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투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선 분들이라면 당연 무슨 수를 써서

라도 투석을 안 하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L 사장은 아무래도 병원을 바꿔서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서울의 A 병원에서는 당분간 상태를 지켜보자 했

다고 했다. 당장 투석은 아니지만,,

 

당장 투석은 아니라 해도 마냥 세월이 흘러가면 무슨 특별한 몸의 호전

이 있을 건가? 우리 몸이 저절로 좋아지는 경우는 사실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슨 특별한 운동 요법을 하거나 식이 요법을 하거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주지 않는 한 나빠진 몸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나는 L 사장에게 간곡히 설명을 했다. 서울 A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진

찰을 받는 건 좋다. 대신 당신 몸에 아무 부작용이 없는 순수 자연영양

요법을 꾸준히 계속하시라! 만일 검사 결과 투석을 안 해도 된다고 하면

이 방법을 평생 계속해 나간다 한들 하등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2019년 10월부터 지금까지 L 사장은 계속적으로 영양요법을 해 오고

있음은 물론 일정 간격으로 체크하는 A 병원의 결과도 양호한 상태로

바뀌었음도 물론이다. 얼굴 색도 예전의 그 누르스름하고 검은빛이

도는 게 아니라 거의 밝은 정상의 칼라를 보여 준다. L 사장은 자신의

건강을 염두에 둔 듯 호주에 살고 있던 아들을 귀국시켜 곁에 두고 있

지만 어쩌면 그가 염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 조심스런 예측을 해 보는 중이다. 건강이 사라지는 마당에 재산

도 명예도 다 소용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신장 투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물어물하다 투석으로 가는 것과 적극적으로

대비하여 투석을 면하는 길,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매우 크다

 

 

구체적인 검사 수치를 함께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그가 신장 문제뿐

아니라 녹내장, 관상동맥 막힌 문제와 통풍까지도 좋은 상태로의 회복을 기

원해 본다. 왜냐 하면 그 모든 증상들은 혈관의 병변을 같은 원인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 요법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그리운 얼굴/(그 옛날 덮치기로 새 잡던 시절 유행하던 노래)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시골에서 겨울이란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지독히도 춥고 배고픈

시기였다. 이제 와서 그 긴 겨울을 끄집어내는 건 단지 그 시절이

아름답다고 느껴서도 아니요, 나 개인의 추억을 할 일 없이

공유해 보려 함 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릴 적 성장기에 그것이 내 삶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 하나요, 손에 전해져 오던 그 촉감과 추위를 무릎쓰고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벌판을 달렸던 그 기상이 또한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와

마지막으로 놀이 겸, 새 와의 싸움이 약간의 창의력 신장에 영향을 준

건 없을까? 등을 조금 반추해 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손주 손녀를 두신 많은 분들이 혹시 아이들 교육에

참고로 하실 내용은 없을까? 해서 이다.

 

새를 잡는 덮치기란 아래 사진과 같은 기구이다. 혹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이 좀 어설프게 표현되긴 했지만 활 모양으로 굵은 나무를 구부려 끝에

새끼를 서너 겹으로 연결한 후 그물망을 짠 작은 반 원형의 포집기를 새끼에

끼워 몇 바퀴 돌려주면 새끼의 뒤틀림에 의해 포집기가 볏 집 쪽으로 강하고

빠르게 원 위치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포집기 중앙에는 아래와 같이 벼를 달아 놓는데 그 벼를 새가 쪼는 순간

포집기가 앞으로 덮쳐지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이런 덮치기를 사용해 본 분들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이다.

 

 

이런 덮치기를 3-4개 혹은 더 많이 만들어 눈만 오기를 기다리는 게

시골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는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건 순전히

저걸로 새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이 듬뿍 내리면 새들은 먹이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혹여라도 눈이

좀 덜 쌓인 논둑 옆이나 큰 나무 아래 혹은 벌판의 풀 더미 옆을 찾아

날아다니게 되는데, 하얗게 눈이 쌓인 들판에서 저렇게 만들어져

놓인 덮치기는 아주 쉽게 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고기 반찬은 예삿일이 되었지만 50년대 후반에는 사실 1년에

설 추석에도 만만히 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고기는 커녕 닭도 거의

구경을 하기 힘들어서 어느 한 집에서 닭이라도 잡는 날이면 온 동네에

닭고기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었다.

 

 그래서 한창 자랄 어린 나이에 그나마 눈 덮인 겨울은 고기를 먹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던 것이다.

 

새 고기라 해봐야 손바닥만도 못해서 화롯불에 구우면 한 입 거리도 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그 맛은 천하에 둘도 없이 기가 막혔다.

 

내가 만든 덮치기는 4개 정도였다. 더 많아도 한 번에 들고 이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양손에 두 개씩 들고 눈 벌판을 신속히 이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일단 봉창 밖으로 간밤에 눈이

왔나 부터 확인하는 거였다. 만일 뽀얗게 눈이 쌓였으면 부리나케 옷을 입고

미리 마련해둔 덮치기를 들고 집 앞에서 2-300미터 떨어진 뽕나무 숲으로

내 달리는 거였다. 두 줄로 심어져 꽤 크게 자란 뽕나무 숲은 이런 날

새들이 먹이를 찾아오는 좋은 포인트였다.

 

일단 그곳에 덮치기를 설치해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뽕나무 밭으로 흰 눈을 헤치며 간다. 덮치기 주변에는 이미 촉새며

몇가지 새들이 푸드덕거리고 아주 요새 말로 하면 난리 부르스가 났다. 그리고

문제의 덮치기를 들여다 보면 여지없이 촉새가 한 마리 들어가 눌려 있게

마련이다. 각 덮치기에서 꺼낸 새를 준비해간 새끼 고리에 목을 꾀어 놓고

덮치기를 재 셋팅한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렇게 1차전은 끝나게 된다. 잡아온 새를 한두 마리 불에 구워서 먹는다.

참새가 황소 궁둥이에 앉아서 너 한 마리 다 해도 나 한 마리만큼 맛이 없을걸!

했다는데 참새, 혹은 촉새의 그 맛은 가히 천하 제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맛이 일품이다.

 

그런 식으로 오전을 보내게 되는데, 새는 무한정 잡히는 게 아니다. 계속 집

앞 뽕밭만 왔다 갔다 하면 될 거 같지만 한 장소에서 연속 새는 잡히지 않는다.

결국 장소를 옮겨야  된다. 이제 동네 어귀 철길 변으로 혹은 아예 동네

넘어 저쪽 새댕이 산 벌판 쪽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오후쯤 되면 눈이 펄펄 바람을 타고 날린다. 바람도 분다. 벌판에 덮치기를

세팅해 놓고 추위를 피해 어린이 몇 명이 옹기종기 볏단 아래 몰려있다.

이제 좀 시간이 더 지나면 새는 안 잡힌다. 바지 혁대 고리에 걸린 새끼줄에

잡혀있는 새 숫자를 확인한다. 아직도 목표엔 미달이다.

 

내 기억으로는 하루 최대

8마리였는지 16마리였던지 정확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겨우내 눈이 오면 촉새를 잡고 또 잡았다. 비슷한 모양의 참새가

있으나 너무 영리해서 좀체 덮치기로 잡을 수가 없었다. 참새의 영리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가을철 다 익은 벼를 못 쪼아 먹도록

허수아비를 세워도 그들은 본 척도 안 한다. 일부 새들이 허수아비에

놀라 도망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이것이 겨울철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시골서 새를 잡는 애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과 달리

먹을게 많고 그 추운데 고생해서 새를 잡을 아이도 없을 것이다.

 

덮치기를 만들고 새와 수 싸움을 벌이는 건 또 어떤가? 따뜻한 방에서 겨우

내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과 비교해서 더 바람직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연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울철에 새만 잡은 게 아니다.바람이 불 땐

연을 만들어 높은 창공에 날렸다. 하늘에 연 날리는 게 뭐라고 그 시절엔 참

그것이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추수하고 쌓아 놓은 볕 집단 속에 바람을

피해 두 손을 호호 불며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바라볼수록 온 몸이 시려지는 파아란 겨울 하늘 높이 하얀 연이 하늘 끝에 보일락

말락 떠 있는 걸 보는 마음은 통쾌하고 시원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연에

담아 날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맘에도 은연중 어떤 소원 같은 걸 빌어

보는 맘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부잣집에서는 연줄 감는 통이 6 각형 혹은 8 각형의 둥그런 나무를 짜서 만든 얼레를

사용했고 보통은 그냥 평면으로 납작한 얼레를 사용했다. 난 둥그런 얼레가 정말

갖고 싶었지만 희망 사항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어쩌다 그 둥근 얼레를

하나 장식품으로 구할 수가 있었는데,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 버린 것 같다

 

8각 얼레 / 출처 ; 대한 연 협회

 

 

새를 잡기 위해 덮치기를 만들고 새를 유인하기 위한 벼를 달아매는 도구로는 속이 빈

개나리를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이 나름 치밀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흰 눈

위를 달리고 바람과 싸워 이기고 새들과 수 싸움을 하고 추위를 견디는 훈련을

하고 그 모든 것이 온통 자연과의 한판 승부나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자연에는 온통 놀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 그 옛날 추억담으로만 남아있던 그런 놀이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아래 기사이다

 

 

 

한참 전 간단히 봤던 기사 한 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기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누렸

던 환경이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

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MRI로 분석했더니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를 많이 볼수록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자녀들을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로프' 학교에 보내고 부모에게 스마트폰 금지 약속을

받아 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안 줬고 빌 게이츠는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 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재산을 대물림

할 수 있다는 것~

 

 

(이하 중략! 디지털 뉴스 김의영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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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雪 / 마로니에

 

 

 

겨울에 눈 안 오면 겨울 헛거지!

 

바쁜 요즘 사람들은 겨울에 눈이 오는지조차 어쩌면

잊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오면 오고 말면 말고다.

더구나 코로나 시국에선 그딴거 관심 둘 여유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난 주 눈이 왕창 내렸다. (1.6) 저녁 7시 30분경 눈이 하얗게

내리는 걸 보자 번개처럼 정리를 하고 조마조마 가슴을 조이며 차

를 휘몰아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정말 오랜만에 눈을 맞으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이런 눈 구경, 눈 맞음도 정말 오랫만이다

 

아니 눈 구경은 재 작년 니가타에 스키 타러 가서 실컷 보고 오긴

했다. 그러나 집 근처 동네에서의 이런 맛은 좀 특별하지 않은가!

 

미리내 성지 앞 미산 저수지에서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가 문제였다. 차는 모셔 두고 마을버스와 전철

을 바꿔 타는 출근이 시작된 것이다. 첫날 즉 목요일(1.7)엔 마을버스가

간신히 수 십 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영하 15도에 바람까지 휘 몰아치는

정류장에서 꼼짝없이 떨어야 했다

 

원체 갑자기 버스를 타 보다 보니 앱 같은걸 활용할 생각을 미처 못했다.

다음 날 금요일은 눈 앞에서 또 버스를 놓쳤다. 에혀~ 그리고 정류장 두

곳을 전전하다 보니 훌쩍 수 십 분이 날아갔다. 마을 버스란게 원체

출퇴근 시간이 살짝 지나면 드문드문 다니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면 4 정거장 10분이 걸리고 내려서 10분을 더 걸으면 약국에

도착하니 20여 분이면 되는데 문제는 전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였다

 

버스 안 타고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아예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어서 다니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매연 자욱한 도로 말고 새로운 루트가 있어야 하는데~

 

토요일 일찍 마치고 전철역에서 뒤쪽 산으로 돌아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기웃거리니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통로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약 6-700여 미터를 올라가는 산을 넘어가서 한적한 도로를

쭈욱 지나가면 되는데 대략 40분쯤 이면 집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일부 구간은 지나가는 차도 어쩌다 만나는 산 등성과 숲과 언덕을

넘는 한적한 길이었다.

 

아! 이런 길이 있다니! 5년이 지나도록 왜 아직 몰랐을까?

나는 무릎을 치며 환호했다.

 

"그래 이 길로 쭈욱 출퇴근을 하는 거야. 봄이면 진달래를 보며 벚꽃을

친구 삼고, 좀 더 계절이 가면 아카시아 꽃 향기도 듬뿍 맡게 되겠지~"

 

 

작년에 마스크 때문에 일찍 움직이다 보니 동네 앞산을 출근 전 30분 정도

걸을 수 있었는데,, 몇 달은 잘했지만 결국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걷는 운동이 몸에 좋다지만 인위적으로 계속하는 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매연이 거의 없는 이런 길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천천히 걸으면 편도 40분이 걸린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도합 하루

100분 정도를 걷게 되는 셈이다. 이걸 계속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혹여 갑자기 폭설이 쏟아진다 해도 아무 걱정이 없이 일할 수 있으니 개인적

으로는 맘껏 눈을 반길 준비도 된 셈이다

 

 

 

하지만 과연 승용차로 불과 2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그런 편한 방법을

두고 그 몇 배나 걸리는 불편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눈 때문에 불

가피한 선택이 됐다지만 정말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까?

 

걷는 게 그리 좋다고 카톡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왔고 또 수많은 경로를

통해 알고 있는 이 진리는 실천이 없으면 무용지물임을 잘 알고 있다

 

 

걸을 수 있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사실 감사할 일이다

 

걸어서 좋고 덤으로 건강도 챙기고 이래저래 이번 눈으로 인해 얻은 게

많은 새해 벽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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