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으례 떨어져 쌓이는 이 낙엽이란 놈!

나이 60이면 적어도 50년 이상은 낙엽을 보며 살았으리라!

 

그런데 수십 번을 보고 또 봤던 그 낙엽이란 것이 갑자기?

새롭게 보일때가 있다니~ 아니 새롭다기 보다 갑자기 그

어떤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고나 할까?

 

 

 

세상에 단풍 여행 이란 말은 있어도 낙엽 여행, 또는 낙엽 밟기 여행~

이런 건 들어 본 적이 없구만요! 그니깐 낙엽은 어쩌면 단풍의 한수

아래! 아니 별 주목을 받는 그런  존재는 아닌것 같아요

 

2012년 가을에 처음 목도한 낙옆의 이름다움은 지금껏

쭈욱 그 감동을 이어 오고 있답니다. 해서 몇장 낙엽을 올려 드리며

 그 묘미를 함께 즐겨 보기로 합니다

 

분당 탄천 변의 바로 이 낙엽을 보면서 그 맛에 빠진 첫 풍광입니다

이날 아침 마치 신천지를 보듯 뭐에 홀린듯 갑자기 낙엽들이 손짓하는

걸 처음 느끼게 됩니다

 

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돌아 다닌게 시발점이 되었지요!

만일 그날 자동차로 쓱 주변을 돌아 봤다면 아직까지 낙옆의

감흥 뭐 이런 얘기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 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씩 낙엽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게 됩니다

 

 

민속촌의 이른 아침, 직원들도 출근하기 전, 밤새 내려 쌓인 단풍잎 이지만 출근하면

빗자루로 쓱싹 쓸어 버립니다. 아! 정말 낙엽의 멋이 어떠한지를 그들은 진정 모르는듯^

허기야 깨끗히 쓸고 정리 정돈을 잘 하라고 지시를 받았겠지만!

 

낙엽이 카펫처럼 두둑히 깔린 저 길을 걸으면 정말이지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원들이 쓸어 치우기 전에 고양이가 내달리듯 살금살금 미친듯

둘러 보았지요

 

그런가 하면 물 위에 떠 있는 낙엽도 있읍니다. 선운사의 명물이 된

도솔천의 낙엽!

 

그 며칠이 지나면 저 잎들은 물 밑으로 가라앉거나 물살에 쓸려 전부

떠내려 갑니다

 

내장산 입니다. 단풍은 져 가지만 나무밑에 예쁘게 내려 앉읍니다

 

동네 주변에선 이런 벚나무 낙엽을~

 

 

단풍도 단풍이지만 낙엽이 근사하게 받쳐 줍니다

저 위로 사람들이 얼마나 지나 갔을까?

사실 이런 낙엽 위는 밟고 가기가 좀 미안하지요!

 

 

만일 단풍의 최 전성기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하면 나무 밑은

이렇게 낙엽이 지천으로 깔려 있을터! 아쉬워 말고 낙엽을  감상

하면 될 일입니다

 

몇가지 나뭇잎이 형형 색색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른 아침!

햇살 비치는 이 풍광도 너무 좋읍니다

 

朱木은 살아 千年~ 죽어 千年이라 하지요! 단풍과 낙엽은 길어야

열흘에서 한달 정도 입니다. 가지 위에 예쁘게 물든 잎 들이 땅에 내려 앉아도

예쁜 모습을 유지하는듯 해요!

 

분당 마태오 성당 주변

그리고 저들 낙엽은 떨어질때도 질서 정연합니다. 뒤죽 박죽 지 멋대로가

절대 아닌듯 해요.. 차곡 차곡 순서가 있고~ 그래서 떨어진 낙엽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平和가 가득해 집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낙엽을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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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로트 가수다!!

그래 트로트 가수다!



허! 그래서 뭐 어쩔건데^^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트롯 하면
그냥 뽕짝, 정확한 시작이 언제부터 인지도 애매하고 그냥

우리 것은 뭐든 시원찮고 별 볼일 없는 뭐 그런 것쯤으로!

그래서 겨우 남은 우리의 전통 가요를 뽕짝이라고 무시하고
비하하고 가까이해서는 안될 무엇처럼 깔보고! 머리에
뭐 좀 들었다는 양반들은 입에 올리 길 꺼려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팝이 어쩌고,, 칸소네, 샹송이 어떻고, 이도 저도 아니면

하다 못해 가곡 정도로 한껏 수준을 높여 입에 올리고 했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TV 프로그램에 '명사 초청 무슨 밤? ' 인가

그런 게 있었는데 말미에 애창곡을 하나씩 소개하는 거였다.

거기 등장한 명사라는 이 들은 하나 같이 팝송, 가곡, 샹송 등을
주로 애창곡이라 말했다. 그중 딱 한 분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구주제약 회장을 지낸 김명섭 선배께서 '영등포의 밤' 이 자신의 애창

곡이라 말했다. 그때 난 뭔가 아주 솔직한 인간미? 같은 걸 느낄 수 있

었다. 그분은 원래 고향이 영등포였기도 했지만, 만일' 돌아오라 쏘렌

토로'가 애창곡이라고 한들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보는

방송이니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길게 서론을 적는 이유는 일단 입으로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 신토 불이' 등등 하면서도 실 생활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

인가를 짚어 보기 위함이다. 우리의 본질을 당당히 어디든 내놓지 못하

고 뭔가 부끄럽고 비천한 것쯤으로 여기게 된 풍토를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이런 풍토는 예전에 비해 확연히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은 땅덩이의 우리는 큰 나라를 받드는 사대사상이

생겨 가까이는 중국, 멀리는 유럽, 미국 것이면 무조건 우리 것보다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린 것인데,, 식자 층에 유독 이것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시대는 모화 사상,, 지금은 모양 주의(慕洋主義)라 부른다. 그리스,

로마, 프랑스, 영국, 독일등이면 무조건 제일로 찬미하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다. 뭐든 그들이 좋은 게 아니라 극히 일부의 어떤 것이 더 좋을

뿐인데 말이다! 당연, 우리 것이 그들보다 훨 더 좋은 것도 있다

암튼 소득 3만 달러를 넘기면서 이제 조금 우리도 이만하면~ 하는
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우리 것이 순 엉터리는 아니네,, 하는 생각도
좀 커지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 상에 트롯이 있게 된 건 아닐까? 갑

자기 2019년부터 트롯이 대세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왜 진작 그러

지 못했을까?

각종 트롯 경연에서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 등장했다. 저
렇게 잘하는 이들이 어디 숨어 있다 나온 거야? 그리고 경연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를 가리는 객관적인 무대이다. 여기서 배출되는 가수가
실력 있고 품질 좋은 가수임은 분명한데, 그동안 많은 가요제등이 있
었지만, 대체로 객관적 실력보다는 연줄로, 알음알음 가수가 되었던

게 사실 많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엇 이거 기성 가수들 밥줄 끊기겠네'라는 일말의 위기
의식이 생겼을 듯하다. 사람들이 트롯 경연대회에 너무 크게 열광했
기 때문이다. 해서 기성 가수들의 경연프로가 만들어진 듯하다. 물론
전에도 이 비슷한 프로는 있었지만, 기성 가수들이 새로 등장하는
신인들보다 과연 노래를 더 잘할까?라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시작했고 이제 대한민국은 노래에 있어서 만큼은 경연의 시대, 경쟁의

시대로 돌입했다.

어제 첫 방영된 프로에서 박서진이란 가수가 부른 '어매'다. 세상 살이
고달프다 보면,, 아이고 엄마! 왜 나를 낳았다요? 이럴 사람도 많을 것
이다. 또 아들 딸 낳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도 많다. 뭐할라고
날 낳았디요?라고 목 터지게 부르짖는 아들 딸도 정말 원망해서 그리
할까? 마는 이 노래 들으며 눈물짓는 많은 엄마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도 남는다


말이야 바른 말 이지만, 트롯의 이 느낌, 이 공감력을 세상 어느 나라
노래에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인이라면 말이다!

알프스가 좋다 하나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아온 내 고향 앞 뒷산보다
더 마음에 파고들 수 있을까? 그저 며칠 가서 보는거야 좋겠지만~

한 많고 탈 많은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날 낳아 주신 어매를 탓할 수야
있겠을까? 천 번 만 번 감사할 일이지! 혹여 탓할 맘이 있다 해도

어차피 이 세상 내 뜻대로 온 이 하나도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를 한번 포스팅해 보기로 한다.

2020년 2월경에 방영된 것으로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던 글을 블로그

에 가져온 것이다. 아마도 위의 트롯에 관련된 내용은 이미 블로그

어디엔가 한번 언급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트롯에 무조건적인 찬동과 자부심을 함께 가지시란 의미는 아니며

더 더구나 근거 없는 무시나 애써 외면하는 바보 같은 짓도 더 이상

안 했으면 해서 써 본 글이다

 

 

 

 

 

나는 울었네!! / 보현 스님


시방 울고 워쩌고 할때요? 때가 어느 때인디!!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카카오 스토리고 뭐고 눈에 들어 오지도
않읍네다~ 지구 전체가 비상시국인데 거 뭐 소소한 개인사 같은 게
어디 낄데가 있겠쓰까요~

이런 거 올리는 거 다 ~ 부질없는줄 알지만, 지금이 봄 아닙네까?
사람이 마음에 꺼풀이 씌워지면 개나리도 안 보이고 진달래도 안 보이고
매화도 안 보입지요! 지금은 코로나가 눈과 마음에 옴팡 씌워져서
암것두 안 보이지유^ 보이는게 이상허지 않것어요!

그런데 주말인 데다 약국 건너 야외 음악당 비탈엔 산수유도 매화도 살구도
다 피어나 찰랑거립니다.

" 나 봄이요!! 봄 왔시요! 나 좀 봐주시유! "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들리면 뭐합니까?

웬 스님이 노랠 저렇게 잘한댜? 뉘 귀여? 보현 스님이라고 ~ 박정희
시절에 연예인들 수난에 몸을 피해 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음, 이 봄에 그나마 좀 어울릴만한 옛 노랠 찾다 보니 이 노래가 띄긴 했는데,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던 그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새도록 나는 울었네

* *

이거이 봄 하고 무신 상관인데?


그런데 이 노래 1절만 들어도 가슴이 싸아해 지고 마치 봄바람이 휘날리는
언덕에 앉아 다시 온다던 님을 그리는 맘이 아련히 떠오르는 분은
복 받은 분이라니께요! 밤새도록 나는 울었지만 운 게 운 것이 아닌 !
거 왜 제목만 보고 울고 불고 그런 것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만,

* *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고 흐르고 강물도 흘러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여 어데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새워 울어 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무정한 봄바람에 속은 경험이 있는 분은 여기까지 글을 보시고 계시
것지요? 허긴 뭐 여기까지 글을 읽어 내려오신 분도 아마 거의 없으
실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 지금 모두가 마음이 급하고 초조하니께요~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가는 걸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요!

깊은 봄밤에 달이 기울어 가는 걸 보고, 별이 흘러 저쪽 산 등성이로 넘어
가는 것도 보고,얼음 풀린 강물이 유유히 흘러 가는 걸 볼 여유가 있는 분!
아마도 요즘 거의 없을 겁니다

요즘 트롯이 대세가 된 시대지만, 트롯의 참맛을 느끼려면 노래만 가지
고는 부족한 게 바로 이런 서정성! 봄을 봄으로 가슴에 껴안는 감성!
꽃과 바람과 달과 별과 구름과 강물을 함께 뒤섞어 내는 그 어떤 것이
가능해야 노래의 참 맛도 살아나고 느껴지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의견
을 올려 봅니다

허기사 마스크 전쟁에서 겨우 한숨 돌린 게 얼마 되지 않았구만유~ 솔직히
지난 두어 주간은 아무 생각도 없었지요!


여전히 아침에 기나긴 줄 서기와 한판을 치르고 나면 온종일 맥이 쫘악
빠지는 건 여전하지 말입니다^ 우리 동네는 유독 마스크 구하는 분 들이
많읍니다^ 너무 많아요! 하루 1천 장을 푼다 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나저나 내일은 앞산 진달래라도 함 보러 가야지 생각 중입니다.
무슨 목련이 벌써 하얗게 피어나질 않나! 시답잖은 겨울 끝에 봄마저도
이리 속절없이 후딱 지나간다면 영랑의 말처럼 봄을 여읜 슬픔에 삼백
예순 날을 슬퍼 울지도 모르지 않읍니까.

 

요새 사람들은 주식이 떨어져서 아니면 집 값이 떨어져서 울테지만
말입니다^ ㅎㅎ

 

자 ! 보현 스님의 옛 노래 한번 더 들으시면서 행복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중학교 졸업식날 / 마로니에 부름

 

과거란 무엇인가?

 

역사적 과거, 국가의 과거, 등 거창한 과거란 말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 개인에게 있어 중요한 건 바로 그 사람 즉 '나의 과거' 인 셈이다.

 

" 내가 누군줄 알어? 짜슥들이~ "

" 거 뭐 나의 과거는 묻지 말아 쥬쇼~"

" 에효 말도 마슈! 옛날 얘기하면 눈물 나요~ "

 

등등 천층 만층 구만층인 게 바로 개인의 과거사다!

 

그런데 1959년도에 나왔다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노래 가사는 이렇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의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잊을수가 없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도 풀렸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렀다.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도 풀렸다.

애닯은 가슴마다 햇빛이 솟았다.

 

그래 그런 것이 과거일 수 있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암튼 난 이 가사가 마음에 든다. 정성수란 분이 작사를 했고 나애심의 오빠

전오승이 작곡한 노래이며 나애심이 불러 당대 큰 힛트를 쳤던 곡이다.

 

그 옛날엔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이 콩쿨 대회란 게 있었다.당시 우리 큰 누

님이 그 콩쿨 대회에 출전을 하셨는데, 바로 이 노래를 불렀다. 해마다 추석때

쯤 농번기가 끝나면 행해 오던 가설무대에서였다.

 

김철은이란 친구 형님인 김철호 이 양반이 얼마나 노래를 잘했는지 기억 난다.

또 장암리 어디 살았던 젊은 처녀가 부른 대머리 총각도 기억이 난다.이 분들은

모두 1등상인 황소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철호형은 아마도 몇 마리는 되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를 부르는 도중 심사 위원이 '땡' 하고 종을 울린것이다.

나는 몇 십년이 지난후 이 얘길 큰 누님에게 했다.

헌데 누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난 절대 콩쿨대회에 나간 적이 없다고 펄쩍

뛰신다. 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내가 당시 뭘 잘못 본 겐가? 착각을 하고 있었나?

 

암튼 내 어릴적 기억엔 이 노래를 부르던 누님이었는데 말이다. 큰 누님이

노래를 잘하는지는 몰라도 8순이 다 되어가는 요즘에도 동네 노래 교실을

꾸준히 다니는 걸 보면 노래를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다.

 

 

여튼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잊을 수가 없는 곡이 되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다른 어느 누님뻘 되는 이가 이 노래를 부른 건지 확실치 않지

만 말이다. 그건 뭐 이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자! 그런데 여기서 과거에 대해 얘길 해보자. 흔히 과거를 묻지 말라 하면

힘들고 고생하던, 떠 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말하기 마련이다. 더러는 결혼 전

남녀가 가지고 있었던 로맨스를 과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암튼,

혹시 우리 친구중에

 

'내 과거는 쓸만했지, 그만하면 난 좋았어' 하는 이 몇이나 될까?

 

6.25 중 태어난 우리들은 거의 대개가 어렵게 살지 않았는가? 먹고 살 것이

넉넉한 집안이 별로 없었다. 다들 겨우 겨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소위 '불행 증후군' 이란걸 알게 모르게 가슴에 품고 산다.  

 '내가 제일 힘들게 살았고 불행했으며 제일 가난했다' 같은 것이다. 

 

" 나 만큼 고생한 놈 있으면 나와 봐! 내 고생은 말도 마! 우리 집이 제일 가

난했어! 어휴 나 같은 사람도 있을라구!! " 등등이다.

 

어쨋거나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했고 가난했고 힘들었고

이런 감정을 갖고 사는 이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을 마치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사는 이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해서 웬만한 남의 고생 얘길 들어도

 

" 까짓 그게 뭐 고생이라고 야단이야~ 흥^ "

 

이러곤 만다. 뭐 하나 끝까지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왜냐면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그 무엇도 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마이너스) 영향을 끼치

는지 잘 모르는 거 같다.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고  불행했으며 가장

힘든 삶을 살았다고 늘 생각하는 마음에 행복한 감정이 깃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또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일치감을 잘 느낄 수 있을까?

 

과거의 그런 나를 버리지 못하는 한 현재의 내가 정상적으로 균형있게 잘 살아

가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낮

게 될뿐 아니라 자칫 인생이 우울 모드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한참 전 까지는 그런 생각이 다소나마 좀 있었던 거 같다. 시골서

논 마지기 하나 변변히 없었지,친척도 없지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부모님도 일찍

돌아 가셨지~ 도대체가 뭐 하나 내세울만한게 아무것두 없었으니 나도 불행증후군

환자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려서 부유한것이 꼭 좋은것도 아닌 걸 많이 보았다. 그 부유가 사람을 나태하게

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하는것도 많이 보았고 유약한 심성으로 인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도 많이 보아 왔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만 인생이란 꼭 좋은것만이 다 좋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기 전 까지 나는 내가 누리고 살았던 즉 나에게 주어졌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행복했던 것인가를 잘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또 나중에 주변을

돌아 보니 다들 나 이상으로 어렵게 살았고 힘든 과정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세상 불행을 자로 잴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더 불행한지 더 가난했는지 측정

하기는 어렵다. 또 설령 측정했다손 쳐도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 마냥

자신이 최고로 불행했다고 느끼며 사는 인생이 과연 행복에 이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바로 이것이 '불행 증후군'에서 시급히 벗어나야할 이유이다.

 

나의 과거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불행하지만도 않았다. 나는 태어난

고향도 있고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도 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

으며 형제 자매간 꿈 같은 시절을 보냈었다. 그후 이런 저런 인생의 질곡은 있었지만

나름 잘 살아왔고, 어디 내어놓을만큼 뻐젓한 무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다.

 

 

내가 겪어 보니 어릴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마음도 넓고 사람도 잘 사귀고

하는거 같았다. 지독히 가난하거나 암튼 뭔가 너무 악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무언가

모르게 심성이 약간씩 비뚤어 지거나 성격이 모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설령 가난하게

살았다 한들 그게 뭐이 자랑이며 자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걸 내세울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상황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이 주변에는 많지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복한 인생은 누가 만들어 줄 수도 꾸어 올 수도 없다. 돈만 많으면,

지위가 높으면, 기타 뭐만 잘하면 행복하냐? 이런 바보같은 물음은 그만 집어 치자.

그럴 수도 안 그럴 수도 있는게 인생이다. 남 보기엔 우스워 보여도 나름 행복한 삶을 사는

이는 많다. 남 보기에 뻐젓해 보이지만 실제 불행하게 사는 이도 많다. 그러니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 할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 화성의 낚시터에서 (1980년대 후반)

 

 

과거를 물을테면 물어라!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다.

현재를 물어라! 역시 또한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 아주 많다.

 

 

행복이 무어냐고 묻지를 마라~ 그건 각자의 가슴 속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묻지 말라는 건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 정체가 무엇인지 잘 밝히고 오픈하여 투명

사회로 나아가는게 바람직한 미래의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뭐든 감추고 쉬쉬하며 회색빛 인간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때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과거의 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 대

한 신뢰성을 더하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현재가 중요하다고 하나 그의 과거에

지울 수 없는 흑 역사가 있다면 과연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쉬운 일례로 카페

에서 알게된 사람을 깊이 신뢰하기 까지는 난관이 많다. 당연하지만 그 사람의

과거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카페등에서 자신의 과거 인생을 소상히 밝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나의 블로그에 최대한 나의 과거부터의 기억을 살려 올려

두려 노력하였다. 물론 현재의 나란 사람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는 마찬 가지다.

 

그것은 '내가 누구요'~ 하는 명함 한 줄과는 게임이 안 되는, 명함 100장 1,000장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인생 고백서이기 때문이다. 여러 블로그를 보아 왔지만

나와같은 형식을 취하는 블로그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그런 방식이 꼭 좋다고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런 방식을 고수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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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에 촬영한 나의 고향 빼낙골

현재는 저 집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우리집은 사진 우측에서 두번째 였는데 이미

당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내 고향 능국리하고도 '동물' 에서도 작은 고개를 넘으면

빼낙골 이라고 있었다.  

 

대체 빼낙골이 뭐야? 허구 많은 이름 중에 어째 그런

요상스런 이름을 쓴댜? 거기다 그 동네는 골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작은 뒷산이 있을뿐 골이라 할려면 뭔가 좀 뒤에 웬만한

산이라도 있고 아늑한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동네라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여튼 빼낙골이던, 빼낸골이던, 삐딱골이던, 아주 빼어난

골이란 뜻이건 거 뭐 자세히 알아 뭐하랴!

 

그 동네가 주류는 아니란 건 확실하고 모두 6 채가 있었

으니 걍 작은 마을이란 거였다. 6(여섯) 집에 애들이 있어야

몇이나 있었겠나?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은 누이뻘이

몇 명, 한두살 아래 동생들이 또 몇 명,

 

나중에 국민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아래 큰 동네 '동물'을

내려가 보니 애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욕" 이란 것으로 이새끼, 저새끼, 이년, 저년,

썅놈, 개 x 끼, 씨x 새끼, 등등 난 아마도 그런 욕을 제일 늦게

배운 축에 속할게 틀림없다. 마치 지리산 청학동처럼, 빼낙골은

나름 당시 신성한 동네? 였던거다.

 

그런데 한집 건너 집에 어디서 인지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딱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살았다. 한살

아래였던 그 애는 '선자' 라 불렀다. 그 작은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애가 살게 됐다는건 꽤나 큰 반가운 일이었다.

 

겨울이면 그 집 방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한송이 순정의 꽃'

이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노래 제목은

'축배의 노래' 란 거다

 

한송이 순정의 꽃 뉘에게 바치리까~

마음의 창문을 나에게 열어주고

술잔을 높이 들어 이 밤을 노래하리~

인생은 즐거우리 ~ 인생은 즐거우리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어두운 가시밭 길에도 행복은 있으리라

 

 

이 중에서 '술잔을 높이 들어' ~ 이 가사만 아주 선명히

또렷히 기억이 나는데, 여튼 그 어린 시절 내가 6살 정도

였을것이다. 몇년 후 그 애는 아랫마을 '구름밭'으로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다

 

허여 수십년을 그 기억을 잊고 살았다. 술잔이 뭔지도 몰랐고

어차피 난 지금도 술잔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그러다 작년 쯤인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아! 그때 그

노래를 부르며 놀던 그 애는 지금 어디 살지?

또 몇살 아래였던 그 옆집의 갑순이란 애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그래서 동물 출신 후배에게 수소문을 하니 그 선자란 애는

1년 후배이며 지금 서울 어드메에 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 아! 여보세요~ 선자씨? 나 누군줄 알겠소? 어쩌구 저쩌구

나 빼낙골 살던 누구요!! "

 

"그 잖아도 상애한테 얘기 들었어요~~ 참 오랜만 이어요"

 

자 여기서 부터 이제 옥경이 노래 가사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그간

 

"어디서 무얼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옛날 빼나골 살때 기억은 좀 나는지~ 등등

 

아니면 최백호가 노래했듯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뭐 첫사랑이라고 말할것 까지는 안 되지만 어린 유년의

추억으로 말하자면 나름 때 묻지 않은

신선한 기억이니까~

 

전화로 얘기를 한참을 해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 우리 언제 한번 만나 그 간의 얘기를 함 해보자구~

 

아이구, 나두 그러고 싶어요! 언제 우리 함 만나요!!

 

_ _ _

 

 

시인 김남조는 안성 난실 마을 조병화 시인의 기념관에

이런 글귀를 하나 남겼다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 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이옵니다

 

 

- - -

 

마찬 가지로 나의 어릴적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요!

 

그러나 나의 시(생각)를 아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나의 고향

사람들 만은 아닐거라고 생각을 해 본다.

 

암튼 그렇긴 하지만 선자를 만나 보고 싶어 약속을 하고

미뤄지면 다시 또 약속을 하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고 몇 달이 훌쩍 지났다.

 

대략 그 옛날 화롯불 옆에서 노래 부르고 놀던때 부터 60여 년이

넘었으니 이게 이산 가족 상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렴 이산

가족 상봉만이야 할까마는 그 상봉 이라는 것도 만나기 전에는

죽고 살지 못할만큼 그립고 애틋하지만 막상 만나면 그

감흥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추측일까?

 

 

결국은 몇달 사이에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젠

전화도 별로 않게 되었다. 약속이 자꾸 미뤄지다 보니

기대와 희망도 같이 사라진걸까?

 

아니면 전화로 목소리 듣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니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는 어떤 안도감과 더불어 어렴풋히 느끼던

그 옛날의 약간의 신비감? 같은게 사라져서 그럴까?

 

무엇보다 내가 일상의 업무에 하루 종일 매달려 맘 대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사는게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이 용두사미가 되어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이 얘기는 내 어릴적 나를 알던 사람! 나란

인간을 원초적으로 기억해 줄 사람!

 

부모 형제 다음으로 그걸 해 줄 수 있을 사람!

 

나는 알게 모르게 고향 일죽을 아니 빼낙골의 원초적

기억을 이렇게 나마 한번 살려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희망 사항이겠지. 나의 사투리를 누군가 알아줄

거라고 믿는건 순전히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김남조 시인이 말한,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

 

이라는 말에 아주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 나는 나의

시를 아는 사람들을 찾으려 알게 모르게 헤매는건

아닌지? 물론 김남조는 여기서 물리적 고향을

꼭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과연 그렇다면 나는

 

그 누군가의 '눈물의 고향'을 알아 보려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며 살아 왔던가를 자문 자답해 본다!

 

 (등장 이름은 실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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