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생가를 돌아본후 얼핏 보니 부근에 사의재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땅으로 유배되어

왔을때 모두들 피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둥 마치 외계인 대하듯 할때 따뜻히 그를 맞아준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문밖(당시는 강진에 성곽이 있었다) 사의재라는 주막집이었다. 이곳 주모되는 할머니가 다산을

측은히 여겨 그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는데~

 

 

90년대만 해도 이곳을 찾을수없어 안타가워 했던 곳이다. 아마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 청장이 된후 사의제를 포함한 몇곳을 복원한게 아닐까..추측을 해본다.

왜냐면 그의 저서에 사의재의 유적지를 찾지못한 걸 못내 아쉬워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자그마한 초가집에 방 한칸을 다산 선생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막주인 할머니!!

아마도 하늘이 도움을 주러 내보낸 이가 아닐까..

 

 

 

이젠 이곳이 실학의 4대 성지로 불려지는 곳이 되었다. 1801년 11월 23일 날도 차고 바람도

심했을 11월 말의 강진 땅에 간신히 거처할 곳을 마련했을 때의 다산 선생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더구나 실의에 빠진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는가? ]

 

라는 주막 할머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아 경세유표 같은 불후의

명저를 남긴 곳이 바로 이 골방이었다니....참으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사의재...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나는 고려 청자 도요지에 가서 결국 사의재가 적힌 청자 판을 하나 구입했다. 그

냥 식탁 옆에 두고 수시로 읽어볼 요량이었다.

 

 

 

 사의재에 걸려 있는 다산의 시 한수입니다. 당시나 오늘이나 세상 사정은 늘

비슷한가 봅니다. 그래봐야 불과 200년 전 일이니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셈이군요^^*

 

그런 세상이었건만 오늘같은 나라로 성장한 걸 보면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음,,여기에 잘 나타나 있네요^^* 1803년 12월 초열흘이니 1801년11월 23일

처음 이곳에 정착한지 대략 2년쯤 경과한

때입니다. 다산선생도 주역을 읽고 계셨군요!!

 

 

 

  물론 최근에 복원시킨 거겠지만,,아담한 우물이 여기도 있읍니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들여다 보니  식음으로 사용은 못하겠드라구요.

 

 

 

 

다산 선생에게 힘을 주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는 주막집 할머니와 그의 외동딸

기념 동상입니다.

 

저는 주막집 뒷편에 있는 저 할머니 동상을 두손으로 어루만져 드렸읍니다.

 

" 할머니...고맙습니다^^ " 하면서 ~ 물론 다산과 저 딸과의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요?

 

 

 

 주막집 입구에는 이렇듯 앵두가 피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참으로 이곳  사의재를 복원한것은 정말 잘한 일 같읍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이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요^^

 

비록 작은 주막집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둘러 보고 나오는 강진의 하늘과 동네는

더없이 청량하고 맑게 느껴 졌읍니다^^*

 

무소의 뿔처럼 - 범능 스님 고규태 시
1.가라 좋은 벗 있으면 둘이서 함께 가라 가라
좋은 벗 없으면 버리고 홀로 가라
달빛엔 달처럼 별빛엔 별처럼 바람불면 바람처럼 가라
<후렴>내가 나에게 등불이 되어 그대 홀로 등불이 되어
함께 못 가도 같이 못 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가라 나의 맘 고우면 나누며 함께 가라 가라
나의 맘 탁하면 버리고 홀로 가라
꽃길엔 꽃처럼 물길엔 물처럼 천둥치면 천둥처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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