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산--해발 300여  미터~ 가 품고있는 능국리 전경~ 

 

저 산의 우측 중간 부근으로 쭈욱 내려와서 우리 동네가 끝에 붙어 있었다. 6,25가 한창인 1952년

가을 안성군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안성군 일죽면 능국리 389번지, 능국리 4개

부락중 제일 크다는 '동물' 이라는 곳 '분동' 이라고도 했다. 50여 호 되는 동네의 동쪽 언덕 너머 6

호가 전부인 바로 그 동네이다. 워낙 작은 동네 - 말하자면 미국의 하와이 같은곳 이라고나 할까, 그

곳을 사람들은 '빼낙골' 이라고 불렀다.

 

 

큰 동네 에서 빼놓은 곳이라는 설도 있고, 암튼 옛날 시골은 마을 규모가 작으면 은근히 무시당하던

풍토가 있었다. 허나 뒤로 노송산이라는 약 300M 짜리 산이 있었고 그 산의 줄기가 최종적으로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마지막 기착지가 된 곳이 바로 그 빼낙골 이라는 곳 이었다.아마도 풍수 지리

적으로 보면 나름 괜찮은 곳이 아니었을지^  원래 능국리는 아버님의 고향이 아니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아버님은 일제시대 때 일찌기 일본으로 건너 가셔서 사셨다. 해방이 되자 위로

큰 형님과 큰 누님을 데 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옛 고향 합천은 잡풀만 무성했을터,,

엄마 고향인 인근 고령군 우곡면 고모집으로 가셔서 반년 정도를 버티시다 결국 고향을 떠나 다시

정착을 한 곳이 내가 태어난 경기 안성 일죽이란 곳이다.. 이것이 내가 일죽을 고향으로 두게 된

연유이다. 

 

만일 아버지가 해방 후 다시 고국을 찾지않고 그냥 일본에 눌러 사셨다면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인가? 가끔씩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뭐 그런 의문이 안 드는 사람도 있을까? 십여년

전 내 가족들과 함께 바로 그곳, 경북 고령군 우곡면 엄마의 원 고향을 한번 찾아 보았더니,, 그곳은

낙동강의 주류와 합천에서 내려오는 황강이라는 지류가 딱 맞닿은 삼각주 같은 코너에 위치한 곳

이었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낙동강 수해를 피하기 힘든 그런곳 같았다.

 

 

 

1980년대에 찾은 고향 ~ 그나마 6 가구중 4 가구 정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최근엔 다 사라지고 한 가구만 남았다) 

 

그 "빼낙골" 의 6번째 집 중에 다섯째에 위치한 초가집은 1946-7년쯤 이주하여

터를 잡은것인데 동네 사람들이 십시 일반으로 벽돌을 만들어 지어준 거라는

얘기를 수십년이 지난후 들었다. 안방 뒷방 부엌 한칸으로 이루어진 반자조차

없어 겨울이면 윗풍이 코를 얼리던 그 집!

 

 

 

허나 약간 높은곳에 위치해 아래로 논과밭 등이 좍 펼쳐보이고 아침이면

해가 들이던 그집, 먼 곳으로 충북 음성의 작은 산들이 부옇게 굽이굽이 보이던

집을 나는 차마 잊을수가 없다. 우리 땅도 아닌 남의 땅에 지은 흙집 초가지만 그곳에서

살던 때가 너무 그립다. 비록 형은 내가 다섯살때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곳에서

엄마 아버지 그리고 두분 누님과 단촐하게 십여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집에서 내려다 보이던 장호원 쪽과 충북 음성 쪽의 들판 (1980 년대 촬영)

  

 

다섯 여섯살 까지는 밑에 큰 동네를 내려가 볼 엄두를 못냈기 때문에 그냥 여섯집 마을의

몇몇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밖에 없었다. 처음 큰 동네를 내려갔더니 또래 애 들이

'욕' 이라는걸 하는걸 첨 알았다.

 

 

** 새끼 니 하는 용어를 처음 듣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놀랬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외에도 인근엔 '물탕골'이니 '능냇골'이니 '가릿골' '국골' 등이 있었고 장호원쯤으로 가면

'분디기' '반월성''가리울'같은 동네가 있었다. 뭐 대개 이름들이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빼낙골'이란 동네 이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부 친구들은 이제 와서' 빼어난 골' 이란 뜻이 아니냐..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고 많은 동네 이름중에 빼낙골이 무언가? 허나 억지로라도 나는 빼어난 골

이란 뜻으로 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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