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의 향기!

꽃 사과

 

 

작은 민들레

 

 

철쭉은 이렇게 피기전의 모습이^

마로니에 새순!

분당의 아침은 이렇게 초 여름으로 가고 있읍니다.

 

겹,,벗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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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 (보라산)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렇다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더니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 누구도 모르니 결국 흙에서

나온것이요 또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게 맞지 않는가!

 

 

내가 살던 고향과 나의 고향 집은 꽃이 피는 산골은 아니었다.

그냥 시골 이었다. 더러는 근처에 진짜 꽃이 만발하는 동네가 없던것은

아니나, 나의 시골은 그저 평범한 동네였다. 좀 큰 아랫동네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모두 합해서 여섯집이 모여 있었다. 집 뒤로는 아주 얕으막한

뒷산이 있었다. 한참을 뒤로 더가면 모양이 예쁜 조금 큰 서울의 남산 정도되는

종산이 있었다. 집 앞으로는 밭이 경사지게 쭈욱 있었고 한 300여 미터

앞으로 신작로가 동서로 가로질러 있었다.장호원과 안성을 잇는 38번 

국도이다.

 

 

 

초가집 단층으로 반자라고하는 것도 없는 흙벽돌 집이었고 안방과 뒷방이

하나 그리고 부엌이 하나 부엌앞에 장독대 하나 그 앞으로 화장실이 한칸 그리고

마당이 한 10여평 남짓, 집 울타리는 없었다. 뭐 지나 다닐 사람도 적었으니 그렇긴

하지만 여섯집 중에 우리집만 담장이 없어 얼마나 담장있는 집을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할수없이 담장 대신 코스모스를 잔뜩 심어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마당을

덮게 했지만 그래도 그게 담장은 되지 못했다. 담장이 없으니 집 뒤는 바로

손바닥만한 텃밭과 야산이 연결되고 있었다.비라도 많이 오면 그대로 집

토담뒤로 물이 좔좔 흘러오는 형국이었다.

 

 

 다행이 집 앞은 막힌데가 하나도 없어 안방 봉창으로 내다 보면 멀리 장호원

 뒷산과 충북 음성쯤의 아련한 산들이 겹쳐서 시야에 들어왔다. 집터가 저 아래 

신작로 보다 약간 높이 위치해 있는터라 언제나 넓은 시야가 확보 되었었다. 

집에는 개 복숭아 한그루에 미류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옆집에는  미류나무를

 여러그루 마당  주위로 심었었고

또 우측 옆 집에는 마당 안쪽에 난초가 한 그루 심어져 있었고 개나리로

 뒷 담장을 하고 있었다. 여섯가구의 우리 동네는 진달래나 살구 이런건

 전혀 없었다.

 

개나리 담장이 전부여서 봄이면 노란 개나리 담장이 예뻣다. 아랫동네에

 좀 오래된 진달래를 심어 놓은 집이 딱 한군데 있었는데 봄이면 그

 진달래가 멀리서도 보였었다. 살구나무 있는  집이 두 집인가 있었고 대체로

 꽃나무는 많지 않은 동네로 기억된다.

 

 

 

 

예전 시골 집에 살려면 겨울 난방이 참으로 어려웠다. 땔 나무를 그득 쌓아놓은

집은 매우 드물었고 가을 걷이가 끝나면 里 공동 소유의 뒷산에서 단체로

영나무 라는걸 한 일주일정도 했다. 식구 많고 노동력 많은 집은 많이

땔감을 가져갔고 식구수 적은 집은 간신히 나무를 해 가는 아주 비합리적인

제도였다. 그런 저런게 끝 나면 별도로 나무를 사서 쓰든지 해야했다. 대체로

그렇게 나무를 해 오려면 아주 멀리 있는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야했다.

 

5일장이란게 그땐 있어서 장날에 나무 를 해서 팔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간혹 나무를 해서 시골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것이 봄에 진달래 필때까지도 연장이 되어 먼산에까지 가셔서 나무를 

해오실 때면 영락없이 지게 꼭지에 진달래를 한 묶음 꺽어서 꽃고

오시곤 했다. 멀리서 도 한 눈에 진달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지게

꼭대기에서 받아든 진달래를 우리는 맛있게 먹곤 했다.

 

이렇게 진달래는 보기에 앞서 우선 먹고부터 보는 꽃이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 어찌 진달래가 소월의 진달래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소월도 진달래를 꺽어 먹고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이라면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 싯귀를 만약 내가 썻다면

 

 

 

 

" 마곡산의 진달래 꽃

아버지의 지개위에 하늘거리네~

진달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지!"

 

뭐 이런 정도 아닐까? 

 

 

우리집 마당에서 바라본 정경 1980년대 촬영,

 

이때만 해도 예전 우리집에서 보던 정경이 대략 유지되고

있었다 . 신작로는 비 포장으로 먼지가 풀풀 나고 미류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에 벼가 자라 올라 잎이 동그랗게 원을 그릴때 쯤이면 보통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오후부터는 그위에 뒹굴기 시작한다. 저녁도 방에서보다 마당에서 먹기 시작

하는 것이고 잠도 마당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기 시작한다. 철판을 잘라 만든

화덕에 솥을 올려 놓고 나무를 때어 밥을 한다. 밥이래야 거의가 보리밥이지만,

나무를 때면 연기가 난다. 그 연기가 피어 올라 이동네 저동네에서 일제히 근처

산허리를 감돌며 퍼져 나간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멍석에 드러누워있는 하늘

위로 잠자리가 빙빙 돌아 다닌다.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일을 마치시고 늦게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오신다. 가끔은 방망이로 칼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칼국수에 호박을 썰어 넣어 먹는다. 수제비도 해 먹는다

그리고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밤이 되면 근처 옆집에 뭐 재미있는 얘깃 거리가

없나..서성이다 멍석에 돌아와 혿이불을 걸치고 밤 하늘의

은하수를 세며 잠이 든다.

 

 

다음날 해가 떠오르면 더워서 얼른 잠에서 깨어난다. 아마 늦어도 아침

6시나 7시일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내가 살던집.. 내가 태어 낳고 자라왔으며 나의 유년기의

추억이 고스란이 남아 있어야할 나의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아랫

동네에 살던 형 한분이 언젠가 자신이 살던 집을 이름 있다는 화가에게 설명하여

그려서 간직하고 있는 걸 본적이 있다. 얼마나 자기 집이 그리우면 그랬을까..

 

내가 보기엔 원래 그분의 집과는 좀 달라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꿈속의 그

나의 허름하던 집을 다시 재생하여 그려 보고 싶다. 만일 그림 실력이 좀 된다면

직접 그려보고 싶지만.

 

 

 

개 복숭아 한 그루에 날로 자라나던 미류나무 한 그루, 그 미류나무와 함께

내가 미처 인지하지는 못했어도 결국 나의 꿈도

같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옛날 우리 초가집과 거의 비슷한 모습 ^

 

굴뚝이며 앞 마당 끝의 코스모스며 초가의 크기가 거의

흡사하다^ 단 저기 보이는 마루는 없었다!

 

 

보슬비 오는거리/마로니에

 

 내 어린시절 꿈이 녹아있던 3,000평짜리 모래밭( 1979년 촬영)

(우리 손을 떠난지 오래지만,땅콩이 여전히 주전 품목으로 경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남부 지역인 백암과 태영컨트리 클럽이 조성되어있는 구봉산 남쪽 정도가

시발점인듯 싶다. 암튼 청미천은 일죽 부근에 다달으면 넓이가 대략 200 여 미터를

족히 넘게 넓어 진다.

 

그 개울을 건너 남쪽으로 일죽 초등학교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개울 건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걸어서 40여분 정도 걸리는 학교길을 우리는 늘상 개울물이

깊지 않으면 건너 다니곤 했었다. 한참 윗쪽으로 신작로와 큰 다리가 있었지만,

개울길은 질러가는 샛길인 셈이었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고 모래는 기슭으로

갈수록 아주 고왔다. 언덕엔 고운 모래에 붙어 길게 꼬리를 물고 자라는 갈대가

얼키설기 있었고 약간의 잔듸도 자라고 일부는 개망초같은 잡풀 등으로 엉켜있는

게 보통이었다.

 

 

일죽이란 동네는 일가친척도 없었고 마치 이북에서 피란 나온 사람과 똑같은 처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큰 누님을 다끼쨩 이라고

늘상 불렀다.일본 살때의 이름을 그대로 불러준 것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있을리 만무한 우리는 힘들게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찾아서 개간을 하여 밭과

약간의 논을 일굴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말기 철거해간 안성-여주간 철로길 변에 약간의 땅을( 철로였으니 자갈밭

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구어 겨우 논을 만들어 놓았고 다 합쳐보아야 2-3 백평도

채 안 되었다.그리고 청미천 변에 하얀 모래를 일구어 만든 모래밭 한 3000 평 정도가

농토의 전부였다. 일년 농사를 다 지으면 쌀이 몇 가마,, 밭에서 고구마가 일 이십 가마,

땅콩이 몇 섬, 그리고 이것저것 잡곡 일부 깨,콩,참외,무우 배추 뭐 그런 정도였다.

다섯식구가 일년 먹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소출이었다.무엇보다 주식인 쌀이 부족했다.

 

우선 쌀이 부족하니 식량의 많은 부분을 무우나 보리 등으로 때워 나갔다. 보리와 무우를

썰어 밥을하고 솥 중간에 한줌의 쌀을 넣어 늦게 낳아서 거의 엄마 젖을 먹지 못한

막내인 나에게만 쌀밥을 약간씩 주곤 했다. 물론 이 시절엔 우리만 그런게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쌀이 부족하여 양식이 넉넉한 집은 몇집 안 되었을듯하다.

 

워낙 영양 보충을 못했으니 그렇게라도해서 잘 크게 해줄 요량 이었다고 생각된다.

 

허지만 주 소출원인 모래밭은 6월 장마가 들면 어김없이 물이 차올라 둑을 넘고

그 물이 밭을 점유하면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겨우 물이 빠지곤 했다. 거

의 한해도 예외가 없었다. 비가 계속 내리면 우리들은 수로에서 송사리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창 자랄 곡식 들이 장마 비에 물이 담아 일주일씩을 패대기치고 있을때 얼마나 엄마

아버지의 속이 상할줄을 철없는 나는 잘 알수가 없었다. 그저 고기 잡는데 온

정신이 팔리곤 했다.

 

 

일죽 들판

장마가 얼추 지나면 모래밭에 나가서 쓰러진 곡식들을 추스려 세우고 다시 잘 자랄수있게

이것저것 물에 떠내려온 걸 치워주고 그렇게 했다. 어쨋거나 우리 삶의 희망은 그 모래밭

뿐이었으므로 모든걸 거기에 걸었다. 만일 그 밭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일찌기

그곳을 떠났거나 암튼 그랬을 것이다. 언덕에 올라 멀리 개울로부터 마치 큰 강물이 쓰나미

처럼 범람해 들어오는 모래밭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기억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정경에 목이 메어옴을 느낀다. 그 모래밭은 그러나 3-4월의 평화로운 시기에는

참으로 보드랍고 깨끗하며 밭 주위로는 깊은 수로가 연결되어 차갑고 깨끗한 물이 늘상

갈대 숲에 가려있던 것을 기억하게한다.

 

 

 

마치 만리포나 안면도 해안가를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고운 모래가 발가락을 간지럽히고

그 위에 벌렁 누워 있으면 높~은 하늘위로 비행기가 하얀 뭉게 구름같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며 고요한 소리를 내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나는 웬만하면

그 밭이 있는 길로 와서 이것저것 곡식들을 들여다 보다가 집으로 가곤했다.

 

 

책보를 언덕에 던져놓고 살짝 차가운 도랑물로 들어가기도 했고 찬물 덕분에 씩씩하고

날쎄게 숨어버리는 붕어떼를 한참씩 들여다 보기도 했다. 우리밭 건너편에는 정서방

(아버님은 늘상 그렇게 부르셨다) 이란 분의 밭이 있었는데 거의 매년 참외를 심고

7월쯤이면 원두막을 높다랗게 지었다. 어쩌다 한번씩 오라고 해서 참외를 깍아주기도

했다. 헌데 우리 아버지는 좀체 원두막 같은걸 만들지 않으셨고 참외는 그저 한두줄

먹을것만 살짝 수수나 기장 같은 키 큰 곡식 사이에 심으셨다. 외부사람이 여간해서는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렇게 하신것 같았다.

 

 

농사를 지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논 농사는 비교적 수월한 편인데 반해 밭 농사는

일년 내내 하루도 일이 없는 날이 없다. 늘상 풀을 뽑고 벌레등을 잡아 주는 등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해 농사는 망치기 일쑤다. 자나 깨나 아버님은 밭에 계실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에게 그 밭은 끝 간데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보이는 곳이었다.

 

 

 

고운 모래 밭에는 목화를 가득 심기도 했고 경상도말로 동부라는 강낭콩 같은 곡식도

띄를 이루며 심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麻 라고 하는 삼베 만드는 걸 심기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대마초였다. 麻는 시원시원하게 자라고 꽃이 피면

야들한 색상이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대마 같은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침 일찍 모래밭을 나가 보면 땅 밑으로 두더지가 터널을 파고 가는것이 보인다.

아마도 먹이를 구하러 땅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그

두더지를 많이 잡아오셔서 풀섶을 태우는 불에 구워서 나를 먹게 하셨다.

깨끗한 모래밭 밑을 배회하던 녀석이니 매우 깨끗했고 구워서 간이나 살코기를

소금에 찍어서 먹곤 했다. 무슨 그런 야만적인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땐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50에 막내를 낳고 젖한번 먹지 못하고 자라는

아들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기회가 되는대로 몸에 좋은 음식이면 뭐든지 먹도록 하신 우리 아버지^^ 아마도

그렇게해서 구워 먹은 두더지가 줄잡아 몇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지금은

그런거 구할래도 구할수도 없고 어찌 보면 자연이 나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

아니었을지.

 

 

가을이 깊어가면 에스키모인의 얼음집 같은 움막을 짚으로 만들어 밭 한가운데쯤

세운다. 그 속에 약간의 반찬이나 이불등을 가져다 두고 다 익은 곡식도 지킬겸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움막에서 지내셨다.  

 

 

 

그러나 우리 다섯식구 삶의 터전인 동시에 내 유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있던 그 모래밭은 결국 열세살 되던해에 우리 품에서 사라지게 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퍼팅 연습장은 여전히 깔끔히 정리되어 있읍니다.

스코어 게시판도 멋지고,저걸 보는 선수들의 가슴엔
피가 끓어 오르겠지요?

 

1번 홀 파 5 히메네즈 티샷을 보고 따라 나섭니다.

 

굴곡이 심한 그린,,

마침 배상문이 옆 5번 홀 플레이 하는 모습이 보여 잠시 따라갈까 하고,

저 쪽에 빨간 바지가 배상문~ 이홀 벙커에서 붙여 버디를 했읍니다.

안되겠다.양용은 선수를 쫓아가 보자,근데 한국 선수들의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질 않읍니다.

217 미터의 파3 7번 홀~ 많은 선수들이 우측 벙커에 빠뜨리거나

해저드에 퐁당하기도 했습니다.

좌로 휜 도그렉 8번 홀, 김밥을 먹으며 모처럼 한참을 쉽니다.

세컨이 120 미터 안쪽에 걸리는 듯한데, 버디하는 선수가 몇 안됩니다. 양용은 선수도

2미터 남짓 한데서 버디를 놓쳤읍니다.

 

앉아 쉬면서 보니 좋긴한데, 저는 답답해서 이렇게
관전은 못하는 편입니다.
9번 홀, 에라 안되겠다 마지막 우승 조를 따라가는 게 차라리 낫겠다..
우측으로 보이는 벙커와 벙커 사이를 정확히 노립니다. 힘 좋고 드라이버 좋고!

 

11번 홀 티 박스... 우승자 번드 위스버거의 티샷을 모처럼 제대로 봤읍니다.
타이틀리스 910 에 알딜라 립 샤프트~ 똑바로 낮은 탄도로 ! 기막히게 날아갑니다.
190이 넘는 키에 90키로도 더 나갈것 같은 장대한 체구~

 

12번 홀 내리막 티샷.. 이젠 갤러리들 때문에 제대로 걸어 가기도 벅찬 지경이

되었읍니다. 위스버거의 티샷 소리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왼쪽으로 감긴 모양입니다.

그렇게 똑바로 기차게 잘 치드니,그래도 여기서 파로 막았읍니다.

18번 홀로,선수는 저 멀리 갤러리는 한참 뒤에서 쫓아가는 형국이니...

무슨 샷을 제대로 볼 수가 있남요? 갤러리가 완전 들러리로 된 하루..

 

사진에서보다 엄청많은 갤러리가 18번 홀에 운집했읍니다.
그런데 우리 선수가 하나도 우승 경쟁에 없으니 맥이 빠집니다. 왜 이렇게
발렌타인 대회에선 맥을 못출까? 내년? 대회.. 에이..이젠 현장은
그만와얄까 봐요. 너무 복잡해서 경기 관람이 힘듭니다.

 

땀은 나고 몸은 피로하고,결국 인근 앙성 능암 온천으로~ 갔다 나오면서,

 

사과꽃

 

 

그리고 복사꽃,하나씩 올려봅니다. 봄이 다간줄 알았더니..여기 이렇게 봄이
아직도 다정한 손짓을 보내고 있었읍니다.
Bad case of loving you (Diatonic)
 

새집, 여기엔 촉새,할미새,종달새,꿩, 물오리 등등이 포함된다.


능국리 시골 동네엔 주변에 야트막한 야산이 많았다. 동네 바로 뒷산도
있었지만 거기엔 새들이 잘 집을 안 지었다. 한 동네에 총 7명의
동갑나기가 있었는데,한결같이 학교를 댕겨오면 약속이라도
한듯 책가방을 팽개치고 동네 서쪽으로 약 1키로 정도 떨어진
'새댕이 뒷산'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봄철 4월에서
6월,혹은 7월 까지였다.

 

큰 나무가 없고 키 작은 소나무, 참나무, 철쭉 등이 빼곡한 이곳은
새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천국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산 지표면 땅으로
풀들이 잘 자라는 이 곳 어디나 새 집이 많았다. 우리는 떼를 지어 산을
헤집고 다녔고 누구라도 먼저 새 둥지를 찾는 사람이 그 새 집의 임자가
되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 혹은 풀잎 속에 예쁘게 마련해 놓은 둥지는
보는 자체가 신비였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수확물 이었다.

새 둥지를 찾으면 다음 단계는 비료 푸대 실로 고리를 만들어
둥지 가장자리로 늘어 놓아 알을 품는 어미새를 포획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잡은 어미새는 집으로 가져가서
새 집을 만들고 그곳에 넣어서 길렀다. 수 없이
새를 잡아 벌레등을 잡아 먹이며 길러 보았으나 대개
1주일이면 새는 죽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거지만,
당시는 그렇게 하는게 매우 즐거웠고 뭔가 심심하고 특별한 놀이도
없어 그렇게 한게 아닐까,생각이 든다.집에는 강아지도 길렀고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뭔가가 있었나 보다. 꿩 알을 발견하고 즐거웠던 일
또 꿩이 새끼를 길러 졸졸 데리고 도망치는 걸 보던 일, 물오리 집을
찾아 20여개에 이르는 푸르스름한 커다란 알을 포획했으나 그것이
이미 부화를 앞둔 알이어서 크게 실망하던 일,, 등등

사실 당시에 그런 일은 하면 안 되는거야,,라고 누군가가 잘
말해 주었다면 아마도 그 일은 중지를 했을지도 모른다.
새가 되었든 뭐가 됫든 생명은 중하니 절대 함부로 대하면
안 되고 그런걸 잡아서 죽게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면 어릴
적부터 조심하고 아끼는 마음이 좀더 생기지 않았을까?

 

그후 6학년 때인가? 산밑 동네에 사는 친구가 자기 집에 까치가
새끼를 기르고 있다고 가보자 하여 호기심에 따라가 보니
커다란 은행나무 위에 까치 집이 있었고 새끼도 있어서
한 마리를 얻어 와서 정성껏 키웠지만 그것도 결국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20여년 전에 시골 가서 그 집이 생각나서 들러 보니 그 친구는
온데 간데없고 은행나무도 너무 커져서 거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던 기억이 난다.

 


얼마전 시골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 당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도 그런 기억을 지금껏 하고 있어 새집 얘길하며
한참을 웃었었다. 허나,

 

이것은 국민소양 부족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마치 그런 책임이 국가에 있는거 아니냐고 떠 넘기는거 같지만,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제대로 자연 보호 교육을 시키는 건 당연
국가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다시 반복하지만 비록 어릴 때라도 생명의 둥지를 무너뜨리는
일은 절대 해서 안 되는 것으로 배웠어야 하고 또 그런 생명존중
사상을 일찌기 일깨워 주는것은 국가의 의무라 생각해 본다.
요즘의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그런 교육이 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코스모스 2019.10 백암
시골의 우리집은 허름하게 흙벽돌을 쌓아 올린 초가집에다 대지가 작아
옆집엔 다 있는 울타리가 없었다. 보통 개나리나 측백나무 또는 흙으로 쌓은
담이 있고 정문엔 싸립문이나 제대로 된 대문이 있기도 했는데,,우린 그냥
마당으로 끝나버려서 동네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나 다니는 길이 마당이
된셈이다.

나는 어릴적 옆집에 있는 담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비록 싸립문일망정 대문이 있는 집이 더욱더 좋아 보였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아늑한게 어린 맘에도 안정감이 크게 느껴
지는데 반해 우리집은 울타리도 없지, 대문은 물론없지..웬지 어디
오픈된 공간에서 보호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뭐 한적한
시골이라 마당 앞으로 지나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었든 것이다.

헌데 울타리 아닌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때가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가을이 되면 마당 끝으로 잔뜩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만발을 하는 때였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마당 안쪽으로 사람들이 댕기니 엄밀한 의미의 담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느낌상 훌륭한 담이 쳐진 집이 된거 같아 너무
좋았다.

코스모스가 내 키보다도 더 자라 저멀리 보이는 신작로와 아랫동네가
가물가물 코스모스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하늘을 나는 잠자리
떼를 보며 마당끝에 지어진 뒷간 지붕에 핀 하얀 박꽃을 바라보던 정경은
이때껏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가장 평화로운 정경으로 뇌리에 저장되어있다.
그때의 그 평화로운 정경을 그림으로 나마 남겨볼 심산으로 몇차례 시도해 보았
지만 나의 짧은 그림 실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의 어릴적 그 기억을 훌륭하게 한번 재현해 보고싶다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있던 우리집 마당의 끝자락에 잠자리 떼가
날아 다니던 그 시절!!

부모님과 누님과 함께 살던 그시절~

나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는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정지용의 꿈엔들 잊힐리이야~ 는 바로 그런
정경이 아닐까?!


 

맥주 박물관으로 다가가니.. 어디 옛날 공장 같은 느낌이^^

 

 

실물크기인듯,,맥주 발효 탱크랍니다.

 

 

 

처음 독일로 부터 기술을 전수 받아 만들었던 맥주다..

뭐 이런 글귀가 있었던듯,,

 

맥주 광고에 등장했던 모델들의 역사 입니다.

 

북해도 최북단에 위치한 시레토코의 비경을 찍어올린 사진인데...

사람 그림자 땜시로 잘 안 보이네요^

세계 문화유산 지정인지,,,신비한 모습이었음다.

여름에 한번 가보고 싶군요^

 

돈내고 마시는 시음장...귀여운 얼굴의 일본 아가씨들이 서빙을 하네요^

 

시음장 내부..천정은 붉은 벽돌인데,,꽤 멋지게 보엿읍니다.

 

맥주 박물관 인근에 있던 ARIO 란 쇼핑 센타..우리의 대형마트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엄청난 규모의

매장입니다. 암튼 쇼핑몰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읍니다.

 

사포로시내에 잇는 쵸콜렛 공장을 찾아 가다가 버스를 잘못 타서

중간에 내려 보니 다이하츠의 소형차

매장이 보입니다. 작지만 예쁜 디자인의 소형차입니다.

 

 

 

유끼마쯔리 행사가 벌어지는 오도오리 공원의 야경입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24시 영업하는 식당에서 아침을 때운 후 눈이 흗날리는

사포로를 떠나 신치토세 공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다행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눈이 뿌렸는데,, 新雪 이 조금 쌓인

신치토세 공항의 모습입니다.

 

키로로에서 그리고 니세코에서 보았던 눈세상을 하늘에서 똑같이 보는 느낌입니다.

하얀구름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게 맞겠지요^

이렇게 북해도의 눈 과 스키는 마감을 하는 순간입니다.

 

 

 

 

 

たどりついたら 岬のはずれ 곶의 끝에 다다르면
赤い燈が点く ぽつりとひとつ 빨간 등이 툭 하나 켜지네
いまでもあなたを 待ってると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いとしいおまえの 叫ぶ聲が 그리운 그대의 외치는 소리가
俺の背中で 潮風(かぜ)になる 내 등 뒤에서 해풍이 돼
夜の釧路は 雨になるだろう 구시로의 밤은 비가 오겠지

 

ふるい酒場で うわさをきいた 낡은 술집에서 소문을 들었어
窓のむこうは 木枯まじり 창 밖은 초겨울 찬 바람
半年まえまで 居たという 반년 전까지 있었다고 해
泣きぐせ 酒ぐせ 浿ぐせ 우는 버릇 술 버릇 눈물 버릇
どこへ去(い)ったか 細い影 어디로 간 걸까 가냘픈 모습
夜の函館 霧がつらすぎる 하꼬다떼의 밤은 안개가 너무 괴로워

 

空でちぎれる あの汽笛さえ 하늘에서 흩어지는 저 기적조차도
泣いて別れる さい果て港 울면서 헤어지는 땅끝의 항구
いちどはこの手に 抱きしめて 한 번만이라도 이 손으로 꼭 안아서
泣かせてやりたい 思いきり 울리고 싶어라 마음껏
消えぬ面影 たずねびと 지워지지 않는 모습 찾는 사람
夜の小樽は 雪が肩に舞う 오따루의 밤은 눈이 어깨에 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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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노래는 북해도를 마치 짜집기 해 놓은듯한
노래입니다. 하꼬닷테,쿠시로,오따루가 등장하니
말입니다
제가 북해도를 몇차례 나마 가본 건 아마도 이 노래의
영향도 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北の旅人 / 마로니에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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