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가는 길의 옥수수밭 (2010.8.3 촬영) 

 

일죽면 능국리 일대는 일제 시대에 안성-여주간 철길이 지나는 곳이었고 

동물 이라고 불리는 고향 동네엔 철도 역도 있었던 곳이다. 

 

해방후 정착한 그 동네 근처에 놀고 있는 땅이 있을리 만무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름에 홍수가 지면 물이 차 오르는 청미천

큰 개울가 빈 땅을 개간하여 약 3,000여 평의 순전히 모래로 된 

밭을 만들게 된다

 

경남 합천 고향을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아 다시 조국으로 

돌아 오신 부모님! 그리고 또 타향 객지인 일죽으로 오셔서 농토도 별반없이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셨던 아버지는 결국 1963년도 경에는 중병에 시달

리시게 된다. 

 

변변한 병원 치료도 못 받아 보시고 그해 음력 4월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향년 62세! 사실 당시의 수준에서 보자면 거의 평균 수명은 사신

 셈이다.그러나  어린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돌아가신 셈이다!

 

 

식구들이 모인 방에서 기력이 쇄잔하신 아버님이 말씀을 하셨다

 

" 쟈는 꼭 중학까지는 가르쳐야 한데이~ "

 

그러자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 뭘 가꼬 중학을 가르치노?" 

 

 

그리 말하는 어머님의 얼굴엔 침통의 빛도 체념의 빛도 아닌 그저 

무 표정에 가까운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 아! 나는 중학교 가기는 틀렸나 부다 "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님은 그래도 하나 남은 아들이 중학은 나와야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지 싶으셨을거다. 

 

일부 몇몇 좀 사는 애들을 제외하면 그 시절엔 많은 애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상 그 당시엔 초등학교 졸업생의 2/3  이상이 중학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가난한게 주 원인 이었지만,일단 중학 수용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면내 국민학교 총 졸업생의 1/3 수준이었다.

 

 해서 당시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일단은 꽤나 괜찮은 인텔리 축에 들던 시기다. 

한 동네에서 아주 잘 사는 부농의 자식 하나 정도가 대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러고 불과 1년여 만에 엄마 까지 연이어 돌아가시니 세상천지에 누나와

달랑 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가 음력 6월 초이니 대략 7월 중순 정도이다. 

내 나이 12살에서 13살 사이에 일어난 격변이었다. 내 유년기의 행복은 거기 

까지였고 타고난 나의 운명이기도 했다

 

 

 

비록 작은 시골 집이었지만 졸지에 어린 두 남매가 살기에는 너무 썰렁하고 

큰 집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은근히 밤이 되면 집에 있기가 무서워 지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몇달을 더 버티다 수소문 끝에 쌀 2가마니에 집을 팔기로 하였다. 정든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이렇게 떠나게 된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덕 너머 큰 동네 어느 집에 뒷방을 하나 얻어 들어갔다. 

 

내가 위장이 안 좋아진 건 바로 그 즈음이다. 초등학교 5학년 까지도 키가 

훤칠한데다 살이 쪄서 통통 했었는데 연 이은 시련과 제때 밥을 못챙겨 먹으면서 

속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꽁보리 밥을 물에 말아 먹기 시작하면서 영 상태가 좋질 않았다. 동네에 있는

 약방 에서 활명수를 사 먹기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이후로 중 고 대학 및 사회

생활을 한 30대 중 후반까지 무려 25년 이상 속을 괴롭히는 위장기능 저하에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초등학년때는 말 안 듣는 특히 나를 비꼬거나 무시하는 녀석은 데리고 가서

 패주기도 했던 나 였는데, 그 이후 키만 크고 몸이 깡마른 체격은 오래 까지 

지속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아무런 상장도 못 받아 서운키 그지 없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

하다 왜 그리 서운 했는가? 당시 시험지 조작으로 엉뚱한 놈이 1등으로 되고 

나는 2등으로 졸업을하게 됬는데, 상당수의 이런저런 상들은 모두 힘깨나 쓰던 집안 

애들에게 돌아가고 나는 내 팽개쳐진듯 아무 상도 안 주었으니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상이 무엇이길래!! 상도 상 이지만 어린 내가 봐도 어처구니

없는 불공정으로 점철된 초등학교 졸업 언저리의 실상이었다 

 

그리고 아무 대책없이 응시한 중학교 시험,,

 

 

 

 감곡성당 창시자 임 필립보 신부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과연 운명이란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일등 합격은 등록금을 면제해 주지만 2등에게는 아무 혜택도 없다. 공교롭게도 

중학입학 시험에서 나는 2등으로 합격을 했다. 물론 2등도 매우 매우 훌륭한 성과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질적 혜택은 전혀 없었다. 이걸 어찌 해야 하는가? 

 

고민을 거듭하다 오직 하나 남은 개울 옆 밭을 팔기로 했다. 어차피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

 형편이니 처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가 밭에 씨를 다 뿌린 다음 돌아가셔서 한 동네 아는

 사람과 소위 어우리라고 반반 씩 소출을 나누는 데 밭을 내놨던 터 였다. 헌데,, 밭이 팔릴

 기미가 없는 것이었다. 등록금 내야 할 기한은 이미 넘겨 네번을 연기했는데 말이다. 

 

그나마 2등으로 붙었다 하니 사정을 봐준 셈이다. 이제 곧 신학기가 다가오는데 잘못하면

 등록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걸까? 먼저 가신 부모님이 

도와주신 걸까? 아니면 스스로 도운걸까? 한 동네 사는 사람이 밭을 사겠다고 나섰다.

 

 " 3,000 평에 쌀 열다섯 가마"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자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총 재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슬아슬하게 중학교를 들어가게 해준 밑천,, 그것은 열다섯 

가마의 쌀 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학교 입학에 드는 돈이 쌀 2가마였다고 당시 쌀 1가마

만 겨우 마련하여 중학교를 포기한 친구가 얼마 전 얘기를 해서 알았다. 

 

이제와서 역사를 유추해보면 만일 당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면

 나는 필경 중학교는 못갔을 것이다. 물론 중학을 못갔으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이고

 그것이 지금보다 결코 못하다고 얘기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허나 내가 중학교를 갈 즈음의

 그 역사적 현실이 참으로 아슬아슬했다. 한 국가의 역사도 그렇지만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중학을 못가고 그 나이에 공장을 다니다 지금은 큰 일을 하고 계시는 분도 있다. 60년대

그 시기에 중학을 못 간것이 어디 한 둘의 문제랴!!

 

 어린시절 일찍 돌아가 버린 부모님이 너무도 큰 충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중학교를 

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던 중학은 물론 대학,대학원까지 마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운명일까? 필연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잊혀질 슬픔/박강성

 

 돌아서 가는 날 붙잡지 말아줘요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보일것만 같아

 이대로 떠나가 버리면 차라리 아픔은 덜하잖아

 이대로 나를 보내줘요 가녀린 그대의 눈동자 그렇게 서글퍼하지마 

이별의 아픔이 서러워도 날 자꾸 울리진 마 

세월이 가면 흔적없이 잊혀질 슬픔이겠지 

 

나 이대로 떠나면 그만일 뿐 우울한 거리엔 비마저 내려오네 

그대의 모습을 나 또 다시 볼 수가 없어 

슬픔에 목이 메어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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