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보라산)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렇다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더니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 누구도 모르니 결국 흙에서

나온것이요 또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게 맞지 않는가!

 

 

내가 살던 고향과 나의 고향 집은 꽃이 피는 산골은 아니었다.

그냥 시골 이었다. 더러는 근처에 진짜 꽃이 만발하는 동네가 없던것은

아니나, 나의 시골은 그저 평범한 동네였다. 좀 큰 아랫동네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모두 합해서 여섯집이 모여 있었다. 집 뒤로는 아주 얕으막한

뒷산이 있었다. 한참을 뒤로 더가면 모양이 예쁜 조금 큰 서울의 남산 정도되는

종산이 있었다. 집 앞으로는 밭이 경사지게 쭈욱 있었고 한 300여 미터

앞으로 신작로가 동서로 가로질러 있었다.장호원과 안성을 잇는 38번 

국도이다.

 

 

 

초가집 단층으로 반자라고하는 것도 없는 흙벽돌 집이었고 안방과 뒷방이

하나 그리고 부엌이 하나 부엌앞에 장독대 하나 그 앞으로 화장실이 한칸 그리고

마당이 한 10여평 남짓, 집 울타리는 없었다. 뭐 지나 다닐 사람도 적었으니 그렇긴

하지만 여섯집 중에 우리집만 담장이 없어 얼마나 담장있는 집을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할수없이 담장 대신 코스모스를 잔뜩 심어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마당을

덮게 했지만 그래도 그게 담장은 되지 못했다. 담장이 없으니 집 뒤는 바로

손바닥만한 텃밭과 야산이 연결되고 있었다.비라도 많이 오면 그대로 집

토담뒤로 물이 좔좔 흘러오는 형국이었다.

 

 

 다행이 집 앞은 막힌데가 하나도 없어 안방 봉창으로 내다 보면 멀리 장호원

 뒷산과 충북 음성쯤의 아련한 산들이 겹쳐서 시야에 들어왔다. 집터가 저 아래 

신작로 보다 약간 높이 위치해 있는터라 언제나 넓은 시야가 확보 되었었다. 

집에는 개 복숭아 한그루에 미류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옆집에는  미류나무를

 여러그루 마당  주위로 심었었고

또 우측 옆 집에는 마당 안쪽에 난초가 한 그루 심어져 있었고 개나리로

 뒷 담장을 하고 있었다. 여섯가구의 우리 동네는 진달래나 살구 이런건

 전혀 없었다.

 

개나리 담장이 전부여서 봄이면 노란 개나리 담장이 예뻣다. 아랫동네에

 좀 오래된 진달래를 심어 놓은 집이 딱 한군데 있었는데 봄이면 그

 진달래가 멀리서도 보였었다. 살구나무 있는  집이 두 집인가 있었고 대체로

 꽃나무는 많지 않은 동네로 기억된다.

 

 

 

 

예전 시골 집에 살려면 겨울 난방이 참으로 어려웠다. 땔 나무를 그득 쌓아놓은

집은 매우 드물었고 가을 걷이가 끝나면 里 공동 소유의 뒷산에서 단체로

영나무 라는걸 한 일주일정도 했다. 식구 많고 노동력 많은 집은 많이

땔감을 가져갔고 식구수 적은 집은 간신히 나무를 해 가는 아주 비합리적인

제도였다. 그런 저런게 끝 나면 별도로 나무를 사서 쓰든지 해야했다. 대체로

그렇게 나무를 해 오려면 아주 멀리 있는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야했다.

 

5일장이란게 그땐 있어서 장날에 나무 를 해서 팔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간혹 나무를 해서 시골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것이 봄에 진달래 필때까지도 연장이 되어 먼산에까지 가셔서 나무를 

해오실 때면 영락없이 지게 꼭지에 진달래를 한 묶음 꺽어서 꽃고

오시곤 했다. 멀리서 도 한 눈에 진달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지게

꼭대기에서 받아든 진달래를 우리는 맛있게 먹곤 했다.

 

이렇게 진달래는 보기에 앞서 우선 먹고부터 보는 꽃이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 어찌 진달래가 소월의 진달래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소월도 진달래를 꺽어 먹고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이라면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 싯귀를 만약 내가 썻다면

 

 

 

 

" 마곡산의 진달래 꽃

아버지의 지개위에 하늘거리네~

진달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지!"

 

뭐 이런 정도 아닐까? 

 

 

우리집 마당에서 바라본 정경 1980년대 촬영,

 

이때만 해도 예전 우리집에서 보던 정경이 대략 유지되고

있었다 . 신작로는 비 포장으로 먼지가 풀풀 나고 미류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에 벼가 자라 올라 잎이 동그랗게 원을 그릴때 쯤이면 보통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오후부터는 그위에 뒹굴기 시작한다. 저녁도 방에서보다 마당에서 먹기 시작

하는 것이고 잠도 마당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기 시작한다. 철판을 잘라 만든

화덕에 솥을 올려 놓고 나무를 때어 밥을 한다. 밥이래야 거의가 보리밥이지만,

나무를 때면 연기가 난다. 그 연기가 피어 올라 이동네 저동네에서 일제히 근처

산허리를 감돌며 퍼져 나간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멍석에 드러누워있는 하늘

위로 잠자리가 빙빙 돌아 다닌다.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일을 마치시고 늦게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오신다. 가끔은 방망이로 칼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칼국수에 호박을 썰어 넣어 먹는다. 수제비도 해 먹는다

그리고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밤이 되면 근처 옆집에 뭐 재미있는 얘깃 거리가

없나..서성이다 멍석에 돌아와 혿이불을 걸치고 밤 하늘의

은하수를 세며 잠이 든다.

 

 

다음날 해가 떠오르면 더워서 얼른 잠에서 깨어난다. 아마 늦어도 아침

6시나 7시일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내가 살던집.. 내가 태어 낳고 자라왔으며 나의 유년기의

추억이 고스란이 남아 있어야할 나의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아랫

동네에 살던 형 한분이 언젠가 자신이 살던 집을 이름 있다는 화가에게 설명하여

그려서 간직하고 있는 걸 본적이 있다. 얼마나 자기 집이 그리우면 그랬을까..

 

내가 보기엔 원래 그분의 집과는 좀 달라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꿈속의 그

나의 허름하던 집을 다시 재생하여 그려 보고 싶다. 만일 그림 실력이 좀 된다면

직접 그려보고 싶지만.

 

 

 

개 복숭아 한 그루에 날로 자라나던 미류나무 한 그루, 그 미류나무와 함께

내가 미처 인지하지는 못했어도 결국 나의 꿈도

같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옛날 우리 초가집과 거의 비슷한 모습 ^

 

굴뚝이며 앞 마당 끝의 코스모스며 초가의 크기가 거의

흡사하다^ 단 저기 보이는 마루는 없었다!

 

 

보슬비 오는거리/마로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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