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시절 꿈이 녹아있던 3,000평짜리 모래밭( 1979년 촬영)

(우리 손을 떠난지 오래지만,땅콩이 여전히 주전 품목으로 경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남부 지역인 백암과 태영컨트리 클럽이 조성되어있는 구봉산 남쪽 정도가

시발점인듯 싶다. 암튼 청미천은 일죽 부근에 다달으면 넓이가 대략 200 여 미터를

족히 넘게 넓어 진다.

 

그 개울을 건너 남쪽으로 일죽 초등학교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개울 건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걸어서 40여분 정도 걸리는 학교길을 우리는 늘상 개울물이

깊지 않으면 건너 다니곤 했었다. 한참 윗쪽으로 신작로와 큰 다리가 있었지만,

개울길은 질러가는 샛길인 셈이었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고 모래는 기슭으로

갈수록 아주 고왔다. 언덕엔 고운 모래에 붙어 길게 꼬리를 물고 자라는 갈대가

얼키설기 있었고 약간의 잔듸도 자라고 일부는 개망초같은 잡풀 등으로 엉켜있는

게 보통이었다.

 

 

일죽이란 동네는 일가친척도 없었고 마치 이북에서 피란 나온 사람과 똑같은 처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큰 누님을 다끼쨩 이라고

늘상 불렀다.일본 살때의 이름을 그대로 불러준 것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있을리 만무한 우리는 힘들게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찾아서 개간을 하여 밭과

약간의 논을 일굴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말기 철거해간 안성-여주간 철로길 변에 약간의 땅을( 철로였으니 자갈밭

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구어 겨우 논을 만들어 놓았고 다 합쳐보아야 2-3 백평도

채 안 되었다.그리고 청미천 변에 하얀 모래를 일구어 만든 모래밭 한 3000 평 정도가

농토의 전부였다. 일년 농사를 다 지으면 쌀이 몇 가마,, 밭에서 고구마가 일 이십 가마,

땅콩이 몇 섬, 그리고 이것저것 잡곡 일부 깨,콩,참외,무우 배추 뭐 그런 정도였다.

다섯식구가 일년 먹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소출이었다.무엇보다 주식인 쌀이 부족했다.

 

우선 쌀이 부족하니 식량의 많은 부분을 무우나 보리 등으로 때워 나갔다. 보리와 무우를

썰어 밥을하고 솥 중간에 한줌의 쌀을 넣어 늦게 낳아서 거의 엄마 젖을 먹지 못한

막내인 나에게만 쌀밥을 약간씩 주곤 했다. 물론 이 시절엔 우리만 그런게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쌀이 부족하여 양식이 넉넉한 집은 몇집 안 되었을듯하다.

 

워낙 영양 보충을 못했으니 그렇게라도해서 잘 크게 해줄 요량 이었다고 생각된다.

 

허지만 주 소출원인 모래밭은 6월 장마가 들면 어김없이 물이 차올라 둑을 넘고

그 물이 밭을 점유하면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겨우 물이 빠지곤 했다. 거

의 한해도 예외가 없었다. 비가 계속 내리면 우리들은 수로에서 송사리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창 자랄 곡식 들이 장마 비에 물이 담아 일주일씩을 패대기치고 있을때 얼마나 엄마

아버지의 속이 상할줄을 철없는 나는 잘 알수가 없었다. 그저 고기 잡는데 온

정신이 팔리곤 했다.

 

 

일죽 들판

장마가 얼추 지나면 모래밭에 나가서 쓰러진 곡식들을 추스려 세우고 다시 잘 자랄수있게

이것저것 물에 떠내려온 걸 치워주고 그렇게 했다. 어쨋거나 우리 삶의 희망은 그 모래밭

뿐이었으므로 모든걸 거기에 걸었다. 만일 그 밭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일찌기

그곳을 떠났거나 암튼 그랬을 것이다. 언덕에 올라 멀리 개울로부터 마치 큰 강물이 쓰나미

처럼 범람해 들어오는 모래밭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기억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정경에 목이 메어옴을 느낀다. 그 모래밭은 그러나 3-4월의 평화로운 시기에는

참으로 보드랍고 깨끗하며 밭 주위로는 깊은 수로가 연결되어 차갑고 깨끗한 물이 늘상

갈대 숲에 가려있던 것을 기억하게한다.

 

 

 

마치 만리포나 안면도 해안가를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고운 모래가 발가락을 간지럽히고

그 위에 벌렁 누워 있으면 높~은 하늘위로 비행기가 하얀 뭉게 구름같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며 고요한 소리를 내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나는 웬만하면

그 밭이 있는 길로 와서 이것저것 곡식들을 들여다 보다가 집으로 가곤했다.

 

 

책보를 언덕에 던져놓고 살짝 차가운 도랑물로 들어가기도 했고 찬물 덕분에 씩씩하고

날쎄게 숨어버리는 붕어떼를 한참씩 들여다 보기도 했다. 우리밭 건너편에는 정서방

(아버님은 늘상 그렇게 부르셨다) 이란 분의 밭이 있었는데 거의 매년 참외를 심고

7월쯤이면 원두막을 높다랗게 지었다. 어쩌다 한번씩 오라고 해서 참외를 깍아주기도

했다. 헌데 우리 아버지는 좀체 원두막 같은걸 만들지 않으셨고 참외는 그저 한두줄

먹을것만 살짝 수수나 기장 같은 키 큰 곡식 사이에 심으셨다. 외부사람이 여간해서는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렇게 하신것 같았다.

 

 

농사를 지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논 농사는 비교적 수월한 편인데 반해 밭 농사는

일년 내내 하루도 일이 없는 날이 없다. 늘상 풀을 뽑고 벌레등을 잡아 주는 등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해 농사는 망치기 일쑤다. 자나 깨나 아버님은 밭에 계실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에게 그 밭은 끝 간데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보이는 곳이었다.

 

 

 

고운 모래 밭에는 목화를 가득 심기도 했고 경상도말로 동부라는 강낭콩 같은 곡식도

띄를 이루며 심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麻 라고 하는 삼베 만드는 걸 심기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대마초였다. 麻는 시원시원하게 자라고 꽃이 피면

야들한 색상이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대마 같은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침 일찍 모래밭을 나가 보면 땅 밑으로 두더지가 터널을 파고 가는것이 보인다.

아마도 먹이를 구하러 땅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그

두더지를 많이 잡아오셔서 풀섶을 태우는 불에 구워서 나를 먹게 하셨다.

깨끗한 모래밭 밑을 배회하던 녀석이니 매우 깨끗했고 구워서 간이나 살코기를

소금에 찍어서 먹곤 했다. 무슨 그런 야만적인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땐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50에 막내를 낳고 젖한번 먹지 못하고 자라는

아들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기회가 되는대로 몸에 좋은 음식이면 뭐든지 먹도록 하신 우리 아버지^^ 아마도

그렇게해서 구워 먹은 두더지가 줄잡아 몇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지금은

그런거 구할래도 구할수도 없고 어찌 보면 자연이 나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

아니었을지.

 

 

가을이 깊어가면 에스키모인의 얼음집 같은 움막을 짚으로 만들어 밭 한가운데쯤

세운다. 그 속에 약간의 반찬이나 이불등을 가져다 두고 다 익은 곡식도 지킬겸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움막에서 지내셨다.  

 

 

 

그러나 우리 다섯식구 삶의 터전인 동시에 내 유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있던 그 모래밭은 결국 열세살 되던해에 우리 품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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