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핸드폰은 모토로라에서 만든 수류탄 만한 크기의

카폰이었다. 당시는 그걸 자동차에 탑재하고 차 뒤에는 

안테나를 달아서 아주 유유자적 폼을 내며 다녔다. 30여 년

전에 120만원 정도 했으니 결코 적은 금액도 아니었다.

 

당시 승용차에 카폰이 있다는 건 매우 자랑거리였다. 아마도

1990년대 초 정도였던거 같다. 불과 30년  전이다. 

 

허긴 30년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그러다 핸드폰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2010년 대에 지금의 스마트 폰이

등장했다. 어디 운동하러 가다가 먼저 스마트 폰을 구입한 친구가

이건 이래서 좋고 어쩌고 하며 설명을 할 때 몇몇 친구가

삥 둘러앉아 반신반의 얘기를 듣던 때가 엊그제 같이 떠오른다.

 

그동안 폰을 바꿔 가면서 전화 번호부는 계속 이어져 내려왔고

해서 현재의 폰에는 대략 1000개 미만의 연락처가 어지러이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011,017,016 등 예전의 번호도 더러 있었고 실상 

1-20년간 한번도 통화를 한 적이 없는 번호도 꽤나 있었다.

그러다 딸 아이 혼사로 알려야 할 곳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이미 다들 먼저 경험해 보셨겠지만, 이것이 연락을 한다는 게

당연한 번호도 있지만 두 번 세 번 숙고해서 결정을 하게 마련

이다.  만일 생각지도 않은 어떤 지인에게서 그런 연락이 왔다

할 때 우선은 감사히 여길 일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 아니 뭐 이 양반은 아무 연락도 없다가 뭐 이럴 때만 연락을

하시나?"  이렇게 반응을 보일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연락을

한 지인은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했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저 짜증만 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응답이 없을 경우가 있는데, 

그 첫째는 연락이 잘 안 됐을 경우이다. 둘째는 아무 상호 해당

사항이 없을 경우이다. 자녀 혼사,부모님이 이미 모두 돌아가신

경우 등이다.아무 응답이 없을때는 대략 거기에 해당된다고 생각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관혼상제에 아직도 허례허식이 상당부분 많이 남아 있는

우리 풍습에서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암튼 여러 고려 사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우리의 전화번호

부이다. 

 

나는 이참에 번호부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 1차로 200명 정도를

삭제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친구 하나는 자기는 3,000명 정도의

연락처가 적혀 있다고 했다. 참 많기도해라~그건 뭐 각자

나름이니까 ~ 

 

허나 아직도 연락할 일이 없는 번호가 꽤나 빼곡히 폰에는 남아있다.

누가 그러던데 일상에서 자주 연락하는 번호는 1-20개 정도라고~ 

 

아무래도 다시 200개 정도를 지워야 할 것 같다. 그 많은 번호를

속에 품고 있느라 폰이 고생을 많이 한 셈이다. 이제 좀 속을 시원

하게 비워주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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飯蔬食飮水(반소 식음수)

曲肱而枕之(곡괭이 침지)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불의 이 부차 귀)

於我如浮雲(어아 여부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고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

 

 

논어에 나오는 글귀라 하는데 우리는 흔히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으냐? 

로 기억하고 있는 글이다 

 

" 그래 기껏 대장부가 나물이나 먹고 물 마시고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 

 

  대충 이 비슷한 생각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는데 뭘 대단한 걸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

오지도 않았지만! 

 

좋은 음식이란 그럼 뭘까? 

 

지난 주 설악산으로 단풍여행을 갔다. 단풍을 설악으로 보러 간 것은 

무려 25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설악의 단풍은 철저히 내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너무 일찍 가다 보니 단풍은 내 예상의 10%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속초 동명항에서

그 동네에 거주하는 약국 단골인 지인 부부와 자연산 활어회를 거나하게 먹게 되었다

술이 약한 나는 평소 회를 맥주 1잔과 먹는 편인데 이 날은 기분도 좋고 해서 맥주를

여러 잔 마신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물회까지 먹었다 

 

속초 동명항의 어느 횟집 

 

여기까진 매우 순조로웠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온 밤 

10시가 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려 새벽 6시까지 15번에 이르는 설사가 계속되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샐 수 밖에 없었고 맥박은 줄곳 분당 120여 회, 두 번의 구토까지 겹쳐 정말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일정을 전부 취소함은 물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

와야 했다. 집에 오는 내내 포카리 스위트 1.5 리터를 다 마셨다 

 

회는 아무 죄도 없었다. 함께 식사한 지인 부부는 너무도 멀쩡했기 때문이다. 

아내도 몇 차례 설사를 했지만 나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내 평생 설사를 했던

그 어떤 경우보다 혹독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보통 대장 내시경을 할 때 전날 미리

먹는 설사 제품도 그저 5-6회면 끝인데 말이다 

 

이번에 명확히 깨달은 건 우리의 위 대장이 얼마나 정교하게 외부의 침입에

대응하는가 였다. 일단 문제를 감지하면 위장에서 섭취한 음식물을 아래쪽

소장 대장으로 절대 내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대장에 이미 내려온 음식물은 

흡수 없이 최대한 설사 형태로 모두 내 보낸다. 그리고 끝까지 보관만 시키던

문제의 위장 내의 음식물은 도로 토해서 제거해 버린다. 

 

이렇게 문제가 감지된 음식물이 위와 장에서 모두 비워진 연후에야 다시 음식

물을 입으로 섭취할 수 있게 활동을 개시한다! 참으로 신묘한 셀프컨트롤이다

내 몸의 장기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운용

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몸에서 여러 약물을 흡수하고 

내 버리고 서로 간섭하고 등의 수많은 기전들을 보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정교한

여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무려 4일 이상 속을 달래느라 흰 죽만 먹고 지냈다. 일요일 날 

몸이 괜찮은듯하여 백암 들판 사진 촬영을 나갔다가 갈비탕을 먹은 게 화근이

되어 다시 그날 밤 설사를 또 8번이나 했다.   

 

불과 3-4일 사이에 도합 23번의 설사~ 이쯤 되면 몸이 기진맥진할 만도 하지만

실은 그렇진 않았다. 포카리스웨트로 깨진 몸의 이온 균형을 맞춰 주었고 식사는

오직 흰 죽만 먹었다. 

 

그렇게 하니 아침에 일어나도 입에서 냄새가 나지를 않았고 밤에 샤워 후 발을

닦아도 발바닥에서 긁혀 나오는 노폐물이 현저히 적었다.  들어간 것이 적으니

당연 그럴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물론 몸이 정상으로 작동하면 배 부르게 또 먹을 테지만, 뭘 이것저것 많이 먹는

게 과연 몸의 운용에 좋은 걸까? 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좋은 음식이라고 먹다가 잘못된 경우는 몇 번 더 있었다.

해서 앞으로는 어느 지역을 가든 그저 평범한 음식 평소 먹던 음식만 먹기로

다짐을 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눕든, 정자에 앉아 책을 읽든, 산책을 하든, 뭐를

하든 뱃속이 편하고 마음까지 편하면 그것으로 족 하고도  남음은 당연지사라

생각해 본다.

 

흰 죽만 먹고살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단순히 밥 한 공기에 반찬 한 두 가지라 해도

살아 가는데 별 지장이 없음은 물론이다. 단순 소박하게 먹어 몸이 절단 나는 경우가 

많을까? 너무 많이 먹어 몸이 탈 나는 경우가 많을까? 

 

수많은 성인병은 모두 과도하게 많이 먹어서 생긴 병 들이다.

 

그동안 온갖 과도한 음식물들 소화해 내고 처리하느라 내 위장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오죽하면 위가 그런 반란을 일으켰을까?  소싯적 25년 정도 위장 때문에 

고생했던 내가 성년 이후 30대 후반부터 이제껏 위장이 탈 나는 걸 거의 모르고 살았는데,

몸이 정상으로 회복된 지금도 나는 진 간장을 즐겨 반찬으로 활용한다. 겪어 보니 간장

만큼 속을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위장에 도움을 주며 살자!!

조금 먹어도 감사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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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hdi - Instrumental Paradise - Sacred Gathering

 

 

단풍~ 하면 일단 휘황찬란한 그런 풍광을 먼저 떠 올리게 되고 실제 일생에 몇 번은

그런 단풍을 다들 보신 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단풍이라는 칼라는 아주 다양한거 같지만, 따져 보면 빨강,노랑, 주황,갈색

등 몇 가지로 구분된다. 즉 빛의 7가지 가시광선 중 빨, 주, 노 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등은 거의 단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통상 단풍 하면 마치 수많은 칼라가 혼합된 것으로 착각을 하게되어

더 많은 색상이 보여진다고 느끼기 쉽다.

 

사람들은 대체로 빨강 색상에 환호하는 경향이 많다. 주로 단풍나무에서 볼 수있는

빨강은 너무도 선명하고 매력적인 게 사실이다. 빨강은 단독으로도 멋지고 무리를

지어 있어도 멋지다. 울긋불긋이라고 보통 표현하는데 통상 불그스럼 하다는 얘기일

듯하다 

 

노랑은 은은하면서도 포근함을 선사한다. 노란 단풍이 주는 매력은 어쩌면 가을의

진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개 낀 늦가을 아침에 노랗게 빛나는 은행잎을 다들 

보신 적이 있을것이다. 그때의 그 고즈넉함!  평화로움~ 그리고 가을 아침이 주는 그

넉넉함 여유로움도 또한 기억하실 것이다. 

 

분당

 

초등학교 시절 학교 입구로 들어가면 둥근 정원 같은 게 있었고 거기엔 오래된 은행

나무가 두어 그루 자라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지천으로 떨어졌다. 은행

잎을 주어서 책갈피에 몇 개 넣었음은 물론이고 신비한 그 색감에 매료되었던것도 사

실이다. 당시엔 가을 단풍이 총체적으로 어떤 건지, 단풍엔 무슨 무슨 색깔이 있는지

등을 잘 몰랐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요즘 흔히 보이는 빨간 단풍 나무의 기억은 없었고 뒷산에 가을 영 나무를 할 때 보던

누렇고 다소 갈색이 돌던 참나무 단풍과 갈색으로 말라버린 오리 나무의 잎이 기억될

뿐이다. 또 가을에 숙제로 훑어와야 했던 싸리 나무의 노란 잎이 생각난다. 학교를 오

가는 신작로에 미루 나무의 잎이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던 것도 기억난다. 

 

      말하자면 나의 첫 단풍의 기억은 교정의 은행 나무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은행이 노란 단풍의 진수를 보여주지만 그 풍미가 정말 멋진 건 만나기 힘들다. 그저

잎만 풍성하게 노랗게 물든다고 다 멋진 건 아니니 말이다. 내가 본 정말 좋았던 은행 잎은 

오래 전(30년) 남이섬에서 봤던 은행잎이다. 살짝 아침 안개가 낀 그날 빛나던 은행잎은 너무도

깨끗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도타울 뿐 아니라 매우 신선한 기운을 전해주고 있었다. 마치

세속을 초월한 그런 느낌을 선사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해의 흔적이 없이 깨끗하게 물들어 가던 깔끔한 노란색~

     그런 은행잎은 고귀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저 윤기 없이 말라가며 물들어 가는 은행잎에선 그런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갈색에서 빨강에 거의 가깝게 물드는 것 중 하나가 떡갈나무 잎이다. 이 색상은 생각보다

아주 멋지다. 대개의 참나무가 노란색에서 갈색 정도인데 반해 이 나무는 독특한 칼라를

선 보인다. 내가 떡갈나무의 색상에 매료된 것은 불과 5년 전이다. 거주하는 동네의 입구에

매년 가을 곱게 물드는 그 단풍을 보았기 때문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기억에서도 멀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저 자주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단풍은 그렇다. 

 

우리동네 입구의 떡갈나무

요즘은 쉽게 예쁜 단풍이 눈에 띄지 않지만 벚나무 잎도 매우 아름다운 칼라를 보여주는

녀석이다. 짙은 고동색에서 거의 자줏빛에 가까운 칼라를 보여준다.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듯 빛나는 벚나무 잎을 보는 것은 그래서 매우 행복했다. 

 

 

예쁘게 물들어 떨어진 벚나무 단풍

 

노란색에서 약간 갈색을 띠는 잎 중 느티나무가 있다. 지역에 따라 또 어디에 위치하느냐

에 다라 다르지만 예쁘게 물든 느티나무는 매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비교적 일찍 물드는

이 나무는 그래서 그해의 단풍의 바로미터라 할 수도 있다. 꼭 오래된 몇백 년 된 나무가 

아름다운 단풍을 선사하는 건 아니다. 내소사 경내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의 단풍이 궁금

하다.  

 

메타 세퀘어나 낙엽송의 노란 색상 또한 아름답다. 이것은 무리로 줄줄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빛난다. 그저 어쩌다 한 그루 있다 해서 안 될 건 없지만 역시 무리로 많이 있어야 빛이 난다. 포천

을 가다 보면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에 줄지어 있는 메타세퀘어에서는 그다지 멋진 풍광

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메타 세퀘어는 마치 불에 구워진듯한 너무 짙은 갈색을 띄기 때문이다 

 

햇빛에 빛나는 느티나무 잎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단풍의 최종 단계는 단풍나무다. 모든 나무의 단풍이 그렇지만 이 역시

나이 어린 단풍나무는 꼿꼿하게 가지를 하늘로 뻗는다. 그보다는 30년 50년 100년이 지난 

나무일수록 단풍이 장엄하고 가지의 휨과 더불어 더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정말 오래된

단풍나무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장성  문수사의 단풍을 보면 좋을 것이다. 300년 이상

되었다는 그곳 단풍을 전성기에 찾는다면 보통의 단풍 나무와는 많이 색 다른 면모를 보여줄게

틀림없다. 

 

문수사의 300년 단풍나무

선운사의 단풍도 멋이 있었고 마곡사 백양사 내장산의 단풍도 그런 면에선 매우 좋은 풍광을 보여

주었다. 일본 교토의 단풍도 전성기에 가서 봤으나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와

거의 흡사한 단풍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곡사

 

 

선운사

이 가을!  단풍만 아름다운것은 아니다~ 

도처에 단풍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단풍과 다른 이 감 나무도 이제껏 내가 보아 온 가을 풍광 중 단연 으뜸이었다 

 

 

교또 난젠지의 단풍

 

그러니 빨간 단풍나무만 찾는 것은 이 가을 단풍을 감상하는 전부는 아닌 셈이다. 오직 빨간 단풍

만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노랑, 갈색, 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고 좋기로는 이 모든 색상이 함께

어우러진 단풍을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다. 

 

아! 그런데 단풍이 점차 그 고운 빛을 잃어가고 있다. 해가 갈수록 우리 곁에서 점차 단풍이

예전의 그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이 자초한 일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언제쯤 단풍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우리동네의 단풍나무

 

백양사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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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막 지난 9월 26일! 

 

그날은 정말 한국의 중반 가을 하늘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근래 와서 한국의 가을은 예전과 다르게 맑은 날이 별로 없게 되었다

 

그런데 9.26일은 화창하다 못해 하늘에서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청명했다. 하얀 구름도 있었다. 뭐가 되었건 큰일 치르는데 날이 좋으면

좋지! 

 

그러나 코로나의 극성으로 인해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별히 준비

를 해야할것은 없었지만, 왜냐하면 세세한 준비는 딸과 사위가 다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 준비는 저비용 고효율로 콘셉트를 잡았다 

해서 예물이며 기타 등등에 큰 돈을 들이지 않았다. 살림살이도 이미 

딸이 분양 받아 살고 있던 송파의 오피스텔에 다 마련되어 있어 그저 소소한

TV 등 가전 물품 한 두 개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것도 소형으로! 

 

우리가 한 것이라곤 분당의 성당 자매님으로부터 한복을 맞춘 게 전부라 할

만큼 쉬웠다. 엄청 뭐가 복잡하고 힘이 들 걸로 예상을 했는데, 진행과정을

보면 너무 쉽고 일사천리였다.

 

원래 되는 일은 그렇지 않던가? 

 

그 한복이라는것도 지금까지 입어왔던 한복 하고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청담

동에서 한복집을 운영하고 있는 바울라 자매님은 성당에서 봉사자로 지낸 경력이

없는 분은 예식에 쓸 한복을 만들어 주지 않는 분이다. 우리는 양가 모두 한복을

맞췄는데 거의 재료값에 불과한 저렴한 비용만 치렀다. 

 

조금 신경이 쓰인건 청첩을 알리고 초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였는데, 코로나

로 인해 양가 합 49명만 예식에 입장이 되고 식사도 그 숫자만 가능하다 보니

이걸 어떻게 선정하느냐가 사실 매우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내가 아무리 친척

이 적다해도 24명 이내에 신부 아버지, 엄마, 신부 친구까지 합쳐 그 숫자를 맞

추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넣었다 또 저렇게 넣기도 하고 식장 참여가 안 되면 안 가겠다, 가겠다

이리저리 번복이 심하고 그 숫자에 포함이 안 되면 대접을 못 받는 기분이 들고~ 

등등 보통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생긴것이다. 거기다 식사도 못하는데

그냥 참석만 하고 인사만 하러 오시라고 알려드리는 것도 참 어색하고 힘이 드

는 문제였다. 어차피 나는 인사만 하고 얼굴만 보러 갈 것이요!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오겠다는 분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식사도 못할걸 그 먼데까지 뭐 할라

가냐?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는 문제다. 

 

코로나 상황을 끝까지 예의 주시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일 최대

확진자가 3000명을 넘어가자 이미 분위기는 끝난 셈이었다. 

 

예식 당일 앞 뒤 팀을 봐도 정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우리 혼례식은 좀

하객이 많은 편이었다. 거의 대부분 약 2/3는 미리 계좌로 축하금을 보내왔다. 

 

이날은 정말 9월중 가장 좋은 날이었다~ 

하늘엔 실 구름~ 파란 색감~  

한국의 집은 혼례를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나는 그날 참석해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일반 예식장,호텔이 아파트 같다면 이곳 한국의 집은 전원주택 같지 않냐고~ " 

예식 전 신부 친구들! 

 

 

동생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하여

14일간 자가격리를 마친 아들과 함께~ 

 

전통 혼례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아주 옛날 시골서 

큰 누님도 이렇게 비슷하게 혼례를 올린 적이 있었다. 7단계의

예를 거치면서 진행되는데 각 단계마다 상당한 의미가 있고

사실 호텔이나 예식장과는 상당히 다른 나름의 의미를 잘 살린

예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부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들어가는 것도 없고, 사실 나는 이것이

좋았다.  우리는 그저 혼례가 진행되는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 

 

조촐하지만 몇개의 축하 화환을 받았다. 일부 모임에서는 화환 대신

축하금을 주기도 했다. 어느 결혼식에서는 쌀로 대신 받는다, 그 값으로

불우 이웃 돕기를 한다등 여러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비용은

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호텔 등에서 꽃 값으로만 1-2천만 원을 들이는 것에

나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것은

명백한 허례요 낭비라 생각을 한다.  어차피 어떤 생각을 갖느냐는 각자 자신의

인생관에 따른 것이니까~ 

이날은 일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

 

나는 딸이 이날 이토록 환하고 밝은 미소와 표정을 보인 걸 어쩌면 평생

처음 보았다. 아니 가장 밝게 웃는 걸 이날 본 셈이다. 덩달아 나도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가끔 예식날 무거운 표정에 더러 울기까지 하는 

신부를 보기도 하는데 도무지 그래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날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서울 약대

친구들로 30년 넘게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aroma 친구들이다~ 

 

 

연로하신 90을 훨 넘기신 장모님은 휠체어를 타고 예식에

참여하셨다. 외손녀의 혼례를 기어이 보시고야 말겠다고! 

 

혼례식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두 달 후에나 나온다고 했다. 해서

그날 핸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보니 화질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하듯 역시나 힘과 정열이 많이 드는 모양

이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후기를 적어 본다. 사진은 

많지만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기로 한다 

 

 정작 내 자신의 결혼식 당시의 사진은 이렇게 정리해볼 엄두도 안 난다

물론 기억해서 올릴 수도 있겠지만 많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딸의 혼사에 직접 참여해 주시고 또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친척,

친구, 동문,선후배 등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나는 이번 딸의 혼례식을 매우 만족하는 편이다. 모름지기 혼례식은

조촐하게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게 치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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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하루 아니 1분도 폰으로 대변되는 디지털에서

떨어져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자잘한 게임부터 쌍방 단체

카톡, 사진 영상 뉴스 오락 등등 그 모든 게 폰에 들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지하철을 타 보면 10에 9는 모두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그리 급박한지 앉으나 서나 오로지 폰만

쳐다봅니다. 그런데 정작 폰으로 얻어진 지식이나 영상 정보 등은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전무할 지경입니다.  예전에 독서를 통해 

얻어지고 기억되던 정보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라져 갑

니다. 물론 저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영상이 더

잘 머리에 저장 된다는 분도 당연 있겠지요! 

 

현대인들은 그걸 당연히 여기는듯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2019

년에 얼핏 보았던 이 글을 잊지 못할 뿐 아니라 될수록 원문을 공

개 해서 내어 놓고 싶은 맘이 커서 아래에 올려 봅니다. 과연 이 시

대에 디지털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선물하는지~ 

 

특히 어린 손자 손녀를 두신 분들께서는 꼭 한번 아래 글을 보시고

무엇이 진정 미래 아이들을 위하는 것인지를 숙고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에 있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
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끼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언제든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쉽게 누렸던 환경
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건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진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자기 공명 영상(MRI)으로 분석했더니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많이 볼수록 중추신경
계에서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백질(white matter)의 질(質)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의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역
설 적으로 자녀에게만큼은 스크린을 허용하지 않는 ‘노 스크린(no screen)’ 교육을 고수한다.

자녀들은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고 보모에게는 스마트폰 사용 금지
약속을 받아낸다. 심지어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아예 안 줬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하고 취침 전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도 제한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디지털 격차)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자산을 대물림할 수 있다는 것. 디지털 과잉 시대에 걸맞은
‘신(新) 디지털 디바이드’인 셈이다.

실제로 미국 보건정책 연구단체인 카이저 가족재단의 조사 결과 부모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인
경우 디지털 기기를 접하는 시간이 대졸 이상인 경우보다 하루 평균 90분 많았다. 한국에서도
저소득층 학생의 디지털 중독 위험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람과의 접촉이 사치재가 됐다(Human Contact Is Now a Luxury Good)’는 올 초 뉴욕타임스
기사가 생각난다. 빈자(貧者)의 삶에 스크린이 더 많이 들어오고 부자의 삶에선 스크린이 사라
진다.

패스트푸드처럼 강하고 빠른 자극이 아닌, 오감을 풍부하게 하는 느린 자극을 받아 인지 정서
등의 발달 수준이 높은 아이가 사회적으로 더 성취할 확률이 크다. 이들은 무인 자판기에 줄
서서 주문해 허겁지겁 밥 먹기보다는 인간 웨이터가 서빙하는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
고, 사무실에선 스마트폰을 안달복달 확인 안 해도 되는 삶을 살 개연성이 높다.

일부러 디지털 기기를 많이 보여주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자녀를 보살필 마음의 여유, 체력의
여유, 시간의 여유가 없으면 디지털 기기를 내어주곤 한다. 전문가들은 사람이나 실생활(real world)
로부터의 자극을 늘려야 발달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며 아이 생각을 들어주고 아이에게 말을 걸며
사소한 눈 맞춤을 늘리라고 한다. ]

( 디지털 뉴스 김유영 차장, 2019년) 

 

^  ^ 

 

 

물론 이 글에 반론도 있을 것이고 실제 실리콘 밸리에 가서 그곳 대기업 오너들이

정말 자녀들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을 금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만일 위 글을 쓴 이의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지금과 같은 디지털 과잉이

특히 어린이들에게 매우 좋지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잖아도 팍팍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이마저도 금하거나 아니면 사용을 제한 한다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아가란 말이요?  이렇게 즉각 반론이 나올 수는 있을것이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어른이 아닌 어린이 들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음을 기억하시면 좋겠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니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각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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