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도 어김없이 지나갑니다^
2017년 가을 단풍도 꽤 자세하게 찾아 올렸는데,,
또 그렇게 해야 하나? 생각도 들지만, 어쨋든 가을단풍을
찾아 보는게 일상의 큰 낙이 되었으니 그냥 지나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 자주 올리기는 그래서 좀 묶어서 올려볼까, 하는데,
우선 10.31 이전까지의 동네 주변의 간략한 사진입니다


그 첫 시작은 바로 마을 입구의 이 참나무에서

시작 됩니다. 10.25 일 이지요^



그리고 이틀후 10.27엔 벌써 벗나무 잎이

이렇게 쌓이기 시작합니다


벗나무 낙엽이 이쁜 해는 다른 단풍도 예쁘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 동 담벼락에 붙어 살던 담쟁이의

예쁜 모습


벌써 담쟁이는 잎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목련^ 예쁜 목련 단풍을 만나기는 쉽지 않읍니다


입구의 참나무 단풍도 이렇게^


바로 앞 보라산은 어떤가~ 해서 올라보니

산은 아직 소식이 감감,


민속촌쪽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는 쌍용 apt 를 가보니

이렇게 벗나무 낙엽이^


10.30일 우리 동네에도 이제 단풍이 들기 시작



목련은 며칠새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원래 단지내 이곳 저곳에 담쟁이 넝쿨이 무성했는데,, 벽면 재 도색에

대비해서 많은 부분을 잘라 냈지요^ 아름다움과 현실은 그래서

항상 일치하지 않는것 같읍니다

산수유도 몇번만에 겨우 선명한 사진을 얻었고


비가 온후라 하늘이 청명 자체입니다


참나무 사이에 몇그루 있는 상수리인지 떡갈나무

인지가 주 관심 대상인데,


푸른 참나무 잎과 익어가는 떡갈나무잎이

너무도 멋지게 대비를 이룹니다


주변의 아름다움도 적극 찾지 않으면 볼수 없는

그런게 아닐까,, 사진 찍는 저 외엔 아무도 이렇게

멋진 참나무의 가을 모습을 보는 이 없읍니다^


단지로 들어가는 작은 참나무 숲인데,,

해마다 이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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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에 15년 이상을 살았던 분당을 떠나

용인으로 왔습니다. 당시 느낌을 적어둔게 있어

3년이 흘렀지만 다시블로그에 올려볼 합니다^

 

 

 
 

 

15년전 분당 첨 이사와서 보았던 청매화는 이제 너무
키가 커졌다.
꽃은 하늘 높이 매달려 있다. 땅으로 내려온 가지중에
하나를 찍어 본다.
약수물도 거의 한두방울씩 떨어 진다. 허긴 15년이
흘렀으니 많이 크기도 했지.

 

청매화의 상콤한 향이 주변을 맴돈다. 어.. 상쾌 유쾌 통쾌다.
그 말은 이럴때 쓰는 거다.

 

 

 

 

그리고 그 옆에 이제 막 피어나는 진달래,역광에 빛나는 청초한
저 자태,

 

아효,, 오늘 어쩜 이리도 때를 잘 맞춰 왔을까??
봄의 신령한 기운을 유감없이 맞닥뜨릴 수 있었다.
지난 15년간 단 한번도 이렇게 봄의 문턱을 만나지 못했다.
대개 봄이 지나 가거나 꽃이 다 피어 버리거나 그런후 여기를
찾았었다.

 

헌데, 이걸 보고 나니 비로서 난 분당을 떠나는구나^
이 동네 와서 최고의 자연과 풍경과 꽃과 낙엽을 선물 받았던 분당^
그래서 사는데에 한톨의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었던 동네^
천당 아래 분당을 정말 누구보다 깊이 느끼던 동네,
이제 이곳을 나는 얼마 안 있으면 떠나게 될듯하다.

 

아마도 그리웁겠지. 벚꽃 흐드러진 탄천 변과 중앙공원 앞을
다시 찾아오게 될까?
연분홍 산철쭉이 쭉쭉 피어나는 중앙공원 숲을 다시 보러 오게 될까?
가을 단풍의 매력을 생애 처음으로 가르쳐준 열병합 발전소,
느티 마을을 다시 찾으러 오게 될까?

 

  그래 내가 분당 정자동 최고 중심가에 살면서 늘상 그리워 하던곳이
바로 그런곳 아니었을까?
그래,이제 좀 힐링이 필요한 그곳으로 가는거야^
분당의 초 봄을 이렇게 처음으로 푹~느끼니 이제 떠날때가
오고 말았다.

 

인생이란 늘상 그런거 뭔가를 알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거.
그러나 별로 아쉽지는 않다. 왜냐면 난 이동네서 느낄 수 있는거
해볼 수 있는거 거의 다 해봤으니까.
사실은 진작에 떠났어야 한다. 그럴 향편이 못되어 눌러 있었을 뿐이다.
이제 새로운 동네에서 새로운 자연을 만나고 새로운 느낌으로 살 것이다.
이제껏 분당을 찬양했던 것처럼그 동네를 찬양하고 즐겁게 살 것이다^

 

 *       *
(윗글은 지난 2015. 3월 말에 집 계약을 하고 당시의 소감을
적어뒀던 일부입니다. 아랫글은 이사 와서 작성한 글이고요) 
  

 

그러나 시골태생인 나는 언제나 자연을 그리워하는 본성이 있었다.
십 수년 전에도 전원주택의 꿈을 안고 수도권 인근을 기웃 거렸다.
사실그 당시는 여건이 맞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결국 그 꿈은 접고
말았지만 자동차 소리 소음이 주류를 이루는 다운타운에서의 삶이
많이 피곤하고 지친건 사실이다.
성냥갑같은 고층 아파트에서 벗어 난다기보다 아주 조금은 해방된
공간에서 살고 싶었다. 너무나 익숙한 자동차 소음소리 마치
소음이 반주곡인양 그것이 습관이 되어 사실 별 거부감도
없게된 게 아닐까? 

 

 

이사 온 단지 앞쪽으로 본 전경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않는 집,
내가 1982년 9월 잠실 주공 5단지 고층 아파트에 방 하나를
얻어서 독신으로 시작한 첫 아파트 생활 이후 33년이
흘렀지만 언제나 자동차 소음은 내 친구였다. 창문을 닫으면 그런대로
버티지만 열면 들리는 우렁찬 소음^ 결국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지는 첫
째 요인은 바로 이 자동차 소음인 것이다. 전혀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인간
이 만든 소리이기 때문이다.

 

 

암튼, 그래서 지금 이사온 이곳은 과연 어떤가? 우선 층고가 저층이기
도 하지만 자동차 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문을 열면 오직 새소리와
어린이들이 뛰노는 재잘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뿐이다. 뻐꾸기,비둘기,
까치,직박구리,소쩍새,등이 돌아가며 울어 댄다. 워낙 밖이 조용하다 보니
실내의 냉장고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렇다! 소음은 오직 그 소리 뿐이다.
그렇다고 저곳이 무슨 고급 단독 전원주택 같은 곳은 전혀 아니다~ 그저
수수한 단촐한 타운하우스 이다^

 

 
"새 소리가 밥 맥여 줍니까? 쳇^ 까짓 소음이 뭐 그리 대수라고^ 우린 그런
거 전혀 개의치 않읍니다. 누구 약올리기요? " 이러실 분도 물론 없으면
이상한게 이 나라다. 그래~ 새소리의 가치를 그 누가 얼마로 매길 것인가?
 
아침 5시에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역시 새소리 부터 반긴다.
온갖 숲의 내음이 코를 찌르는 아침에 새소리를 고요히 듣고
있자니 과연 이 숲과 고요와 새소리와 맑고 깨끗한 이 공기의 값을
얼마를 매기면 될까? 생각을 하게된다. 아니 값을 매긴다기 보다 숲과 새
의 가치는 무한대라해도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다. 난, 대체 이 나이 먹도
록 무슨 삶을 살았단 말인가? 내가 추구한것이 고작 정자동의 이름난 주상
복합이란 말인가?
 

 

거기 살땐 그 아랫지역 같은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강남
보다도 훨 좋다고 생각했다. 강남은 탁한 공기가 가슴을 짓누르는데 반해
신분당선을 타고 정자역에 내리면 공기 자체가 완전 달랐기 때문이다.지하
주차장엔 수입 차가 반 이상을 차지하던 그런곳이다. 그러나,

 

 
내가 정자동에 사는것과 이 동네에 사는것의 비교를 할 필요는 전혀 없
을것이다. 거기는 거기대로 여기는 여기대로 다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
다만, 33년만에 느끼는 이 고요와 해방감과 편안함과 충만함은 지금껏
살아오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숲으로 가라는 쏘로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그것이 가끔이 아니고 일상이 되었을때의 그 의미를
앞으로는 조금 잘 알게 되지 않을까?

 

 
인생은 결국 선택이라 말할 수 있겠지. 어디에 사는것도 결국은 선택
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더더욱 나의 선택인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던
그건 개인의 자유다. 나처럼 시골 태생은 이곳을 택한것 뿐이다. 그것도
완전 자유 의사가 아닌 어쩌면 약간은 반 강제적인 경로로 말이다. 그러나
그 반 강제적이었던 그 이유가 이렇게 나를 자유롭게 하다니^
 

 

 

아침에 일어난 아들이 말했다.

 

"지금까지 이사해 본 집 중에 제일 좋은곳
같아요^ "
 

 

그래? 그러면 됐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집에만 오면 습관적으로 틀던 TV
를 켜고 싶지 않다. 그냥 조용히 새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 그동안 멀리하던
책도 좀 볼 수 있을까? 음악도 조금 더 듣게 되지 않을까? 나는 살면서
거의 한번도 닦지 않던 가구들을 수건으로 열심히 먼지를 닦고 있었다.
 

 

웬지 짓눌려지지 않는곳, 사람과 학생과 어린이가 많이 돌아 다니는곳!
정자동에 비해 웬지 삶의 활력이 느껴지는 수수한 동네~ 아들,딸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나무 돗자리를 깔려고 했으나 너무도 시원해서 실크양
탄자를 다시 거실에 깔았다.분당 밑으로는 절대 내려갈 수 없다고 버티던
집사람도 언제 그랬냐는듯 완전 만족한 표정이다.
 
이사에 지친 몸이 좀 풀리면 아침에 저 옆으로 산을 함 올라봐야지^
오늘 일찍 일어나 보니 산기슭으로 뿌연 안개가 자욱히 끼어 있었다.

 

이쯤되면 크게 후회할 선택을 한건 아니겠지?
 
 

 

2015,6.18 아침 둘러본 인근 경작지의 도라지,오이  

 
 
아! 자연이여^ 숲이여^ 바람이여^ 새소리여^
향긋한 땅의
냄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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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한번씩 치러지는 총동 골프대회가 올해로 8회를 맞았으니

아마도 1회는 16년 전 그니까 2002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데,

 

골프모임인 관악회는 약 3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하니 나름 꽤

역사가 길다^

 

2016년 7회 대회에 참석후 후기를 이미 올린바 있지만,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 소감을 간략히 적어 보고자 한다^

 

 

대회장인 덕평 cc

 

40여 팀이 참석한 매머드 대회인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

올해는 65세 이상을 씨니어로 구분하여 대략 10조 40여 명을

묶고 그 이하 기수를 주니어로 묶어 팀을 구성한듯하다

나는 62회 동기 한명과 57회 선배님들 2분과 함께 팀이

되었다

 

해서 난생 처음 씨니어 티에서 티샷을 했는데, 나중에 몇홀은

화이트 티를 싸용하긴 했지만, 사실 내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씨니어 티를 쓸 군번은 아닌것 같다. 거기서 친다고 더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제 고령화 시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75세 이상부터 씨니어 티로

치도록함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개인차가 워낙 많아 이 문제는

좀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할듯하다^

 

2년 전 지적했던 중간에 막걸리 찬조 판매는 여전했는데, 우리팀은

찬조만했지 막걸리를 마시지는 않았다. 물론 나중에 그늘집에서

막걸리 한 병을 마시기는했다. 글쎄,, 뭐 즐겁게 축제같은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는 딱히 하지 말자 하기도 좀 그렇다.

 

저녁 식사는 2년 전보다 아주 나아진건 아니지만,그래도 웬만한

수준이었다^ 한국의 골프장이 저녁 만찬에 얼마나 바가지를 씌울

지는 안 봐도 뻔한거라, 집행부의 고충이 크리라 본다^

 

그런데, 이번에 자세히 보니 찬조금이 장난이 아니다. 얼핏 봐도

대략 5,000 만원 정도나 되는데, 음 이거이 참, 고등학교 동창

회가 대학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승자 트로피를 비롯한 수상자들 트로피의 제작 수준이

매우 하이 퀄리티다. 대개 트로피라는게 모양만 크거나 제작 재

질이 보잘것 없는데, 내가 받은 트로피의 무게는 7kg 아령과 비슷

하다^ 케이스에 넣어 자동차까지 들고 가는데 어찌나 무겁던지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왼쪽 팔뚝에 알이 배어 아프니 말이다^

 

골프치고 난생 이런 무거운 트로피는 처음이다^

 

 

각종 트로피를 30여 개나 제작을 했다는데,, 그 비용만 300여 만원이

들었단다^ 거기다 수상자들에겐 모두 축하 꽃다발까지 주었으니

이것도 참 대단한 일이다^

 

어느 골프대회에서 수상자 전원에게

꽃다발을 주는곳 있던가?

 

 

 

 

우리 62회 동기들이 15명이나 참석을 했는데, 이것도 기록적

이다. 그 이전까지의 참석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하나 준비위원들의 세심함을 옅볼수 있는것이 볼 마커 인데,

각 개인의 이름을 새겨서 나눠준 건 가히 기록적이라 할것이다

그냥 볼 마커를 주는것과 개개인 이름을 새겨 주는건 천지 차이

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물론 상품을 전 참석인원이 다 탓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그렇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지난 7회대회 때는 나

역시 아무 상품도 못타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오페라 가수들을 몇분 모신건 대회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를

한 느낌이다^ 서수남 선배의 공연과 이홍렬 후배가 사회를

봐준건 물론 거기에 플러스 요인이었지만 말이다^

 

 

8회 대회에 참가한 62회 동기들

 

덕평cc는 20여년 전 한번 가보고 다시 처음 찾은 곳인데

올여름 폭염에도 페어웨이며 그린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주변의 수목이며 산세도 매우 수려한 편이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찾고싶은 골프장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62동기들이 많이 참석 하기도

했지만 좋은 성적을 내었다. 신현국 동기가 개인 3위,

내가 메달리스트,안구원 동기가 우승을 했으니 말이다^

이승지 동기도 개인상을 탓다^

 

신형국 동기

 

안구원 동기의 우승

 

그리고 필자의 메달리스트

 

시상은 시니어와 주니어부를 구분해서 했다^ 주니어부의

메달은 -1 을 친 후배가 했고 다버디는 4개,다파는 18개파

등 준수한 성적들이다^

 

필자의 시니어 메달스코어는 74타였다^

 

대회는 지나면 잊혀진다^ 누가 그 기억을 1년 또는 2년씩 간직

할까 마는, 그래도 이런 대회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지금 현재

진행형이고 그렇게 해서 여러 동문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회를 위해 수고하신 김영기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 임원 여러분과

참석해준 모든 동문, 62회 동기들, 진행과 뒷풀이에 참여하신 이홍렬

동문,서수남 선배님 그리고 오페라단 가수 여러분, 고생 많이

하시고 애 많이 쓰셨읍니다^

 

덕분에 정말 즐겁고 보람된 하루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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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다 익은 논둑길도 좋았지만 실상 5월 초에 모내기를 하면 

6월 넘어 중순쯤 벼는 상당부분 키가 자라게 된다. 온 들판은

새파란 그린 칼라로 뒤덮힌다^ 초록의 들판에 그러나 장마가

진다. 

 

6월 중순 이후의 여름 장마다~  넘치는 물은 큰 개울을 덮치고

방파제를 넘어 들판을 뒤 덮기도한다. 청미천 물이 일죽 들판을 

뒤덮으면 며칠씩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 길을 건너 학교에 갈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장마가 지면 논둑길과 수로에는 송사리 떼가 창궐을

했다. 송사리를 잡는 방법은 얼게미라는 걸 가지고 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대는 것이다. 얼게미를 대놓고 손가락을 살짝 철사

망에 대고 있으면 송사리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다 철

망을 치는 느낌이 온다^ 그렇게 해서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송사

리를 잡는다. 잡은 송사리는 금세 죽는다^  초여름 풀을 먹고 자란

송사리는 실상 맛이 쓰다^ 너무 작아서 배를 따고 끓여 먹기가 어

려워 그냥 졸여 먹는다. 

 

장마철 학교 끝나고 집에오면 송사리 잡는데 나머지 시간을 다 바쳤다

비가 많이 내리면 송사리뿐 아니라 붕어들도 물을 쫓아 오르내리는데

어느날 집으로 오다 동네 앞 200여평 되는 풀밭을 지날때였다^ 

 

커다란 붕어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 놓고 풀밭속에 퍼덕이는게 보였다

기껏 송사리만 잡던 나에게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얼른 집에가서

얼게미를 가지고 와서 풀밭을 훓었다. 붕어는 끝이 없이 나왔으니

그날 잡은 붕어도 상당량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붕어를 공짜

잡는 횡재를 한것이다^ 

 

 

 

초여름 붕어를 잡을때는 저렇게 파란 벼가 자랄때이다^ 장마철

송사리를 잡을때도 물론 저렇게 녹색의 들판일 때이다.

 

어릴적 시골서 자란 이들은 아마도 이런 글이 조금은 공감이 갈

것이다^ 지금이야 기계로 모내기를 하고 기계로 벼를 베고 기계

에서 탈곡을해서 사람의 손이 거의 안 가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으로 농사를 짓던 그때는 논과 벼와 논둑과 그것들이 어우

러져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벼를 다 베어낸 논에서도 스토리는 계속

만들어졌다.

 

 

겨울이면 얼음이 언 논 한편에서 삽으로 흙을 퍼내어 미꾸라지를

잡았다. 비교적 좀 큰 논에서는 얼음위에서 팽이치기,설매타기

를 하루 종일 했었다. 이래저래 논은 정말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인간에게 더없이 유익을 주는 장소였다.

 

논둑길에 못지않게 밭둑길에 얽힌 추억도 많다^

 

논둑 밭둑 작은 동산, 마당, 동네 뒷담, 초가집, 수수밭,보리밭,

개나리,진달래,미류나무,우물가,들깨 냄새,아카시아 나무 냄새,참나무,

소나무,참새,촉새,하얀 눈, 소낙비, 장마비,비닐우산,우비,도시락,

책가방,모래갱변,개울가의 갈대,고구마,땅콩,,, 끝도 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하나하나에 몇가지씩 딸린 글을 써도 모자랄 판이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의 기억들^ 불과 십여년의 추억이

이렇게 방대하다^ 누가 뭐래도 그 추억들은 나의 보물창고 임이

분명하다

 

 

그 논둑길을 보며 시골길을 달린다^ 저수지에 담긴 물보다 더

많은 나의 기억들을 꺼내면서 들판을 바라 본다^

 

 

아! 그 누가 공감하는이 있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저 들판을 바라

볼까?

 


 

 

세상에는 하고많은 길이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있으면

마치 길이 사람의 혈관처럼 교묘하게 이어져 있다. 혈관이

그렇듯 어딘가에서 끊어지거나 막힌 건 깊은 산중이거나 바닷가

거나 뭐 그런곳이다^ 

 

큰길 작은길 고속도로 국도 신작로 산길 들길 밭길 골목길 

동네 뒷길 앞길 그리고 또 무슨 길이 있을까? 아! 참 그게 있었네

공항가는길~ ㅎㅎ 한참전 티브이 드라마에 등장했던 제목^ 

 

사람들에게 어떤 길은 특별한 추억과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 자신만이 체험했던 특별한 기억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쓰려고하는 길은 바로 논둑길이다! 

논둑길! 21세기 문명시대에 웬 논둑길을? 

 

논둑길을 얘기하려면 먼저 벼가 잔뜩 자라고있는 들판을 말해야

한다^ 봄철 모내기 이후부터 가을 추수를 하기까지 우리 눈에 

보이는 들판은 과연 어떤 느낌을 주는가? 

 

들판의 느낌은 사실 땅의 느낌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회지의 

건물로 도배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주의 본래 모습,태초의

모습은 바로 땅 이다^  사람이 본래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성서는 말하지만, 흙이야 말로 이 지구의 본체이고 

사실이고 실증이다^ 천지 창조도 결국 땅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지 아니한가? 

 

즉 들판은 바로 그 땅의 모양새를 말한다^  아침 이슬이 벼끝에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면 그 감격이 과연 얼마만 하던가? 

그래서 들판은 우주의 원초적 신비를 말해준다^ 그런 들판을 제대

로 본 적도 없어서야 아니 그런 가정을 미리 세울 필요는 없을것

이다 . 이제라도 보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들판에 바로 지금부터 말하려고하는 논둑길이 있다 

논둑길은 말 그대로 논에 둑을 쌓아 우리논과 남의 논을 구분하고

또 논의 평면의 위치가 달라 물을 가두는 면적이 구분되어야할때

역시 둑을 만들어 서로 분리하게 된다. 그래서 논뚝은 자연 구불

구불하고 두께가 다르며 끊어질듯 이어지고 끝 간데가 없이 펼쳐

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농지 정리로 두붓모 처럼 반듯하게 또 예전과 달리 크게

구획이 된걸 볼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효율성은 높아질지 모르지만

원래 의미의 논둑과는 많이 느낌이 다른것 또한 사실이다^ 

 

나 어릴적 살던 안성 일죽면의 들판은 참으로 광대했다^ 백암에서

흘러오는 청미천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상당부분 평야라 일컬을만한

꽤 넓은 들판을 자랑했다^  호남평야,김제평야 같은 들판에는 비할

바가 안되고 유럽이나 미국의 광활한 농지에도 도무지 필적할수가

없는 작은 면적이지만 어릴적 내 눈에 비친 일죽평야는 상당히 크고

넓었다^ 

 

집에서 학교를 가는 길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38번 국도인 비포장

신작로를 거쳐 가는 길이요^ 하나는 예의 그 일죽평야를 쭈욱 가로질러

가는거였다^ 즉 논뚝으로 이어진 그 길로 가면 질러가는 편이되어 

거의 대부분의 통학을 그쪽으로 6년간 한것이 바로 논뚝길이란 글을

쓰게된 연유이다^ 

 

그 길은 논뚝만 있는게 아니었다^ 그 길의 끝 즈음에는 청미천 

고운 모래가 반짝이는 3천평에 달하는 우리집 밭이 있었기에 

그길은 더욱더 친숙할 수 밖에 없었고 학교를 오고가는 길에 더러는

쉬었다 갈 수 있는 휴식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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