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차 옆자리에 젊은이가 휴대폰에 눈을 바짝

붙이고 무언가를 보고 있다. 

엇? 뭐지? 무슨 요상한 영상을 보고 있나? 해서 슬쩍

돌아다보았다.

 

그 청년은 휴대폰 화면을 거의 눈에 붙이듯 하고 영상을 보며

때때로 문자까지 열심히 날리고 있었다. 내가 어림잡아 손가락으로

재어보니 한 5 센티미터 정도였다. 

그 5 센티도 안 되는 공간에서 문자를 잘도 쓰고 있었다. 

 

그렇게 화면을 보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저렇게 하고도 눈이

멀쩡할까?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눈을 가졌길래 눈을 붙여야

사물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거, 참 희한한 사람도 다 있네~ 

 

저렇게 해야 뭘 볼 수 있다면 정상 거리의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 볼까?

원 거리의 물체는 보이기는 하는 걸까? 

 

그 젊은이는 내가 내리고자 하는 한 정거장 앞서서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머리에 떠 올랐다. 

 

빈부 격차,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를 완화할 방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 복잡한 건 모르겠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살펴보자.

 

과거엔 영세 자영업자인 골목 상권이란 것이 다양하게 존재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대형 마트란 놈이 도시 곳곳에 우후 죽순처럼 생겨났다.

소비자들은 신이 났다. 일단 거기 가면 골고루 물건이 쌓여있어 발품을 조금만

팔면 싱싱하고 좋은 물건을 양껏 살 수가 있었다. 

 

처음 코스트코라는 대형 마트가 양재동에 생겼을 때 거기 진입하는데만 30분

심지어는 1시간 가까이 차량이 줄을 서던 걸 기억한다. 해서 힘들게 들어갔으니

물건을 양껏 카트에 집어넣는 게 일상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3-40만 원은 기본

이고 5-60 만원 어치의 물품을 잔뜩 사서 돌아오곤 했었다. 

 

양재동은 지금도 주말엔 오랜 대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E 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E 마트 트레이더스, 등등 

그중에는 간혹 상권이 안 좋아 폐점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매년 성장하고 있다. 

 

코스트코를 잠깐 언급해 보면,

 

전 세계 매장 -- 약 800개

미국-- 540개

캐나다-- 100개

일본 --26개

한국 --10개 

 

2020년 총매출 -- 1560억 달러 ( 약 170조 원)

참고로 월마트, 아마존 ,코스트코의 합산 총 매출은 약 1조 달러에 육박하여

우리 돈으로는 1,200조 에 이른다 . 우리나라 한해 예산의 2배를 거뜬히 넘기는

금액이다. 

 

참고로 삼성전자의 2021년 총 매출은 279조 였다. 

 

* 전 세계 탑 10 매출액 매장 중 한국이 1위--5위까지 싹 쓸이

부동의 1위였던 양재점이 세종점에 1위를 빼앗겼다 함, 

도대체 세종점이 뭐길래?? 

 

* 코스트코의 주가는 500$ 를 기준으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음 

 

소비자들은 당연 이렇게 말한다.

 

' 아, 그거 물건 가격 싸고 믿을만한 품질이고 넓은 주차장에 그만하면 됐지,, 뭘?'

 

물론 맞는 말이고 나 자신도 그래서 인근의 코스트코를 비롯한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편이다. 

 

자, 그런데, 세상의 시스템은 이렇게 부익부, 빈익빈을 향해 세팅이 되어 왔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도록 일조를 하며 살고 있다. 당연 동네 상권이란 것은 

덕분에 지리멸렬이다. 

 

그러면 ' 싸고 편하고 좋은 물건 '을 찾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고 될수록 만인이

평등하고 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양극화니 뭐니 하는 말 자체를 꺼내지도 말아야 할거 아닌가? 

 

양극화가 심화되어 경제 성장도 한계에 직면했다고 다들 얘기한다. 빌 게이츠도

그랬다. 그런데 세상의 시스템은 양극화가 커지도록 이미 만들어져 작동되고

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무슨 방법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시민들의 자발적 인식의 전환으로?

쳇, 공염불도 유분수지, 이게 될 일인가? 

 

정치 제도적으로 혹은 정치적 결단으로 일부 완화가 가능할 순 있겠지만, 이미

굳건히 가고 있는 방향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한 10년 후 20년 후는 세상은 어찌 될 것인가?

 

잘 사는 부유층은 더욱더 주체할 수 없는 돈을 가지게 될 것이고 없는 사람은 

더욱더 빈한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 정도가 어느 수준으로 될지 상상 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전철에서 핸드폰을 마치 눈에 붙이고 보던 젊은이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눈앞의 이익 이란 이런 것일까?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지긴, 뭐가~ 

이런게 뜬금없는 생각 이라는 걸까? 

 

핸드폰에 눈을 바짝 붙이고 화면을 보는 친구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는

것이다. 암튼 생각의 물꼬가 마르지 않고 있다는데 위안을 삼는다는 정도! 

 

 

 

 

 

 

'포토 에세이,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은 맑다^  (0) 2022.05.04
왜? 이봄에 가슴이 뛰어야할까?  (0) 2022.03.24
눈 떠보니 선진국 (책 소개)  (0) 2022.03.08
봄이 겨울을 이기는가?  (0) 2022.03.08
매화에 대한 나의 생각  (0) 2022.02.24

선진국?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그런데 왜? 나라가 이래? 

선짓국은 아니고?

 

우리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소위 거시적 국가지표라는 건

확실히 선진국이 분명한데, 

잡다한 사회현상부터 곳곳에 숨어있는 여러 지표들은 선진국은커녕

후진국에 다름 아니니 이게 대체 왜? 이럴까? 

 

[그러니 이건 현 정치가 엉망이라 그래~부터

눈 가리고 아웅이지 무슨 선진국?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자살률 봐라, 출산율 봐라, 빈부격차 봐라, 교통 사고율 봐라,

산업현장의 재해율 봐라, 

무엇보다 4류에 불과하다는 저 정치꼬라지 좀 봐라~ ]

 

이런 방면에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 이상 보통 시민들이 이 이상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모순 같은 현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연히 유튜브 보다가 알게 된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왜? 란 질문도 또 해답도 일부 제시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일단 전체 220 여 페이지 정도에 불과하고 글도 상당히 

짧게 짧게 간략히 서술되어 있어 읽어 나가기가 편하다. 

생각 같아선 서너번 반복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난다. 

 

암튼 맘만 먹으면 금세 읽을 수 있다. 

 

 왜? 한국이 선진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문제가 다양한지~

그 원인은 어디서 출발하는지~ 

그래서 우리 각자는 어떤 생각을 하는 게 좋을지~

 

이런 문제에 대한 좋은 해답을 구하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포토 에세이,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이봄에 가슴이 뛰어야할까?  (0) 2022.03.24
핸드폰 5cm  (0) 2022.03.08
봄이 겨울을 이기는가?  (0) 2022.03.08
매화에 대한 나의 생각  (0) 2022.02.24
낙엽 치우기 ~ 풀뿌리 민주주의!  (0) 2022.02.15

뭐 다 아시는 거지만,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과 걸어서 가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느냐이다. 

 

승용차를 타고 가게 되면 일단 안전하게 차를 운전하는데 초 집중을

하게 된다. 뭐 슬슬 하는 거 같아도 몸과 마음은 온통 차를 몰아 가는데

한시도 집중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을 동시에 듣는다~

이럴 수는 있어도 무언가를 생각해 나가기는 대단히 어렵게 된다. 

 

만일 차 타고 가면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을 한다~

그러면 결과는 뻔할것이다. 극히 위험하고 당연 피해야할 사안이다. 

 

반면 걸어서 가면 옆 사람이나 나무나 보도 블록 같은 거에 부딪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기는 하지만 아주 약간이면 된다. 한적한 산 길을 걸으면 그 마저도

거의 무시할 수준이 된다. 거기다 속도가 아주 느리지 않은가?

따라서 무언가를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전철을 타고 가는데

 

" 그 어떤 겨울이라도 다가 오는 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 

 

이런 글귀가 어느 교회의 광고 문안으로 걸려 있었다. 음 ~ 나는 순간 생각의 물꼬를

거슬러 올라갔다. 

 

'봄이 강해서 겨울을 이기는가? ' 

'겨울은 봄 보다 약하다는 건가?'

 

물론 이 글의 뜻은 그런데 있지 않음을 잘 안다. 

 

제 아무리 힘들어도 따스한 봄 바람으로 당신의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우리 교회로 오시오~  

우리가 위로하고 녹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감성적 접근도 있지만 이런 이성적 접근은 어떨까? 

 

봄,여름,가을,겨울은 그 어느 것도 서로에 대해 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다. 

겨울은 봄보다 약하지 않고 봄은 여름보다 약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여름은 

가을보다 약하지 않으며 가을은 겨울 보다 약한 것이 아니다. 

 

오직 계절이라는 것은 태양으로부터 지구에 전달되는 열량의 변화에 정확히 부응할

뿐인 것이다. 지구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이 법칙은 변하지 않았으며 제 할 일을 정확

하게 수행해 왔을 뿐이다. 

물론 중간에 빙하기니 뭐니가 있었다지만, 극히 예외적 상황이었고 그 이후 쭈욱 지구는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계절변화에 어찌 이기고 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연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계절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도 않을것이지만~ 

 

이 세상은 아니 정확히 이 지구는 매일 매시간 변하지만, 한편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 할 수 있다. 

변하는 것은 생성된 일체의 것들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우주의 질서와 운행법칙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제법 무변(諸法無變)은 또 하나의 법칙인 셈이다. 

(無變이 맞는지 不變 이 맞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항상 변하지만 결코 변한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이다. 

 

흔히 제행은 무상 이여~ 하다보니 온통 세상에 안 변하는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세상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궁평리 아래 

 

이제 곧 매화가 필 것이다.

천년 전, 백 년 전에도 피었고 작년에도 재 작년에도 피었으며

올해도 필 매화~ 

 

우리의 선인들은 매화를 칭찬하기에 결코 인색한 적이 없다. 

꽃 중에 어느 꽃이 이토록 많은 칭송을 받았으랴~ 

 

그런데 나 자신은 도대체 언제부터 매화를 보았는지 기억이 없다.

특히 어릴 적엔~

대체 동네에 매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초 중등학교 교정에도 매화는 없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앵두꽃은 기억이 선명한데~

그런데 교과서는 물론 도처에 매화를 칭송하는 글은 많았다. 그런데 왜?

그 꽃은 그리 구경하기가 힘들었을까? 

 

선인들이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다면 나라 도처에 매화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해서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겨우 매화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몇 년간 매화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내 발길이 짧아서 그런지 도무지 상상으로 그리던

멋진 매화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림에서 보던 그런 매화는 다 어디 간 걸까? 

매화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선인들이 읊은 매화 예찬과는 별도로  진짜 내가 만난 매화는 무언지~

과연 그 칭송에 걸맞는 꽃인지? 

 

꽃 자체로의 매화를 논한다면 나는 유감스럽게 만점을 줄 수가 없다.  

매화는 꽃 + 알파가 더해야 그 진가가 발휘되는게 아닐까? 

그 알파란 은은한 향기일 수도, 추운 봄 눈을 뚫고 피어나는 꿋꿋함 같은거~ 

혹은 달밤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런 멋 같은 거~ 

그리고 초여름 선물처럼 다가오는 매실 이라는 열매의 유용함~ 등등

 

허긴 뭐 그 정도만 해도 여타의 꽃과는 차별화 됨이 확실하다 하겠다. 

그런데 나는 수백년 묵은 고목에서 해맑게 피어나는 고고한 매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그런가 여전히 그것에 목 마르다.

 

더러 사진상으로 그런 고목의 매화를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렇게 멋지다고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 하나 있다. 

 

구례 화엄사의 흑매화를 본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런 매화는 아래 여러

선인들이 칭송하던 그 매화는 아닌 거 같다. 

 

 

달 아래 보는 매화 / 이승소(李承召)

 

매화는 눈과 같고  달빛은 서리 같아
이따금 실바람이  暗香을 보내누나.
달 아래 보는 이 맑음  뼛골에 사무치거니,
다시 무슨 잡념이 일어 시사에 따고 들랴?

 

 

매화 가지의 달 / 원천석(元天錫)

 

눈썹같은 초승달이 추운 밤을 알리는데
매화 흰 바탕의 그 밝음이 사랑옵다.

바람 자고 밤 깊은데 사람들 흩어진 뒤
찬 빛 서로 비추자니 향기도 맑은 지고!

창가의 매화 (우리동네)

 

 

매화 핀 창가 /퇴계 이황(李滉)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아서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노래하다 / 퇴계

 

 

 獨倚山窓夜色寒(독야산창야색한) -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불수갱환미풍지)-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이 일어나니,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량만원간)-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山夜寥寥萬境空(산야요요만경공)- 산 속 밤은 적막하여 온 세상이 비었는 듯, 

 白梅凉月伴仙翁(백매량월반선옹)-  흰 매화 밝은 달이 늙은 신선 벗해 주네. 

 箇中唯有前灘響(개중유유전탄향)- 그 가운데 오직 앞 내 흐르는 소리 들리니, 

揚似爲商抑似宮(양사위상앙사궁)- 높을 때는 商음이고 낮을 땐 宮음일세.

 

步履中庭月趁人(보리중정월진인)- 마당을 걸어가면 달이 사람 쫓아오고,

梅邊行遼幾回巡(매변행요기회순)-  매화 옆을 걸어 돌며 몇 번이나 돌았던가. 

夜深坐久渾忘起(야심좌구혼망기)-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는데,

香滿衣巾影滿身(향만의건영만신)- 향기는 옷에 가득  꽃 그림자 몸에 가득

 

晩發梅兄更識眞(만발매형갱식진)-  늦게 핀 매화의 참됨을 다시 알아선지,

故應知我怯寒辰(고응지아검한진)-  이 몸이 추위를 겁내는지를 아는지. 

可憐此夜宜蘇病(가린차야의소병)- 가련쿠나 이 밤에 병이 낫는다면

能作終宵對月人(능작종소대월인)-  밤이 다 가도록 달과 마주 하련만.

 

퇴계가 칭송한 매화는 혹시 이런 모양?

 

 

 

매화 예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조선 중기의 문신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야언(野言)’이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제 곡조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고--月到千虧餘本質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柳經百別又新枝

신음이 예찬한 매화는 이런 스타일이 아닐까?  매서운 듯, 고고한 듯~

 

 

그러나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는 저 싯귀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못해

너무 매화의 격을 의인화 시킨 감이 있다. 허긴 작자 마음이니까~

 

그러나 위의 퇴계의 도산 달밤의 시도 그렇고 신흠 선생의 시도 그렇고 참 너무도

멋지게 매화를 표현했다. 

추운 계절에 피다보니 다소 꽃잎이 움추러 들어 그 모양이 완벽해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런 멋진 시로 묘사하고 있으니

매화는 참 행복한 녀석이다. 

 

 

매화는 꽃이 피어나는 순서, 곧 춘서(春序)의 으뜸이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춘풍(春風) / 백낙천

 

春風先發苑中梅 櫻杏桃李次第開

薺花楡莢深村裏 亦道春風爲我來

 

봄 바람에 정원의 매화가 가장 먼저 피어나고

뒤이어 앵두 살구 복사꽃 오얏꽃이 차례로 핀다.

냉이꽃 느릅나무 열매 마을 안에 깊숙하니

또한 말하리라 봄바람이 나를 위해 불어 왔다고.

 

백낙천의 매화는 이런것일까?

 

 

매화 예찬 글 중에서 괜찮다고 생각되는 글 몇 수를

가져와 올려 보았다. 

 

당연 매화 사진은 몇년간 나름 심혈을 기울여 찍어본 나의 작품들이다. 

허긴 이른봄에 피는 꽃으로 이보다 더 멋진게 따로 뭐가 더 있을까? 마는

 

 

이퇴계는 매화를 소재로 107수의 시를 지었을 정도로 매화에 빠졌다.

 

그런데  그토록 멋지다는 매화는 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단 말인가?

설령 나의 눈에 아직은 띄지 않았다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 멋진

그런 매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요즈음 매화 하나 고즈넉이 감상하는 이가 얼마나 있기나 하겠냐 마는,

과연 명성이 맞는지 어떤지 직접 내 눈으로 한번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화엄사의 흑매 

 

 

 

이런 산수유가 이른봄 나의 창가에 피어난다면 어떨까?

 

 

매화 산수유가 아니라도 좋다. 그 어떤 꽃이라도 다가올 봄

나의 창가에 고즈넉 하게 피어난다면

 

그거 참 너무 멋지지 않은가? 

어제 아침부터 오늘 아침까지 영하 7-8 도의 추운 날에 구청  직원 줄 잡아

10여 명이 우리 동네 입구 조그만 녹지대에 지난 가을부터 쌓인 낙엽을 걷어 낸다고

난리도 아니다. 

 

아무래도 무슨 연유가 있겠지~ 하고 어제는 그냥 넘어갔다. 혹 시간 되면

구청 녹지과에 함 물어볼까? 했지만, 그냥 하루가 지났다.  

무슨 화재 위험 때문일까? 

지나는 행인이 휙하고 담뱃불을 잘못 던지면 불이 날 수도 있지.

불 나서 몇그루 수목 홀라당 태우는 것 보다야 낙엽을 싹 치우는 게 낫겠지~

 

그런데 오늘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작업 중인 분에게 물어봤다.

 

" 이거 낙엽을 이 추운데 왜 쓸어 담는 겁니까? "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 민원이 들어와서 그래요~ 지저분하다고~ "

 

나는 되 물었다. 아 그래요? 혹시 뭐 화재의 위험도 있을까요? 

 

" 뭐 그렇기도 하고~" 작업 중인 분은 말끝을 흐렸다. 

 

아하 그러니까 인근 주민 누군가가 구청에 민원을 넣은 거구나~

낙엽 좀 치워 말끔히 하지 뭐 하는 거냐고~ 

 

그런데 떨어진 낙엽이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사람과 반대로 정취를 돋운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방치함이 좋겠다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엽이 쌓여 이듬해 자체 거름이 되면 나무가 더 잘 자랄텐데~

왜 나무에게 제 스스로 생산한 나뭇잎을 자기가 활용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저렇게 싹 쓸어 낸단 말인가? 

 

이럴 경우 어떻게 결정을 함이 좋을까?

 

 

나는 아래와 같은 절차를 생각해 본다.

 

1, 일단 해당 구청에서 인근 동네에 공문을 보낸다.   

 

'여러분이 사는 인근에 낙엽이 많이 떨어져 지저분하다는 민원이 들어왔는데,

주민 의견을 좀 수렴해서 몇 날까지 회신해 주시오~' 

 

그러면 인근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동별 엘리베이터 내부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주민 각자의 찬반 의견을 표시하도록 해서 이를 규합해서 구청에 보내면 이를

종합 판단해서 낙엽을 치울지 말지를 결정하면 된다. 

 

" 거 복잡하게 무슨 일을 그리한단 말입니까? 

 아 그냥 민원 들어왔으면 그대로 처리하면 되지~ 구청 직원들이 그리 할 일이

없답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과거엔 그랬는지 몰라도 요즘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게

맞는 걸까? 

 

민주적 절차~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런데서 출발하는게 아닐까? 생각보다 우리는

민주적 절차 이런 것에 너무 서투르다. 뭔가 복잡하고 시간이 드는 이런 류의 일은

낭비라 생각한다. 그저 단칼에 해 치우는 걸 좋다고 생각한다. 당연 이런 일에 훈련이

덜 되어 있기도 하다.

 

2,몇 명 더 우세한 쪽으로 처리한다.

 

3,  엇비슷하게 의견이 나왔을때  어느 쪽으로 결정할거냐는 전적으로 공무원의

판단에 달렸다.  

아마도 담당 공무원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까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소소한 얘기지만 이것이 곧 국가의 결정권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중차대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는데 생각이 도달하게 된다. 

 

다수결이 만능이고 해결책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만일 모든 구성원 100%가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면 그게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의사 결정에 참여한 수 보다 침묵과 방관

으로 남아 있는 수가 월등히 많을 때 과연 다수결이 얼마나 의미를 가질까? 

 

이럴 경우 정책 결정권자의 소양과 판단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할 것이다. 

 

 

지난 가을 늦게 찍어 본 동네 입구의 낙엽~                                                                       

(구청에서는 저 부근에 돌로 인도와 구분 작업을 마쳤고 작은 관목을 추가로 식재해서

낙엽이 인도나 도로로 날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한 상태였다. 따라서 낙엽은 겨우내

두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아래 사진~

 

 

(떨어진 낙엽을 몽땅 쓸어 담은 포대와 휑 해진 동네 입구~)

 

 

이것이 단지 민원 한통으로 이렇게 처리할 사안일까? 

과연 실제 민원이 들어온게 맞긴하나?   

 

여러분들은 자신의 동네 입구라면 어느 쪽을 선호하실지요? 

 

 

 그런데 공무의 자세~ 시민을 위한 봉사심~ 국가 미래를 위한 판단력~

  이런 것들은 대체 어떻게 갖출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당신들 국민들은 아직 멀었어~ 잠자코 우리가 하는 대로 따라 하기나 해~ 

먹고 살만 하니까 별 헛소리야 참~  "

 

"그보다 뭘 그런데 신경을 쓰고 그러슈?

아 그거 구청에서 하는대로 놔두면 되지! 할 일이 그리 없소?"

 

하여튼 올해는 이미 끝났으니 할 수 없고 내년 가을~ 겨울을 대비해서

구청에 민원을 넣을 예정이다.

 

" 쌓인 낙엽이 잘 보존되는 상태라면 굳이 쓸어 내지 말고 그냥 좀 

두시면 좋겠다!  만일 보기 싫다고 민원이 또 들어오면 인근 주민들 의견을

듣고 판단해 주시라~ " 

 

 

2022.1. 14일 작성  

 

 

 P.S ;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수목 및 환경에 대한 견해를

         나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우리나라는 수목의 생장 발육이 매우 늦다. 따라서 가능한 수목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자

 

2, 개인이 거주하는 주거지는 최대한 녹지가 보존되는 게 맞고 또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수목 또한 동일한 권리가 있다. 

 

3, 콘크리트 벽돌만 빼곡한 주변 환경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어렵다. 가능한

   자연 속에 혹은 그와 유사한 환경 속에 살때 정서적 심미안적 안정감과 행복감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4,너무 쉽게 나무를 자른다. 한번 자른 나무는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 신중을 기해야

   할것이다. 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 

 

   자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존되는게 맞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손을 대지

   않는게 순리라 생각한다. 

 

 

 

'포토 에세이,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이 겨울을 이기는가?  (0) 2022.03.08
매화에 대한 나의 생각  (0) 2022.02.24
걷는건 하늘의 일, 타는건 사람의 일  (0) 2022.01.14
2022 새해 첫날  (0) 2022.01.14
딸 시집가기 전날 밤에~  (0) 2022.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