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몬티로버츠라는 친구가 있다. 샌 위시드로에 큰 규모의 말 목장을 갖고 있는 친구이다.
나는 매번 목장 안에 있는 그의 집을 빌려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를 가
져왔다. 지난번 행사가 열렸을 때 몬티 로버츠는 참석자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말했다.
 
"제가 왜 잭 캔필드 씨에게 이 집을 사용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군요.이야기는 스므 해 전의 한 어린 소년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마구간에서 마구간으로 경마장에서 경마장으로 목장에서 목장
으로 말을 훈련시키며 돌아다니는 떠돌이 말 조련사였읍니다.그래서 소년은 고등학교 시절
에 끊임없이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읍니다.
졸업반이 되었을때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훗날 어른이 되면 어떤 인물이 되고 무슨일을
하기를 원하는지 써 내라는 숙제를 주었읍니다.
 
그날 밤 소년은 언젠가는 자신이 거대한 말 목장의 주인이 되겠다는 인생 목표를 일곱장의
종이에 걸쳐 깨알같이 적어 내려갔읍니다.소년은 아주 상세히 자신의 꿈을 적었읍니다.
건물들과 마구간의 트랙의 위치를 보여주는 25만 평에 달하는 목장의 상세도까지 자세히
그렸읍니다.그리고 그 25만 평의 꿈의 목장안에 지을 1백평의 집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
도를 맨 끝에 첨부했읍니다.
 
소년은 그 꿈의 설계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었읍니다.그리고 다음날 그것을 선생님께
제출했지요.
이틀뒤 소년은 숙제를 되돌려 받았읍니다.겉장에는 커다랗게 붉은 글씨로 F 학점이
적혀 있고 '수업이 끝난 후에 나를 만날것' 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읍니다.
꿈을 가진 소년은 수업이 끝난 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물었읍니다.
 
'왜 제가 F 학점을 받아야하죠?'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이것은 너 같은 환경의 아이한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꿈이다.넌 돈이 한푼도 없다.
너의 가정은 여러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형편이다. 넌 자본을 끌어댈 곳도 없지 않느
냐.말 목장을 가지려면 막대한 금액이 필요하다.넌 땅도 사야한다.말들도 사야하고
종마 값도 치러야한다.너 한테는 이 모든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덧붙이셨읍니다.
 
'네가 좀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 숙제를 다시 제출한다면 점수를 재고해 보겠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했읍니다.소년은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햇읍니다.소년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읍니다.
 
'아들아 이것에 대해선 너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너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것이 되리라고 난 생각한다.'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한 소년은 전에 냈던 숙제를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다시 제출했
읍니다.
 
'선생님께선 F 학점을 주세요. 전 제 꿈을 간직할 테니까요.'
 
소년은 담임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했읍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몬티로버츠는
잠시 참석자들을 둘러 보았다.
 
"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지금 25만 평의
목장안에 세워진 1백평의 집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전 아직도 그 당시 제
가 작성했던 숙제를 액자에 넣어 벽난로 위에 보관하고 있읍니다."
 
몬티 로버츠는 이어서 말했다.
 
" 이이야기의 더 놀라운 부분은 두해 전 여름에 바로 그 선생님께서 30명의 학
생들을 데리고 저의 목장에 와서 일주일간 야영대회를 하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떠나면서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읍니다.
 
'이보게 몬티, 난 이제 자네에게 말해야겠네.내가 자네를 가르치는 선생이었
을때 난 꿈을 훔치는 도둑이었지.그 시절에 난 참으로 많은 아이들의 꿈을 훔
쳤어 다행히도 자네는 굳센 의지가 있어서 자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지.'
 
선생님은 제 어깨를 두들겨 주시고 이곳을 떠나셨읍니다.이상으로 제 얘기를
마칩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누구도 당신의 꿈을 흠쳐가게 하지 마라. 그 꿈이 무엇이든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따르라.
 
잭 캔필드.마크빅터한센 지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에서
 

최근의 우리약국

 

 

약국은 기본적으로 자유업이다. 그러니 아무 곳이나 어떤 방법이든 개업에 제약 조건은 없었다. 

단지 면적 규정만 있다가 그것도 의약분업이 되면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주유소의 거리 제한

규정이 지켜지다가 주유소 개방에 대비하여 그 규정을 철폐하고 철저히 자리를 선점한 결과 외국

자본의 주유소가 설 자리를 잃어 주유소 개방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자유업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거리 제한을 두어 업권을 보호해주는 사례는 더러 있는 편이다.

아무리 시장경제 자유 경쟁이라지만 수많은 업종들이 서로 중복되면 결국 너도 나도 다 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분업 전까진 의원은 어느 정도 상권을 지킬줄 알았고 지금도 먼저 선점한 의원 옆에는 좀체로

동일 의원이 들어가지는 않는 편이다.


허나 약국은 그렇질 못하다. 당시 수원의 동신 아파트 상가에 처음 개업을 했는데 좀 큰 상가이다 보니

약국이 두개가 지정 점포로 되었고 그 중의 하나를 나는 월세로 입점하였다. 헌데 코너에 제과점으로

분양된 점포가 입주를 안 하고 부동 산으로 임대를 주더니 1년이 지나자 갑자기 약국으로 임대가 되었단

소문이 돌았다. 깜짝 놀란 나는 수원시청으로 도청으로 다니며 지정외 점포에 약국이 들어오는 걸 막아

달라고 전체 상인들 명의로 진정서도 넣고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70%의 주민 동의를 받아낸

후발 제3의 약국은 결국 우리 약국과 벽을 하나 두고 코너에 들어 오고야 말았다.

 


이렇게 약국이 들어와도 되는지,나는 약사회의 무능력함에 원망도 해보고 뭐 그리 잘되는 상황도 아닌

상가에 약국이 3개나 있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하고 또 조제시 유발에 약을 가는 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이런 약국을 계속해야 하는지도 의문 이었고 참으로 김이 새는 상황의 연속에서 약국을 괜히 했나 하는

자괴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 약국을 열어 참으로 호된 시련을 맞게된 것이다.

 

급기야 아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장에 탈이 나서 큰 고생을 하게되었다. 그러다 약국을 동일상가 내에서

중간지점으로 이동을하고 약간의 호전을 보다가 결국 지금의 약국으로 완전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으면 나는 계속 그 곳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었으나 그 혹독한 일이 전화 위복이 되어 훨씬 진일보한

약국 경영을 할 수 있게된 셈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새옹지마 격이 된 셈이다.

 

지금은 그보다 훨신 더 참혹한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처방이 많이 나온다하여 거액의 권리금을 주고 약국을 이전하였으나 졸지에 의원이 다른곳으 로 가버려

오도가도 못하는 약국이 있는가 하면, 1층에서 윗층의 처방전을 잘 받아 오던 곳에 갑자기 윗층 의원 가운데로

다른 약국이 날라 들어와 소송을 하고 신경 전을 벌이며 원수처럼 되는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다.

 

모두 의역분업이란 이름 하에 일어나는 약국가의 슬픈 현실인 것이다. 또는 메디칼 센타가 들어선다며 거액의

권리금을 요구받고 기존의 약국도 정리한 상태에서 의원이 안 들어와서 오 갈데가 없어진 약국도 있다.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제3자의 입장에선 별거 아니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정말 죽을 맛일 것이다.

 

이것이 2010년 대한민국의 약국가의 현 주소요 단면이다.
아무런 규제도 없는 자유업종, 약국뿐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자영업은 벌판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이다.

 

유독 약국만 저런 현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교양을 높인 다고,시민 의식을 올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근래 인문학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는 있지만, 文科 理科 로 양분된 이분법적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 세대, 또 지금도 그렇게 학제를 운용하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될 가망은 없을듯하다.

 

文은 理를 흡수해야하고, 理는 文을 멀리 하고서는 균형된 사고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생의 멋과 행복을

오롯이 추구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필수 과정인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문과 이를 적절히 통합한다해서 모두

해결될 수는 당연 없는거지만, 적어도 균형잡힌 사고를 할 수 있는 시민들을 많이 생산해 낸다면 그나마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은 있는 것이니까~ 

 

허나, 돈이 최고 가치를 발휘하는 현실에서 그 어떤 수단을 써도 저런 혼란을 잠재울 수는 없을것이다.

분업 후의 말도 안되는 이런 현상들은 실은 제도의 불비에서 온 측면이 강하다 할것이다. 의약분업이란 게

원래 서양의 제도인데,이것이 동양의 여러 나라도 맞을것으로 생각 하고 세계화의 일환인거 처럼 도입되었지만

실은 많은 문제점과 모순점이 공존하는 제도인것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약국뿐 아니라 병의원도 상당부분 제도적 모순점을 안고 있는 의약분업~

 

과연 좀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일까?

 

   처음 개업할 당시 모습 1987

  

회사를 그만 두기 두어 달 전 부터 일요일이면  약국 할 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수도권

인근을 샅샅히 다니며 어떻게 약국을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수원 부천 인천 성남 안양 등등,

그러다 결국 수원의 한 곳을 계약을 하게 되었다.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장소였는데 그 상가 주인은 서울 강남에서 약국을 하는 여약사였다. 영남대를 나온 박모 약사,

그녀는 이미 완전히 약국이 궤도에 올라 슬슬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최종 부천의 약대 동기생이 운영하는 금마 약국에서 1주일, 근처 중동 약국에서 1주일

약국 실무를 익혔다.  약국 시작하는데 총 2주일의 현장 실습을 끝으로 마친 셈이니 이 얼마나

부실한 준비인가? 하지만 당시 회사를 다니다 중도에 개업을 한 약사들은 거의가 그런 정도였다.

물론 회사 10년 다니며 익힌 약물의 물성 등 약학지식은 기본이 갖춰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약국 실무는 턱없이 부족했다.  

 

 

 1987년 5.27일  드디어 약국을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제약회사를 10년을 채웠으나 

실제 약국에 대해  준비한 건 적었으니 내심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약국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만 앞섰다. 인생의 여정에서 차근차근 자기의 갈 길을 예측하고

꾸준히 준비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때그때 상황에 직면하여 갈 길을 틀어가는

사람도 있으니 나는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좁은 공간에 갇혀있어 답답해 보이는 약국 생활~ 그 길을 택한 나는 앞으

로 어떻게 일을 해나가야 할지, 막연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딱히 어디 가서 물어

보고 조언을 구할 곳도 별로 없었다. 그냥 먼저 개업한 친구들이 유일한 물음의 상대

였다. 

 

 1987년 당시만해도 약국에서는 직접 환자에게 조제를 해줄 수가 있어서 나는 선배들이 

그간 노우하우로 작성한 두툼한 참고용 노트를 친구에게 빌려서 몽땅 필기를 해 나갔다.

볼펜 글씨에 재미가 없던 나 보다 또박또박 잘 쓰는 집사람에 의해 그 노트는 완성되었

다. 개업 초기엔 그 노트가 꽤 힘을 발휘해서 증상을 잘 모르는 환자가 오면 속히 노트를

펼쳐서 처방을 보고 응용하곤 했다. 그래도 환자에 대한 임상지식이 워낙 부족한지라 나는

틈만 나면 그런 강의를 하는 곳을 찾아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배울수 없었던 임상 지식, 그리고 한방 지식을 위해 찾아다닌

강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88년 한 겨울이었다. 당시 서울 종로 관철동에서 한방 강의를 수강하던 때이다. 새벽

 4시 정도에 일어나 수원에서 종로까지 도착하면 강의는 6시 정도부터 시작되어 10시 경에

끝났다. 추운 겨울이어서 중고로 장만했던 포니2는 시동이 잘 안 걸릴때가 많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새벽부터 앵앵 거리는 시동 거는 소리를 낼때가 많았다. 당시는 지하

주차장 같은거는 꿈도 꿀수 없던 대이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수원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는데 갑자기 차의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할수없이 고갯길 내리막을 천천히 시동이 꺼진채로  내려가 의왕시 버스 차고지 앞에 차를

세우고 버스 회사로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니 여기선 안 되니 다른 정비소로 가라 한다.

버스 기사가  쫓아 나와서 간신히 시동 거는 걸 도와주어  차를 과천의 어느 정비소에 맡기고

버스를 타고 강의실에 도착하여 강의를 마치고  다시 내려와 차를 찾아 돌아온 적도 있다. 

 

 한방공부에 임상공부에 정신없이 준비를하며 90년대로 흘러 들어갔다. 그동안 공부한것

도 한방,양병학, 홍채학, 하정헌 자연건강요법,서울약대 임상약학, 옵티마,온누리 등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여러 과정으로 같은 강의를 몇번씩 공부를 해왔다.특히 그중에 

한방에 쏟은 시간과 정열이 막대한데 투입된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제일로 없는게 한방

이다. 물론 그것도 내 탓인 셈이지만^*

 

내가 골프를 잘 치니 공부는 안 하고 늘상 필드만 댕긴줄 아는 친구들이 많은데 실은 그

렇지 않다는 점이다. 약국 개업후 26년이 흐른 지금까지 할수 있는 공부는 거의 다 해왔다

는거, 임상에서의 약학은 완전  백화점 식이어서 어느 분야도 놓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문제라면 한방이면 한방, 임상이면 임상, 양병이면 양병,자연건강 식품이면 식품, 한

분야를 집중으로 파고 들지 못한 것인데 각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이 분산된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2,000년 의약분업 전까진 최대한 푸로페

셔널한 약사가 되기위해 정말 몸부림을 치며 공부를 했었다. 분업 후에는 나 뿐 아니라 대

체적으로 약사들의 공부 열기가 1/10이하로 줄어들고 말아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서울대 대학원 졸업사진 1987.2.26(중간줄 가운데가 필자) 사진 앞에 친구가

2013년 경까지 태준제약 사장을 지낸 권석윤이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묘목을 뽑아서 옮겨가듯 옮겨간 직장은 갈수록 

힘이 들었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특수 신분이나 마찬가지의 혜택을 받은

이동이어서 더 그랬다. 그리고 통근 버스 노선도 없는 입석 버스로의 1시간

반 이상이 편도로 소요되는  출 퇴근은 정말 고달픈 일이었다. 

 

회사에 늦는 경우도 가끔씩 나타났다. 버스를 놓치면 도리가 없었다. 당시

독산동에서 남부 순환로를 따라 양재동을 거쳐 성남으로 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지루했다.

 

그러는 중에 태평양 시절부터 한달에 1만원씩 붓던 재형저축으로 개포동에 13평

아파트를 당첨 받기도하고 1983년엔 드뎌 서울약대 대학원에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도 했다. 그리고 그해 4월 9일에 결혼도 하게 된다. 

 

허나 대웅제약에서는 전부터 해 오던 테니스,야구, 등산등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단지 야구는 거기서도 가능해서 성남 공단의 여러 팀들과 시합을 하기도 했다.

태평양과는 달리 회사의 인적 자원들이 상당 부분 폐쇄적이었고 뭔가 텃세가 남아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리고 대학원을 입학하여 일주일에 두어번 시간을 내어 신림동으로 다녔으나

초기엔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성남에서 관악산까지 강의 시간에

맞추기란 너무도 빡빡했다. 더구나 회사에서는 학비등 일체의 지원이 없었다. 시간도

겨우 조금 내주는데 불과해서 말이 대학원이지 공부를 할 여가가 없었다. 사실 회사에서는

직원이 대학원을 다니는게 뭐 그리 마뜩한 일이겠는가? 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83년도에 입학한 대학원은 논문을 제출할 여력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러면서 더 이상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마침 산도스란 외국계

회사가 사람을 뽑고 있었는데  나는 몰래 산도스에 지원을 해 놓고 면접을 여러차례

보았다. 왜냐면 대학원도 졸업해야했고 뭔가 분위기 쇄신이 필요 했었다. 당시 나는

연구소도 아니고 GMP 라고 한창 당면 과제로 떠오른 공장 리모델링에 투입되어 생산

공정을 맡고 있었다. 도저히 논문을 작성할 방법이 없었다. 

 

산도스의 인사 담당자는 용케도 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종 5차 면접에서

그러면 홀딩하고 있는 논문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서 뽑아주면 지금의 회사

그만 두고 몇 달의 여유 기간에 논문을 완성할거라 말했었다.

그는 내말을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려울 거라는 뜻이었다. 암튼 뭐 논문이 

하루 이틀에 되는것도 아니고 그때 그 회사로 안 가길 천만 다행이었다. 그 회사로

갔다면 필경 또 몇 년은 더 직장 생활을 했을터이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닌듯도하다. 그저 한 4-5년이면 실증이 나니

결론적으로 애초에 회사에서 성공할 마음은 갖지 않는게 옳지 않았을가?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논문을 작성하고 회사를 떠나자'

 

실험실의 도움을 얻어 가며 논문 작성에 피치를 올렸다. 당시 케토톱이 나오기 

이었는데 내가 한 연구가 바로 그런 케토톱같은 흡수률이 시간에 정비례하는

필름의 제조였던 것이다. 수은을 페트리 디쉬에 깔고 그 위에 얇은 필름을 제조하는

것이었는데,이게 수은 알러지가 생겨 손바닥이 가렵곤 했다. 결국 목공 부서의

도움까지 얻어서 결국은 논문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1987년 봄이었다.  야호!!

 

 

1983년도 입학하여 5년 만에 간신히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돈 한푼 

지원없이 졸업하는 대학원! 허나 지도 교수의 조언도 거의 없었다. 직장 다니며 대학

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이게 교수들에게는 별로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우선 공부를 충실히 못하는게 맘에 안 들었을 것이고 회사 댕기면 뭔가 좀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도 못하니 그것도 별로였는가 보다. 허나 쥐꼬리 봉급에

집 살림해야지 등록금 내야지 무슨 여유가 있었겠는가?

 

중고 포니를 타고 댕길때 였는데 담당 교수님은 그것도 불만이었나 보다. 왜 교수가

차가 없느냐? 라고 누군가 묻더라고 때 아닌 불평을 강의시간 중에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긴 그 당시 1980년대 중반 서울대학 교수가 차가 없다는게 이상하기도 했겠지만~

 

대학원생도 타고 다니는 자가용을 교수인 당신은 왜 ? 없냐? 뭐 그런 의미였을까? 

하지만 당시 1980년대 중반만해도 아직 자가용이 보편화 하기 전 이어서 지금처럼 누구나 

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논문 말미에 지도교수를 칭찬하는 말을 

조금만 한 탓에 그 부분을 도려내고 논문을 제출하라는 코미디같은 일을 겪게 된다.

 

지도교수란 분이 단 한번의 논문 지도도 없이 제자가 논문을 작성했으면 지나가는 말로

칭찬 한마디라도 하는게 정상 아닌가? 자기를 추켜세우는 서두 글을 안 썻다고 그 부분을

도려내라니~

지도는 커녕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도 서울대생들은 지가 알아서 논문도 작성하고 졸업

까지 하는 정말 특별난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이제 말이지만 참 째째하기 이를데없는 교수라 아니할수가 없다. 

물론 내가 이 부분에서 잘했다는것은 아니다.  무조건 치켜세우는 말을 올리면 될것을~

어찌보면 나 자신도 참 고지식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그 나이 먹도록 그리 모르다니!

 

일찌기 유달영 선생은 학교 선생, 교수같이 속 좁은 인간이 없다 말씀 하신바 있다. 

1950~ 70 년대 쯤에 겪은 느낌일 걸로 생각 되는데, 세월이 경과해도 별로 변치 

않는게 바로 그 점 이리라.  우리가 흔히 스승이라고 하면 관대하고 포용력도 있고 인생의

사표라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을 뒤집어 엎는 유달영 선생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씀인 것이다. 

 

이 사건은 세상 일에 적당히 영합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상의 문제일 수도 있을듯하다. 

근데 솔직히 마음이 그렇게 돌아 서지를 않는데 어떻게 그딴 말을 써 올린단 말인가?

내 성격상 그런건 어렵다. 

 

세상의  모든 스승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럼 나만 유독 그런 일을 겪은 것이란 말

인가? 뭐 반반 정도 아닐까?  사실 세상사는 다 내 하기 나름이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별 탈없이 살려면 그런것 쯤은 식은죽 먹기처럼 능숙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직장은 이미 재미를 잃었고 학교는 더더욱 매력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 대학원만 졸업하자, 어차피 시작한 거니 끝은 봐야지^ "

 

회사도 때려치고, 더구나 학교? 이미 초중고 부터 나는 학교와는 그닥 좋은 인연을 갖고

있는 편이 아니었으니, 학교나 교수쪽에 무슨 미련이 있을소냐^ 더구나 약학은

내 취향에 썩 잘 맞는 분야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10년 직장 생활은 서서히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바보같은 사나이 /마로니에
 
L.A 의 STUART 회사 연수시절 (1981.9)
 

 태평양 실험실에 나름 적응하며 4년여를 지냈지만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1980년도에 서울약대 대학원에 시험을 쳤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직장이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신문 광고가 보였다. 여기 오면 6개월간 해외 

연수를 시켜 준다는 광고였다. 무조건 응시를 하기로 했다. 헌데 시험을 치는 날 

내가 태평양화학 신입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다. 사정을 얘기하고 그 다음 주 일요일에

시험을 보갰노라 했다 

 

마침 그 회사에는 장덕기라는 동기가 있어서 그게 가능했다. 

 

남들 다 시험 끝난 그 다음주에  대웅제약 동자동 본사의 허름한 2층 구석에 앉아

나는 시험을 혼자 치렀다. 영어와 약제학 전공 이었는데 대학원 갈려구 익힌

어휘에다 태평양 4년간 통근 버스에서 갈고 닦은 영어는 괴력을 발휘했다. 

 

시험 친 그 누구도 영어를 나처럼 깔끔하게 잘 처리한 사람이 없었든 모양이다. 나중에 

전성수 상무께서 어떻게 이리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냐? 하며 약제학의 공장

보다 개발부에 나를 두고 싶어했다. 헌데 회사는 제제를 담당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제제 담당 1명과 성대 화학과를 나온 합성 담당 1명 이렇게 딱 2명을 특

채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대웅 제약으로 가게 되었고 1981년 9월 약속대로 해외 연수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대웅 제약은 직원 그 누구도 해외를 내보낸 실적이 없었고 

심지어  회장님 자신도 해외를 별로 다니신 적이 없다 했으니 큰 투자를 한 셈이다. 

 

그러나 당초 약속된 6개월이 아니고 17일 간의 일정에 불과했다. 실은 6개월 씩 

어딜  보낼만한 껀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후일 삼일제약 사장을 지낸 이종원 당시

대웅제약 생산 부장과 둘이서 미국 LA 의 파사디나에 위치한  STUART 사의 공장에

미란타 제품의 정제와 현탁액을 만드는 공정을 익히기 위해 출국했다. 아마도 그게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란타는 대웅제약에서 상당기간동안 제조 판매를 해 왔었다.

 

LA의 외곽의 고급 부촌인 파사디나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키 큰 야자수가 빼곡한 동네에 호텔이 있었고 공장도 있었다. 와이셔츠가 일주일

을 입어도 목이 더러워지지 않는 그런 청정 지역이었다. 시간을 쪼개 인근 헌팅톤 라이

브러리와 디즈니랜드를 구경했다. 이종원  부장의 미국에 정착한 약대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맨체스터로 날라 갔다. 당시만 해도 동양인은 희귀해서 비행기에 동양

인은 달랑 우리 둘 뿐이었다. 맨체스타에 본부를 둔 ICI 그룹에서 별것 아닌 히비탄

류의 소독제 제조 방법을 형식상 둘러 보았다. 

 

태평양 야구부 경기중 다친 앞니가 결국 맨체스터에서 말썽을 부려 ICI 회사의 

도움으로 근처 칫과에 가서 치료를 했는데, 아주 오랜동안 문제가 없었다. 

맨체스터 외곽 시내에서 당시 퀘이커 교의 집회 장소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관광을 하고  동경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이렇게 꿈같은 17일 간의 난생 처음 해외 구경을 하고 돌아오니 정말 눈에 

뵈는게 없을만큼 나는 들뜨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회사에서는 부장도 나가 보지 못한 해외를 댕겨온 내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툭하면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걸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상일에 영민하게 대처를 잘 못하는 나의 성격과 수양부족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상당 기간 동안 그런 위 아래의 질시와 견제에 힘들어 해야했다.

 

그것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6년을 다닌 회사지만 지금껏 연락이 되거나 교류를 이어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것은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다. 회사의 사풍이 일정부분 몫을 하긴 하겠

으나 꼭 그것만 일지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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