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실험실에 나름 적응하며 4년여를 지냈지만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1980년도에 서울약대 대학원에 시험을 쳤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직장이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신문 광고가 보였다. 여기 오면 6개월간 해외
연수를 시켜 준다는 광고였다. 무조건 응시를 하기로 했다. 헌데 시험을 치는 날
내가 태평양화학 신입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다. 사정을 얘기하고 그 다음 주 일요일에
시험을 보갰노라 했다
마침 그 회사에는 장덕기라는 동기가 있어서 그게 가능했다.
남들 다 시험 끝난 그 다음주에 대웅제약 동자동 본사의 허름한 2층 구석에 앉아
나는 시험을 혼자 치렀다. 영어와 약제학 전공 이었는데 대학원 갈려구 익힌
어휘에다 태평양 4년간 통근 버스에서 갈고 닦은 영어는 괴력을 발휘했다.
시험 친 그 누구도 영어를 나처럼 깔끔하게 잘 처리한 사람이 없었든 모양이다. 나중에
전성수 상무께서 어떻게 이리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냐? 하며 약제학의 공장
보다 개발부에 나를 두고 싶어했다. 헌데 회사는 제제를 담당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제제 담당 1명과 성대 화학과를 나온 합성 담당 1명 이렇게 딱 2명을 특
채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대웅 제약으로 가게 되었고 1981년 9월 약속대로 해외 연수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대웅 제약은 직원 그 누구도 해외를 내보낸 실적이 없었고
심지어 회장님 자신도 해외를 별로 다니신 적이 없다 했으니 큰 투자를 한 셈이다.
그러나 당초 약속된 6개월이 아니고 17일 간의 일정에 불과했다. 실은 6개월 씩
어딜 보낼만한 껀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후일 삼일제약 사장을 지낸 이종원 당시
대웅제약 생산 부장과 둘이서 미국 LA 의 파사디나에 위치한 STUART 사의 공장에
미란타 제품의 정제와 현탁액을 만드는 공정을 익히기 위해 출국했다. 아마도 그게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란타는 대웅제약에서 상당기간동안 제조 판매를 해 왔었다.
LA의 외곽의 고급 부촌인 파사디나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키 큰 야자수가 빼곡한 동네에 호텔이 있었고 공장도 있었다. 와이셔츠가 일주일
을 입어도 목이 더러워지지 않는 그런 청정 지역이었다. 시간을 쪼개 인근 헌팅톤 라이
브러리와 디즈니랜드를 구경했다. 이종원 부장의 미국에 정착한 약대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맨체스터로 날라 갔다. 당시만 해도 동양인은 희귀해서 비행기에 동양
인은 달랑 우리 둘 뿐이었다. 맨체스타에 본부를 둔 ICI 그룹에서 별것 아닌 히비탄
류의 소독제 제조 방법을 형식상 둘러 보았다.
태평양 야구부 경기중 다친 앞니가 결국 맨체스터에서 말썽을 부려 ICI 회사의
도움으로 근처 칫과에 가서 치료를 했는데, 아주 오랜동안 문제가 없었다.
맨체스터 외곽 시내에서 당시 퀘이커 교의 집회 장소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관광을 하고 동경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이렇게 꿈같은 17일 간의 난생 처음 해외 구경을 하고 돌아오니 정말 눈에
뵈는게 없을만큼 나는 들뜨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회사에서는 부장도 나가 보지 못한 해외를 댕겨온 내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툭하면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걸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상일에 영민하게 대처를 잘 못하는 나의 성격과 수양부족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상당 기간 동안 그런 위 아래의 질시와 견제에 힘들어 해야했다.
그것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6년을 다닌 회사지만 지금껏 연락이 되거나 교류를 이어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것은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다. 회사의 사풍이 일정부분 몫을 하긴 하겠
으나 꼭 그것만 일지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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