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대학원 졸업사진 1987.2.26(중간줄 가운데가 필자) 사진 앞에 친구가

2013년 경까지 태준제약 사장을 지낸 권석윤이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묘목을 뽑아서 옮겨가듯 옮겨간 직장은 갈수록 

힘이 들었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특수 신분이나 마찬가지의 혜택을 받은

이동이어서 더 그랬다. 그리고 통근 버스 노선도 없는 입석 버스로의 1시간

반 이상이 편도로 소요되는  출 퇴근은 정말 고달픈 일이었다. 

 

회사에 늦는 경우도 가끔씩 나타났다. 버스를 놓치면 도리가 없었다. 당시

독산동에서 남부 순환로를 따라 양재동을 거쳐 성남으로 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지루했다.

 

그러는 중에 태평양 시절부터 한달에 1만원씩 붓던 재형저축으로 개포동에 13평

아파트를 당첨 받기도하고 1983년엔 드뎌 서울약대 대학원에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도 했다. 그리고 그해 4월 9일에 결혼도 하게 된다. 

 

허나 대웅제약에서는 전부터 해 오던 테니스,야구, 등산등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단지 야구는 거기서도 가능해서 성남 공단의 여러 팀들과 시합을 하기도 했다.

태평양과는 달리 회사의 인적 자원들이 상당 부분 폐쇄적이었고 뭔가 텃세가 남아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리고 대학원을 입학하여 일주일에 두어번 시간을 내어 신림동으로 다녔으나

초기엔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성남에서 관악산까지 강의 시간에

맞추기란 너무도 빡빡했다. 더구나 회사에서는 학비등 일체의 지원이 없었다. 시간도

겨우 조금 내주는데 불과해서 말이 대학원이지 공부를 할 여가가 없었다. 사실 회사에서는

직원이 대학원을 다니는게 뭐 그리 마뜩한 일이겠는가? 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83년도에 입학한 대학원은 논문을 제출할 여력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러면서 더 이상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마침 산도스란 외국계

회사가 사람을 뽑고 있었는데  나는 몰래 산도스에 지원을 해 놓고 면접을 여러차례

보았다. 왜냐면 대학원도 졸업해야했고 뭔가 분위기 쇄신이 필요 했었다. 당시 나는

연구소도 아니고 GMP 라고 한창 당면 과제로 떠오른 공장 리모델링에 투입되어 생산

공정을 맡고 있었다. 도저히 논문을 작성할 방법이 없었다. 

 

산도스의 인사 담당자는 용케도 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종 5차 면접에서

그러면 홀딩하고 있는 논문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서 뽑아주면 지금의 회사

그만 두고 몇 달의 여유 기간에 논문을 완성할거라 말했었다.

그는 내말을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려울 거라는 뜻이었다. 암튼 뭐 논문이 

하루 이틀에 되는것도 아니고 그때 그 회사로 안 가길 천만 다행이었다. 그 회사로

갔다면 필경 또 몇 년은 더 직장 생활을 했을터이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닌듯도하다. 그저 한 4-5년이면 실증이 나니

결론적으로 애초에 회사에서 성공할 마음은 갖지 않는게 옳지 않았을가?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논문을 작성하고 회사를 떠나자'

 

실험실의 도움을 얻어 가며 논문 작성에 피치를 올렸다. 당시 케토톱이 나오기 

이었는데 내가 한 연구가 바로 그런 케토톱같은 흡수률이 시간에 정비례하는

필름의 제조였던 것이다. 수은을 페트리 디쉬에 깔고 그 위에 얇은 필름을 제조하는

것이었는데,이게 수은 알러지가 생겨 손바닥이 가렵곤 했다. 결국 목공 부서의

도움까지 얻어서 결국은 논문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1987년 봄이었다.  야호!!

 

 

1983년도 입학하여 5년 만에 간신히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돈 한푼 

지원없이 졸업하는 대학원! 허나 지도 교수의 조언도 거의 없었다. 직장 다니며 대학

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이게 교수들에게는 별로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우선 공부를 충실히 못하는게 맘에 안 들었을 것이고 회사 댕기면 뭔가 좀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도 못하니 그것도 별로였는가 보다. 허나 쥐꼬리 봉급에

집 살림해야지 등록금 내야지 무슨 여유가 있었겠는가?

 

중고 포니를 타고 댕길때 였는데 담당 교수님은 그것도 불만이었나 보다. 왜 교수가

차가 없느냐? 라고 누군가 묻더라고 때 아닌 불평을 강의시간 중에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긴 그 당시 1980년대 중반 서울대학 교수가 차가 없다는게 이상하기도 했겠지만~

 

대학원생도 타고 다니는 자가용을 교수인 당신은 왜 ? 없냐? 뭐 그런 의미였을까? 

하지만 당시 1980년대 중반만해도 아직 자가용이 보편화 하기 전 이어서 지금처럼 누구나 

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논문 말미에 지도교수를 칭찬하는 말을 

조금만 한 탓에 그 부분을 도려내고 논문을 제출하라는 코미디같은 일을 겪게 된다.

 

지도교수란 분이 단 한번의 논문 지도도 없이 제자가 논문을 작성했으면 지나가는 말로

칭찬 한마디라도 하는게 정상 아닌가? 자기를 추켜세우는 서두 글을 안 썻다고 그 부분을

도려내라니~

지도는 커녕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도 서울대생들은 지가 알아서 논문도 작성하고 졸업

까지 하는 정말 특별난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이제 말이지만 참 째째하기 이를데없는 교수라 아니할수가 없다. 

물론 내가 이 부분에서 잘했다는것은 아니다.  무조건 치켜세우는 말을 올리면 될것을~

어찌보면 나 자신도 참 고지식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그 나이 먹도록 그리 모르다니!

 

일찌기 유달영 선생은 학교 선생, 교수같이 속 좁은 인간이 없다 말씀 하신바 있다. 

1950~ 70 년대 쯤에 겪은 느낌일 걸로 생각 되는데, 세월이 경과해도 별로 변치 

않는게 바로 그 점 이리라.  우리가 흔히 스승이라고 하면 관대하고 포용력도 있고 인생의

사표라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을 뒤집어 엎는 유달영 선생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씀인 것이다. 

 

이 사건은 세상 일에 적당히 영합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상의 문제일 수도 있을듯하다. 

근데 솔직히 마음이 그렇게 돌아 서지를 않는데 어떻게 그딴 말을 써 올린단 말인가?

내 성격상 그런건 어렵다. 

 

세상의  모든 스승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럼 나만 유독 그런 일을 겪은 것이란 말

인가? 뭐 반반 정도 아닐까?  사실 세상사는 다 내 하기 나름이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별 탈없이 살려면 그런것 쯤은 식은죽 먹기처럼 능숙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직장은 이미 재미를 잃었고 학교는 더더욱 매력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 대학원만 졸업하자, 어차피 시작한 거니 끝은 봐야지^ "

 

회사도 때려치고, 더구나 학교? 이미 초중고 부터 나는 학교와는 그닥 좋은 인연을 갖고

있는 편이 아니었으니, 학교나 교수쪽에 무슨 미련이 있을소냐^ 더구나 약학은

내 취향에 썩 잘 맞는 분야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10년 직장 생활은 서서히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바보같은 사나이 /마로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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