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중학교 졸업식날 / 마로니에 부름

 

과거란 무엇인가?

 

역사적 과거, 국가의 과거, 등 거창한 과거란 말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 개인에게 있어 중요한 건 바로 그 사람 즉 '나의 과거' 인 셈이다.

 

" 내가 누군줄 알어? 짜슥들이~ "

" 거 뭐 나의 과거는 묻지 말아 쥬쇼~"

" 에효 말도 마슈! 옛날 얘기하면 눈물 나요~ "

 

등등 천층 만층 구만층인 게 바로 개인의 과거사다!

 

그런데 1959년도에 나왔다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노래 가사는 이렇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의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잊을수가 없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도 풀렸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렀다.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도 풀렸다.

애닯은 가슴마다 햇빛이 솟았다.

 

그래 그런 것이 과거일 수 있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암튼 난 이 가사가 마음에 든다. 정성수란 분이 작사를 했고 나애심의 오빠

전오승이 작곡한 노래이며 나애심이 불러 당대 큰 힛트를 쳤던 곡이다.

 

그 옛날엔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이 콩쿨 대회란 게 있었다.당시 우리 큰 누

님이 그 콩쿨 대회에 출전을 하셨는데, 바로 이 노래를 불렀다. 해마다 추석때

쯤 농번기가 끝나면 행해 오던 가설무대에서였다.

 

김철은이란 친구 형님인 김철호 이 양반이 얼마나 노래를 잘했는지 기억 난다.

또 장암리 어디 살았던 젊은 처녀가 부른 대머리 총각도 기억이 난다.이 분들은

모두 1등상인 황소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철호형은 아마도 몇 마리는 되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를 부르는 도중 심사 위원이 '땡' 하고 종을 울린것이다.

나는 몇 십년이 지난후 이 얘길 큰 누님에게 했다.

헌데 누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난 절대 콩쿨대회에 나간 적이 없다고 펄쩍

뛰신다. 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내가 당시 뭘 잘못 본 겐가? 착각을 하고 있었나?

 

암튼 내 어릴적 기억엔 이 노래를 부르던 누님이었는데 말이다. 큰 누님이

노래를 잘하는지는 몰라도 8순이 다 되어가는 요즘에도 동네 노래 교실을

꾸준히 다니는 걸 보면 노래를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다.

 

 

여튼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잊을 수가 없는 곡이 되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다른 어느 누님뻘 되는 이가 이 노래를 부른 건지 확실치 않지

만 말이다. 그건 뭐 이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자! 그런데 여기서 과거에 대해 얘길 해보자. 흔히 과거를 묻지 말라 하면

힘들고 고생하던, 떠 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말하기 마련이다. 더러는 결혼 전

남녀가 가지고 있었던 로맨스를 과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암튼,

혹시 우리 친구중에

 

'내 과거는 쓸만했지, 그만하면 난 좋았어' 하는 이 몇이나 될까?

 

6.25 중 태어난 우리들은 거의 대개가 어렵게 살지 않았는가? 먹고 살 것이

넉넉한 집안이 별로 없었다. 다들 겨우 겨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소위 '불행 증후군' 이란걸 알게 모르게 가슴에 품고 산다.  

 '내가 제일 힘들게 살았고 불행했으며 제일 가난했다' 같은 것이다. 

 

" 나 만큼 고생한 놈 있으면 나와 봐! 내 고생은 말도 마! 우리 집이 제일 가

난했어! 어휴 나 같은 사람도 있을라구!! " 등등이다.

 

어쨋거나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했고 가난했고 힘들었고

이런 감정을 갖고 사는 이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을 마치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사는 이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해서 웬만한 남의 고생 얘길 들어도

 

" 까짓 그게 뭐 고생이라고 야단이야~ 흥^ "

 

이러곤 만다. 뭐 하나 끝까지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왜냐면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그 무엇도 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마이너스) 영향을 끼치

는지 잘 모르는 거 같다.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고  불행했으며 가장

힘든 삶을 살았다고 늘 생각하는 마음에 행복한 감정이 깃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또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일치감을 잘 느낄 수 있을까?

 

과거의 그런 나를 버리지 못하는 한 현재의 내가 정상적으로 균형있게 잘 살아

가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낮

게 될뿐 아니라 자칫 인생이 우울 모드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한참 전 까지는 그런 생각이 다소나마 좀 있었던 거 같다. 시골서

논 마지기 하나 변변히 없었지,친척도 없지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부모님도 일찍

돌아 가셨지~ 도대체가 뭐 하나 내세울만한게 아무것두 없었으니 나도 불행증후군

환자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려서 부유한것이 꼭 좋은것도 아닌 걸 많이 보았다. 그 부유가 사람을 나태하게

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하는것도 많이 보았고 유약한 심성으로 인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도 많이 보아 왔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만 인생이란 꼭 좋은것만이 다 좋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기 전 까지 나는 내가 누리고 살았던 즉 나에게 주어졌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행복했던 것인가를 잘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또 나중에 주변을

돌아 보니 다들 나 이상으로 어렵게 살았고 힘든 과정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세상 불행을 자로 잴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더 불행한지 더 가난했는지 측정

하기는 어렵다. 또 설령 측정했다손 쳐도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 마냥

자신이 최고로 불행했다고 느끼며 사는 인생이 과연 행복에 이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바로 이것이 '불행 증후군'에서 시급히 벗어나야할 이유이다.

 

나의 과거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불행하지만도 않았다. 나는 태어난

고향도 있고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도 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

으며 형제 자매간 꿈 같은 시절을 보냈었다. 그후 이런 저런 인생의 질곡은 있었지만

나름 잘 살아왔고, 어디 내어놓을만큼 뻐젓한 무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다.

 

 

내가 겪어 보니 어릴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마음도 넓고 사람도 잘 사귀고

하는거 같았다. 지독히 가난하거나 암튼 뭔가 너무 악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무언가

모르게 심성이 약간씩 비뚤어 지거나 성격이 모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설령 가난하게

살았다 한들 그게 뭐이 자랑이며 자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걸 내세울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상황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이 주변에는 많지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복한 인생은 누가 만들어 줄 수도 꾸어 올 수도 없다. 돈만 많으면,

지위가 높으면, 기타 뭐만 잘하면 행복하냐? 이런 바보같은 물음은 그만 집어 치자.

그럴 수도 안 그럴 수도 있는게 인생이다. 남 보기엔 우스워 보여도 나름 행복한 삶을 사는

이는 많다. 남 보기에 뻐젓해 보이지만 실제 불행하게 사는 이도 많다. 그러니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 할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 화성의 낚시터에서 (1980년대 후반)

 

 

과거를 물을테면 물어라!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다.

현재를 물어라! 역시 또한 충분히 대답해 줄 것이 아주 많다.

 

 

행복이 무어냐고 묻지를 마라~ 그건 각자의 가슴 속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묻지 말라는 건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 정체가 무엇인지 잘 밝히고 오픈하여 투명

사회로 나아가는게 바람직한 미래의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뭐든 감추고 쉬쉬하며 회색빛 인간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때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과거의 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 대

한 신뢰성을 더하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현재가 중요하다고 하나 그의 과거에

지울 수 없는 흑 역사가 있다면 과연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쉬운 일례로 카페

에서 알게된 사람을 깊이 신뢰하기 까지는 난관이 많다. 당연하지만 그 사람의

과거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카페등에서 자신의 과거 인생을 소상히 밝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나의 블로그에 최대한 나의 과거부터의 기억을 살려 올려

두려 노력하였다. 물론 현재의 나란 사람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는 마찬 가지다.

 

그것은 '내가 누구요'~ 하는 명함 한 줄과는 게임이 안 되는, 명함 100장 1,000장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인생 고백서이기 때문이다. 여러 블로그를 보아 왔지만

나와같은 형식을 취하는 블로그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그런 방식이 꼭 좋다고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런 방식을 고수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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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에 촬영한 나의 고향 빼낙골

현재는 저 집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우리집은 사진 우측에서 두번째 였는데 이미

당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내 고향 능국리하고도 '동물' 에서도 작은 고개를 넘으면

빼낙골 이라고 있었다.  

 

대체 빼낙골이 뭐야? 허구 많은 이름 중에 어째 그런

요상스런 이름을 쓴댜? 거기다 그 동네는 골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작은 뒷산이 있을뿐 골이라 할려면 뭔가 좀 뒤에 웬만한

산이라도 있고 아늑한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동네라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여튼 빼낙골이던, 빼낸골이던, 삐딱골이던, 아주 빼어난

골이란 뜻이건 거 뭐 자세히 알아 뭐하랴!

 

그 동네가 주류는 아니란 건 확실하고 모두 6 채가 있었

으니 걍 작은 마을이란 거였다. 6(여섯) 집에 애들이 있어야

몇이나 있었겠나?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은 누이뻘이

몇 명, 한두살 아래 동생들이 또 몇 명,

 

나중에 국민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아래 큰 동네 '동물'을

내려가 보니 애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욕" 이란 것으로 이새끼, 저새끼, 이년, 저년,

썅놈, 개 x 끼, 씨x 새끼, 등등 난 아마도 그런 욕을 제일 늦게

배운 축에 속할게 틀림없다. 마치 지리산 청학동처럼, 빼낙골은

나름 당시 신성한 동네? 였던거다.

 

그런데 한집 건너 집에 어디서 인지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딱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살았다. 한살

아래였던 그 애는 '선자' 라 불렀다. 그 작은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애가 살게 됐다는건 꽤나 큰 반가운 일이었다.

 

겨울이면 그 집 방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한송이 순정의 꽃'

이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노래 제목은

'축배의 노래' 란 거다

 

한송이 순정의 꽃 뉘에게 바치리까~

마음의 창문을 나에게 열어주고

술잔을 높이 들어 이 밤을 노래하리~

인생은 즐거우리 ~ 인생은 즐거우리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어두운 가시밭 길에도 행복은 있으리라

 

 

이 중에서 '술잔을 높이 들어' ~ 이 가사만 아주 선명히

또렷히 기억이 나는데, 여튼 그 어린 시절 내가 6살 정도

였을것이다. 몇년 후 그 애는 아랫마을 '구름밭'으로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다

 

허여 수십년을 그 기억을 잊고 살았다. 술잔이 뭔지도 몰랐고

어차피 난 지금도 술잔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그러다 작년 쯤인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아! 그때 그

노래를 부르며 놀던 그 애는 지금 어디 살지?

또 몇살 아래였던 그 옆집의 갑순이란 애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그래서 동물 출신 후배에게 수소문을 하니 그 선자란 애는

1년 후배이며 지금 서울 어드메에 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 아! 여보세요~ 선자씨? 나 누군줄 알겠소? 어쩌구 저쩌구

나 빼낙골 살던 누구요!! "

 

"그 잖아도 상애한테 얘기 들었어요~~ 참 오랜만 이어요"

 

자 여기서 부터 이제 옥경이 노래 가사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그간

 

"어디서 무얼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옛날 빼나골 살때 기억은 좀 나는지~ 등등

 

아니면 최백호가 노래했듯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뭐 첫사랑이라고 말할것 까지는 안 되지만 어린 유년의

추억으로 말하자면 나름 때 묻지 않은

신선한 기억이니까~

 

전화로 얘기를 한참을 해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 우리 언제 한번 만나 그 간의 얘기를 함 해보자구~

 

아이구, 나두 그러고 싶어요! 언제 우리 함 만나요!!

 

_ _ _

 

 

시인 김남조는 안성 난실 마을 조병화 시인의 기념관에

이런 글귀를 하나 남겼다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 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이옵니다

 

 

- - -

 

마찬 가지로 나의 어릴적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요!

 

그러나 나의 시(생각)를 아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나의 고향

사람들 만은 아닐거라고 생각을 해 본다.

 

암튼 그렇긴 하지만 선자를 만나 보고 싶어 약속을 하고

미뤄지면 다시 또 약속을 하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고 몇 달이 훌쩍 지났다.

 

대략 그 옛날 화롯불 옆에서 노래 부르고 놀던때 부터 60여 년이

넘었으니 이게 이산 가족 상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렴 이산

가족 상봉만이야 할까마는 그 상봉 이라는 것도 만나기 전에는

죽고 살지 못할만큼 그립고 애틋하지만 막상 만나면 그

감흥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추측일까?

 

 

결국은 몇달 사이에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젠

전화도 별로 않게 되었다. 약속이 자꾸 미뤄지다 보니

기대와 희망도 같이 사라진걸까?

 

아니면 전화로 목소리 듣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니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는 어떤 안도감과 더불어 어렴풋히 느끼던

그 옛날의 약간의 신비감? 같은게 사라져서 그럴까?

 

무엇보다 내가 일상의 업무에 하루 종일 매달려 맘 대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사는게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이 용두사미가 되어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이 얘기는 내 어릴적 나를 알던 사람! 나란

인간을 원초적으로 기억해 줄 사람!

 

부모 형제 다음으로 그걸 해 줄 수 있을 사람!

 

나는 알게 모르게 고향 일죽을 아니 빼낙골의 원초적

기억을 이렇게 나마 한번 살려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희망 사항이겠지. 나의 사투리를 누군가 알아줄

거라고 믿는건 순전히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김남조 시인이 말한,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 뿐"

 

이라는 말에 아주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 나는 나의

시를 아는 사람들을 찾으려 알게 모르게 헤매는건

아닌지? 물론 김남조는 여기서 물리적 고향을

꼭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과연 그렇다면 나는

 

그 누군가의 '눈물의 고향'을 알아 보려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며 살아 왔던가를 자문 자답해 본다!

 

 (등장 이름은 실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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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 갤러리

 

만나 봅시다 / 경기도 약사회 나레연 부회장

 

분업이후 대부분의 약사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여유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처방전 조제에 복약지도까지 도맡아 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짬을 내기도 힘들고, 다양해진 데다 수시로 바뀌는

 전문약을 비롯한 전반적인 약국관리 업무도 많아졌다. 당연히 취미생활에

 할애할 시간을 찾기란 쉽지 않고, 빡빡한 일상에 여유를 잃기 십상이다.

 

 이번호에는 약국을 운영하며 노래, 글쓰기, 골프,자동차, 여행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통해 향기 나는 삶을 일구어가고 있는 경기도약 나레연 약사를

 만나 봤다. 

 

얼마 전 동료 기자로부터 한 개국약사가 낸 음반이라며 노래 CD 한 장을 받았다. 

제 2의 주현미 같은 약사가 나왔나 생각하며, 물었더니 경기도약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약사가 직접 부른 노래들을 담은 CD라고 한다. 거기에 티칭프로골퍼 

자격증도 있고, 책도 냈 단다. 

 

약사회 부회장직을 맡으며 개국약국을 직접 경영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녹록치

 않은 일상일텐데,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는 궁금함을 갖고 약국을 찾았다.

 조금은 한적해 보이는 아파트단지 상가에 위치한 **약국. 연락을 하고 찾아가며

 몇번의 통화를 했지만 목소리 만으로는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던

 나약사. 약국으로 들어서자 조금은 호리호리한 외모에 편안한 인상의 중년

 신사가 반갑게 맞는다.

 

늦은 저녁식사라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음식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카오디오를 통해 CD며 테이프에 녹음한 노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그의 표정이 생기 가득하다. 

 

인생을 노래하고 자연을 사색하는 음유시인

 

"지금이야 노래방도 흔하고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대중화돼 있었지만 70∼80년대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노래할 기회가 많지 않았지요. 어쩌다 업무상 접대 때문에

 들른 빠에서 노래를 하면 녹음해 주곤 했는데 그런 정도가 다 인것 같네요. 평소에도

 노래를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제대로 노래를 배우고 내 음반을 녹음해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죠."

 

나레연 약사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접하게 된 것은 '동두천 노래모임'이라는 약사들의

 노래동호회를 통해서다. 지인들과 노래모임을 해 보자는 이야기도 했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아 아쉬웠던 차에 지난해 10월24일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노래동호회의 1주년 기념모임에 나가면

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동호회에 참여하면서 포켓용 수첩에 자신만의 애창곡 리스트를 담은 노래수첩도 

만들어 연습하다보니 그 목록만도 수백곡이 넘는다. 모임을 통해 회원 서로간 장단점도 

지적해 주며 꾸준한 연습을 이어가다 보니 노래실력도 부쩍 늘었다. 그러던 중 모임의 

회장으로부터 개인 음반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이번 노래 CD를 제작하게 

됐고, 그렇게 만든 음반 500여장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무슨 음반이냐며 손사래를 쳤죠. 하지만 직접 노래를 녹음해 보면서 이런

 작업을 통해 자신의 노래실력도 더 키일 수 있다는 점을 알게됐고, 동료 회원들이 

만든 음반들을 들어보면서 '더 나이 들기전에 한번 도전해 보자'하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만들어보니 스스로도 성취감이 있지만, 내가 직접부른 나만의 애창곡들을 담은 CD를 

지인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또 하나의 보람을 느낄 수 있

었습니다."

 

나약사는 특히 업무에서 많은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받는 약사들에게는 노래가 큰 

도움이 된다고 권했다.이미 건강관리와 질병치료에서 음악요법의 효과는 입증되고 있듯이 

스트레스 해소에 특효라는 것. 

 

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들처럼 그의 인생 또한 수많은 삶의 파고를 헤쳐온 나날

이었다. 시골출신으로 서울에 상경,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서울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수학하던 중 고3이 되어서야 뒤늦게 마음을 먹고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엄두도 못 낼 처지였기 때문에 재수까지 해가며 서울대 약대에 입학하게

 됐지만, 공고출신인 그에게 서울대 입학 교과목 들은 그리 만만치 않은 난제였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조건들이 그를 더욱 분발케 하여 공부에 매진하는 요인이 되게도 했다.  

 

이렇게 대학을 마치고 제약사 에서의 직장생활을 거쳐 87년 개국을 해 이제 웬만큼 기반을

 잡았다 싶으니 의약분업이 시작 됐고 인근에 병의원이 없으니 약국경기도 많이 침체됐다.

 하지만 그는 굳이 약국을 옮기지 않았다. 10년 넘게 자신의 약국을 찾아 준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온 건강 지킴이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약사는 살아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아니겠냐며 자신의 인생관을 담담히 전했다. 더불어 그러한 기반 

위에서 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을즐기고, 삶과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 

안에 담긴 순리를 깨달아 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그는 이러한 인생관이 말해주듯 약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살아왔다.

 열심히 약학과 약국경영, 환자 서비스에 대한 공부를 했고, 여느 약사들처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주말도 없이 365일 약국을 몇년간 운영한 적도 있다. 1990년 수원시약사회 부회장

직을 맡으면서 약사회 활동을 시작해 지금은 경기도약사회 부회장직을 맡아 회 발전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그의 외도도 노래 하나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1년부터 시작한 골프는 취미 수준을

 넘어 미국 티칭 프로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각종 차량들의 

성능과 시승기 등 자료를 스크랩하고 국내외 신차가 나오면 어김없이 자료를 뒤져 

확인을 하는건 일상이되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싼 차 큰 차를 선호하는 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올 3월에는 그 동안 각종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 활동을 통해 쌓아온

 자신의 소소한 일상과 자연에 대한 사색, 그리고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대한 글을 

모아 수필집 '기억 뒤편으로 세월의 강은 흐르고...' 를 내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레연 약사는 어둠에 잠긴 원천호수 가를 지나며

 자신의 1급 드라이브 코스라고 자랑스레 소개한다. 

 

"매일 출퇴근길에 이곳을 지날 때면 그 아름다운 경관에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고, 가끔 좋은 글 소재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죠. 이런 자연을 벗삼아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속에 담겨진 

의미를 곱씹어가는 것, 이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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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 이 얼마나 정겹고 따스한 느낌이 나는 말인가?


고향 친구,이 또한 마찬가지로 포근한 말이다.

고향 사람에 얽힌 얘기가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는

좋은 추억이 서린 얘기가 있는 반면 아주 쓰디 쓴 기억도 있으니,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본다.

 

그 중의 좋지 못한 기억을 두어개 써 보고자 한다.

 

그 첫째는 지금부터 대략 30 몇년 전 쯤 일이다. 내가 결혼 후 뒤늦게 대학원
을 다닐때 쯤이다. 아마도 1983,4 년 경인것 같다. 시골 국민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가 서울에서 연락이 닿아 그 친구집에서 꽤 여럿 동창들이
모여 맛있는 요리도 시켜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얼마후였다.

 

갑자기 회사로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주택 난방공사를 하다가 하자
가 발생해서 경찰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급히 합의금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나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일하는 친구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냐 해서
안 되기도 했고 또 고향 친구가 그렇게 어려움에 처했는데 못 본체는 더더욱
할수도 없고, 당시 신림동에 살던 친구가 급히 성남의 회사로 온다고해서
기다렸다.

 

다급히 온 친구는 우선 아쉬운대로 돈을 달라했다. 나는 가지고 있던 가계
수표를 작성해서 60만원을 건네 주었다. 친구는 좀더 많이 안 되겠냐 사정했지만
당시 내 한달 월급이 60만원이 채 안될 때였고 대학원 학비대랴 살림하랴 사실
생활에 여유가 거의 없던 시기여서 그 정도도 나한테는 매우 큰 돈이었다.

 

헌데 돈을 빌려간 친구는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 한참 지난 후에 알고 보니
나는 약과였다. 다른 친구 하나는 정기적금을 해약해서 200만원 가까운 돈을
빌려줬다 했다. 물론 그 친구도 그 이후 소식을 못 들은 건 마찬가지다. 35년
전에 60만원,200만원은 지금으로 환산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아마도 600만원,2,000만원은 되지 않을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시골 동창, 그는 계획적으로 동창들의 돈을 빌리고는
잠적한 것이다.

 

2016.6.촬영
 

그러고 또 세월이 좀 더 흐른 1990년대 초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수원 매탄동에서
약국을 하고 있던때 마침 시골 국민학교 몇년 선배인 어떤 분이 부동산을 한다고 나타
나셨다. 나는 당시 약국이 지금보다는 잘 되던때라 약간의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때였다.

나는 멋도 모르고 그 선배를 따라 양지의 대학 친구 땅에 아파트를 짓는 계약을 성사
시키려 다니기도 했고, 수원 조원동의 주공 아파트 건립 예정지 앞의 목 좋은 땅을 사

준다고 해서 가 보니 이미 계약이 끝난 곳이기도 하고 등등  흠,나름 친분을 조금씩
쌓아 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약국에 찾아 와서는 아들이 충청도 지방에서 무슨 일로 다툼을 벌이다 노인을
때려서 구속이 되게 생겼다. 합의금이 급히 필요하니 어쩌냐~했다. 그때만해도 나는
소형 가방에 깨끗한 현금만 항상 백만원 이상씩 넣어 들고 다닐때였다.


나는 아무 의심없이 120만원을 챙겨 손에 쥐어 주었는데, 이게 참, 그러고는
이 양반 다시는 약국에 나타나질 않았다. 그 후로 몇년은 그 부인이 우리 약국을
들르기도 했지만, 그 돈 문제를 얘기할 수가 없었다. 걍 선배님은 잘 계시냐,
정도로 안부만 물었고 언젠가는 빌린돈 가져오겠지 라고 막연히 기대했으나 그는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몇년이 더 흐르자 부인 마저 나타나지 않고 말았다.

 

고향 선배,동창, 모두 특정 '산북리'라는 한 동네 사람이었다. 흠,그 동네가 왜
그럴까? 물론 어려워서 그리 되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친구 때문에는 화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는데 고향 선배라는 사람 때문에는
매우 화가 났고 적어도 몇년간은 그 일로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여파가
생각보다 컷었다. 같은 동네 사람에게 두번이나 속아 돈을 뜯겼다는게 몹시도
화를 나게 한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돈 몇푼 때문에 고의적으로 몇 달을 거쳐 나에게 접근해왔던
것이다. 저 정도면 뭐 거의 상습적으로 돈을 갈취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여겨
진다.


물론 그 보다 큰 거액을 사기당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것이지만, 큰 돈이나
적은 돈이나 예기치 않은 이런 경우엔 속이 쓰리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데, 이걸 면역으로 여겨야 할듯하다. 더 큰 사기를 당하는걸 미연에 방지
했다고나 할까^ 이 얘기를 시골 사는 다른 친구에게 말하니 그 친구는
오히려 더 큰 돈을 고향 사람에게 당했노라고 말했다.남대문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벌어 한푼 두푼 모았던 돈이라고 했다.그 피같은 돈을 같은 고향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 이후론 고향 사람을 만나도 별로 반갑지도 않고 시골 친구들을 만나도
예전같지 않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아주 확실하게 실감했으니까~
당연히 일정 거리를 두고 사람을 보게 되고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만 고향
사람을 대하는 건 예전같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위의 두 당사자 분들이 어디에 살건 잘 살고 있기를 바랄뿐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 뭐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와는 반대로 정말 푸근하고 고마운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고

실제 나의 경우도 몇번 있긴 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거와 같이 세상엔 반드시 명암이 함께 한다는거,

그러나 고향 사람 말씨만 들어도 반갑고 그립고 그런것만은 아니란거,

 

그게 세상인거같다^

 

 

 
 
인생선 / 김다인 작사 / 이봉룡 작곡 (1942) 
 
똑같은 정거장이요
똑같은 철길인데
시름길 웃음길이
어이한 한길이냐
인생이 철길이냐
철길이 인생이냐
고달픈 인생선에
달이 뜬다
해가 뜬다
 
똑같은 시그널이요
똑같은 깃발인데
고향길 타관길이
어이한 한길이냐
인생이 철길이냐
철길이 인생이냐
아득한 인생선에
눈이 온다
비가 온다

사나이 옷고름이
바람에 나붓낄때
연기는 구불구불
희망의 깃발이냐
인생이 철길이냐
철길이 인생이냐
아득한 인생선에
밤이 온다
동이 튼다

 

인생선 / 마로니에(나레연)

 


    

인생 노트라 하고 적어본 건 순전히 나의 지나온 길을 되집어 보기 위함이었다.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뭔가를 기록해 둔 것도 없는데 이마저 남겨놓지 않으면

훗날 나란 존재가 무엇을 어떻게 살아온 건지 도무지 알길이 없지 아니하겠는가?  에서

출발했다.

 

해서 우선 기억력이 좀 괜찮을때 어릴적 추억을 꺼내 하나씩 적어본 것인데,,최근 들어서는 여행기록,

사진기록, 나의 생각, 시, 세상 평론 기타 등등으로 모든 기록을 해 나가다 보니 딱히 인생 노트란 걸 

별도로 작성할 필요가 없어진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아주 중요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든지 잊지 못할 추억 등은 따로 작성해서 인생노트에

계속 올리면 좋긴 할것이다.  

 

원래 인생노트란 제목은 지금은 돌아가신 유달영 선생이 자신의 인생 기록을 적어 출판한 책 이름을

본 따서 한 건데, 젊은시절 읽었던 그 인생노트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게 사실이다.

지금도 누렇게 변해버린 유달영 선생의 인생노트 책을 책장에 간직하고있다.


누구에게나 개인의 삶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귀하다해도 그것이 기록으로 남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누구에게 기억이 되던 안 되던 관계없이 일정하게 기록으로

남지 않으면 사라질뿐,그뿐인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더라도 삶의 흔적을 기록해서 자신만의 인생 노트를 만들어 두시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 자식들이,인생의 반려자가, 친척들이 친구들이 혹은 후배들이 나의 인생을 무엇으로

기억할지를 생각해 보자^  

 

물론 그런 취지로 자신의 인생기록을 남겼다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봐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 모든게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은 생전의 모든 저작물들에 대한 추가 발행을 하지 말도록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흔히 일반인들은 자신의 인생기록은 유명 인사나 정치가 예술가 등만이 작성하는 걸로 알고 있기도한데,,

과연 그럴까? 

 

서두에 말씀 드렸지만 모든 인생은 다 소중하다. 유명인사라해서 그 인생이 더 엄청날 것도 없고

이름없는 민초라 해서 그 인생이 보잘것없다 말할수는 없다.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인생기록,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더 할수 없는 보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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