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고 1학년 시절(1968년)  사진의 맨 왼쪽이 필자이다.

 
 

 

시골서 겨우 중학을  나오고 고등학교를 어딜 갈까~생각할 때 사실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게 당시의 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실업계를

가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인문계를 추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서울

미아리에 살던 큰 누나 집을 찾아 가니 나 보다 몇 년 나이 많은 집 주인댁 형이

내 중학교 졸업 성적 얘기를 듣고 추천해준 학교는 성동 고등학교였다.

 

경기-서울-경복-용산, 등 A 그룹의 학교와 경동-휘문-보성-중앙-대광 등 A'

그 룹과 성동-중동-등 A'' 그룹에서 시골서 그 정도 했으면 아마도 수준이

맞을 거란 예측을 해 준 것이다.

 

해서 원서를 사러 성동 고등학교를 가니 마침 원서가 떨어져 내일 오란다.

시간에 쫓기던 나는 그 길로 그 형과 함께 아현동의 경기 공전을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헌데 거기도 입학 원서가 거덜 나서 내일 다시 오라는 게 아닌가?

이 무슨 일인지. 해서 다시 즉흥적으로 방향을 돌린 게 대방동에 있던 서울공고였다.

당시 나는 내일 다시 원서를 사러 갈 형편이 되질 못했다

 

당시 이 3 학교가 그토록 인기가 많았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일단 수험생들은

원서부터 여기저기 사놓고 보는 풍토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 정하는 것도 주먹 구구 즉흥적이요 원서 사는 것도 코미디 같이 되었다.

서울의 그 형이 데리고 다녔으니 망정이지, 서울 지리도 잘 모르던 나 혼자였다면

그 마저도 불가능한  입학 원서 구하기였다.


그렇게 해서 달랑 원서 한 장 사 가지고 고향 일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중학교에서는 어떻게 원서를  한 장만 사 오는 경우가 있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공고 건축과에 입학하게 된다. 사실 입학 시험에서도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내가 며칠간 머물던 미아리에서 대방동 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고 버스도 여러번을 갈아 타야 했었다.  버스 타고 어디

다니는데 미숙할 수 밖에 없는 시골 출신인 나는 입학 시험 당일 미아리에서

버스를 몇번 갈아탄 후 대방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내려 서울공고 교문까지

죽어라 뛰어갔지만 1교시 시험에 약 30분 정도나 늦고 말았다.첫 시험은 

국어 시험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교문의 수위 아저씨는 빨리 들어가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나는 세찬 숨을 몰아 쉬며 30분이나 늦게 1교시 시험을 겨우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1지망 과였던 기계과를 놓치고

2지망인 건축과에 1등으로 합격을 했다.

 

안성 목장의 5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공고는 짙은 고동색 벽돌로 본관은 물론 실습실이

지어져 있었다. 대지 면적 3만여 평에 달하는 꽤 넓은 캠퍼스였다.

몇년 전 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으니 1900년 초기 일제시대에

설립되어 졸업생 중에는 일본인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고 모교 총 동창회에는

일본인 선배들이 지금도 다수 방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특별히 대단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일제 강점기의 한 모습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사상계의 거두 이영희 선생도 이곳 전기과 출신이다. 대학은

안 가기로 하고 들어 왔으니 뭐, 특별히 공부를 할 것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

고 2 때 2학기부터 부족한 영어를 보충하고자 학교 수업이 끝나면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영어실력기초란 책을 여러번 열심히 보았다. 해질녘이 되면 가방을

챙겨 학교 인근의 하숙집으로 향하는 일을 꽤 오래 약 6개월 이상 지속했다.


허나 공고라는 곳은 인문학교처럼 공부를 주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필요한

기술을 전수시켜 이 나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것이 교육 목표일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해서 인문계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2년을 보내고

고 3 이 되었다.

 

사실  졸업 후 취직을 하고 당시 유일한 야간 공대인 한양공대를 가 볼까??

하는 정도의 정말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야간 대학,

그거 낮에 일하고 밤에 어떻게 다니지?라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야간 대학의

실질적 접근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2년 동안 목공 실습으로 탁자, 책상, 등을 만들고 건축 제도라 해서 주택 도면만

그리던 내가 과연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당시는 예비고사란 게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라 대학을 가려면 우선 그것부터 패스를 해야 하는 절박한 때였다.

 

특별히 누구에게 듣거나 깨달음이 있던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왠지 내가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졸업 후 취직을해서

생활을 안정 시켜야 할 내가 어찌된 영문일까? 

 

누구나 가는게 대학 같아도 실상 대학 못간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원래 대학은 글자 그대로 큰 학문을 하러 가는 곳이지만

요즘 어디 대학이 그런가?

 

지금이야 대학 진학률이 80% 를 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지만 70년 초만 해도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3학년 올라 가는 1970년 1월 1일 부터 세종로에 있던 세종학원에 영어

'삼위일체' 강의를 신청하는 것으로 입시 공부를 스타트 했다.

 

그런데 학원에 가 보니 맨 뒷줄에 중학교 3학년 생이 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아! 나는 고 3이 되어 겨우 영어를 시작하는데 나보다

3년이나 빠른 아이들^^그 친구들은 경기 중학교 뱃지를 달고 있었다. 역시 경기

로구나!

당시 경기 중,고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왠지 김이 쫙 빠지고 도무지 공부할 맛이 나질 않게 되긴 했으나 그렇게

1년을 학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부를 했다. 학교 마치면 그 길로 대방동 삼거리로

달려가 120번 버스를 타고 세종로로, 종로로 가서 한 두 과목씩 학원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 이럴거 였으면 처음부터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뒤늦게 이게 뭐하는

짓이람? 어찌 보면 나의 학교 선택이 첫술부터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고

뭐 이겠는가?

 

사실 이렇게 뒤늦게 공부를 하는 건 비 효율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 공고의 13개 科 중 기계과, 전자, 전기과, 화공과 등에 다니던 친구들은

정말 머리도 좋고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이었다. 가정 형편상 또 기타의 이유로 공고를

왔지만 그 친구들의 실력은 당시 용산고 정도는 충분히 될 거라 다들 얘기 했었다.

실제로 용산 고등학교를 다니다 무슨 이유인지 건축과로 전학을 온 서재석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역시 그 친구는 공부에 상당히 일가견이 있었고 자기 말로는 용산고 반에서

8등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서울대학에 가기 힘들어 일찌감치 공고로 전학을

왔노라 했다(물론 학비 때문에~)

친구의 선택이 현명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래 성적표가 당시의 내가 배웠던 교 과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실업고에는 나름 합당하지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너무나 부실한 과목들이다.

 

 

 

서울공고 건축과 2학년 때의 성적표--

 

 

교과목 수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보여준다.

총 6개 과목(체육,교련 빼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고 교과목으로는 당연하다 할 것이었다.

국어,사회,정치경제,수학,지리,화학, 이게 전부다.

아니 영어도 없지 않는가? 그리고 아래

 

전공 과목인 , 건축 구조학施工구조 역학計劃재료학製圖 , 실습 ,

 

 

고3, 2학기에 이르러 진학반이 두 학급으로 편성되었는데, 당시 역사

선생님은 진학반인 우리들한테

 

"너희 중에 서울대학을 한 명이라도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아주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속에서 진학반을

만들어 준 학교 측에는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우리를 분발케 하려는 좋은 뜻으로 이해는 하지만, 실은 공고 출신이

서울대학을 간다는 건 당시로는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만큼 불가능 하다는

걸 웅변으로 말해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지 않는가?

 

그러니 아무리 빈 말이라도 이런 류의 말은 함부로 어린 학생들에게

교사가 할 말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좋게 해석하면 반어법

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제 내 개인적으로는 역사 선생님의 그 참혹

한 말씀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렇게 공부를 이를 악물고 했던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왜들 그리 쉽게 하는지! 참,

정말 손에 장을 지져 보실라우? 어찌되나!

 

서울대학을 들어간 후 1학년때 모교인 서울공고에서 당시 서울대등 기타

유수의 세칭 잘 나가는 대학에 다니는 선배들을 몇몇 불러서 고3 후배들과

모임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니 서울공대, 법대, 또 다른 서울대

재학중인 선배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신출귀몰한 공부법을

후배들에게 토해 내고 있었다.

 

우리 62회 졸업생 중에는 내가 유일했지만 위 아래 기수에서는 서울대를

간 경우가 상당히 있었다.

 

 

아무튼 나는 1년간 밤낮 없는 종로의 학원가를 전전한 결과 마지막 모의고사

에서 당당히 전교 4등을 할 수 있었다. 1년 공부한 걸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였다. 문제는 산업 역군이 되라고 공업학교를 만들었고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수차에 걸쳐 세계 1위를 한 한국인데, 왜? 대학을 가려 그 발버둥이냐? 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2,000년 대를 지난 현재까지도 해결이 요원한 한국 사회의 기술자

홀대 전통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꼭 그것만이 원인이라고 말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걸 누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지금은 공고는 커녕 아예 이공계 대학 조차 기피하는 세상이 되었지 않았는가?

당시 공고만 나오고 대기업 임원이 된 친구도 적잖이 있긴 하다. 또 대학을

안 갔기 때문에 그 분투 노력으로 큰 기업을 일군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긴긴 세월 동안 흘렸을 그들의 고난의 눈물을

그 누가 알아줄까?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당연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던 나는 영등포 신길동 우신극장 근처에서 1학년 하숙을 하며 지냈다.

 

누나가 건축과 터줏대감격인 신태식 선생님을 찾아가 어떻게 학교 근처에

 있을데가 없겠냐고 부탁을 해서 고3 형들 2명이 하숙하던 집에 나를 끼워

넣기를 한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하숙비가 저렴했을 

것이기도 하고 일단은 도무지 어디 아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방에 3명이 지내야 하니,,영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기 어려웠다.공부는

커녕 홍천이 고향인 형이 가져온 찹살 미숫가루를 몰래 타 먹는 재미가

쏠솔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헌데 여름방학에 생애 처음으로 내가 대구와 창녕등 부모님 고향을 찾아보고 

돌아오니 주인 아주머니가 하숙비가 두달 밀렸다고 밥을 안 주는 것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 하숙비를 안 냈으니 나가서 밥을 사 먹어야지~ “

 

이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놀란 나는 나도 뭔가를 좀 해서 하숙비에

보태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며후 동네에 신문사 지국을 찾아갔다.

신문을 좀 돌려보겠다 하니 보증금으로 1500원을 먼저 내라했다.

 

그리고 신길동 신남동 일대에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략 130여부를

돌리는 건데 아마도 석간 동아일보였지 싶다. 

 

 학교 마치고 하숙집에 오면 우선 신문부터 돌렸다. 요리조리 골목을 가로질

러 마치 모자이크를 맞추듯 집집 마다 신문을 집어 넣는게 재미도 있었고 신문

을 다 돌렸을때는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헌데 신문은 돌리는것 외에 월말에 수금을 차질없이 해야하는게 문제였다.

대부분은 제때 돈을 주었지만, 몇몇 집은 질질 끌고 안 주거나 어떤 집은 

몇달씩 미루거나  행방이 묘연한 집도 있었다. 결국 신문대금을 전액 받아와야

월급을 준다며 지국장은 한 달이 지났는데도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당시 한달 신문 돌리고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기억은 안난다. 대략 1000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니 한달 동안 공부 시간도 줄이면서 신문 돌린다고

매일 쫓아다닌 시간이 얼만데,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한창 공부해야할 학생이 신문 돌린다고 한달 간 쓴 시간이며 노력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면 그만 두겠다 하니 보증금 1500원도 

되돌려줄 수 없다고 큰 소리를 치는게 아닌가? 

 

아마도 지국장이란 인간은 이전부터 이런 식으로 어려운 학생들의 등을

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보증금은 미리 받고 월급은 이런 저런 핑계로

안 주고~ 뭐 그런식일게다 !

 

 

보증금 돌려 받는 문제로 지국장과 언성을 높이는데 갑자기 타향에 와서

 바보가 된 느낌에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못 받는 신문값은 지국장이 

다니며 받아야지 어린 학생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무슨 수로 그걸 다 받는단

 말인가? 

 

더구나 보증금은 애초에 왜 받았으며 이제 와서 그것조차 못 돌려 준다는건

 무슨 횡포인가? 신문 값 못 받아오면 그걸로 상계하겠단 얘기란 말인가? 

 

정말 인간성이 아주 못된 지국장이었다. 결국 울음반 호소반으로 밀고 댕기다 

보증금만 어렵사리 겨우 돌려 받는것으로 신문 돌리기는 끝나고 말았다  

 

 

만일 그 당시 제대로 월급을 받았다면 나는 신문 돌리기를 길게 해 나가지 않았

을까 생각해 본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시도해본 돈벌이는 별 소득없이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딱히 배운것도 없고 매정한 인간상만 느끼게 되었

으니 인생사 그것으로 배운것도 없고 아쉬움만 크게 남는다. 

 

 

 

그 당시 신문 돌리며 뛰어다니던 주택가 골목에선 이런 노래가 

리디오에 자주 흘러 나왔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maronie

 

 

문경 가은의 가을 2016년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일죽에 지소를 두고 있던 신문,

중앙일보인지 암튼 그런 신문이었다.  지국장을 하던 김증순이란

 분이 있었는데 마침 내 얘기를 그 신문에 투고를 했고 어느 날인가 

기사가 났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대단한 내용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도 여의고 힘들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기사인즉, 사실 그 내용이 어린 나에게는 좀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헌데 그 기사가 나간 다음 얼마인가 지나서 인근 이천시

에서 장사를 한다는 어느 두 분이 힘을 합쳐서 소액환으로

1500원을 당시 돈으로 부쳐 온 것이다.

 

 

신문사 지국으로 부터 그 돈과 편지를 전해

받고 나는 곧장 학교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는 편지를  짤막하게 써서  

답장을 해 드렸다. 

 

당시는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세상에 이렇듯

 따듯한 인정이 흐르고 있는지를 절절하게 피부로 느끼진 

못했고 철이 없어 그저 고마운 일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때 1500원이면 아마 쌀 한 가마 정도의 금액이 아니었

을까 생각된다. 

 

 

비록 1회성 이었지만 힘내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성 편지를

 함께 보내 주신 이름없는 그 분들, 이제와 생각하면 그 고마움에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핑 돈다!

 

지금도 장사란 어렵지만 그때도 장사해서 생활을 유지한다는게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을텐데!  

 

 

특별한 보답을 해드릴순  없었지만 그냥 이날 이때껏 

잊지 않고,

 

또 잊을 수가 없어 이렇게 글로 남겨봅니다. 

 

내가 중3때 학교 바로 아래서 하숙을 할 때의 일이다.


인근 장암리라는 동네에 살던 친구가 가정 형편상 중2 때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내가 어쩌다 그 친구를 보러 친구집을 가게 되었다.

헌데 당시로는 귀한 공기 총이 친구집에 있었다. 지금처럼 가스를

충전해 쏘는게 아닌 총구 입구에 쇠 막대기로 공기를 수십번 압축

해서 총을 쏘는 구식 총이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친구집으로 달려가 함께 인근 야산으로 새를

잡으러 다녔다. 촉새 종류부터 조금 덩치가 큰 콩새, 비둘기 등이
주 대상이었다. 당시 새 잡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공기총으로 새 잡던 시골 그 친구와 먼 훗날 친구의 포도밭에서

(1980년대 후반 즈음) 

 

 

 

 

      그러다 어느날 총을 아예 빌려 하숙집으로 왔다. 하숙집 아저씨는

 

" 내가 이래뵈도 군대에서 특등 사수였어" 하며 공기총을 팡팡 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총이 고장이 났는지 더 이상 격발이 되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괜히 총을 만져 고장나게 했다면서 아저씨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어떻게하여 다시 총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실은 그 총을 빌려온 이유는 하숙집 뒷 동네에 비둘기를 많이 키우는

집이 있었고 허구헌날 비둘기가 그 집 지붕위에 쭈욱 늘어서서 앉아있는

걸 자주 보았었다. 또한 비둘기가 너무 많아 귀찮으니 비둘기를 좀

잡아 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 받은 때문이었다. 당시 공기총 탄피 속엔

큰 쇠 구슬과 작은 구슬을 넣을 수가 있었는데 작은 새를 잡을때는 작은

산탄을, 좀 큰 새나 꿩 종류를 잡을땐 큰 쇠구슬을 함께 넣어 총을

쏘곤했다.

 

 

 일요일 아침 나는 혼합된 총알을 만들어 뒷 동네로 내려갔다. 총이
귀했던 그 시절인지라 몇몇이서 구경한다고 함께 갔었다. 사랑채를 넘
어 안 마당으로 들어가며 지붕을 보니 예의 비둘기들이 여러 마리가 쭈욱
앉아 있었다. 나는 총을 슬며서 들어 올려 지붕위의 비둘기를 겨냥하려
했다. 허나,, 아뿔싸~ 미처 겨냥해서 제대로 총을 쏘기도 전에 대문 문턱
을 넘다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격발이 되었고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은 그 집의 뒷방 방문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순간 등골이 싸아 하며 식은 땀이 주룩 흘렀다. 혹시나 뒷방에 누가
있었다면 큰 일인 것이었다. 다행히 거기 아무도 없어 화는 면했고
다시금 호흡을 조정하여 아직도 지붕에 태평하게 앉아 있던 비둘기를
향해 다시 총을 한방 탕! 하고 쏘았다. 그런데 비둘기는 한마리도 즉시
떨어지지 않고 모두 날아 가고 말았다.

 

뭐야 이거! 총은 제대로 쏘긴 쏜거야?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듯도

했다. 며칠 후 동네 뒷산에서 죽은 비둘기 두어 마리를 발견했다. 아마도

그날 총에 산탄을 맞은 비둘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내 마음을 괴롭혔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
으로 당시는 애호 받는 새 였기 때문이다. 허나 총을 쏘아 볼 욕심에 앞뒤
분간이 안 되었던 것이다.물론 부탁을 받기는 한 것이나 뒤늦게 비둘기를
총으로 쏜 것을 많이 후회했다. 더구나 그날 총 쏘다가 큰 사고를 낼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이후로 비둘기를 잡으려는 시도는 안 했지만 소소하게 새 종류와
꿩을 잡기 위한 사냥은 오랜 동안 해왔다. 가끔씩 나이 들어 시골 내려가면
그 친구를 찾아 꿩을 잡으러 함께 시골 동네를 다니기도 했다. 약국을 경
영하면서도 공기총을 구입하여 눈이 하얗게 내리기라도 하면 수원 인근을
돌며 꿩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실제 꿩을 한 마리도 잡은적은
없었다.


1990년대 초에 수원서 약국하던 한참 후배와 공기총을 70만원에 하나씩
구입하였고 그후 몇년 동안 그렇게 총을 가지고 다니다 관리가 귀찮아
결국 파출소에 헌납하고 말았다.

 

그런데 파출소는 왜 총기에 대한 보상도 한푼없이
그냥 총을 가져 가는겨?

 
 

 

 

때는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시골 학교라서 수업과정에 농업이 있었다.

실제 땅을 파고 농기구를 다루는 시간이다. 당시 나는 1학년 급장으로 있었는데,,

실습 시간에는 급장 부 급장 등이 실습 기구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는것이

 관례였다.

 

 

그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구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다. 그때 담당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던 총각 선생으로 학교 근처 동네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항상 독서를 많이 한다고 늘상 우리들한데 말하곤 하셨다.

 

 

헌데 그 선생님은 해병대를 갓 제대하고 교사로 부임해 온터라 가끔씩 성질을

내고 앞뒤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그날 무슨 심기가 나쁜 일이 있었는지,,미처 준비가 안된 농기구 땜시로

 학생 한명당 5분이면 60명, 즉 300분의 시간 로스가 난 것이라며 노발대발 

하고 급장, 부 급장등 책임있는 우리를 나오라 하였다. 

 

그리곤 지휘봉으로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대략 10여대 이상 맞은거 같았는데,,이게 문제였다.

 

 

나를 제외한 두 명은 그런대로 괜찮아서 다니는데 별 지장이 없었으나 나는 두 

다리가 퉁퉁 붓고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 둘 보다 유독 나만 더 

심하게 때린건지는 확인 불가지만 아무튼 학교까지는 2킬로 남짓 한데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이 문제가 교장 선생님한테 까지 보고가 되어 국어선생은

꾸지람을 듣게 되었고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우리 뒷 동네 살던 광묵이란

친구의 자전거 통학길에 아침 저녁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게 조치를 했다.

약 보름 정도를 그렇게 통학을 했다 

 

 

 

시간 개념을 가르쳐 준건 좋았지만 걸을수도 없이 퉁퉁 부은 다리를 보는 내 

맘에는 그런 교훈 따위가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그건 순전히 쓰잘데 없는 욱하는

 정신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당시 부모님이 다 돌아 가시고 외롭고 기댈

데가 없던 나는 더욱 더 이 처사가 슬프고 서럽기도 했다. 열번을 양보해서 정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조치였다고 쳐도 지금 같으면 아마도 학부형들 등쌀에

학교가 난리가 났을 그런 사건이었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시골이었으니 망정이지, 

 

 

내가 다리를 못 쓰고 자전거로 통학한다는 말을 들은 그 선생님은 오히려 더 맞았

어야 한다며 목청을 돋구고 있었다. 도대체 수업 시간에 준비가 다소 안된 건 잘못

이지만 그렇게 까지 해야했나 하는 의문이 지금도 드는건 물론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오른쪽 종아리가 힘을 주면 약간은 불편할 정도이니 말이다

 

 

한참 전에  " 왜 당시 그렇게 까지 하신 겁니까? "하고 만나면 따져볼라 했드니 그 

선생님이 벌써 이 세상을 하직한지 오래됐다는 얘길 친구들로 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때 함께 종아리를 맞은 친구 둘 중 하나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학생들 체벌이 가끔씩 사회문제로 보도 되긴 하지만, 체벌은 약간 만으로

 그쳐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도를 지나친 체벌은 교육은 커녕 괜한 반발감만 

심어주고 두고 두고 후유증만 남길 뿐이다.

 

 

오늘도 우리 약국에 들르는 중학생들을 보면 아기같이 귀엽고 보숭보숭하다.

이런 학생들에게 과격한 종아리 때리기 체벌이라니,,말이 되는가?

설령,세상에 뭔 죽을 죄를 지었을망정 두들겨 패서 고쳐질 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고상하게 단어를 적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는 당시 그 선생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 거 무슨 선생이라고~ 

어린 학생들한테 화 풀이나 하고 말이야~ 

 

당신 자식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 이 양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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