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생활에 이렇다 할 재미를 느낄수없던 나는 뭔가 정신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현실은 너무나 고달프고 기계적이었다. 공부보다 등록금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양한 취미나 과외 할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2학년 초 쯤이던가 70 학번 선배로부터 교회 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게 된다. 인근 효제동에 있던 UBF라는 대학생
기독교 선교 단체였다. 교회나 성경에 전혀 문외한 이었던 나는 일단
그곳을 나가게 되었고 창세기 강의를 1주일에 걸쳐 받게 된다. 결과적
으로는 엄청난 느낌의 아주 감명적인 공부였다. 혹시 이런 공부를 나는
애시당초 바라고 대학을 온 게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 당시의 대학
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하는데 너무 역 부족이었고 어찌보면 나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
다고도 볼 수 있을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마음을 울리는 공부를 한것 같았다.
그 이후 단체에 합류해서 약 2년간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된다.
없는 용돈에 선교헌금이라는 것도 해보고 여름방학이면 동해안 맹방
초등학교로 단체 피정을 가서 많은 감흥을 맛보기도 했다.
그때 동해안 언덕배기에 혼자 올라 아침 일찍 솟아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감격의 시 한수를 지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눈앞에 떠 오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뭔가에
목말라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중 우연히 함석헌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분의 저서를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눈이 떠지게 되었다. 역사와 인생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게된 것이다. 대학 3학년부터 4학년까지 줄곳 신촌의 퀘이케의 집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대학졸업 후에도 몇년간 나는 그 모임에 나갔다.
그때 인도의 간디 저서도 읽게 되었고 칼릴지브란의 시집도 읽었고
일요일이면 여럿이 모여 행하는 침묵의 예배도 하게 되었다.
당시는 워낙 군사정권의 감시가 심해 그런 자연스런 활동조차도 맘 놓고
할 수가 없어 퀘이커의 집에 모이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추운 겨울 흰눈이 듬성듬성 보이는 천안의 한 집을 빌려 당시 함께 하던
몇몇 학생들과 1박2일 피정을 하며 주제 발표를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당시 서울문리대 인류학과에 재학중이던 여학생이 건네준 세계
공동체를 다룬 영어 텍스트를 교재로 삼아 발표 했었다. 그
때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갔었는데,누군가 미행을 하고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어서 맘이 편치 않았었다. 피정후 근처 맹정승 고택을 둘러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면서 대학을 졸업할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딱히 해놓은
공부는 없고( 사실은 가장 좋은 공부를 한 것이지만) 마음의 방황을
해결하고자 몇몇 단체 활동을 한것이 전부인 나는 4학년의 끝이
다가오자 당황스럽게 되었다.
딱히 향후 진로를 정한 것이 없는 것에 따른 불안감이었다.
전공 공부는 흥미가 없어 하는둥 마는둥 하고 종교 단체에 들어가
활동한 것 밖에는 없는 셈이니 냉혹한 사회에 무엇으로 적응할지
참으로 막막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마음이 불안한 나머지 관악산 뒤에 올라
혼자 소리를 쳐 보기도 여러번 했다.
뭔가 옥조이는 느낌..막연한 불안감~ 나는 당시 인생항로에 너무도 불안감이
컷었다 만일 지금쯤 누군가 대학 생활이 무미하고 거기다 인생의 의미까지 찾을
수 없어 너무 힘들다고 조언을 요청해 온다면 나는 무엇이라 답을 해줄 것인가?
( 물론 충분한 답은 준비되어 있다)
청춘은 방황이라~ 젊은날 이 정도의 고민과 방황이 없는 이 누가 있으리요 마는,
그래서 대학 생활이 완전 자유롭고 흥미로울뿐 아니라,열심히 학문에 정진해야
할것이지만 이런 저런 현실적 제약과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굴레가 방향을 잃고
헤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장기와 특성이 뭔지를 잘 파악하여 다음
목표를 확고히 정하는데 꼭 필요한 정신적 멘토가 그래서 이 시기엔 필요한
것이리라.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확고한 분별력! 종교적 활동,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 공부를 한 건 이상론적 추구였지 나의 현실과는 사실 밀접하진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을 쫓는 것이건 현실적 목표이건 그때의 결정이 결국 나머지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시의 방황과 추구했던 방향이 이후 나의
인생 여정에서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나름 평가를 해 본다. 만일
그마저도 없이 약학 공부만 했다면 그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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