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여름이었다. 그전부터 소식만 오가던 일본에 거주하는 6촌 형님과
조카들이 보고 싶었다. 말이 6촌이지 나한테는 현존하는 제일 가까운 친척이다.

大山(오오야마)이란 성으로 개명을 하고 일본에 귀화한 형님은 동경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도치키 현에 살고 있었다. 

 

형님은 70년대 말경에도 가끔씩 한국에 나오시면 나를 찾기도 해 당시로서는 귀한

카시오 계산기 같은 걸 전해 주기도 했었다. 

마침 대웅제약에서 파프류의 생산을 검토할 즈음인지라 일본의 사토 제약에
*파프제의 기술을 전수받을 겸 이 기회에 일본 친척도 만날 겸 계획을 짰다. 
당시 생산부의 김창수 대리와  함께 가기로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일본 친척을 만나고 나는 나대로 또 그렇게 하는 비슷한

구상이었다.

 

여름휴가 7일 중 3일은 사또(佐藤) 제약에서 나머지 4일은 친척을 만나는 조건이었다.  

대신 왕복 비행기표와 3일간 사또 제약이 있는 하찌요지(八王子)에서의 숙식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다. 

나리타 공항에 마중나온 조카를 따라 바로 도치키 현으로 달렸다. 조카는 

당시 동경에서 부동산 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형 승용차에 기사를 딸려 가지고 나왔다. 

일본의 부동산이 천정 부지로 오를 때이다. 며칠만 지나도 수천만 엔씩 값이 올라

흥청망청 하던 시절이었다. 조카는 8천여만 엔에 구입한 부동산을 불과 얼마 만에

1억 몇천만 엔에 팔았다는 서류등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동북 고속도로를 140km 이상으로 커브를 돌아 가는데 차가 상당히 성능이 좋아 보였다.

지금은 시속 140 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커브를 그 속도로 돌아 나가는 것은 꽤나

성능이 좋은 차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포니 1,2 가 막 생산되던 때였다.

 

도치키 현에는 우쯔노미야( 宇都宮) 라는 큰 도시가 있고, 일본 최고의 관광지 닛꼬(日光)에서 흘러

내려오는 큰 개울이 있는 언덕위에 형님의 집이 있었다.   
가누마(鹿沼])市란 곳이었는데 근처 개울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마침 형님의 처형이 근처 우쯔노미야의 천리교(天理敎) 회장으로 있어서 다음날부터 
차를 가져와 닛꼬를 구경시켜 주었다. 하얀 백색의 대형차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이 진 구식  토요다의 Century 로 추정된다. 

 

 

나는 억지로 근처 천리교 회당에 끌려가 아침이면 소위 예배를 보아야 했다. 

헌데 그들의 자세는 정말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아닌가?

지극정성으로 아침이면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우쯔노미야 천리교 회장 직함을 다지고 있던 형님의 처형이 엔카 카셋테이프

두어 개를 건네 주셨는데, 거기에 수록되어 있던 노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장가노야도(さざんかの宿) - 조아람 

 

 

 

닛꼬를 올라가는 길은 예의 도꾸가와가 만든 삼나무 숲길을 거치게 된다. 그 옛날

조성한 삼나무 숲은 이제 거목이 되어 길 양 옆을 기가 막히게 장식을 하고 있었다. 큰 나무에

비해 길의 도폭은 좀 좁았다. 

담양의 메타세퀘어 숲길을 연상하시면 되겠으나 닛꼬의 숲 길은 그보다 훨씬 웅장한 느낌이다. 

 

2,000미터 이상의 男大山 을 오르면 거대한 폭포가 나타나고 산 중턱에 조성된 칼데라호의 

크기도 엄청난 편이다. 유람선을 타고 그 호수를 도는데 아래 물이 그렇게 맑고 청명할 수가

없었다. 20여 년이 더 흐른 2,005년에 가족여행으로 닛꼬를 겨울에 다시 찾아보았으나 단체

여행이어서 첫  방문만큼 충분히 둘러볼 수가 없었다. 단지 눈쌓인 고갯길을 정말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잘도 오르고 내려갔다. 

 

호수 뒤로 돌아가면 유황 온천의 넓은 전장의 벌판이 나타난다.  한여름의 닛꼬는 시원했고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를 소금에 구워 팔기도 했다. 닛꼬 호수의 청명함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우쯔노미야 천리교 회장이었던 형님의 처형과~


그리고 조카들과 봉고차를 몰고 쯔쿠바 박람회도 갔었다. 한국에서 처음 온 친척을 

대접한다고 그렇게 한 것이다. 今市 (이마 이찌)라고 하는 닛꼬 바로 아랫동네에서 석재

가공업을 하는 조카의 이모네 식구들을 찾아보니 너무나 맑고 시원한  물이 큰 도랑으로 콸콸 

흘러 내려오고 있는 동네였다. 

 

당시만 해도 스키 같은 걸 탈 생각도 못하던 때였는데,

 

" 이 근처가 겨울이면 스키 타기가 아주 좋으니 함 놀러 와~ "

 

남의 속도 모르고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일본 스키를 몇 번 가 본 경험으로는 그들은 동네에도 스키장이 웬만하면 

한 둘쯤 있었다. 

 

허긴 형님이 일본 형수님과 결혼해 닛꼬 부근에 정착하신 이유도 원체 경관이

수려하고 동네 사람들 인심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눈에 들어왔던 닛꼬 아랫동네의 풍광은 너무도 한적하고 깨끗했다. 

벼가 빼곡히 잘 자라고 있는 시골 농촌은 골목까지 포장이 되어 있었고 집 옆에는

어김없이 승용차가 한 두대 세워져 있어,

 

" 아!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군~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나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당시의 일본 이상으로 잘 되어 있고

마을에는 자동차가 즐비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 사이 세월이 흐르고 형님도 돌아가시고 조카들과는 말도 안 통하고

하다 보니 차츰 연락이 뜸하게 되었고 결국 아주 연락 자체가 두절되고 말았다.

사실 도치키현은 후쿠시마에서 대략 200여 킬로 정도 떨어져 어찌 보면 

방사능 권역에 아주 약간은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그렇다 해도 연락이 두절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막상 일본에 겨울철 스키를

타러 더러 가는데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조카들과 형수님과~

 

조카 준꼬~  당시 열심히 안내를 해 주었는데, 수 년전 연락을

취했지만 두절되어 매우 안타깝다.

 

 

약 36년전 일본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무료한 겨울을 뛰어넘기 위해

일본으로 스키 여행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 파프제 - 파스를 말함 , 당시 기술을 대략 전수받아 왔으나 대웅제약에서는

               파스 제품의 생산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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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시절 내가 자취를 할 때의 일이다. 지금도 사회 취약 지역 극빈자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당시에도 그런 제도가 있었다. 면 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당시 면 사무소에서 연락이 오면 나는 사무소로

찾아갔다. 

그러면 큰 자루에 쌀,또는 보리 같은 걸 저울에 재서 넘겨주곤 했다.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맙게 받아 와서 식량에 보태곤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면 사무소에 가서 식량을 타 오는 일이 조금은 창피해서

즐겁지 만은 않은 마음으로 가곤 했다. 왠지 그것이 친구들에게 알려질까 봐

살금살금 면 사무소로 들어가곤 했었다. 

 

양곡 배급은 아마도 내가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자취를 한 약 2년간 지속되었던

거 같다. 하숙을 하면서 부터는 양곡 지급이란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그렇게라도 하도록 누군가 추천을 하였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해

 

나는 뒤늦었지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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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고모령 / 춘강 마로니에  

 

 

 

엄마에 대한 기억~

 

그 희미한 몇가지나마  마치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걸 겨우

가느다란 실 하나로 잡아 당기듯 그렇게 더 늦기 전에 기억 속에

매달아 놓는 중이다. 

 

 

울 엄마는 생전 큰 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왜냐면 나에게 뭘 야단을 치신 적도, 지적을 하신 적도, 명령을 내린

적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한 시간은 고작 12년~

그 중에도 내가 세상을 인식한 때를 5살로 본다면  대략 7년 여에 불과하다. 

 

청미천(안성 일죽면에 있음) 큰 개울 밭!  그 밭에서 여름 뙤약볕에

김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린 내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잠시

나를 업어서 가시곤 하던 것과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쓰고 일하시던 것이

어렴풋 기억 난다.

 

' 앞산 노을 질때까지 호미 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며 흙에 살던

어머니~ ' 

 

딱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겨울이면 대개의 또래 친구들의 엄마는 집에서 겨울을 나시는데 반해

울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인근 동네로 장사를 나가시어 저녁 늦게나

돌아 오시던 것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쌓여도 엄마는 매일 장사를

나가셨다. 집에서 30여 리의 길을 그렇게 오고 가셨다.

당시엔 어린 나로서는 그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우리 엄마는 이 추운 날에도 집에 없는 거야? "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는,

 

" 오늘은 가리울 누구네 집에서 점심을 한 술 떴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는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가 힘든 때였는데,

점심 한술 얻어 먹는다는 것이 그리 녹록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눈치가 보였을까? 순박했던 시골이니 가능한 것이었을 터, 

가리울은 장호원 근처 방추리 옆에 있는 작은 동네로 우리 집에서는 30리도

더 되는 꽤나 먼 곳이었다. 

 

그렇게 한 겨울 내내 인근 마을 사방 삼십여 리를 돌며 장사를 하시고 몇 푼 돈을

버셨던 거다.

 

194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엄마 사진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대략 194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먼저 일본에 가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머리에 꽃을 꽂아 표식을 하여 상봉을

하셨다는 엄마! 

 

오사카에서 형님과 큰 누님을 낳으시고 그런대로 사시다가 해방이 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신 건데, 아버지의 누님 즉 엄마에게는 시누이가 될 터이고

나에게는 고모가 사시는 합천 덕곡면 옆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정터,

라는 동네~

 

그 동네로 다시 오신 거다. 사실 그 곳은 엄마가 태어나 살던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인근 합천이었다. 

 

그 고모가 사는 집이라고 여유가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6개월을

버티시다 보따리를 싸서 흘러 흘러 오신게 지금의 안성 일죽이다. 기왕 고향을

떠나는 거  왜? 서울로 그냥 가시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다시 정착을 하신

건지는 이제 풀 길 없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당시의 철도는 서울로 쭈욱 이어지는 경부선이 있었고 평택에서 갈라져

안성을 거쳐 장호원, 여주로 가는 지선이 있었다. 

 

오사카도 그렇고 안성 일죽도 그렇고 어차피 산 설고 물 설고 아는 이 없는

타향이다. 내가 태어난 일죽은 나에겐 고향이지만 엄마 아버지에겐 시리기만

한  타향일 뿐이다.

 

'타향살이'  노래를 부를 땐 항상 울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향인 일죽을 떠나 떠나 50년 이상 살고 있는 타향은 타향이라 할 것도 없다.

자동차로 30-40분 이면 닫는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특별히 어떤 노래를 부르신 걸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

가지다. 당시 시골에서는 노래를 부를 일도 없었고 아무데서나 노래를 흥얼

거릴 그런 형국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이 고될 때 불렀다는 농요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며 살 만큼 당시 삶에 흥이 있었을까? 집집마다 라디오는 커녕

좀 사는 집에는 축음기가 있긴 했지만 우리 집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확실한 기억!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음력 4월 초나흘 밤이다. 그 며칠 전 나는 우리집 뒤

작은 동산 너머의 풀숲에서 마침 뜸부기가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걸 발견

했었다. 오랜 투병에 쇄약 해질 대로 쇄약 해져 경각에 달한 엄마는 내가 말하는

뜸부기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 그 뜸부기 좀 잡아 오너라~ " 하셨다.

 

초승달이 실 눈썹처럼 희미하게 비추던 그 밤에 나는 누님(당시 17세)과 함께

큰 광주리를 들고 컴컴한 뒷동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덤이 몇개 있어 밤에는

혼자는 무서워서 가기 힘든 곳이었다. 낮에 봐 두었던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억새풀

둥지를 가늠하여 광주리를 덮쳤다.

 

뜸부기는 알을 품고 있다 광주리와 뜸부기 집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조그마한 중닭 정도의 뜸부기를 손질하여 누이는 밤새 불을 때서 솥에 넣고 푹~고았다.

야생 뜸부기는 살이 질겨 웬만큼 고아서는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엄마는 뜸부기 국물을 한 모금 겨우 드셨을 뿐이다. 더 이상

살코기도 드시지 못했다. 

겨우 누워 계시는 엄마를 뒤로한채 나는 학교를 갔고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학교를 마쳤다. 학교문을 나서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날 찾았다. 

 

최대한 빨리 나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오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엄마가 그 사이 돌아가셨다는 걸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약 2km 남짓 되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 좌우로는 모내기가

한창 이었다.

간간이 제비가 날고 봄날의 따스한 열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 아! 이제 엄마와 이별인가? '

 

그러나 특별한 슬픔이나 애절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딱 1년 전 이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연이어 닥치는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였을까?

 

뜸부기 사건은 나와  엄마의 마지막  이생에서의 인연이었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었고 열 세살,열 일곱살 두 남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눈 감으면 고~ 오 향  눈 뜨면 타향~ "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화안 하게 떠 오르는 고향! 고향의 골목, 나무, 우물가, 짚 앞

저 멀리 먼지가 뽀얗게 나던 신작로~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  

아무리 고향을 최근에 다녀와도 뒤돌아 서면 방금 본 변한 풍경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그 옛날 정경만 기억나는 참으로 이상한 그런 경험이 아마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니 천리 타향, 만리 이국에 가서 산들 어찌 어릴적 내 고향을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곳이 뻐젓이 좋은 곳이던 어디 내놓을 그런 곳이 못 되던 그건 중요하지 않

다. 내노라하는 인물이 나왔건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고향은 고향일 뿐이다

 

엄마는 마치 후광처럼 은은하게 내 기억을 감싸고 있다.  마치 어떤 풍경화의 뒷

배경처럼, 연주회의 배경 음악 같이~  

 

엄마와 고향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찬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 모틍이를 돌아 하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시던

엄마가 너무나 그립다^* 

 

그때가 나에게는 무한 행복의 시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항상 거기 계시는 그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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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0년도 초반 , 정확히는 72년 73년 그 즈음이다.

 

가까스로 대학은 갔지만, 그 넘의 학비가 자나 깨나 걱정이어서 

어떻게 하면 학비를 벌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한 학기 등록금은 4만 원 정도

였고 한 달 과외비는 대략 2만원 이었으니 잘만 하면 학비는 충분

하고 용돈까지 되고도 남는 괜찮은 장사였다. 

 

실제로 과외비 벌어서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세고비아 통기타를

종로 2가에 가서 덜컥 사기도 했으니까~ 

 

당시는 유신 반대 데모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해서 하루도

캠퍼스가 평화로운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학비 걱정으로

나날을 지새우는 처지에 무슨 데모인들 눈에 들어올까? 

거 뭐 데모도 다 먹고살만하니 하는 거지~  흠! 

 

일간지 광고란에 엄지 손톱만한 크기로 '과외' 광고를 특별히 싼 값에 

낼 수가 있었다. '과외, 전화번호, 어느 학교 '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돈 없는 학생이라고 특별히 봐준 것이다. 그때 돈으로 한 천원 정도지

싶다. 

요즘처럼 다른 일거리를 해 볼 수도 없었고 오직 과외 외에는 학비 충당

의 기회가 전무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어이쿠 이게 웬 떡이냐~~ 

 

나는 보문동인가 하여튼 어느 허름한 다방 약속 장소로 학교 마치고 

부랴부랴 나갔다. 테이블에는 중년의 잠바 차림의 수수한 분이 앉아

있었다. 통상 학교 어쩌고 등의 소개가 끝나자,

 

" 우리는, 아니 나는 공화당의 자제들 모임인 ' 송아지 회' 란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요! 그런데 당신의 할 일이란 게 공부를 가르치는 그런

게 아니고 안성에 가면 안법 고등학교가 있지. 거기 가서 학교 선생들이

어떻게 수업을 잘하고 있는지, 거 뭐 어려울 것도 없소. 수업할 때 복도에서

슬쩍 한번 들으면 대충 파악이 가능할 거 아니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또 학교 분위기나 운영 사정 같은 것도 좀 봐 가면서~  

그런 거 슬슬  관찰해주면 되는 거요! "

 

" 아니 과외 때문에 저를 보잔거 아니었나요? " 

 

" 그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것도 공부에 관련된 일이잖소? 그리고 음 

이걸 잘 해결해 주면 말이지  까짓 학비 정도는 껌값도 안되게 될 거야~

또 송아지회에도 좀 관여 할 수 있고~ 그러니 어떻게 한번 해 볼 생각이 있소?" 

 

그러나 나는 선뜻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고 이게 대체 나 보고 뭘 하라는

소린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내가 뭘 학교에 가서 염탐꾼이 돼라

는 얘긴가?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더니 그 사람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 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1분이 지나 5분이 지나 10분이 지나 30분이 지나도

도통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아니 그 사람은 영영 자리에 안 돌아오고 말았다

하염없이 다방 구석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하다 결국 집으로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에잇 오늘도 과외는 또 허탕이군~ " 

 

나는 왠지 그가 제안했던 그것이 갑자기 매우 괜찮은 조건인 듯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냥 무조건 해 본다고 할걸 그랬나?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고~

그런데 뭔지도 모르고 덜컥 한다고 하기도 그렇잖아?

 

혹시 그 사람 어디 간첩은 아닐까? 순진한 학생들 데려다 소위 학교 내에

프락치를 심으려는 건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는 무엇을 위하여 나를 만났는지 그게 궁금하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새털 하나만큼도 모르는 쑥맥 같은 나를 보고

아예 틀렸다 하고 때려치운 건 아닌지! 

 

아마도 그 일이 진짜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분이 나 외에도 다른 학생들을 

만나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간혹 이 나이에도 이상하리 만치 특정

집단에 충성을 바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혹시 저 친구 그때 저런 일로 학비를 충당했

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뭐 이건 추측일 뿐이다 

 

그때 그 일이 결론적으로 잘 된 건지, 잘 못된 건지, 새옹지마의 고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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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얼굴/(그 옛날 덮치기로 새 잡던 시절 유행하던 노래)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시골에서 겨울이란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지독히도 춥고 배고픈

시기였다. 이제 와서 그 긴 겨울을 끄집어내는 건 단지 그 시절이

아름답다고 느껴서도 아니요, 나 개인의 추억을 할 일 없이

공유해 보려 함 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릴 적 성장기에 그것이 내 삶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 하나요, 손에 전해져 오던 그 촉감과 추위를 무릎쓰고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벌판을 달렸던 그 기상이 또한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와

마지막으로 놀이 겸, 새 와의 싸움이 약간의 창의력 신장에 영향을 준

건 없을까? 등을 조금 반추해 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손주 손녀를 두신 많은 분들이 혹시 아이들 교육에

참고로 하실 내용은 없을까? 해서 이다.

 

새를 잡는 덮치기란 아래 사진과 같은 기구이다. 혹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이 좀 어설프게 표현되긴 했지만 활 모양으로 굵은 나무를 구부려 끝에

새끼를 서너 겹으로 연결한 후 그물망을 짠 작은 반 원형의 포집기를 새끼에

끼워 몇 바퀴 돌려주면 새끼의 뒤틀림에 의해 포집기가 볏 집 쪽으로 강하고

빠르게 원 위치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포집기 중앙에는 아래와 같이 벼를 달아 놓는데 그 벼를 새가 쪼는 순간

포집기가 앞으로 덮쳐지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이런 덮치기를 사용해 본 분들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이다.

 

 

이런 덮치기를 3-4개 혹은 더 많이 만들어 눈만 오기를 기다리는 게

시골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는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건 순전히

저걸로 새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이 듬뿍 내리면 새들은 먹이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혹여라도 눈이

좀 덜 쌓인 논둑 옆이나 큰 나무 아래 혹은 벌판의 풀 더미 옆을 찾아

날아다니게 되는데, 하얗게 눈이 쌓인 들판에서 저렇게 만들어져

놓인 덮치기는 아주 쉽게 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고기 반찬은 예삿일이 되었지만 50년대 후반에는 사실 1년에

설 추석에도 만만히 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고기는 커녕 닭도 거의

구경을 하기 힘들어서 어느 한 집에서 닭이라도 잡는 날이면 온 동네에

닭고기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었다.

 

 그래서 한창 자랄 어린 나이에 그나마 눈 덮인 겨울은 고기를 먹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던 것이다.

 

새 고기라 해봐야 손바닥만도 못해서 화롯불에 구우면 한 입 거리도 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그 맛은 천하에 둘도 없이 기가 막혔다.

 

내가 만든 덮치기는 4개 정도였다. 더 많아도 한 번에 들고 이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양손에 두 개씩 들고 눈 벌판을 신속히 이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일단 봉창 밖으로 간밤에 눈이

왔나 부터 확인하는 거였다. 만일 뽀얗게 눈이 쌓였으면 부리나케 옷을 입고

미리 마련해둔 덮치기를 들고 집 앞에서 2-300미터 떨어진 뽕나무 숲으로

내 달리는 거였다. 두 줄로 심어져 꽤 크게 자란 뽕나무 숲은 이런 날

새들이 먹이를 찾아오는 좋은 포인트였다.

 

일단 그곳에 덮치기를 설치해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뽕나무 밭으로 흰 눈을 헤치며 간다. 덮치기 주변에는 이미 촉새며

몇가지 새들이 푸드덕거리고 아주 요새 말로 하면 난리 부르스가 났다. 그리고

문제의 덮치기를 들여다 보면 여지없이 촉새가 한 마리 들어가 눌려 있게

마련이다. 각 덮치기에서 꺼낸 새를 준비해간 새끼 고리에 목을 꾀어 놓고

덮치기를 재 셋팅한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렇게 1차전은 끝나게 된다. 잡아온 새를 한두 마리 불에 구워서 먹는다.

참새가 황소 궁둥이에 앉아서 너 한 마리 다 해도 나 한 마리만큼 맛이 없을걸!

했다는데 참새, 혹은 촉새의 그 맛은 가히 천하 제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맛이 일품이다.

 

그런 식으로 오전을 보내게 되는데, 새는 무한정 잡히는 게 아니다. 계속 집

앞 뽕밭만 왔다 갔다 하면 될 거 같지만 한 장소에서 연속 새는 잡히지 않는다.

결국 장소를 옮겨야  된다. 이제 동네 어귀 철길 변으로 혹은 아예 동네

넘어 저쪽 새댕이 산 벌판 쪽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오후쯤 되면 눈이 펄펄 바람을 타고 날린다. 바람도 분다. 벌판에 덮치기를

세팅해 놓고 추위를 피해 어린이 몇 명이 옹기종기 볏단 아래 몰려있다.

이제 좀 시간이 더 지나면 새는 안 잡힌다. 바지 혁대 고리에 걸린 새끼줄에

잡혀있는 새 숫자를 확인한다. 아직도 목표엔 미달이다.

 

내 기억으로는 하루 최대

8마리였는지 16마리였던지 정확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겨우내 눈이 오면 촉새를 잡고 또 잡았다. 비슷한 모양의 참새가

있으나 너무 영리해서 좀체 덮치기로 잡을 수가 없었다. 참새의 영리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가을철 다 익은 벼를 못 쪼아 먹도록

허수아비를 세워도 그들은 본 척도 안 한다. 일부 새들이 허수아비에

놀라 도망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이것이 겨울철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시골서 새를 잡는 애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과 달리

먹을게 많고 그 추운데 고생해서 새를 잡을 아이도 없을 것이다.

 

덮치기를 만들고 새와 수 싸움을 벌이는 건 또 어떤가? 따뜻한 방에서 겨우

내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과 비교해서 더 바람직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연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울철에 새만 잡은 게 아니다.바람이 불 땐

연을 만들어 높은 창공에 날렸다. 하늘에 연 날리는 게 뭐라고 그 시절엔 참

그것이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추수하고 쌓아 놓은 볕 집단 속에 바람을

피해 두 손을 호호 불며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바라볼수록 온 몸이 시려지는 파아란 겨울 하늘 높이 하얀 연이 하늘 끝에 보일락

말락 떠 있는 걸 보는 마음은 통쾌하고 시원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연에

담아 날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맘에도 은연중 어떤 소원 같은 걸 빌어

보는 맘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부잣집에서는 연줄 감는 통이 6 각형 혹은 8 각형의 둥그런 나무를 짜서 만든 얼레를

사용했고 보통은 그냥 평면으로 납작한 얼레를 사용했다. 난 둥그런 얼레가 정말

갖고 싶었지만 희망 사항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어쩌다 그 둥근 얼레를

하나 장식품으로 구할 수가 있었는데,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 버린 것 같다

 

8각 얼레 / 출처 ; 대한 연 협회

 

 

새를 잡기 위해 덮치기를 만들고 새를 유인하기 위한 벼를 달아매는 도구로는 속이 빈

개나리를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이 나름 치밀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흰 눈

위를 달리고 바람과 싸워 이기고 새들과 수 싸움을 하고 추위를 견디는 훈련을

하고 그 모든 것이 온통 자연과의 한판 승부나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자연에는 온통 놀이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 그 옛날 추억담으로만 남아있던 그런 놀이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아래 기사이다

 

 

 

한참 전 간단히 봤던 기사 한 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기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누렸

던 환경이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

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MRI로 분석했더니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를 많이 볼수록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 임직원들은 자녀들을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로프' 학교에 보내고 부모에게 스마트폰 금지 약속을

받아 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안 줬고 빌 게이츠는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 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재산을 대물림

할 수 있다는 것~

 

 

(이하 중략! 디지털 뉴스 김의영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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