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적부터 살던 우리집을 떠나 그야말로 방랑길 같은 남의 집을
전전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이다. 그 때는 정든 내 집을 떠나 남의 집으로
간다는 불안감이나 이런것 보다도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의
썰렁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시골 초가집을 일단 벗어나는 게 좋을거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먼 동네에서 누군가 우리 집을 쌀 두 가마니에 사겠다했고 그 길로 작은
누나와 나는 아랫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보따리를 챙겨
아랫동네 아는 집 뒷방으로 이사를 했다.

 

담은 물론 대문 까지도 어엿히 갖춘 집이었다. 그 집에서 몇달인가 지내다
어차피 남의 방에 사는 거 학교 근처로 가자 하여 면사무소가 있는 송천리로
다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버스가 다니는 알죽 시내 큰 길가집 이었는데
방에 앉아 있으면 버스가 지날때 창이 우르르 울리곤 했다.

물론 시골이라 버스가 그리 자주 지나는게 아니라서 큰 문제가 되는건
아니었다

 

거기서 몇달인가를 지내다 좀더 한적한 곳으로 방을 하나 다시 얻어 본격적
으로 자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나이에 무슨 자취냐? 그것도 시골에서
할지 모르겠으나, 친척이 인근에 사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의탁할 곳이 없어
별 도리가 없었다.

 

당시 석유 곤로라는 걸 써서 밥을 해 먹었는데,,이것이 석유 냄새도 많이 날
뿐더러 또 어린 나이에 밥을 안 해 먹고 여름 같은 때는 참외 하나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때의 약간은 향긋한 특유의 석유 냄새가 어쩌면
그립기도하다.

 

내가 방을 세 얻은 동갑나기 친구의 집은 규모가 꽤 커서 당시에도 여러개의
방을 세를 놓고 있었는데,,마침 내 옆 방은 신혼부부가 어린 아기 하나와 살고
있었다.중학 2년생이었던 내가 밥을 잘 못해 먹는 걸 보고는 어느날


"학생!! 쌀만 주면 밥은 내가 해줄께"


라고 새댁이 보다 못해 나한테 말을 했다 아마도 밥도 잘 안 해먹고 학교라고
다니는 어린 학생이 많이 안쓰럽게 보였나 보다. 나는 무조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날부터 옆집 새댁 방에서 밥을 날라다 먹기 시작했다. 같이 셋방 살이를
한다는 동병 상련의 심정이 있다고는 하나 시골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인심이다.


참으로 고마운 새댁이다.만일 지금은 사라졌지만 'TV는 사랑을 싣고' 란 프로에
만약 내가 출연할 기회가 있다면 단연 1순위로 찾고 싶은 분들이다.

말이 자취이지 사실 한창 커갈 나이에 뭐 하나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 었다. 직장 일 때문에 한달에 한번 겨우 들르는 작은 누나가
이것저것 챙겨 주기는 했으나 워낙 역 부족이었다.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암것두 생각하지 말고~ "

라고 누나는 언제나 그 말만 하곤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국민학교때부터 습관 들여진 예습 복습 전혀 안 하기는 여전해서 맘 잡고
집에서 책을 들여다 보는 건 거의 안했다. 몸은 점점 야위어 갔고 체육 시간에
츄리닝을 입고 보니 두 다리가 정말 가늘어져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나름 건장
하던 내가 정말 초라하게 변한 걸 실감해야했다

 

시골서 혼자 자취한다하여 불량한 패거리에 끼어 다니거나 생활이 무질서 해
지거나 이런건 전혀 없던것만도 감사할 일이었다

식사는 그렇다 치고 가끔씩 찾아오는 감기나 이런 병이 나면 참으로 난감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고열이 났을때 벽지 무늬가 뱅뱅 돌던 기억이 지금도
또렸하다.


그 렇게 일년여쯤 지내다 도저히 안 되겠서서 한 동네 하숙집을 찾아 들었다
도무지 자취를 해 가며 중학교를 다닐 능력이 없었다고 봐야겠다


초등 동창집 이기도 했던 하숙집 문간방을 하나 차지하고 지내게 되었다. 밥은
걱정 안해도 되니 이젠 살 것 같았다. 친구의 엄마이기도한 아주머니는 문 단속
과 전기 끄는것에 아주 엄격했다. 방을 나올 때 반드시 전기를 꺼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해서 지금도 그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그 집에는 주인 아주머니의 친척뻘되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하나 같이 살고
있어서 그나마 말 동무가 좀 되어 주어 심심하지는 않았다.

 

당시 3학년때의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두번재 하숙집이다

 서글서글하고 화통한 성격으로 서울로 이주해서 쉽지 않은

생활을 이어갔으나 2017년쯤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다 중 3 이 되면서 중학교 교무실에 근무하는 뒷 동네 누나가 학교 바로 아랫
동네 '내뚠이'에 하숙집을 소개해 주었다. 농사를 짓는 집 이었는데 건너방 하나를
쓰게 되었다. 그 방은 늘상 어둑하였었다.

집은 약간 높은 곳에 지어져 있었고 외동딸이 당시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따로 지어진 안방과는 좀 떨어져 있는 방에 혼자 지내는 건 참으로 심심하고 외롭고
고독한 일이었다. 먼저번 하숙집에는 그나마 말 동무라도 있었는데, 여긴 그렇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중학 3년간 나는 집을 네번이나 이사하며 안정적인 생할과는 거리
가 먼 어수선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천리 타향이 아닌 바로 내 고향
땅에서라니~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볼것 없는 나를 공부를 좀 잘 한다는 이유로 점
찍어 둔듯 한참의 세월이 지나 나중에 내가 대학을 들어간 후 까지 은근한 미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세상 일이란 그래서 알다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암튼 그렇게 시작된 남의집 살이가 결혼해서 내 집을 꾸리기 까지 무려 25회 이상
을 전전하는 시발점이 될줄이야 !

 

애수의 네온가/maronie

 

 

밤비는 부슬부슬 지향 없이 오는데

향수에 젖은 몸이 처마 끝에 지새듯

명동의 이 한밤이 길기도 하다

눈부신 네온만이 마냥 밉구나

 

장미꽃 한 송이를 내 가슴에 안고서

원많은 옛 추억 하룻밤을 새우네

푸른 별 꽃잎처럼 쏟아져 온다

때묻은 안개 길엔

등불만 깜박

 

 

김초향 작사/ 박시춘 작곡

 

 

 평창 가는 길의 옥수수밭 (2010.8.3 촬영) 

 

일죽면 능국리 일대는 일제 시대에 안성-여주간 철길이 지나는 곳이었고 

동물 이라고 불리는 고향 동네엔 철도 역도 있었던 곳이다. 

 

해방후 정착한 그 동네 근처에 놀고 있는 땅이 있을리 만무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름에 홍수가 지면 물이 차 오르는 청미천

큰 개울가 빈 땅을 개간하여 약 3,000여 평의 순전히 모래로 된 

밭을 만들게 된다

 

경남 합천 고향을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아 다시 조국으로 

돌아 오신 부모님! 그리고 또 타향 객지인 일죽으로 오셔서 농토도 별반없이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셨던 아버지는 결국 1963년도 경에는 중병에 시달

리시게 된다. 

 

변변한 병원 치료도 못 받아 보시고 그해 음력 4월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향년 62세! 사실 당시의 수준에서 보자면 거의 평균 수명은 사신

 셈이다.그러나  어린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돌아가신 셈이다!

 

 

식구들이 모인 방에서 기력이 쇄잔하신 아버님이 말씀을 하셨다

 

" 쟈는 꼭 중학까지는 가르쳐야 한데이~ "

 

그러자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 뭘 가꼬 중학을 가르치노?" 

 

 

그리 말하는 어머님의 얼굴엔 침통의 빛도 체념의 빛도 아닌 그저 

무 표정에 가까운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 아! 나는 중학교 가기는 틀렸나 부다 "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님은 그래도 하나 남은 아들이 중학은 나와야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지 싶으셨을거다. 

 

일부 몇몇 좀 사는 애들을 제외하면 그 시절엔 많은 애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상 그 당시엔 초등학교 졸업생의 2/3  이상이 중학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가난한게 주 원인 이었지만,일단 중학 수용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면내 국민학교 총 졸업생의 1/3 수준이었다.

 

 해서 당시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일단은 꽤나 괜찮은 인텔리 축에 들던 시기다. 

한 동네에서 아주 잘 사는 부농의 자식 하나 정도가 대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러고 불과 1년여 만에 엄마 까지 연이어 돌아가시니 세상천지에 누나와

달랑 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가 음력 6월 초이니 대략 7월 중순 정도이다. 

내 나이 12살에서 13살 사이에 일어난 격변이었다. 내 유년기의 행복은 거기 

까지였고 타고난 나의 운명이기도 했다

 

 

 

비록 작은 시골 집이었지만 졸지에 어린 두 남매가 살기에는 너무 썰렁하고 

큰 집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은근히 밤이 되면 집에 있기가 무서워 지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몇달을 더 버티다 수소문 끝에 쌀 2가마니에 집을 팔기로 하였다. 정든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이렇게 떠나게 된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덕 너머 큰 동네 어느 집에 뒷방을 하나 얻어 들어갔다. 

 

내가 위장이 안 좋아진 건 바로 그 즈음이다. 초등학교 5학년 까지도 키가 

훤칠한데다 살이 쪄서 통통 했었는데 연 이은 시련과 제때 밥을 못챙겨 먹으면서 

속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꽁보리 밥을 물에 말아 먹기 시작하면서 영 상태가 좋질 않았다. 동네에 있는

 약방 에서 활명수를 사 먹기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이후로 중 고 대학 및 사회

생활을 한 30대 중 후반까지 무려 25년 이상 속을 괴롭히는 위장기능 저하에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초등학년때는 말 안 듣는 특히 나를 비꼬거나 무시하는 녀석은 데리고 가서

 패주기도 했던 나 였는데, 그 이후 키만 크고 몸이 깡마른 체격은 오래 까지 

지속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아무런 상장도 못 받아 서운키 그지 없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

하다 왜 그리 서운 했는가? 당시 시험지 조작으로 엉뚱한 놈이 1등으로 되고 

나는 2등으로 졸업을하게 됬는데, 상당수의 이런저런 상들은 모두 힘깨나 쓰던 집안 

애들에게 돌아가고 나는 내 팽개쳐진듯 아무 상도 안 주었으니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상이 무엇이길래!! 상도 상 이지만 어린 내가 봐도 어처구니

없는 불공정으로 점철된 초등학교 졸업 언저리의 실상이었다 

 

그리고 아무 대책없이 응시한 중학교 시험,,

 

 

 

 감곡성당 창시자 임 필립보 신부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과연 운명이란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일등 합격은 등록금을 면제해 주지만 2등에게는 아무 혜택도 없다. 공교롭게도 

중학입학 시험에서 나는 2등으로 합격을 했다. 물론 2등도 매우 매우 훌륭한 성과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질적 혜택은 전혀 없었다. 이걸 어찌 해야 하는가? 

 

고민을 거듭하다 오직 하나 남은 개울 옆 밭을 팔기로 했다. 어차피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

 형편이니 처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가 밭에 씨를 다 뿌린 다음 돌아가셔서 한 동네 아는

 사람과 소위 어우리라고 반반 씩 소출을 나누는 데 밭을 내놨던 터 였다. 헌데,, 밭이 팔릴

 기미가 없는 것이었다. 등록금 내야 할 기한은 이미 넘겨 네번을 연기했는데 말이다. 

 

그나마 2등으로 붙었다 하니 사정을 봐준 셈이다. 이제 곧 신학기가 다가오는데 잘못하면

 등록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걸까? 먼저 가신 부모님이 

도와주신 걸까? 아니면 스스로 도운걸까? 한 동네 사는 사람이 밭을 사겠다고 나섰다.

 

 " 3,000 평에 쌀 열다섯 가마"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자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총 재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슬아슬하게 중학교를 들어가게 해준 밑천,, 그것은 열다섯 

가마의 쌀 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학교 입학에 드는 돈이 쌀 2가마였다고 당시 쌀 1가마

만 겨우 마련하여 중학교를 포기한 친구가 얼마 전 얘기를 해서 알았다. 

 

이제와서 역사를 유추해보면 만일 당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면

 나는 필경 중학교는 못갔을 것이다. 물론 중학을 못갔으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이고

 그것이 지금보다 결코 못하다고 얘기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허나 내가 중학교를 갈 즈음의

 그 역사적 현실이 참으로 아슬아슬했다. 한 국가의 역사도 그렇지만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중학을 못가고 그 나이에 공장을 다니다 지금은 큰 일을 하고 계시는 분도 있다. 60년대

그 시기에 중학을 못 간것이 어디 한 둘의 문제랴!!

 

 어린시절 일찍 돌아가 버린 부모님이 너무도 큰 충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중학교를 

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던 중학은 물론 대학,대학원까지 마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운명일까? 필연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잊혀질 슬픔/박강성

 

 돌아서 가는 날 붙잡지 말아줘요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보일것만 같아

 이대로 떠나가 버리면 차라리 아픔은 덜하잖아

 이대로 나를 보내줘요 가녀린 그대의 눈동자 그렇게 서글퍼하지마 

이별의 아픔이 서러워도 날 자꾸 울리진 마 

세월이 가면 흔적없이 잊혀질 슬픔이겠지 

 

나 이대로 떠나면 그만일 뿐 우울한 거리엔 비마저 내려오네 

그대의 모습을 나 또 다시 볼 수가 없어 

슬픔에 목이 메어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진달래 (보라산)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렇다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더니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 누구도 모르니 결국 흙에서

나온것이요 또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게 맞지 않는가!

 

 

내가 살던 고향과 나의 고향 집은 꽃이 피는 산골은 아니었다.

그냥 시골 이었다. 더러는 근처에 진짜 꽃이 만발하는 동네가 없던것은

아니나, 나의 시골은 그저 평범한 동네였다. 좀 큰 아랫동네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모두 합해서 여섯집이 모여 있었다. 집 뒤로는 아주 얕으막한

뒷산이 있었다. 한참을 뒤로 더가면 모양이 예쁜 조금 큰 서울의 남산 정도되는

종산이 있었다. 집 앞으로는 밭이 경사지게 쭈욱 있었고 한 300여 미터

앞으로 신작로가 동서로 가로질러 있었다.장호원과 안성을 잇는 38번 

국도이다.

 

 

 

초가집 단층으로 반자라고하는 것도 없는 흙벽돌 집이었고 안방과 뒷방이

하나 그리고 부엌이 하나 부엌앞에 장독대 하나 그 앞으로 화장실이 한칸 그리고

마당이 한 10여평 남짓, 집 울타리는 없었다. 뭐 지나 다닐 사람도 적었으니 그렇긴

하지만 여섯집 중에 우리집만 담장이 없어 얼마나 담장있는 집을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할수없이 담장 대신 코스모스를 잔뜩 심어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마당을

덮게 했지만 그래도 그게 담장은 되지 못했다. 담장이 없으니 집 뒤는 바로

손바닥만한 텃밭과 야산이 연결되고 있었다.비라도 많이 오면 그대로 집

토담뒤로 물이 좔좔 흘러오는 형국이었다.

 

 

 다행이 집 앞은 막힌데가 하나도 없어 안방 봉창으로 내다 보면 멀리 장호원

 뒷산과 충북 음성쯤의 아련한 산들이 겹쳐서 시야에 들어왔다. 집터가 저 아래 

신작로 보다 약간 높이 위치해 있는터라 언제나 넓은 시야가 확보 되었었다. 

집에는 개 복숭아 한그루에 미류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옆집에는  미류나무를

 여러그루 마당  주위로 심었었고

또 우측 옆 집에는 마당 안쪽에 난초가 한 그루 심어져 있었고 개나리로

 뒷 담장을 하고 있었다. 여섯가구의 우리 동네는 진달래나 살구 이런건

 전혀 없었다.

 

개나리 담장이 전부여서 봄이면 노란 개나리 담장이 예뻣다. 아랫동네에

 좀 오래된 진달래를 심어 놓은 집이 딱 한군데 있었는데 봄이면 그

 진달래가 멀리서도 보였었다. 살구나무 있는  집이 두 집인가 있었고 대체로

 꽃나무는 많지 않은 동네로 기억된다.

 

 

 

 

예전 시골 집에 살려면 겨울 난방이 참으로 어려웠다. 땔 나무를 그득 쌓아놓은

집은 매우 드물었고 가을 걷이가 끝나면 里 공동 소유의 뒷산에서 단체로

영나무 라는걸 한 일주일정도 했다. 식구 많고 노동력 많은 집은 많이

땔감을 가져갔고 식구수 적은 집은 간신히 나무를 해 가는 아주 비합리적인

제도였다. 그런 저런게 끝 나면 별도로 나무를 사서 쓰든지 해야했다. 대체로

그렇게 나무를 해 오려면 아주 멀리 있는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야했다.

 

5일장이란게 그땐 있어서 장날에 나무 를 해서 팔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간혹 나무를 해서 시골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것이 봄에 진달래 필때까지도 연장이 되어 먼산에까지 가셔서 나무를 

해오실 때면 영락없이 지게 꼭지에 진달래를 한 묶음 꺽어서 꽃고

오시곤 했다. 멀리서 도 한 눈에 진달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지게

꼭대기에서 받아든 진달래를 우리는 맛있게 먹곤 했다.

 

이렇게 진달래는 보기에 앞서 우선 먹고부터 보는 꽃이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 어찌 진달래가 소월의 진달래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소월도 진달래를 꺽어 먹고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이라면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 싯귀를 만약 내가 썻다면

 

 

 

 

" 마곡산의 진달래 꽃

아버지의 지개위에 하늘거리네~

진달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지!"

 

뭐 이런 정도 아닐까? 

 

 

우리집 마당에서 바라본 정경 1980년대 촬영,

 

이때만 해도 예전 우리집에서 보던 정경이 대략 유지되고

있었다 . 신작로는 비 포장으로 먼지가 풀풀 나고 미류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에 벼가 자라 올라 잎이 동그랗게 원을 그릴때 쯤이면 보통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오후부터는 그위에 뒹굴기 시작한다. 저녁도 방에서보다 마당에서 먹기 시작

하는 것이고 잠도 마당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기 시작한다. 철판을 잘라 만든

화덕에 솥을 올려 놓고 나무를 때어 밥을 한다. 밥이래야 거의가 보리밥이지만,

나무를 때면 연기가 난다. 그 연기가 피어 올라 이동네 저동네에서 일제히 근처

산허리를 감돌며 퍼져 나간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멍석에 드러누워있는 하늘

위로 잠자리가 빙빙 돌아 다닌다.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일을 마치시고 늦게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오신다. 가끔은 방망이로 칼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칼국수에 호박을 썰어 넣어 먹는다. 수제비도 해 먹는다

그리고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밤이 되면 근처 옆집에 뭐 재미있는 얘깃 거리가

없나..서성이다 멍석에 돌아와 혿이불을 걸치고 밤 하늘의

은하수를 세며 잠이 든다.

 

 

다음날 해가 떠오르면 더워서 얼른 잠에서 깨어난다. 아마 늦어도 아침

6시나 7시일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내가 살던집.. 내가 태어 낳고 자라왔으며 나의 유년기의

추억이 고스란이 남아 있어야할 나의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아랫

동네에 살던 형 한분이 언젠가 자신이 살던 집을 이름 있다는 화가에게 설명하여

그려서 간직하고 있는 걸 본적이 있다. 얼마나 자기 집이 그리우면 그랬을까..

 

내가 보기엔 원래 그분의 집과는 좀 달라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꿈속의 그

나의 허름하던 집을 다시 재생하여 그려 보고 싶다. 만일 그림 실력이 좀 된다면

직접 그려보고 싶지만.

 

 

 

개 복숭아 한 그루에 날로 자라나던 미류나무 한 그루, 그 미류나무와 함께

내가 미처 인지하지는 못했어도 결국 나의 꿈도

같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옛날 우리 초가집과 거의 비슷한 모습 ^

 

굴뚝이며 앞 마당 끝의 코스모스며 초가의 크기가 거의

흡사하다^ 단 저기 보이는 마루는 없었다!

 

 

보슬비 오는거리/마로니에

 

 내 어린시절 꿈이 녹아있던 3,000평짜리 모래밭( 1979년 촬영)

(우리 손을 떠난지 오래지만,땅콩이 여전히 주전 품목으로 경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남부 지역인 백암과 태영컨트리 클럽이 조성되어있는 구봉산 남쪽 정도가

시발점인듯 싶다. 암튼 청미천은 일죽 부근에 다달으면 넓이가 대략 200 여 미터를

족히 넘게 넓어 진다.

 

그 개울을 건너 남쪽으로 일죽 초등학교가 있었고 우리동네는 개울 건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걸어서 40여분 정도 걸리는 학교길을 우리는 늘상 개울물이

깊지 않으면 건너 다니곤 했었다. 한참 윗쪽으로 신작로와 큰 다리가 있었지만,

개울길은 질러가는 샛길인 셈이었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고 모래는 기슭으로

갈수록 아주 고왔다. 언덕엔 고운 모래에 붙어 길게 꼬리를 물고 자라는 갈대가

얼키설기 있었고 약간의 잔듸도 자라고 일부는 개망초같은 잡풀 등으로 엉켜있는

게 보통이었다.

 

 

일죽이란 동네는 일가친척도 없었고 마치 이북에서 피란 나온 사람과 똑같은 처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큰 누님을 다끼쨩 이라고

늘상 불렀다.일본 살때의 이름을 그대로 불러준 것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있을리 만무한 우리는 힘들게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찾아서 개간을 하여 밭과

약간의 논을 일굴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말기 철거해간 안성-여주간 철로길 변에 약간의 땅을( 철로였으니 자갈밭

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구어 겨우 논을 만들어 놓았고 다 합쳐보아야 2-3 백평도

채 안 되었다.그리고 청미천 변에 하얀 모래를 일구어 만든 모래밭 한 3000 평 정도가

농토의 전부였다. 일년 농사를 다 지으면 쌀이 몇 가마,, 밭에서 고구마가 일 이십 가마,

땅콩이 몇 섬, 그리고 이것저것 잡곡 일부 깨,콩,참외,무우 배추 뭐 그런 정도였다.

다섯식구가 일년 먹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소출이었다.무엇보다 주식인 쌀이 부족했다.

 

우선 쌀이 부족하니 식량의 많은 부분을 무우나 보리 등으로 때워 나갔다. 보리와 무우를

썰어 밥을하고 솥 중간에 한줌의 쌀을 넣어 늦게 낳아서 거의 엄마 젖을 먹지 못한

막내인 나에게만 쌀밥을 약간씩 주곤 했다. 물론 이 시절엔 우리만 그런게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쌀이 부족하여 양식이 넉넉한 집은 몇집 안 되었을듯하다.

 

워낙 영양 보충을 못했으니 그렇게라도해서 잘 크게 해줄 요량 이었다고 생각된다.

 

허지만 주 소출원인 모래밭은 6월 장마가 들면 어김없이 물이 차올라 둑을 넘고

그 물이 밭을 점유하면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겨우 물이 빠지곤 했다. 거

의 한해도 예외가 없었다. 비가 계속 내리면 우리들은 수로에서 송사리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창 자랄 곡식 들이 장마 비에 물이 담아 일주일씩을 패대기치고 있을때 얼마나 엄마

아버지의 속이 상할줄을 철없는 나는 잘 알수가 없었다. 그저 고기 잡는데 온

정신이 팔리곤 했다.

 

 

일죽 들판

장마가 얼추 지나면 모래밭에 나가서 쓰러진 곡식들을 추스려 세우고 다시 잘 자랄수있게

이것저것 물에 떠내려온 걸 치워주고 그렇게 했다. 어쨋거나 우리 삶의 희망은 그 모래밭

뿐이었으므로 모든걸 거기에 걸었다. 만일 그 밭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일찌기

그곳을 떠났거나 암튼 그랬을 것이다. 언덕에 올라 멀리 개울로부터 마치 큰 강물이 쓰나미

처럼 범람해 들어오는 모래밭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기억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정경에 목이 메어옴을 느낀다. 그 모래밭은 그러나 3-4월의 평화로운 시기에는

참으로 보드랍고 깨끗하며 밭 주위로는 깊은 수로가 연결되어 차갑고 깨끗한 물이 늘상

갈대 숲에 가려있던 것을 기억하게한다.

 

 

 

마치 만리포나 안면도 해안가를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고운 모래가 발가락을 간지럽히고

그 위에 벌렁 누워 있으면 높~은 하늘위로 비행기가 하얀 뭉게 구름같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며 고요한 소리를 내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나는 웬만하면

그 밭이 있는 길로 와서 이것저것 곡식들을 들여다 보다가 집으로 가곤했다.

 

 

책보를 언덕에 던져놓고 살짝 차가운 도랑물로 들어가기도 했고 찬물 덕분에 씩씩하고

날쎄게 숨어버리는 붕어떼를 한참씩 들여다 보기도 했다. 우리밭 건너편에는 정서방

(아버님은 늘상 그렇게 부르셨다) 이란 분의 밭이 있었는데 거의 매년 참외를 심고

7월쯤이면 원두막을 높다랗게 지었다. 어쩌다 한번씩 오라고 해서 참외를 깍아주기도

했다. 헌데 우리 아버지는 좀체 원두막 같은걸 만들지 않으셨고 참외는 그저 한두줄

먹을것만 살짝 수수나 기장 같은 키 큰 곡식 사이에 심으셨다. 외부사람이 여간해서는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렇게 하신것 같았다.

 

 

농사를 지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논 농사는 비교적 수월한 편인데 반해 밭 농사는

일년 내내 하루도 일이 없는 날이 없다. 늘상 풀을 뽑고 벌레등을 잡아 주는 등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해 농사는 망치기 일쑤다. 자나 깨나 아버님은 밭에 계실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에게 그 밭은 끝 간데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보이는 곳이었다.

 

 

 

고운 모래 밭에는 목화를 가득 심기도 했고 경상도말로 동부라는 강낭콩 같은 곡식도

띄를 이루며 심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麻 라고 하는 삼베 만드는 걸 심기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대마초였다. 麻는 시원시원하게 자라고 꽃이 피면

야들한 색상이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대마 같은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침 일찍 모래밭을 나가 보면 땅 밑으로 두더지가 터널을 파고 가는것이 보인다.

아마도 먹이를 구하러 땅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그

두더지를 많이 잡아오셔서 풀섶을 태우는 불에 구워서 나를 먹게 하셨다.

깨끗한 모래밭 밑을 배회하던 녀석이니 매우 깨끗했고 구워서 간이나 살코기를

소금에 찍어서 먹곤 했다. 무슨 그런 야만적인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땐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50에 막내를 낳고 젖한번 먹지 못하고 자라는

아들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기회가 되는대로 몸에 좋은 음식이면 뭐든지 먹도록 하신 우리 아버지^^ 아마도

그렇게해서 구워 먹은 두더지가 줄잡아 몇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지금은

그런거 구할래도 구할수도 없고 어찌 보면 자연이 나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

아니었을지.

 

 

가을이 깊어가면 에스키모인의 얼음집 같은 움막을 짚으로 만들어 밭 한가운데쯤

세운다. 그 속에 약간의 반찬이나 이불등을 가져다 두고 다 익은 곡식도 지킬겸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움막에서 지내셨다.  

 

 

 

그러나 우리 다섯식구 삶의 터전인 동시에 내 유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있던 그 모래밭은 결국 열세살 되던해에 우리 품에서 사라지게 된다.

 

 

 

 

 

새집, 여기엔 촉새,할미새,종달새,꿩, 물오리 등등이 포함된다.


능국리 시골 동네엔 주변에 야트막한 야산이 많았다. 동네 바로 뒷산도
있었지만 거기엔 새들이 잘 집을 안 지었다. 한 동네에 총 7명의
동갑나기가 있었는데,한결같이 학교를 댕겨오면 약속이라도
한듯 책가방을 팽개치고 동네 서쪽으로 약 1키로 정도 떨어진
'새댕이 뒷산'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봄철 4월에서
6월,혹은 7월 까지였다.

 

큰 나무가 없고 키 작은 소나무, 참나무, 철쭉 등이 빼곡한 이곳은
새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천국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산 지표면 땅으로
풀들이 잘 자라는 이 곳 어디나 새 집이 많았다. 우리는 떼를 지어 산을
헤집고 다녔고 누구라도 먼저 새 둥지를 찾는 사람이 그 새 집의 임자가
되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 혹은 풀잎 속에 예쁘게 마련해 놓은 둥지는
보는 자체가 신비였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수확물 이었다.

새 둥지를 찾으면 다음 단계는 비료 푸대 실로 고리를 만들어
둥지 가장자리로 늘어 놓아 알을 품는 어미새를 포획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잡은 어미새는 집으로 가져가서
새 집을 만들고 그곳에 넣어서 길렀다. 수 없이
새를 잡아 벌레등을 잡아 먹이며 길러 보았으나 대개
1주일이면 새는 죽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거지만,
당시는 그렇게 하는게 매우 즐거웠고 뭔가 심심하고 특별한 놀이도
없어 그렇게 한게 아닐까,생각이 든다.집에는 강아지도 길렀고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뭔가가 있었나 보다. 꿩 알을 발견하고 즐거웠던 일
또 꿩이 새끼를 길러 졸졸 데리고 도망치는 걸 보던 일, 물오리 집을
찾아 20여개에 이르는 푸르스름한 커다란 알을 포획했으나 그것이
이미 부화를 앞둔 알이어서 크게 실망하던 일,, 등등

사실 당시에 그런 일은 하면 안 되는거야,,라고 누군가가 잘
말해 주었다면 아마도 그 일은 중지를 했을지도 모른다.
새가 되었든 뭐가 됫든 생명은 중하니 절대 함부로 대하면
안 되고 그런걸 잡아서 죽게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면 어릴
적부터 조심하고 아끼는 마음이 좀더 생기지 않았을까?

 

그후 6학년 때인가? 산밑 동네에 사는 친구가 자기 집에 까치가
새끼를 기르고 있다고 가보자 하여 호기심에 따라가 보니
커다란 은행나무 위에 까치 집이 있었고 새끼도 있어서
한 마리를 얻어 와서 정성껏 키웠지만 그것도 결국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20여년 전에 시골 가서 그 집이 생각나서 들러 보니 그 친구는
온데 간데없고 은행나무도 너무 커져서 거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던 기억이 난다.

 


얼마전 시골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 당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도 그런 기억을 지금껏 하고 있어 새집 얘길하며
한참을 웃었었다. 허나,

 

이것은 국민소양 부족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마치 그런 책임이 국가에 있는거 아니냐고 떠 넘기는거 같지만,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제대로 자연 보호 교육을 시키는 건 당연
국가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다시 반복하지만 비록 어릴 때라도 생명의 둥지를 무너뜨리는
일은 절대 해서 안 되는 것으로 배웠어야 하고 또 그런 생명존중
사상을 일찌기 일깨워 주는것은 국가의 의무라 생각해 본다.
요즘의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그런 교육이 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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