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제약 시절,,야구 우승트로피와 함께.((1978~9년경)
아래 유니폼 입고 앉아있는 맨 좌측이 필자

 

 

태평양 화학 시절(테니스,야구,등산)

 

내가 약대 재학 시절에도 제일 어려워 하던게 실험실습 이었다. 그런데

첫 직장에 처음 배정된곳이 바로 실험실이었다. 나는 거의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왜? 하필 다른 부서 다 놔두고 실험실을 갔단 말인가?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나자 안정이 되었다.

 

초기 극심한 실험실 적응 훈련에 성공한 다음에는 차츰 그동안 하지 못 했던 

스포츠 등에 눈이 떠지게 되었다. 약대 재학 중 있는 자들의 전유물 처럼 여겨져 

감히 흉내도 못내 본 테니스가 눈에 들어 왔다.

 

마침 비슷한 또래의 약사가 너댓명 함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라켓을 

구입하고 일요일이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림동 태평양화학 근처에서 부터 신림동 서울대학  부근의 테니스장까지

찾아 다녔다.

 

당시 남자 선수들 외에 김약사라고 하는 여약사도 한 명이 끼어 있었는데 곧바로

퇴사해버려 이름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1980년 5.18 소식도 우리는

대림동의 한 테니스장에서 게임을 하다가 들었다

 

테니스에 얽힌 과거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 약대의 자그마한 운동장은 위 아래 두개가 있었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땐 윗쪽도

그냥 흙 운동장이었다. 헌데 얼마 있다가 그곳에 테니스장 공사를 하여 테니스장으로 

바뀌고 말았다.72년 당시만해도 테니스는 마치 있는 자들의 부의 상징과 같았다.

 

아무나 테니스를 할 수는 없는 시절이었다. 라켓도 비싸고 무엇보다 테니스장이 많지

않았고 한 게임 할려면 돈이 들었다. 우리 동료 중에도 몇몇은 라켓을 들고 학교에 

오기도 했고 특히 교수님들이 열풍이 불어 거의 모든 분들이 테니스를 즐겼다.

졸업 후에도 한 동안 테니스 대회란걸 열었는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3학년 쯤인가~쉬는 시간에 놀다 약대의 그 테니스장 안으로 공인지 뭔지를 떨어

뜨렸고 나는 무심코 담장을 넘어가 테니스 장에서 공을 꺼내 들고 나오다 학교 교수님과

마주쳤다.

헌데, 그 교수님 험한 인상을 하고 왜 테니스장을 무단으로 출입 하냐며 나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그 교수님은 자타가 인정하는 테니스광 이었다.

 

학생들이 자유로 뛰놀아야할 운동장을 무단으로 변경하여 테니스장을 만든게 누군데,

당시도 테니스장 건설에 대한 찬반 논의가 분분했지만 결국 교수들이 밀어 붙여 공사를 

했었다. 그 교수님이 아직 생존해 계시니 누구라 밝힐 수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몰상식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해서 나중에 대웅제약으로 옮겨서 해외 일주를 할때 결국 나는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거리에서 보론으로 만들어진 당대 최고급 라켓을 구입하고야 말았다.

 

*

 

그리고 다음 차례는 야구였다. 당시 직장별로 사회인 야구가 붐을 이루고 있었는데 태평양

화학도 야구에 열심이었다.어릴적부터 돌멩이로 나무를 맞추거나 새를 잡으러 던지거나

하는데 재미를 붙이던 나는 즉시 야구팀에 가입을 했다. 키가 크다고 포지션은 1루수였고 

간간이 투수도 해보았다.

 

누군가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장효조 선수를 초청해 와서 운동장에서 야구 교습이 있었는데,

그의 공이 얼마나 쎄게 날라 오는지 정말 바람을 몰고 왔다. 그냥 슬슬 쳐 대는 건데도 

공을 잡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장효조는 투수 시범도 보였는데 공이 끝에가서 뚝 떨어지는

커브도 기가막히게 구사했다. 허나 선경합섬(지금의 SK) 과의 경기중 앞니에 공이 맞아 

두고두고 그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작한것이 국내 유명산을 등반하는 것이었다. 마침 영남대 약대 출신의 입사 선배

전기석 약사가 산을 아주 잘 탔다. 우리는 그의 리드하에 설악산, 두타산,대둔산, 등등을 시간

만 되면 찾았고 눈이 쌓인 한 겨울에도 설악산을 찾았다. 버스로 오색약수에 내려 1박을하고

새벽에 대청을 올라 그 길로 화채봉을 거쳐 속초로 가서 바로 버스로 상경하는 코스를 여러번

했다.

 

연휴가 닥치면 우리는 어김없이 등산을 댕겼고 그렇게 직장생활의 고달픔도 잊고 산으로

테니스로, 야구로 4년을 재미있게 지내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대학 4년보다도 오히려 

직장 첫 4년이 더 재미있고 즐거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으니 1978년 봄에 있었던 경북대 여학생들과의 미팅이었다.

이것 역시 대구의 영남 약대를 나온 전기석 님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그 친구까지 포함해서

남자 약사 4명이 경북대 여학생 3학년쯤 되는 4 명과 대구에서 미팅을 하기로 한 사건이다.

 

아마도 지금의 약사 위상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래도 한 두 건은 성사가 됬을텐데, 당시 한껏해야

직장 다니는 약사였으니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나 보다.

암튼 우리 넷은 열차로 대구로 내려갔다.

 

뽀얀 봄 바람이 부는 3.15일 대구에 도착하니 진달래가 빨갛게 피어 있었다.

 

모처에서 조우를 하고 여학생중 누군가 "팔공산 으로 가입시데이" 했다. 시내 버스를 타고

동화사를 거쳐 팔공산 입구에서 내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북대생들은 하이힐을 신고 나왔는데

그 상태로 팔공산을 오르자니 정말 힘든 일이었다. 팔공산 정상에 올라 잠시 봄 바람을 쐰 

일행은 할 일이 없어 다시금 내려왔고

 

" 앞산 공원으로 갑시다" 해서 대구 시내 남쪽에 위치한 앞산 공원 이란데를 또 올라갔다.

정말이지 미팅으로는 이보다 더 싱거울 수가 없는 일정이었다.

 

당시 아무런 플랜도 없이 추진한 미팅이다 보니 이 지경으로 되고 말았다. 아마도 경북대 

생들은 다리 아픈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할 것이다. 이러니 무슨 미팅에 실적이 

나겠는가? 해서 멀리 대구까지 원정한 미팅은 아무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다.

 

최근 분당의 성당 M.E 모임에서 바로 옆동네 사는 한 성당 자매님이 경북대를 나왔다 해서

혹시 그 당시 미팅 나오시지 않았어요? 하고 당시 일화를 들려주어서 다들 배꼽을 잡고 웃은

기억이 있다. 회사 일은 적성에 잘 맞는건 아니었지만 나름 극복을 하며 그래도 청춘시절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낸 직장 생활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