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20일 초복이 지난 여름,

바로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자랐던

고향 - 안성 일죽 능국리를 찾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에 간신히

입학을하여 몇달 다니다 학교가 있는 면 소재

지 송천리로 이사를 했으니 1965 년도가 되고 중학

졸업후 서울로 간 해가 1968년이니 47년이

되는 셈이다. 고향을 떠난지가^

 

 

동네 들어가는 길~ 이날 운무가 끼어 시계가 좀

흐릿했다.차를 몰고 들어 가는데 인적은 없고 길

옆으로 꽃들이 반겨 준다 

 

백일홍 군락

 

 

백일홍이야 어디든 지천이지만 고향 동네의 꽃 아닌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까지도 너무도 새롭고 마치

내 분신처럼 여겨진다 !!

 

저 나무,그 옛날 저 나무 아랫집 정도에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서 봄이면 그걸 보고 봄 기운에 푹~ 빠졌었다.
멀리 우리집 있는 작은 동네와 큰 동네를 연결하는
등성이에서 아주 잘 보였는데^ 

 

동네 중앙에 위치한 이 집, 내가 저 너머 작은 동네
빼나골에서 집을 정리하고 내려와 방 하나를 얻어 살던
바로 그 집이다.
당시 대문도 크고 했는데, 이젠 소박한 집이 되어 버렸네
 
저 비닐 하우스 쯤에 내가 살았던 방이 있었다
 
숨을 고르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살짝 윗 길로 올라가니 여기도 백일홍^
개량종인듯
 
동네 어귀로 조금 내려가니 땅콩 밭이,
저기 전봇대 있는 언덕으로 참 많이도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우리집이 있던 동네로 올라가는 등성이에서 본
아랫 동네
예전과 달리 아담한 맛이 없고, 집들도 많이 줄었다.
 
6 가구가 모여 살았던 우리 작은 동네,이제 2집만
달랑 남았다.
 
할머니 혼자 거주하는 이 집 우리 마을의 산 증인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집에 거주하셨는데, 요 근래 가보니
요양원에 가시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초가 삼간 우리집이 있던 이 자리^
저 뒤에 아카시아 나무는 언제부터 저리
자랐을까^
도라지 꽃만이 나를 반기는구나^*
 
우리집에서 방문을 열면 보이던 밭에는
이렇게 수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동쪽으로 해가 떠오르던 논은 겨우 내내  나의
썰매장으로~ 
저 야산으로는 봄이면 칡 캐러 가을이면 나무하러
넘어 가던곳~
 
초등학교 다닐때 걸어 다니던 개울가 모래길이
이렇게 변해 버렸다.
 
우측 안으로 더 가면 우리밭이 있었는데 이젠
접근 조차 불가능하다.
 
하얀 모래가 반짝이던 저 개울이,이젠 열대 밀림처럼
갈대가 빽빽한 늪지대로 변해 버렸다.
그 넓은 모래밭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변변한 고향 사진이 없어 다녀와 본 고향 동네,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 또한 간데 없다.
더러 지나쳐 지나가긴 했지만 막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니 옛 기억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고향이 좋은 것이지만 깨어진 꿈처럼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 또한 크다. 허나 다시 가서 살 것도 아니고,
어릴적 기억속에 살아나는 그 고향을 나는 그냥
간직할 것이다.
 
 

고향^ 은 마치 어머님의 품속같은 평화와 그리움을

안긴다. 그 누군들 고향이 그립지 않은 이 있을까?

 

이 노래는 원래 이북에 고향을 두고 피란을 왔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고향이 있어도 갈수 없는 설움 또 아예 고향이라고

할  그런 곳이 없는 사람^

어릴적 너무 이곳저곳 떠돌아 다녀서 딱히 고향이

없는 사람!

 

헌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을 둔 내가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리우면 가면 될 것을^ 그립다. 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젠 그리운 마음도 점점 사라진다.

딱히 가 보고 싶은 맘도 없다^

 

산천도 예전 같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이 없다.

내가 가서 만날 사람이 없는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닐 것이다. 

 

이 노래는 가요무대 독일편을 보고 이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현지 교민들을 보면서 나도 불러 봐야지

결심해서 불러본 곡이다. 이만한 감동을 주면 됬지

노래가 뭐 별건가?

 

 

어떤 좋은 음악이 이만한 감동을 백성들에게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반세기도 전에 남인수 선생이 부른

고향의 그림자에서는 찾아갈 곳이 못 된다고

고향을 노래했다.

왜? 그랬을까?

 

고향이라고 찾아봐야 정말 볼일 없음을 느껴본

사람은 노래를 이해할 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고향이 볼일 있다면 이상한

것 아닐까?

 

아래에 노래 고향의 그림자를 올려 본다.

 

일전에 들은 얘기 하나,

 

 * P 약국 위에 T 의원이 이사를 왔다 벌써 2년전 쯤이다. 와서 그럭저럭 처방도 제법 내고

   T의원이 내는 처방의 50% 정도는 아래 P 약국에서 소화를 해냈다. P 약국은 나름대로

   T 의원과의 친선을 위해 여러모로 신경쓰며 지내려고 노력했다. 

 

   헌데 T 의원이 바로 옆에 새로 짓는 신축 건물로 이전을 했다. 머, 신축 건물로 P 약국도

   함께 가지 않겠냐며 은근히 돈을 요구했다. 돈도 돈이고 여러 여건이 맞질 않았고 또,약사로

   서의 자존심도 더 이상 구기기 싫어 마지막 단계에서 안 간다고 했다. 

 

   이사를 마친 T 의원은 진료를 새로 시작했고 1층의 약국은 근처 다른데서 이전을 해 온 상태

   였고 T 의원 이전 시에 수 천만 원을 협찬하였다. 진료를 마친 원장 왈 

 

" 에~ 처방을 말이에요~ 전에 있던 그곳 약국은 ** 게 받으니 요 아래 1층 새 약국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헤헤" 

 

 * T 의원은 이전해 온 약국으로 부터 수천씩 돈을 받기로 했을 뿐더러 비공식 소문에 의하면

   주력 약품을 써주는 메이커 몇 곳으로 부터도 수천@@ 씩 이전비를 협찬 받았다 한다. 

   결국 돈을 받기로 한  P 약국으로 부터 돈을 못 받은게 환자를 특정 약국으로 가라마라하는 

   희안한 꼴을 연출한 결과로 보여진다. 

 

 * 이 경우 T 의원을 혼내줄 방법은 무었인가? 워낙 저런 예가 많다보니,이 정도는 껌 씹는 소리정도

  에 불과한 얘긴가? 

 

  

 * 문제는 돈이다. 그런 경우 당연히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T 원장은 생각이 바뀔 수가

   없을 것이다. 왜? 내한테 돈을 안 가져 오느냐?? 

  이것뿐이다. 제기랄! 

 

 * 현행 의약분업 법에서 금지한 담합 행위 금지...이거 얼마나 효력이 있는 조항인가? 무슨 처벌이

   뒤따르긴 하는 건가? 특정 약국으로 처방전을 유도하는 행위는 물론 금지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럴 경우 무슨 조치가 취해진 적이 있느냐 말이다.유사 이래로~ 

 

당연 없지~  이런 문제를 대체 누가 바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행정 당국도 나름 할 말이 없는건

아닐 터이다.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법으로 규제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느냐공? 

 

 * 그럼 뭐,,억울하고 아니꼬운 꼴을 보고 감수하는 수 밖에 없는 건가?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의 약사

   들이 지고 가야할 숙명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런 뭣만도 못한 제도는 때려 부셔야 할 것이라고??

   이 보다 더한 독재도 때려 부수웠는데,

 

그렇지만 의약분업의 순 기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의와 약을 일단 분리했고 약을 두 집단이

크로스 첵크하는 방식을 취해 즉 감시의 기능을 2개로 두어 여러 문제를 차단하는 효과를 꾀하는

것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 무슨 IMF 때 돈 빌려줄때 의약분업이 옵션사항이었다는 멍멍이 같은 소리도 들었다. 진짜 그런게 

   맞는가? 진짜루 선진국들이 지네들 약 팔아 먹으려 그런 꼼수를 쓴게 맞는가? 아니 왜 아무도 지금

   껏 그런 얘기가 맞으면 맞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걸까? 

 

  아무래두 그건 아닌것 같다. 

 

 * 위에 의원 이사 가면 하루 아침에 밥줄이 끊어지는 인공호스같은 제도! 또 가는 의원 따라 가려면 수

   천만원씩 이사 비용을 대야하는 엿같은 현실~

  일하는 손은 나눠 놨지만, 전혀 의와 약이 분리되기 힘든 이상한 현실^^ 

 

   지금 이순간 전국의 수많은 약국들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가 계속 일어나고 있을것이다. 

 

 * 약사회는 이런 개같은 현실을 줏어 모아서 백서로 발간 해야하는거 아닌가.. 해서,이건 우리 약사

   의 잘못이 아니다, 제도의 문제이다...이렇게 공표해야 하는거 아닌지.. 그거이 뭐 약사의 치부만 

   드러내는 꼴 아니냐고?? 어차피 망가진 거,,뭐 쉬쉬한다고 나아질리도 없을것 같지 않소?,

 

그런데 이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 곳곳에 이와 유사한 갑을의 관계가 빈번하지만 

간단히 바로잡을 문제가 아닐것이다. 

 

   의사들은 갈수록 더 돈돈돈 하고 약사들은 벌어서 갖다 바치기 바쁘고!! 같이 상가 분양을 받아도

   의원 분양가 일부를 떠않질 않나, 의원이 낼 월세를 쪼개서 내주질 않나, 인테리어 비용을 대 주는 건 

   상식에 속하고, 어디서 의원 하나가 온다하면 기본이 수천만 원을 공납금으로 바치질 않나, 허다허다

   안되면 브로커에 뜯기고,이게 무슨 선진국형 의약분업이란 말인가?? 이게 다 약사들이 못나서 생긴

   일이라고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아니 이런 문제는 법률을 정해서 일체 금지시키고 만일 어길시는 면허를 영구 취소시킨다든지 하면

나라가 좀 제대로 작동한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제도는 좋은데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못돼서 그렇다고 말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要는 법과 제도가 

부실한 것이다!! 대한 민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기막히게 좋아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배우러 온다고,

엊그제 방송에서 정@@ 공단  이사장이 선전하고 있었다. 진짜 그런가?

 

의원들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수가는 턱없이 적고 환자는 많이 봐야하는데,,환자도 줄어 별로 안 오고

이거이 겨우 먹고 살기도 바쁜게 현실인데,우리가 뭐 천당에서 내려온 사람이냐고~ 어쨋든 분업에선

우리가 갑이지,어쩔거냐.. 우리도 그러고 싶어 그러는게 아니다..라고! 흠.그렇겠지, 암,, 

 

 * 에이..그건 극히 일부 시원찮은 의원을 끼고 있는 약국의 경우가 그럴뿐이지요` 든든한 큰 병원이나

  아주 잘되는 의원은 어디 가라고 떠밀어도 안 가요! 아니 그런데 붙어야지 왜 그런 쫀존한 의원 옆에

  붙어 가지구 설람에 그런 꼴을 당하슈?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더러는 콩팥에 붙었다 방광에 붙었다

  해야 요즘 세상 살아요! 안 그렇소? 약사가 독립해서 살 생각일랑 아예 하지두 마쇼~ 그리구 거 뭐 

  의원인테리어다 이사 비용이다 좀 갖다 주는거 신경쓰지 마슈,, 세상 모든 물건에는 다 프리미엄이란게

  있는거 아니유?

 

기브앤 테이크^^ 약대 6년제 해봐야 말짱 헛것이유.. 어차피 약사는 의사 옆에 붙어야  먹구 사는거유..

허허허~ 6년제가 아니라 10년제를 해도 마찬가진게요~ 사람 나고 돈 났지,돈 나고 사람이  났다더냐?

다 씰데없는 소리요~ 이젠 돈나고 사람났지..가 맞아여~ 

 

억울하면 다시 의대 가던지, 걍 딴 나라로 떠나 뿌리던지,공부해서 사법 시험이나 붙던지... 요새 약사 출신

검사,판사 꽤 있던데,

 

 * 아니,,그럼 세상은 힘 있고 돈 있고 빽 있고 능력 있는 넘만 살고 나머진 다 죽으란 얘기요? 무슨 소릴

   하는거요? 아프리카 평원에 사자 호랑이만 남고 나머지 다 죽으면..걔들은 머 살수 있을거 같아요? 

   그리구 의사옆에서 맨날 조제나 해주구 살 바에야 뭐할라 6년씩 공부를해요  돈과 시간이 아깝지,

 

   더구나 이젠 아무나 약국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둥 미친* 널 뛰는 소리나 해대고 있는 이 나라에서 

   말이에요~ 차라리 그돈으루 일찌감치 부동산 증권 공부를 해두면 나중에 의사 약사 고용해서 병원

   약국 더 잘할 수 있을텐데, 안 그래요? 그러니 불평같은 거 이제 할 필요없다구요~ 

 

 * 그래 백보 양보해서 불평 같은 건 좀 자제하겠다만, 약국이 의원 궁둥이 옆에 바짝 붙어야만 먹고

   살수 있다는 이런 상태는 연구를 해서 해소시켜 줘야 하는거 아니야?

 

처방 많이 처리한다고 약국의 수입이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도록 강력한 조정 정책 같은 건 좀 해 볼수

없는거냐? 하루 100건 처리하나 200건 처리하나 비슷한 수입 구조로 바꿔주면 누가 힘들여 200건

할까? 나머지 처방은 자연스레 동네 환자들 거주하는 약국으로 분산될거 아녀?

 

부회장을 열두명으로 늘리니 어쩌니 상임이사를 30명으로 하느니 40명으로 하느니, 약사회 조직이나

키워 뭘 좀 해 볼려는 옛날식 생각좀 버리고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골방에 앉아 방법을 좀 만들어 봐라^

 

100명이 건성으로 생각하면 뭐하냐? 단 한명이라도 제대로 깊이 생각을 해야쥐^ 

 

약사회 말단 조직은 이 모양으루 망가지고 있는데,,

 서초동의 조직만 키우면 저절로 뭐가 된다냐? 

 

약사도 사람답게 살아야하지 않겠냐?? 증말루!! 인간들아^


공세리 성당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의약분업이란게 생기기 전이었다. 한국의 약국가는 이제 곧 다가올 의약분업이란 커다란 변화의 목전에서 마지막 대형화의 몸부 림을치고 있는 중이었다. 우후죽순격으로 여기저기 약국은 대형화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소형 약국들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양평에서 중급이상 규모의 대형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시골 중학동창의 약국에 가끔씩 바람을 쐬러 다니다 보니 나도 좀 큰 약국을 한번 해보고 싶은 맘이 들었다. 거기다 어느날 저녁 무슨 약인가를 사러온 동네 아주머니와 얘 기도중 뭔가가 언짢은 말이 오갔는지 좀 지난 밤에 남편이란 사람이 약국에 와서 왜 그런 말을 집사람에게 했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물론 약국 하다보면 그런일은 더러 일어나는 일상사이긴 하지만 웬지 그날은 참 기분이 안 좋았다. 이거 동네에서 조그만 약국이라고 하다 보니 별거 아닌걸로 비추어 지나보다 . 그런 생각도 들고 아무래두 이젠 뭔가 변신을 해야할 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대형약국을 해보기로 맘을 먹게 되었다. 대형약국을 할려면 몇가지 선결해야할 과제가 잇었는데 나는 사실 그런걸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 그 첫째가 약품의 사입과 직원관리, 매출 규모의 적정화 등인데 그 어느것 하나 제대로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달려들게 되었으니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것이 꼭 약국 처음 개업하던때와
어찌 그리 똑 닮은 꼴인지~ 허나 뭐 세상사 뭐는 충분히 연습을 하고 시작하는
게 있던가?

첫째 입지부터 문제였다. 장소는 큰 도시의 인접 마을이었는데 그게 문제의 시발이었다. 내가 구성면 경찰대학 입구를 본건 그 보다 몇년전 88cc에 골프 를 치러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그 동네에 내려왔을 때였다. 당시 그 동네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게 보였고 식당이란 식당은 꽉 들어차서 아주 번화한 동네로 기억이 되었었다.
그런데 마침 그 동네에 큰 평수의 약국을 임대한다는 광고가 약사공론에 올라 온게 얼핏 보였다. 나는 아! 그동네,,번화한 그동네,,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그날로 달려가 앞뒤 안가리고 주인의 대리인과 가계약을 체결했다.

그런 다음 수원에 거주하는 동문들에게 그 장소가 어떤가 좀 봐달라고 연락을 했다. 몇이서 장소를 본 소감은 부정적이었다. 허나 한번 인식이 번화했던 곳 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나는 좀체 생각을 바꿀 엄두룰 못내고 결국 그자리 에 실평수 60평,분양평수100평이나 되는 대형 약국을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마 치 병목과 같은 그곳은 안으로 들어가면 꽤 큰 옛날식 동네가 펼쳐지는 곳이었 는데 그 입구에 들어선 대형약국으로의 접근성이 안좋았을 뿐 아니라 출퇴근 시 에도 그저 스쳐 지나는 자리지 쉬어가며 약국을 들르기엔 교통 여건등이 좋지 않았다. 결국 후방의 동네를 다 집어 삼킬듯한 인근에 유례가 없이 큰 약국은 매출이 처음부터 그리 신통치 않았다. 멋지게 인테리어를 해서 약국에 들어서면 정말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막상 약국 운영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판매원이라고 둔 직원이 일요일이면 부산집으로 갔다가 월요일 오후에 도 착하는 바람에 바쁜 월요일을 비우기 일쑤였고 이래저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 다. 나는 수원에 원래 있던 약국을 후배에게 넘기고 대형약국만 전념하긴 했지만 항상 그곳도 염두에 두고 함께 관리를 해야했기에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치기 시작했다.

결국 1년을 딱 채운 시점에서 약국을 넘기고 말았다. 아주 많은 투자를 한건 아 니지만 모양새 좋게 시작한 대형약국은 이렇게 어설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한 동 안은 그곳으로 차를 타고 지나기도 싫었으니 얼마나 맘 고생을 한지를 짐작할만한 했 다. 생각해 보면 판단 착오에 무모한 자신감 그리고 세심한 입지 분석력없이 시작한 일이기에 모든게 내 탓이었다. 이후 대형약국을 다시 시작할 엄두도 못냈을 뿐 아 니라 의약분업의 갈림길에서 자리를 박차고 새 환경에 적응하는데도 적잖이 걸림돌 이 되고 말았다. 분업이후 대형약국들이 대부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마땅한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인거 같다. 특히 분업후 일반약품의 구 매 비중이 현저히 낮아진것도 그 이유가 될것이다. 약은 처방에 의해서만 먹어야 되는걸로 오해를 한 측면도 강하고 그것이 의약분업의 예기치 않았던 역기능의 하 나로 오늘날 자리 매김하고 말았다.

허나 세상 모든게 그렇듯 대형약국도 시스템 하나로 척척 움직이는건 아니다. 큰 만큼 내부에 복잡한 문제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 특히 종업원 문제가 정말 만만치 않게 된다. 툭하면 나가고 들어오고 무단히 결근하고 등등 약국의 분초를 다투는 환경에서 이런일은 참으로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냥 맡겨놓고 약국장 은 유유히 관리나 하면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분 업하에서는 크게 벌으나 적게 벌으나 약국장 개인의 수입에는 많은 차이가 나지않는 기이한 환경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어디에도 노력한 이상의 많은 열매를 가져다 주는 약국은 없지 않을까..생각해 본다.
 


경기도 약사회 활동중(2004~2006) 회관 기공식

 

 

 

약국은 반(班) 이란 조직으로 이루어진다. 

 

처음 약국을 하니 수원의 파장동 반이란 데 일원이 되었다. 당시 인근에 일찍부터

약국을 시작해 정착한 한 친구는 수원시 약사회 부회장을 한다하여 엄청 높은 위치에

올라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매탄동 현재의 약국으로 옮긴후 골프를 시작하여 한참 재미를 붙여 가는데

느닷없이 서울대 동문중에 市藥 부회장을 한 명 선임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우리 동문들은 서로 사양을하여 결국 72학번 중에 제비를 뽑아 맡기로했다.

 

당시 운이 없게도 내가 뽑히고 말았다. 그래서 1992년도 부터 수원시 약사회에

부회장으로 참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부회장이 5명이었는데 약회에 아무 경험이 없던 나는

역대 임원들이 모두 기피하던 약국위원회 담당 부회장이 되고 말았다.

 

그곳은 표준소매가란 골치아픈 업무를 해야하는 곳이었다. 뿌리깊은 수원 남문의 대형

난매 약국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데 툭하면 시매 (試賣)라 해서 약을 시험적으로 사고

터무니없이 싸게 판 약국의 自認을 받아 처벌을 해야하는 일이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성과를 내기 어려운 피곤한 일인지는 안 해보면 절대 모르는 일이다.

 

암튼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는 약사회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다. 당시 함께했던

부회장들이 주거니 받거니하며 수원시약 회장을 해도 난 전혀 그것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 1999년 가을에 용인 경찰대 앞으로 대형 약국을 열고 수원을 떠났다.

1년간 고생만 하고 결국 대형 약국은 접고 말았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온 나는 2004년 부터 경기도 약사회의 부회장을 자진해서 들어갔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약사회인데 친구의 경기道 약사회장 선거를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약사회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당시 생각은 서울대를 대표해서 좀더 폭넓게 운신의 폭을 키우고

경기도의 여러 약사들과 교류도 하며 회무 전반을 맡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약사회의 속성은 분회 단위란걸 난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군대로 치면 중대 소대가 직속

부하를 거느린 야전이지 군단이나 사단은 벌써 한층 걸러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약사회의 꽃은

분회라는 걸 뒤늦게 안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기도 부회장을 하면서 키오스크 지문인식  시스템에 관한 문제에 부닥쳤고 부산시약과

자매결연을 맺어 부산을 오 가기도 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도 약사회 일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내가 경영하던 약국은 분업 후 처방이 별로 없어 침체 일로를 걷고 있었다.

 


약사회 일에 뛰어들어 겪어본 나의 소감은 이렇다.

 

약사의 조직체인 약사회는 개업 약사라면 한번쯤 참여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약국장들은 졸업후 이렇다할 조직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이 곧바로 개업을 한

경우이다.그러다 보니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나 조직을 제대로 체험할 기회가 없다.

물론 나의 경우는 10년의 제약회사 생활을 거친후 였다.

 

결국 나와 내 약국만 아는 편협한 골짜기를 헤매게 된다.

오늘날 나타나는 약국의 많은 문제점은 여기서 비롯되는것도 상당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약사회의 활동은 매우 유익하리라 판단되는 것이다.


한편 약사회 활동 그거 아무리 해봐야 말짱 도루묵이야. 무슨 소용이 있다구? 이렇게 말하는

약사도 상당수 있긴하다. 또 한번 약사회에 들어오면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약사회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엄청 많은게 현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말년에 해놓은 거 없이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회장님! 회장님 !

하고 불리우는것에 취한 나머지 마치 뭐라도 된듯 취해 인생을 살기 십상이다.

이것 또한 경계해야할 크나큰 복병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한발 더 나아가서 세상의 다른 전문 직능들도 거의 비슷한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약사회도 너무 정치 지향적이 되어 버렸다. 약사회 활동을 통해 나중에 정치적 입신을

노리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실제 약사회를 통해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장관이 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그걸 꿈 꾸는게

자연스런 현상이 된것이다.

 

그러나 전문직능 단체의 정치화는 결코 바람직스러운게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렇치 않아도

세상이 모두 정치 일색으로 돌아가는데 전문 직능마저 정치에 물들면 모든 것이 정치적 득실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말 세상이 필요로 하는 전문 영역이 빛을 발하기는 점점 어려워 질 공산이

큰것이다.

 

' 뭐 그런걸 걱정하십니까? 당신이 정치의 맛을 알기나 해요?

거 함부로 정치가 어떻고 말하지 마슈. 능력 있으면 다 하게 되는게 정치지요~ '


이런 말이 들려올 듯도 하지만, 정치 약사,정치 의사,정치 검사, 정치 군인,정치 공무원,정치 농민,

정치 어민, 정치 가수,정치 배우가 만연하는 사회가 어찌 바람직스럽다 할 것인가?

세상 모든 가치의 종착역이 정치로 귀결 된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어찌 모든 가치가 정치의 그늘에 가릴 수 있단 말인가? 정치가 매우 필요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모든 가치를 우선할 수는 없다는 말인 것이다.

작금의 약사회는 바로 이 정치의 그늘에 주눅이 들어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제발 약사의 궁극적 목표가 정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진정한 약사회의 리더를 갈망해 본다.

 

( 2012.5.24 작성 )

 

양지cc 의 새벽  2013.8

   
 
 
 

골프가 뭔지 또 그런 운동이 있는지 조차 생소한 그런 시절을 거쳐 처음 골프공을 본건 아마도
1983년 정도일 것이다. 당시 같은 회사의 대 선배님과 한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골프공을 보여
주시며 파,보기,버디 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해 주셨다.

아~ 그런게 골프구나..그리고 골프 공을 바닥에 떨어뜨려 보니 탄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야구를 열심히 해봤던 나로서는 웬지 자그마하면서도 탄성이 뛰어난 골프공에

묘한 매력 같은걸 느꼈다.

같은 공이지만 일정한 틀 속에서 이루어 지는 농구-배구-축구 같은거 보다 날아가는 속도가 빠르고
다이나믹한 야구나 골프 같은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두고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한지 수년 차. 두번째 약국 이전 후에 비로서 좀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근무 시간이 길고 지루하기도 한 약국 생활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물론 임상공부나 한약공부등 꾸준히 공부도 병행해 왔지만,어느 정도 약국이 안정이 되니 갑자기 나도
골프를 좀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1년 4월23일 따스한 봄날 드디어 나는 근처에 개업을 하고 있던 선배님과 둘이서 가까운 골프
연습장에 등록을 했다. 혼자 가기는 쑥스러워서 부득불 선배님을 꼬득여 함께 간 것이다.


수원시청 앞에 있던 88골프 클럽이었다. 점심 시간에 잠깐씩 가서 교습을 받았다. 골프화를 사고

꽃피는 공원을 걸어 연습장을 오고 가는 길은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 나이 40세가

되던 해이다.


헌데 한달 교습을 받기로 하고 시작한 연습장은 겨우 한달에 4회 교습을 받는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프로가 어찌나 바쁜지 도무지 만날 시간이 없었다. 화도 나고 해서 교습은 한달 만에 때려치고 말았다.
그리고 기나긴 독학의 기간을 거치게 되었다.

 

이젠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연습용 7번 아연으로 처음 연습을 하다가 여기저기

조언을 듣고 핑 EYE2란 아연과 당시만 해도 주먹 크기만한 조그만 헤드의 테일러메이드 드라이버를

함께 준비했다.

 

3개월후(7.26일) 관악cc 로 머리를 올리러 가서는 뜨거운 땡볕에 거의 죽을뻔 했다. 7월 26일 이었다.

그후 시간 나면 새벽에 약국 열기 전에 가까운 수원 공군 비행장으로 달려가 골프를 치곤 했다. 당시만해도

그린피는 저렴하였고 아침 새벽에 운동하고 와서 약국을 여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함께 다니던 오산 미군 부대 군무원이던 분이,


" 아니 세번째 라운딩에 저렇게 드라이버 잘 치는 사람 봤소? "

 

하며 캐디 언니에게 되묻곤 했었다. 그만큼 나는 초창기에도 드라이버를 잘 쳤었다. 그러면서 적어도

300회 라운딩 까지는 꼭 캐디를 쓰고 잘 배우라고 군무원은 신신 당부를 하곤 했다.
3년후 중앙 cc 에서 첫 싱글인 79타를 쳤다. 그후 골프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또 시절이 좋아 나라
경제도 좋았고 낮에는 골프치고 밤 부터는 조제 손님이 줄을 서는 아주 이상적인 근무 환경도 골프실력
신장에 한몫을 하였다. 답답한 약국 환경은 골프로 인해 숨통을 트게 되었다.

 


원래 어릴적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 댕겨오면 그 길로 산으로 들로 나댕기던 나는 이제 그 비슷한

환경을 골프에서 찾게 된 셈이다. 골프에 약간의 소질이 있었는지 1995년 경부터 약 4년간은 정말

골프를 잘쳤고 재미도 너무 좋았다. 약국 단골 중 안기부 수원 분실장이었던 분이


"박카스 팔아서 언제 돈벌어요~ 골프 회원권 같은 거 사 두는게 좋을텐데~"


하는 얘길 듣고 불현듯 인근의 태광cc 회원권을 구입했고 뒤이어 관악cc 도 구입했다. 당시 그곳 회원은

개인 카트를 혼자 끌 수도 있게 해서 자동차에 카트를 사서 넣어두고 수시로 두 골프장을 드나들었다.

 

그래서 태광 클럽 참피언 대회에도 첫 출전하여 3등을 하였고 여세를 몰아 관악cc 도 출전했지만 거기선

그리 재미를 못 보았다. 그후 2,002년 미국의 티칭프로 양성기관인 PGTCA 란 기관에 응시를 하여

7일간의 용평 합숙을 거쳐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허나 한국의 골프협회에서는 인정해 줄 수 없는

그런 자격증이다.
마치 외국의 의약사 자격증을 국내에서 인정해주지 않는것 과 같은 맥락 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국내 자격증은 머리 터지게 달라 붙어야 겨우 딸까 말까지만 이건 그와는 많이 다른 쉬운 종류의

자격증이다. 2,000년도 의약분업 직전에 용인으로 대형약국을 운영한다고 나가는 바람에 1년간 골프채를

잡아 보지도 못하게 된 이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이 전 골프실력으로 돌아가는 데는 무려 7년 이상의

세월이소요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이 골프채를 수도없이 갈아 치우고 많은 노력을 집중해야했다.


다행히 2,008년부터 본 궤도에 올라 다시 예전의 실력을 되찾아 경기도 약사회및 마약퇴치 운동본부

골프대회, 서울약대 총동 골프대회, 국민카드 우수 고객대회 등에서 연달아 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연은 경량스틸로, 드라이버는 65G 대의 STIFF 를 쓰게 되었으니

세월을 거꾸로 간다고나 할까?

 

암튼 요즘의 나의 골프는그렇게 되었다. 더구나 사정상 예전처럼 빈번한 라운딩이 아니고 한달에
1~2 회 라운딩에 그런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매우 예외적 케이스라 할것이다.


이렇게 이제 20년 이상 약국과 골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 나이가 들면

골프채를 들고 여러곳을 여행하게 될 꿈을 꾸고 있다. 골프가 인생의 전부는 될수 없지만 적어도

골프와 나의 인생은 많은 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나 외에도 골프 매니아는 아주 많다.

골프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정도로 골프에 미쳐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나는 그런 지독한 골프매니아라 할 수는 없는 환경과 위치에 머물지만 골프를 아끼고 사랑하는 맘에는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골프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비교적 잘 치게된 건 행운이라

할것이다.

 

나는 골프를 단순 취미 이상 으로 여기며 건강과 삶의 의욕을 북돋워주는 매우 유익한 운동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것이 쭈욱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내 곁에서 멀리 떠나 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내곁에서 멀리 떠나 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Exchange the cold days for the sun A good time and fun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태양이 뜨면 시련의 날들도 바뀐답니다 좋은 순간은 다 지났어요

내곁에서 멀리떠나 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내 곁에서 멀리 떠나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내 곁에서 멀리 떠나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Exchange your troubles for some love Wherever you are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Longing for the sun you will come To the island way down me

당신이 어디에 있건 어떤 사랑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괴로움을 없애 버려요 내 곁에서 멀리 떠나 주세요 휴가를 가듯이

 

Longing for the sun be welcome on the island many miles away from home

Be welcome on the island without name Longing for the sun

you will come To the island many miles away from home

 

우우 아아, 태양을 그리며 당신은 나의 섬으로 돌아올거예요

그곳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태양을 그리며 당신을 찾아 줄거예요

태양을 그리며 당신은 나의 섬으로 돌아올거예요

그곳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집을 떠나서 올거예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