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지브란을 알게된건 지금으로부터 약 45년전 그의 詩集
'예언자' 를 통해서였다. 그 시집은 당시 함석헌 선생께서
번역 출간한거였는데,, 함선생님이 워낙 지브란 예찬론자여서
예언자 만큼은 선생님의 번역이 최고라는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브란의 여러 이야기중 특히 아이들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매우
신랄해서 부모들, 특히 한국의 부모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되어 소개 올리고 생각을 해보려 한다




그러자 가슴에 아이를 안은 안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 갈 수 없는 꿈 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는 활 그리고 그대의 아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화살처럼 그대로부터 쏘아져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활 쏘는 자인 신은 무한의 길 위에
과녁을 겨누고 자신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그대는 활 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 흔들리지 않는 활 또한 사랑하기에



활처럼 앞으로 날아가는 아이들^
그 화살이 멀리 잘 날라가도록 몸을 굽혀
활이 되어야하는 부모들^

나의 생각과 영혼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거늘^
비록 육신의 집은 만들어 주었으나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님을 처절히
자각해야 하는것^

아이들과 같이 되려는것은 좋으나
결코 아이들을 부모처럼 만들지는 말것을^
생명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뒤로 즉 부모에게로 후퇴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
부모가 자식에게 간섭해서 결코
잘되는걸 본적이 없다^

꽃,나무 풀,곡식에게는 따스한 햇볕과
적당한 비와 부드러운 공기와 마땅한
영양을 주면 되지 그 이상의 것을 강요
하면 그들은 시들고 만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이다^


해가 바뀔때마다 그렇게 또 봄은 왔고
어느새 또 그렇게 봄은 갔다^

과연 올해도 봄이 올 것인가? 라고 의문을 품은적이
있었다^ 도저히 이 추운 겨울이 물러갈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것같지 않던 봄이 어느날 갑자기 닥친다! 사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왜? 봄을
기다리는 건가?

그러나 기다리는가 싶던 봄이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얼음이
녹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새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짓고
그러는 사이 바쁜 인간들은 그런거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고
꽃도 제대로 못보고 나무에 새싹이 돋는것도 안보고 바쁘게
헐레벌떡 그렇게 살다가,, 어? 벌써 봄이 갔군! 세월 빠르네^
이러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 그만이다^ 그렇게 30년이 흐르고
50년이 흐르고 60년이 흐른다!

그렇게 봄을 보낼수야 있는가?

봄철 제일 먼저 노랗게 피어 봄을 알려주는 봉홧불 같은


것이 바로 저 산수유이다^




눈속에 피는 매화가 어쩌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매화는

2-3년간 찾아다녔지만 그닥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선인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았던 매화^ 그런데 나는 보통의 홍매화,청매화엔

이렇다할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다. 꽃 자체의 모양이나 나무의 자세가

특별히 마음을 끌지 못해서 그랬는데,,



저 매화 나무가지가 큰들 뭐 얼마나 멋질까? 눈을 뒤집어

쓰고도 피는 기상이야 높이 평가할만 하지만,


큐슈의 다자이후 텐만구 에서 본 매화나무엔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혹시 이런 매화가 전설속에 등장하는 그런 멋진게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었다^ 허나 저건 꽃매화 같은거였다^ 이끼낀 고목에 휘휘

늘어진 전설속의 그런 매화는 일본에도 그닥 없는듯했다^


암튼, 봄 하면 첫 손가락에 꼽는 매화이기 때문에 장황하게 얘기가

길어 졌는데,


오는 봄을 앉아서 기다리는게 좋은가? 아니면 찾아서 가는게 맞는가?


2018년은 내 생애 거의 최초로 찾아가는 봄을 맞았다. 구례에 2번,

제주에 1번 그랬다.


1월에 찾은 제주의 봄은 이렇게 동백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짜 멋진 제주의 동백은 잘 몰라서 빠뜨리고 말았다

내년 1월경에 다시 찾아갈 것이다^



제주 하면,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하는건 역시 이 밀감이다




그러나 금년봄 최대의 수확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화엄사의 흑매 이다^



내 인생 최초로 나무 한그루에 400여장의 사진을

찍어본 첫번째 경험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동양 3국에선

유일할거란 생각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




화엄사의 흑매를 보기전에는 결코 매화를 논하지 말 것이었다





언제나 봄이면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아 버리는

진달래^



명품 벛꽃길로 알려진 리베라cc 입구도 찾아갔고~





그리고 현충사에서 본 목련의 아름다운 자태^

이 역시 올봄의 백미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봄을 기다리고 맞이하고 느끼고 봄날의 정취속에

푹 빠져 지새는게 뭐 그리 대단할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청 장년기의 대부분을 봄의 정취와는 동떨어져서 살아 왔다.

서울로 올라온 17-8세부터 50대 중반 까지도 봄을 좋아는 했지만

특별한 애착을 갖고 대하지는 못했다. 그건 가을 또한 마찬가지

였다^ 대략 30여년을 그렇게 보낸셈이다^


그리고 약 10여년 전, 특히 카메라에 애착을 갖게된 몇년전부터

봄,가을에 깊이 빠지게 된것이다^



배꽃이 이렇게 아름답지만,


그러나 굵은 참나무 기둥만한 배나무는 이제사

비로서 처음 보았으니^

나의 자연 관찰력이라는게 얼마나 좁고 형편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봄은 끝났는가?



김영랑은 목단이 지고나면 그의 봄은 끝났다고 했다

다시 모란이 피기까지 삼백예순날을 운다고 했다^


허긴 목단이 지면 봄은 끝이다^ 목단이 지기까지 나의 봄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이 저 푸르른 나뭇잎속에서 읽혀

진다^ 그러나! 목단이 진다고 봄이 끝날까? 봄은 삼백예순날이 지나

야만 다시 오는건가?


봄이 삼백예순번이 다시 오더라도 그 봄은 언제나 새 봄이다

영랑이 붙잡고자했던 그 봄이 지금도 오고있다^ 나의 봄은 이렇게

꽃과 나무와 잎과 흙과 물과 그리고 공기중에 빛나고 있다!


내년에 다시오는 봄은 또 새롭게 다시 정리할것이다^

그러나 봄은 이제 갔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봄은 언제나 기쁨 그 자체이니까^^


 

 

배맛은 언제가 좋을까?

 

9월 이른 추석에 나오는 배는 아직 맛이 덜들어 밍밍하다

10월 늦추석이 걸리면 그나마 좀 맛이 든 배를 먹어볼 수 있다.


그리고 한겨울 설날이 되면 차례 지낸후 또 배를 먹게된다.

보통 배를 명절이 아닌 시기에 사서 먹기는 좀 쉽지 않다.

사과와 달리배는 아침에 까서 먹기도 좀 그렇고 어찌보면

생산량에 비해 그닥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과일이 아닌듯하다.

 


그런데, 수년전부터 나의 관심은 봄철에 피는 배꽃이었다.

우연찮게 안성에서 행한 조카 결혼식을 가다가 거기 눈부시게

피어난 배밭을 보게 되었고 그후 쭈욱 봄만 되면 안성의 배꽃을

잘 찍어보겠다고 다짐을 하게되었다.

 

그러다 아! 가을이면 맛있는 배를 거기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을에 가 보니 배를 아무 과수원에서나 살 수 있는게 아니었다.

팔지도 않았다. 이미 수확하기 몇달 전부터 밭 전체로 도매업자에게

넘겨 버린다는 거였다.

 

또 배밭을 가지고 있는 농가가 모두 저온 창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된 배 농장이 있었다. 저온 창고도 잘 갖추어 놓았고^

그런데 그 배맛이 참 기가 막혔다. 이제껏 마트나 추석 명절에 먹던 배 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집에서 멀지도 않아 수시로 배가 떨어지면 차 몰고가서

한박스 또는 두박스씩 구입해왔다. 너무 많이 가져와도 보관이 어렵고 마지막

즈음에는 맛이 떨어졌다.

 

안성 고삼면 지나 대덕면 즉 안성 시내에서가까운 동네의 '누렁이 과수원' 이란 곳이다.

인터넷 치면 금세 나온다.


그렇게 몇년째, 올해도 벌써 두번이나 다녀왔다. 일요일 오후쯤 안성 가는 길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잘 뚫린 도로 주변으로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보는것 또한

너무 좋다.

 

배 맛을 정말 잘보고 즐기는 건 이렇게 하는게 최선이라 생각한다.

과수원이 멀면 택배로 주문해 먹으면 되지만,

 

웬지 직접 가서 사느니만 못할거 같아서다.


추운 한 겨울에 아주 시원하게 보관된 배를 까 먹는 맛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누구나 배를 좋아하는것은 아닐것이다. 배의 흰 과육이 말해주듯 웬지 배는 해독에

좋을거 같고, 알려진 바와같이 기침에도 쓰이고 그렇다.

 

내 경우는약국마치고 밤 늦게 집에가서 반쪽 정도 까먹는 배 맛이 너무도 좋다.

특히 밤에 먹는 배 맛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배맛은 겨울이 제격이다. 흰눈이 펄펄내리는 밤에 따스한 이불에 발을 묻고

이가 시릴정도로 찬 배를 한입 베어무는 그맛^

 

상상만해도 몸이 오삭해지는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밤의 제천 E.S 리조트



그대 밤의 적막이
알고 싶은가?
시끄러움과 잠시
 결별하고 싶은가?

절대 고요에
잠기고 싶으신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태초의 정적이 
궁금하신가?


무언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한 삶!
적막 속에서는
살수 없는 인생!

도시의 불빛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
절대 적막 절대 고요를
 견딜 수 없는 인생!



능강의 깊은 밤으로
 가시라!
능강의 산속에
 안겨 보시라!

그곳은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조차 없다
그렇다
 아무 소리도 없다


능강의 새벽밤엔
별빛조차 
숨죽이며
 흐르고 있었다




2017.10.22 새벽3시50분
능강의 고요속에서~



 

가수는 타고 난다~ 만들어 진다~ 타고 나서 약간은

만들어져야 한다~ 등등 수많은 가수를 보면서 나름 얻은

주관적 결론이다!!

 

 

일단 목소리가 천부적으로 타고 나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의 목소리는 말을 잘 하는 즉 강연에 적합한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대중 연설에 적합한 목소리도 있다.

아나운서에 적합한 목소리도 있고 노래에 즉, 성악에

적합한 목소리, 가요에 적합한 목소리, 랩에 적합한

목소리,창에 적합한 목소리 등등,, 그 구분이 천차

만별이다.

 

 

암튼 대중 연설이나 강연에 적합한 목소리는 발음이 정확

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해서 귀에 쏙 들어와야 한다. 내용이 물

흐르듯 분명히 전달이 되어서 모호한 발음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엄청 유명세를 타는 저명한 분도 막상 들어 보면 좋지않은 발음과 분명

치 않은 음성으로 실망을 할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도 유명해지기도

하니 그것이 꼭 목소리에 달린것 만도 아닌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수, 오늘 얘기 할려고 하는 가요 즉 전통가요나 발라

드나 이런 분야의 노래를 잘 하는것에 타고난 음색 외에 추가될게

무어냐 하는 것인데.

 

그중에 내가 생각하는 단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문학적

소양, 감수성을 말하고 싶다. 아니 그것이 노래 잘 하는것과 무

슨 관련이 있다고?

 

음악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가수를 직업으로 해온 사

람도 아니고~ 그저 약간의 노래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 10 몇년간

꾸준히 노래 녹음도 해보고 나름 분석과 검토를 해본 결과~

 

 

노래는 작곡가와 작사가의 합작으로 만들어 지는데, 어찌됐건 거기엔

구체적 어떤 배경과 감성이 배어있게 마련이다. 예컨데 동백꽃 이나

돗단배,안개,가로등,달,구름,선착장,저녁노을,밤하늘의 별,기러기

낙엽,저녁 어스름,진달래,개나리,목련, 각종 꽃^ 이별, 슬픔,기차,

연락선,항구,자작나무,소나무,등 그 모든것이 실은 모두 이 땅

과 하늘과 자연과 인간의 현상들을 포함하며 또한 그에 따른

감성적 배경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헌데 그런 사연이 포함된 노래를 부를때 과연 가수는 어떻게 그런걸

표현해 내야 할까? 작사 작곡가가 애초에 느꼈던 감흥을 충실히 표현

해 내야함은 물론 때론 그 이상의 감흥을 노래속에서 적절히 구현해

내야함은 당연지사라 할것이다.

 

그러니 이때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감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동백 꽃잎에 새겨진 사연' 할때 그 수많은 깜깜한 밤을 본

적도 별로 없고,붉디 붉은 남녁의 동백을 처연하게 한번 바라본적도

없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당연 입으로는 가사가 읊어지지만 듣는 이의 감성에 별 영향이

없이 밋밋하게 들릴게 뻔하지 않는가?

 

' 저 별과 달을' 이런 가사도 마찬가지다. 밤하늘에 희미하게 빛나는

별과 달을 제대로 한번 응시한 적도 변변히 없는 사람이 부를때 과연

그 느낌이 얼마나 전해져 올 것인가?

 

'무슨 소리요? 밤하늘에 달과 별을 안 본 사람도 있단 말이요? '

 

보기야 봤을지 모르지만 그저 건성으로 본 것과 나름 의미와 사연을

가지고 침잠속에 내면의 공감을 깊이 느껴본 경험이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서는 밤에 부엉이는 차치하고 밤새가 우는 소리

라도 들었던 사람과, 아무 그런 추억이 없는 사람이 부르는 '비내리는

고모령'은 전혀 다르게 들릴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굳이 문학적 소양이라고

부르기도 좀 애매하지만, 문학성과 삶의 체험이 결부된 복합체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옛날 노래를 예로 들었지만, 노래란 옛날이나 지금

이나 별 차이가 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인간의 감성이 옛날이라 해서

지금과 근본적으로 다른건 아니니 말이다

 

 

 

 

 

이는 비단 노래를 부르는 가수 에게만 한정된게 아니다. 노래를 듣고

감상하는 청중의 경우에도 당연 해당되는 얘기다. 그런 체험과 문학

적 소양이 부족하면 할수록 노래는 별 감흥도 없는 그저 그런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할것이다. 내 속에 울림과 감흥이 없는데 어찌

타인이 불러주는 노래나 악기에 깊은 공감을 할수 있겠는가?

 

" 아! 그 뭐 노래 걍 듣고 좋으면 되지 무슨 노래 듣는데 문학

어쩌고 심오한 말씀을 하고 그러쇼? "

 

그렇긴 한데, 우리가 노래라는 걸 그냥 술한잔 걸치고 자기 흥에

겨워 대충 즐기는 뭐 그런 걸로 여기는 분들도 많으니 그래서 그걸

대중적 가요라 부르기도 하지만, 술 안먹고 정말 정좌하고 음미하는

그런 노래와 그런 자세로 대하는 분들도 또한 많은게 사실이다.

 

남이 부른 노래만 듣는게 아니라 나도 노래를 부르고 또 녹음을 해

볼라치면 가사 하나 문장 하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진

지한 고민이 생기게 된다. 또 그뿐만 아니라 목소리 좋다는 평을

듣는 괜찮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정밀 감상해 보면

 

" 아! 저 부분에선 저렇게 표현하는게 아닌데~ " 라는 탄식이

더러 나오기도한다.

 

따라서 노래 한곡을 표현하는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을 수 있는것이다.

 

일제 시대를 겪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 보면 뭔가 설명하기 힘든

애수 같은게 목소리의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사

표현력이 상당히 탁월하다고 느끼게 된다. 가사 전달력이 뛰어남은

말할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걸 당시 가수들의 문학적 감수성이 월등해서 그렇다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문학적 이란 말을 넣지 않아도 뭔가 그와 유사

한 동등의 그 무엇이 그들에게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었던 건 아닐까?

 

음악적 감수성이 좋아 그걸 충분히 느끼고 일상적으로 향유하며 산다

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 장르가 어디에 속하건 중요하지 않다.

귀하고 천하며 높고 낮음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울림이다~

 

 

마곡사의 가을

 

 

'포토 에세이,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의 배맛  (0) 2018.01.02
능강의 밤 / 클럽 E.S (2017년 겨울 소식지에 실림)  (0) 2017.12.26
내 인생 최초의 주례사  (0) 2017.12.07
단풍 얘기 두번째^   (0) 2017.12.06
머리 염색 ^  (0) 2017.10.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