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당연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던 나는 영등포 신길동 우신극장 근처에서 1학년 하숙을 하며 지냈다.

 

누나가 건축과 터줏대감격인 신태식 선생님을 찾아가 어떻게 학교 근처에

 있을데가 없겠냐고 부탁을 해서 고3 형들 2명이 하숙하던 집에 나를 끼워

넣기를 한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하숙비가 저렴했을 

것이기도 하고 일단은 도무지 어디 아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방에 3명이 지내야 하니,,영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기 어려웠다.공부는

커녕 홍천이 고향인 형이 가져온 찹살 미숫가루를 몰래 타 먹는 재미가

쏠솔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헌데 여름방학에 생애 처음으로 내가 대구와 창녕등 부모님 고향을 찾아보고 

돌아오니 주인 아주머니가 하숙비가 두달 밀렸다고 밥을 안 주는 것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 하숙비를 안 냈으니 나가서 밥을 사 먹어야지~ “

 

이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놀란 나는 나도 뭔가를 좀 해서 하숙비에

보태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며후 동네에 신문사 지국을 찾아갔다.

신문을 좀 돌려보겠다 하니 보증금으로 1500원을 먼저 내라했다.

 

그리고 신길동 신남동 일대에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략 130여부를

돌리는 건데 아마도 석간 동아일보였지 싶다. 

 

 학교 마치고 하숙집에 오면 우선 신문부터 돌렸다. 요리조리 골목을 가로질

러 마치 모자이크를 맞추듯 집집 마다 신문을 집어 넣는게 재미도 있었고 신문

을 다 돌렸을때는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헌데 신문은 돌리는것 외에 월말에 수금을 차질없이 해야하는게 문제였다.

대부분은 제때 돈을 주었지만, 몇몇 집은 질질 끌고 안 주거나 어떤 집은 

몇달씩 미루거나  행방이 묘연한 집도 있었다. 결국 신문대금을 전액 받아와야

월급을 준다며 지국장은 한 달이 지났는데도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당시 한달 신문 돌리고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기억은 안난다. 대략 1000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니 한달 동안 공부 시간도 줄이면서 신문 돌린다고

매일 쫓아다닌 시간이 얼만데,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한창 공부해야할 학생이 신문 돌린다고 한달 간 쓴 시간이며 노력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면 그만 두겠다 하니 보증금 1500원도 

되돌려줄 수 없다고 큰 소리를 치는게 아닌가? 

 

아마도 지국장이란 인간은 이전부터 이런 식으로 어려운 학생들의 등을

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보증금은 미리 받고 월급은 이런 저런 핑계로

안 주고~ 뭐 그런식일게다 !

 

 

보증금 돌려 받는 문제로 지국장과 언성을 높이는데 갑자기 타향에 와서

 바보가 된 느낌에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못 받는 신문값은 지국장이 

다니며 받아야지 어린 학생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무슨 수로 그걸 다 받는단

 말인가? 

 

더구나 보증금은 애초에 왜 받았으며 이제 와서 그것조차 못 돌려 준다는건

 무슨 횡포인가? 신문 값 못 받아오면 그걸로 상계하겠단 얘기란 말인가? 

 

정말 인간성이 아주 못된 지국장이었다. 결국 울음반 호소반으로 밀고 댕기다 

보증금만 어렵사리 겨우 돌려 받는것으로 신문 돌리기는 끝나고 말았다  

 

 

만일 그 당시 제대로 월급을 받았다면 나는 신문 돌리기를 길게 해 나가지 않았

을까 생각해 본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시도해본 돈벌이는 별 소득없이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딱히 배운것도 없고 매정한 인간상만 느끼게 되었

으니 인생사 그것으로 배운것도 없고 아쉬움만 크게 남는다. 

 

 

 

그 당시 신문 돌리며 뛰어다니던 주택가 골목에선 이런 노래가 

리디오에 자주 흘러 나왔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maro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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