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 도카치 목장 입구길 (2011년 촬영)

 
 
 

 

아래 글은 내 일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1년간의 내 기록일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한 평생중 치열한 시기가 있겠지만, 또 나 혼자만 이런 시기를

보낸건 물론 아니지만,  

 

1971년 이 한해야 말로 나의 인생을 걸었던  전무후무한 시기로서 이 정도의 분투

노력의 시기를 또 다시 가지지 못한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한다. 

 

* 

 

서울공대를 연습삼아 시험을 치고 돌아와서 나는 다음 1년간의 학습 계획서를 각

과목별로 13장을 A4용지 2배의 크기로 세세하게 작성했다. 

그러던 중 고1때 하숙을 했던 대방동 집을 찾아가 나보다 2년 위인 형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형은 나의 계획을 심각히 다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 계획은 좋은데, 서울대를 가려면 그걸로는 부족해~ 

그리고 학원비가 좀 들지만, 나중에 대학 가서 아르바이트하면 충분히 그동안 쓴

비용은 벌 수 있고 또 일단 서울대를 붙어야 할거 아냐? "

 

해서 나는 유력한 대성학원을 가기로 맘을 먹게 되었다. 

다행히 학원 입학시험은 통과가 되었다. 

 

학원에는 1류 고등학교 출신들이 거의 전부였고 이들의 실력은 나 하고 초기에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출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했다. 학교때 배우

지도 않은 과목을 추가로 1년 내에 4-5 과목이나 生으로 익혀야 하니 그게 웬만큼

공부해서는 될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책을 들고 공부를 하는 터라 식사 시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3월,4월, 5월

갈수록 나의 성적은 꾸준히 우 상향되고 있었다.점차 상급 애들 과의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실업계 고교생에게 주던 제2외국어 시험 대신 치르게  했던 '공업일반' 이란 과목이 그 

해부터 폐지될거란 소문을 듣고 제 2외국어 시험을 대비한 불어를 혼자서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학원 다녀 오면 매일 '완전불어'란 참고서를 무조건 하루 

2~3 페이지 씩 읽고 암기했다.

 

아니나 다를까..결국 실업계고에 주던 제 2 외국어 특혜는 72학년도 입시부터 폐지되었다.

제 2 외국어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입시 과목에 포함시키면 실업계고 출신은 원천적

선발을 봉쇄하는거나 마찬가지 였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즉 그런 혜택으로 서울공대를

들어온 실업계 고교 출신들이 정상적인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한 정보는 아니고 대충 당시에 내가 들었던 얘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일 뿐 실상 제 2외국어가 대학공부에 특별한 도움을 주는것도 아니고

졸업 후 써먹을 일도 없었으며 특히 해당 국가로 유학을 가는 친구도 거의 전무 했던 걸

생각하면 어렵게 입학 제한을 두는거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사실 서울대학이 그나마 공대 에서만 공고 출신에게 일정 특례를 주어 뽑는 혜택이

나중에 다시 생겼다는 얘길 듣긴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고교 후배들  중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의 임원으로 일 하는 친구가 몇명 있는걸 확인했었다.

  

당시의 대성 학원 한달치 수업료는 6,000원 이었다. 나는 수업료의 일부라도 충당하고자

2월의 쌀쌀한 날씨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전단지를 만들어 인근 대방동 전봇대에 풀을

쑤어서 들고 다니며 손을 호호 불며 붙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2월 날씨에 전단지 붙이기는

생각보다 쉬운게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성남고를 졸업한 조병철 이란 친구가 도와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학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에 2-3 명의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을 가르쳤으나

벅찬 학원공부로 인해 결국 2 개월 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마음에 갈등도 생기고, 또  당시엔 내 공부가 열 배 백 배 더 중요한 걸 절감했기 때문에

도저히 지속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달 6,000원이란 학원비가 부담이 되어 시작한 

것이지만,

 

돈도 문제요, 시간도 문제요, 공부 실력도 문제인, 3중 고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은 물론 버스 타고 가는 시간도, 휴식 시간도 없이 공부에

전력을 경주했다. 간혹 명문 고를 나와 재수를 하는 학생 중엔 집안이 유복하기도 했고

이미 다 배운거라 슬렁슬렁 공부를 하기도 했다. 쉬는 시간엔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시큰둥하니 공부에 임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중 경기고를 졸업한 피부가 하얗고 깔끔한

친구가 유독 기억난다.

 

 '내가 특히 준수한 성적을 낸 과목은 국어-영어-사회등 文科 과목이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학 같은 과목은 웬만큼은 따라갔지만 특별히 앞서 나가지는 못한 거 같다.

 

지금도 학생들은 입시 공부에 목숨을 걸지만 당시 내가 공부에 집중함은 참으로 치열하다

못해 거의 죽음을 각오한 수준이었다. 세종로 대성학원 뒤로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나무가 푸르면 여름이요, 물 들면 가을이 왔음을 겨우 감지할 뿐이었다. 

 

뭐 그 정도는 약과였다. 어찌 그뿐 만이랴~ 

 

  

허나, 제2 외국어인 불어는 불타는 독학에도 불구하고  10월 모의 고사에 0점이 나왔다.

10월 까지는 정규 학원 불어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 연유도 있었다. 나는 0 점을 받은

다음날 부터 수업에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두달 후 12월 최종 고사 에서는 50점 만점에

35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제 2외국어 점수는 당시 합격의 당락을 결정하는 결정적

방아쇠 같은 거였고 대성 학원의 모의고사 수준은 본고사를 뛰어넘는 높은 수준이었으니

나는 제 2 외국어란 결정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은 거 였다.  

 

참으로 열정 앞에는 어떤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2 외국어는 실업계고 출신의 서울대 진학을 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인 셈이었다.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갖췄어도 문턱도 가지 않았던 어학을 짧은 시간에 극복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종 원서를 어디로 쓰는가를 인터뷰할때 학원 선생님들은 서울공대 건축과는 안 된다고 

난리였다. 서울공대만 목표로 매진하던 나는 순간 방향감을 잃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무슨 과를 택하지? 

 

당시 서울공대 건축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직전 71년도의 서울대 전교 수석도

공대 건축과가 차지할만큼 대단한 시기였다. 하필 그 시기에 건축과의 인기가 그토록

높을게 뭐란 말인가?  

 

단지 상담 교사들이 서울공대가 어려우면 차선의 공대 건축과를 가면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것이다..라고 한 수만 코치를 해줬다면 아마도 나는 건축을 전공하여

건축사가 되었을 것이다. 입시 학원들의 서울대 보내기 경쟁이 워낙 치열하던 시기였다.

한명이라도 더 서울대를 보내야 하는 지상 과제가 그들의 목을 잡고 있었다.

 

당시 대성 학원의 서울대 합격자수는 200여명 정도로 경기고와 맞먹는 높은 수준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학원에서 서울대 합격수를 늘려야 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나 대로

반드시 서울대를 가야만 할 절박함이 있었다. 

 

어쩌면 당시의 실력으로는 서울대 외의 연고대 한양대 홍익대 등의 건축과를 응시 했

다면 4년간 장학금을 받아 공부에만 전념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당시의 학교 편차란게 분명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한 친구는 경희 의대 전체 수석을 차

지하고도 이듬해 다시 서울약대에 들어 왔으니 말이다.  

허긴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대에 목숨을 거는 풍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단 1년간 내 인생에서 벌어졌던 사활을 건 투쟁! 그것은 내 몸과 마음에 깊게 박혀있다.

600여 명의 고등학교 동기 중 재수 포함해서 단 1명만 서울대의 문을 연 셈이다. 

제2 외국어를 포함한 핸디캡이 너무도 두터웠고 여러 악 조건이 그렇게 만들었다. 

 

고3 , 2학기부터 겨우 시작된 진학반 수업 중 국사 선생님이

 

" 너희 중 서울대를 단 한 명만 가도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도대체 선생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물론 현실이 그렇긴 했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말씀에 반론을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내 얼굴이 반쪽이 된 걸 알았다. 키는 182인데 몸무게가

58키로 이하로 떨어진 상태..  그 상태가 적어도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던

 

[중학은 보내야 된데이] 를 가슴 시리게 듣던 내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그것도

누구나가 꿈에 그리는 서울대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상황으로는 시골 어느 집 머슴살이로 출발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생각해 볼수록 나는 이 문제가 참으로 신비하고 내  머리로는 풀 수 없는 문제임을 느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한편, 당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 근교로 올라와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 친구도 있다.

또 고등학교 졸업 후 사업을 일궈 현재 수천억 단위의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 

 

인생은 각자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어느 쪽이 더 잘됐다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니까~ 

나 자신은 현재의 나의 상태에  완전 만족이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후회나 불만도 없다.

 

뚜껑을 열어 보니 공대나 의대나 약대나 커트라인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580점 만점에 대략 280,290 점 대 였으니 말이다. 함께 학원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은

 

'에이 그냥 공대를 갔어도 된 거 아냐? ' 뒤늦게 이런 아쉬움을 나에게 토하기도 했다. 

 

사실 주변에 서울공대 출신들이 몇몇 있지만, 50대에 일찌감치 퇴직하여 아침 안개처럼

고요하게 쉬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그래서 인생은 새옹지마란 고사가 갈수록 실감이 나고 있다. 

 

그렇다고 서울약대 입학한 걸 미흡 하다거나 혹은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도 아니다.

당시 물론 좀 아쉽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처음 목표 했던 서울공대 건축과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서울약대의 인기도 50,60년대 초반에는 엄청 높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선배들 중

미국으로 이민간 분들이 거의 대부분 지역 서울대 총 동문회 대표를 도맡아 하다시피

하는걸 봐도 유추가 가능하다. 

 

세상 모든건 돌고 돈다! 

 

대학 2학년 때 합천 본적지로 징병 검사를 하러 가니 검사관이 하는 말이

 

" 왜? 약대를 갔어~ 법대를 가지~"  당시 세간의 평가는 서울대 하면 법대~였다. 그 시절

서울 법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법대는 아무나 가나? 다 인연이 있어야 하고 적성이 맞아야지~

 

허나,나는 법 조문을 읽고 사람을 수사하거나 죄를 얹어주며 평생을 살 자신은 물론 흥미도

없으니 말이다. 

 

막상 대학에 가서는 약학 뿐 아니라 대학 자체에 대한 실망감으로  입학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하지 못했고  4년을 힘들게만 보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은 4만 원 정도로 비록 저렴한 학비였지만 한 달 학원비 6,000원도

힘들어서 아르바이트를 했던걸 생각하면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4년 내내 돈 걱정을

한시도 떨쳐내지 못하고 공부에 열중 하기는 어려웠고 그보다도 공부 자체에 뚜렷한

목적성이 없다 보니흥미 또한 많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당시 똑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공부했던 친구 중 2명이나 후일 유명 대학교수가

된 걸 보면 흥미와 적성의 문제이지 경제 사정이 공부를 좌우하지는 않는 것 같다. 

 

허긴 톨스토이도 대학이 적성에 안 맞아 중도에 그만두었다 하니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소용없다는 말은 진리인듯하다.  

나는 대학이 무언지도 모르고 무작정 대학을 간 것 같고 따라서 대학에 대한 막연한 어떤

환상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실용적인 학문을 하는 약대를 간 것이 그런 허탈감을 준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모두가 좋게만 연결 되기는 힘든가 보다! 

 

사실 이런 글을 쓰면서 무척 곤혹스러운 것은 자칫 자기 자랑의 일부로 보이지 않을까

해서 이다.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못 간 친구들이 초등 동창 중에 2/3 나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학교 진학 때문에 마음 상했던 분들이 이런 글을 보신다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 쳇 놀고 있네~ "  이러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건, 학력 중시의 우리 사회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빛이 나더라는 것이고,

또한  나의 일부 본질이 어쩌면 이런 것에서 출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러 例가 있고 세상에는 고난을 극복하여 승리의 발판으로 삼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처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쉬지 않고 노력하고 갈고 닦는 자세야 말로 귀한 모범이며

예전이나 현재나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라 생각한다.

 

 "그거 다 옛날 얘기지~ 지금은 말짱 헛소리요, 도루묵입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요~ " 

 

이런 말이 요즘 나오는 세상이지만, 과연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또 세상이 실제 일부 그렇다 손 쳐도 열심히 노력하는 기본자세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본다. 

 

솔직히 지금은 대학을 너무 많이 가서 탈이 된 세상이다. 전 세계 유례가 없는 70% 의

대학 진학률!  헛바람만 잔뜩 들어 시시한 일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는 세상~ 

힘든 일을 할바에 야 그냥 놀고먹겠다는 젊은이가 많아진 세상!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일까? 

 

 

파스칼은 일찌기

 

"직업은 모자와 같은 것이다. 이게 안 맞으면 다른걸 써 볼수도 있고

 또 그게 안 맞으면 다른걸 고를수도 있다" 고 말했다.

 

즉, 전공이니 뭐니 하는것도 모자와 같다는 말일 것이다.

건축이건 약학이건 의학이건 실은 큰 차이가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이 단순 모자 정도에 불과할까? 

 

이 문제는 수 십년이 지난 현재도 명쾌하게 풀수없는 숙제로 남아있다.

다른 과로 갔다고 더 멋진 인생을 살게 됐을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은 물론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인것을 우리 각자는 충분히 느끼고 있지

않는가? 

 

단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꿈 넘어 꿈' 즉 

일정 목표를 이룬 후 다시 재 도약의 목표나 꿈을 설정함이 필수인데

당시의 현실에서 그걸 놓친 감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누군가 제 3자가

깨우쳐 줄 수도 있고 스스로 터득했을 수도 있겠으나, 암튼 그 부분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인생길 나그네길 / maronie

 

 

 

사나이 한번 나서 고향에만 살 수 있나

젊어서 한때라면 고생을 사자

부모님 슬하 떠난 이 못난 자식  

 

눈보라 치는 길이 끝이 없어도

일곱번 쓰러져도 일어설테다

나그네길 인생길  

 

사나이 어리석게 속아서만 살 수 있나

진실한 사랑앞에 목숨을 걸자

불같은 젊은 가슴 피가 뛰는데  

무슨일 못할소냐 못이룰 소냐

하늘이 둟뚫어져도 솟아날테다

나그네길 인생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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