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2019.10 백암
시골의 우리집은 허름하게 흙벽돌을 쌓아 올린 초가집에다 대지가 작아
옆집엔 다 있는 울타리가 없었다. 보통 개나리나 측백나무 또는 흙으로 쌓은
담이 있고 정문엔 싸립문이나 제대로 된 대문이 있기도 했는데,,우린 그냥
마당으로 끝나버려서 동네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나 다니는 길이 마당이
된셈이다.

나는 어릴적 옆집에 있는 담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비록 싸립문일망정 대문이 있는 집이 더욱더 좋아 보였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아늑한게 어린 맘에도 안정감이 크게 느껴
지는데 반해 우리집은 울타리도 없지, 대문은 물론없지..웬지 어디
오픈된 공간에서 보호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뭐 한적한
시골이라 마당 앞으로 지나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었든 것이다.

헌데 울타리 아닌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때가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가을이 되면 마당 끝으로 잔뜩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만발을 하는 때였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마당 안쪽으로 사람들이 댕기니 엄밀한 의미의 담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느낌상 훌륭한 담이 쳐진 집이 된거 같아 너무
좋았다.

코스모스가 내 키보다도 더 자라 저멀리 보이는 신작로와 아랫동네가
가물가물 코스모스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하늘을 나는 잠자리
떼를 보며 마당끝에 지어진 뒷간 지붕에 핀 하얀 박꽃을 바라보던 정경은
이때껏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가장 평화로운 정경으로 뇌리에 저장되어있다.
그때의 그 평화로운 정경을 그림으로 나마 남겨볼 심산으로 몇차례 시도해 보았
지만 나의 짧은 그림 실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의 어릴적 그 기억을 훌륭하게 한번 재현해 보고싶다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있던 우리집 마당의 끝자락에 잠자리 떼가
날아 다니던 그 시절!!

부모님과 누님과 함께 살던 그시절~

나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는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정지용의 꿈엔들 잊힐리이야~ 는 바로 그런
정경이 아닐까?!


 
일죽 시골에 사실때의 어머니.. 30대 중반이실듯
(도민증을 만드느라 찍어둔 사진이다,엄마 사진중
그나마 제일 잘 보존된 것이다)
 
 
엄마의 보따리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는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당시 우리는 원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을
떠나 안성의 일죽에 정착한터라 마땅히 농토도 없었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은 더구나
생각할수도 없는 터라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다. 다섯식구의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던 셈이다.
 
 해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개나리봇짐을 꾸려머리에 이고 인근 동네로 겨울한철 내내
물방구 장사를 나서야만 했다. 외로운 타향에 정착하여 추운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인근
동네를 하루도 쉬지않고 장사를 나서야 했을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봄 여름 가을 농사 일하면 겨울 한철 좀 쉬는게 유일한 낙인게 시골 아닌가?
 
아침에 나가서 해가 뉘엿뉘엿 할때 저 멀리서 오시는 엄마를 집 마당에서 볼 수 가 있었다.
그때 철없는 나는 생각하기를 어째서 울 엄마는 남들 엄마처럼 집에 있질 않고 저리
저녁때나 돼야 오는 걸까? 그게 늘 아쉬웠다. 어릴적엔 그저 엄마와 아버지랑 같이 있는게
제일의 보약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긴긴 겨울 방학 내내 엄마랑 같이 있지
못하는것이 못내 서운했던 어린 시절,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몇십리 길 추운
겨울에 다니며 점심은 간신히 동네 이집 저집에서 한술로 때우시던 엄마!

 
 몇년전 나는 어릴적 바로 옆집에 살던 나보다 4살위인 작은 누나와 친구인 누님이 사는
장호원 인근 동네에 우연히 간적이 있었다. 그 동네 사람중 몇분이 우리 약국에서 약을
드시고 기적적으로 위장병을 고친 이후 해마다 동네 사람들이 가을 걷이가 끝나면 한약을
지어 드시곤 해서 그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네옆으로 돌아 가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산 너머에 [가리울] 이란 동네가 있노라고 했다. 순간 나는 아! 바로 그
동네구나!

어릴적 엄마가 가리울 얘길 더러 하신걸 기억한다. 가리울,,우리 고향 빼나골에서 약
12키로쯤 떨어진 곳이다. 삼십리 정도이다.
어머니는
그 옛날 추운 겨울에 삼십리길을 걸어서 물건 보따리를 이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
가리울 동네 얘길 듣는 순간 눈앞이 희미해지며 그 동네를 걸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아픈 다리로 걸어 다니든 동네를 나는 이제 차를 타고 와서 인근
장호원 일대 동네 주민들에게 한약을 지어 드리고 있다니 ~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모틍이를 돌아 집으로 오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
 
 
*************
 
 
용꿈

엄마가 나를 가지셨을때 특이한 꿈을 꾸셨다한다.
어머니의 태몽에 용(龍)두마리가 치마폭에 들어 왔는데,,그중 한마리가
품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다. 아하,,,이런,,, 우선 태몽으로
용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문제는 나와 우리형이 딱 12년차 형도
용띠였던 것이다.

 
형은 내가 5살 되던해 그러니까 17세를 일기로 그만 하늘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용꿈..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요즘 같으면 복권1등에 당첨될 확률이
클것이고 그렇찮으면 무슨 큰 일을 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크게 빛내거나
뭐 그런걸까? 그런거 하나도 해당되지 않지만,, 이날까지 건강하게 나름
깡 시골에서 누구나 부러워 하던 서울대까지 나오고 잘 살고 있으니,,
일단은 엄마의 용꿈에 약간은 부합하게 살고 있는걸까?


단지 나와 띠동갑 용띠였던 형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것이 못내
아쉽다, 어찌 그리 엄마의 용꿈은 정확히 맞는단 말인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해이던가 물방앗간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maronie


1979년 찾았을때도 땅콩이 길러지고 있던 우리 옛날 밭  



시골의 우리땅은 논 두어마지기와 밭 3000 여평이 전부였다. 3000평하면 꽤

되는거 같지만 큰 개울가 쓸모없는 땅을 개척하여 만든 밭은 사실 재배할

작물이 몇가지로 한정되어 있어 주로 고구마,땅콩등을 심었다.

물론 배추나 무우등도 심고 들깨나 호밀도 심긴 했지만,,


고운 모래가 주 성분인 개울가 밭이라 다른 특이한 작물은 심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을이면 땅콩과 고구마를 많이 수확하게 되었다.



땅콩은 부피가 비교적 적어 저장이 용이했지만 고구마가 문제였다.

고구마는 수확철에 내다 팔면 값이 별로 안되어 뒷방에 커다랗게 볕짚으로

보관 창고를 만들어 그곳에 겨우내 저장을 한후 이른 봄 쯤에 내다 팔곤했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겨우내 긴긴 밤을 뒷방에 저장된 고구마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먹거나 땅콩을 가져와 볶아 먹기 일쑤였다. 지금 들으면 아이구,,그런

횡재를~ 하실지 모르지만 이게 간식이기도 했지만 고구마가 거의 주식이기도

했던 것이라서 어쩌면 부족한 밥대신 먹던 식량이었던 것이다

.


쌀이 귀하니 밥을 지을때는 쌀 약간에 고구마와 무우를 썰어 넣어 밥을 했다.

다된 밥을 휘~섞어 고구마 무우밥을 주로 먹고 살았다. 나는 그 무우밥이 참 먹기

싫었다. 그러나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암소리 안하고 그 맛없는 무우밥을 먹곤했다.

쌀은 거의 없고 무우와 고구마로 만든 밥을 먹었으니 그 배고픔이 오죽했을까? 

허나 그 시절에는 그나마도 못먹고 배를 곯은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뭐 그닥 애닯아

할일도 아닌지 모르겠다



헌데,,땅콩은 식물성 기름이 풍부하여 아마도 뇌세포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간식으로 심심풀이 땅콩이란 말이 있지만, 당시 겨우 내내

볶아먹은 땅콩의 양은 상당 량이었다. 주식인 밥이 부족해서  먹게된 고구마와

땅콩이 결국은 괜찮은 두뇌를 만드는데 일조를 한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과연 그게 맞는지 어떤지는 확인 불가지만, 좋게 생각하면 좋은게 아닐까?


세상은 그래서 새옹지마라고 하는말이 있는게 아닐지^ 
  


자라

 

집에서 논둑을 따라서 1.5킬로 정도 나가면 우리의 밭이 있었다. 우리 밭은

원래 넓은 하천 부지였는데 아버지가 그곳을 일일히 손으로 일구워 밭을 만든것이다.

그리고 우리 밭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넓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백암쪽 멀리 큰 청미천

상류에서 퍼올린 물을 벌판으로 이송하는 수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수로의 물은 아주 깨끗하지도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은 적당한 수질의

물줄기였다.

 

그 수로에 자라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라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놈이 수로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교 갔다 올때는 가끔 큰 개울을 넘어 우리 밭을 지나 논둑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여름 날이 더위지면 자라란 놈이 그 수로 옆으로 나와서 뭘하는건지 앉아
있곤했다. 자라는 쇠 젓가락도 물면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어서 국민 학교생인 내가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잡기는 커녕 슬슬 피해 도망을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와 아버지를 찾았고 그 즉시 아버지는 부리나케 수로로

달려가 수로 옆에서 쉬고 있는 자라를 잡곤 하셨다.

 

자라는 서른 아홉 엄마가 낳은 늦둥이인 내가 젖을 먹지 못해 항상 몸이 약할

거라는 염려를 불식시키기에 좋은 보약 노릇을했다. 그렇게 잡아다 고아 먹은 자
라가 아마도 수십마리는 될것이다. 

 

자라와 더불어 보신제 역할을 한것이 두더지였다. 깨끗한 모래가 주 토양인 밭에서

잡힌 두더지는 생각보다 아주 깔끔한 놈이다. 두더지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들쥐를

연상 하는듯 하지만, 두더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두더지도 몇백 마리는

구워먹지 않았을까..추산해 본다.

 

큰 솥에 넣어 푹 고아 먹고 남은 임금왕자가 선명한 자라의 뼈는 새끼줄에 달아서

안방 뒷쪽에 걸어놓곤 했다. 자라의 뼈는 음(陰)을 補하는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다.
어릴적 보음제를 그나마 충분히 먹고 자란 나는 덕분에 키가 또래들 보다 훨씬 크게

자랐던 것이다. 180센치 이상을 유지한 키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흔치않은 일이었다.

 

엄마 젖은 못먹고 대신 자라를 먹은것이 오히려 키가 크는 동기가 된 셈이다. 초등

동급생 180명 중에 내가 두번째로 키가 컷으니 말이다.

 

그렇게 잡아서 고아 먹은 자라인데, 2009년도에 일본 오사카에 가서 보니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꽤 넓은 강이 있었는데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강물에서 노니는 자라를

보게 된것이다. 상당히 숫자가 많았는데,,오사카 시민들은 아마도 자라를 잡아먹지

않는가 보다. 물론 강물이 오염이 되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옛날 오사카에서 쭈욱 사셨던 아버님이 어쩌면 그 당시 자라에 대한 효능 같은걸

인지하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해서 훗날 시골 동네에서도 자라를 잡아 먹이면 키도

크고 몸에 좋다고 생각 하신건 아닐지 추정해 본다

 

어릴 적 길어 먹던 동네 유일의 우물 (1979년 촬영)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아마도 6세 정도..작은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 돐 사진이 없는 나의 생애 최초의 사진이다.

 


국민학교 이야기를 한번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아랫 마을 큰 동네도
겨우 가 보던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했다. 누나 손에 이끌려 2km 정도
떨어진 학교를 간 날이 입학식이었다. 사실 학교를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한다니 이끌려 간 것인데~

 

그날 비가 왔었다. 축축하고 음습한 중에 교실이라고 찾아갔고 그리고
뭐라뭐라 설명을 잔뜩 듣고 다시 집에 돌아온것이 기억날 뿐이다.

 


당시엔 다들 그랬지만, 한글도 다 학교에 가서 깨우쳤고 학교를 가고 오는 五里
안팍의 등하교 길은 그냥 놀이터의 연장일 뿐이었다. 봄이면 비를 맞고 여름이면
하교 길에 미역을 감고,,가을이면 고구마를 캐어 먹고,,겨울이면 얼어 붙은 개울을
미끄럼 타고 댕기는 재미로 학교를 오갔다. 물론 고구마는 등하교 길에 있던 우리
밭에서 캣다. 사실 그 시절 1950년대 시골서 학교 다니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것이다

 


공부? 는 솔직히 국민학교 6년간 집에서 단 한 차례도 책을 펴서 예습 복습을
해본 기억이 없다.책가방은 집에 오는 즉시 방에 팽개쳐 버리고 오로지 들로
산으로 새집 찾고 미역 감고 물고기 잡고 이런저런 나물 뜯고,, 버섯 따러
댕기고,솔방울 채취, 영나무 하기,싸리 훓어 오기,등으로 바빴다.

 

 

저렇게 밖으로 나 돈 것은 집에서 딱히 할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펴본 건 여름 겨울 방학숙제 할때 뿐이었다. 그것도 마지막 날 간신히
곤충 채집이며 과제물 하기 등을 시간에 쫒겨 겨우겨우 땜빵하기 일쑤였다.


그니깐 애초부터 나는 학교 공부 같은것엔 그닥 취미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2학년인가,3학년이 되니 주변에서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에 별 관심도 없었다. 이렇듯 학교 공부에
대한 집착같은게 별로 없던 내가 하나 잘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집중하는
능력이었다.


수업 시간에 절대 한눈 안 파는것.. 그리고 한번 들으면 좀체로 잊어 먹지 않는것,,
뭐, 결국 그게 공부 좀 하는 비결이 되긴 했겠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나는 예전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다. 산천을
헤매며 놀던 기억은 많은데 비해 학교 생활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요즘
시골 동창을 만나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당시의 학교 일을 아주 세세하게 잘
기억하고 있음에 나는 놀라곤 한다.

 

암튼 요새 애들의 선행 학습이 어떻고, 유치원에서 한글을 떼는 건 기본이고
영어까지도 척척 하고, 노는 건 오로지 컴퓨터 게임이고,이것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좀먹는 원흉이라고 하는데,,한국에서 더구나 공부 잘 한다는게
인간의 무한 창의성과 심미안을 희생하며 달성하는 반대 급부적인 성격이
강함을 어느정도는 인정해야할 터인데 뭐든 예전이 좋았다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이 시대는 중요한 걸 망각하고 있는게 확실한듯하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와는 상황이 너무도 변해서 뭐 꼭 그때가
최상 이었다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더구나 공부 잘하기와 감성의 무한
개발이 동시에 가능했던 그 시절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벼포기 하나,솔잎 하나,미류나무의 잎새 하나,고구마의 새순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침 이슬이 맺힌 풀잎들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
이런 것들은 결코 학교 공부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난했지만 공부에 목숨걸지 않아도 좋았던
그 시절을 나는 지금도 가슴이 시리게 회상해 볼 뿐
아니라 너무도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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