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살기는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당시 우리는 원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을 떠나 안성의 일죽에 정착한터라 마땅히 농토도 없었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은 더구나 생각할수도 없는 터라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다. 다섯식구의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던 셈이다.
해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개나리봇짐을 꾸려머리에 이고 인근 동네로 겨울한철 내내
물방구 장사를 나서야만 했다. 외로운 타향에 정착하여 추운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인근
동네를 하루도 쉬지않고 장사를 나서야 했을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봄 여름 가을 농사 일하면 겨울 한철 좀 쉬는게 유일한 낙인게 시골 아닌가?
아침에 나가서 해가 뉘엿뉘엿 할때 저 멀리서 오시는 엄마를 집 마당에서 볼 수 가 있었다.
그때 철없는 나는 생각하기를 어째서 울 엄마는 남들 엄마처럼 집에 있질 않고 저리 저녁때나 돼야 오는 걸까? 그게 늘 아쉬웠다. 어릴적엔 그저 엄마와 아버지랑 같이 있는게
제일의 보약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긴긴 겨울 방학 내내 엄마랑 같이 있지
못하는것이 못내 서운했던 어린 시절,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몇십리 길 추운
겨울에 다니며 점심은 간신히 동네 이집 저집에서 한술로 때우시던 엄마!
몇년전 나는 어릴적 바로 옆집에 살던 나보다 4살위인 작은 누나와 친구인 누님이 사는
장호원 인근 동네에 우연히 간적이 있었다. 그 동네 사람중 몇분이 우리 약국에서 약을
드시고 기적적으로 위장병을 고친 이후 해마다 동네 사람들이 가을 걷이가 끝나면 한약을
지어 드시곤 해서 그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네옆으로 돌아 가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산 너머에 [가리울] 이란 동네가 있노라고 했다. 순간 나는 아! 바로 그
동네구나!
어릴적 엄마가 가리울 얘길 더러 하신걸 기억한다. 가리울,,우리 고향 빼나골에서 약
12키로쯤 떨어진 곳이다. 삼십리 정도이다.
어머니는 그 옛날 추운 겨울에 삼십리길을 걸어서 물건 보따리를 이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
가리울 동네 얘길 듣는 순간 눈앞이 희미해지며 그 동네를 걸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아픈 다리로 걸어 다니든 동네를 나는 이제 차를 타고 와서 인근
장호원 일대 동네 주민들에게 한약을 지어 드리고 있다니 ~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멀리 철길이 있던 조모골 당촌리
산모틍이를 돌아 집으로 오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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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꿈
엄마가 나를 가지셨을때 특이한 꿈을 꾸셨다한다.
어머니의 태몽에 용(龍)두마리가 치마폭에 들어 왔는데,,그중 한마리가
품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단다. 아하,,,이런,,, 우선 태몽으로
용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문제는 나와 우리형이 딱 12년차 형도
용띠였던 것이다.
형은 내가 5살 되던해 그러니까 17세를 일기로 그만 하늘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용꿈..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요즘 같으면 복권1등에 당첨될 확률이
클것이고 그렇찮으면 무슨 큰 일을 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크게 빛내거나
뭐 그런걸까? 그런거 하나도 해당되지 않지만,, 이날까지 건강하게 나름
깡 시골에서 누구나 부러워 하던 서울대까지 나오고 잘 살고 있으니,,
일단은 엄마의 용꿈에 약간은 부합하게 살고 있는걸까?
단지 나와 띠동갑 용띠였던 형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것이 못내
아쉽다, 어찌 그리 엄마의 용꿈은 정확히 맞는단 말인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해이던가
물방앗간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쉽지 않았지만 그 놈이 수로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교 갔다 올때는 가끔 큰 개울을 넘어 우리 밭을 지나 논둑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여름 날이 더위지면 자라란 놈이 그 수로 옆으로 나와서 뭘하는건지 앉아 있곤했다. 자라는 쇠 젓가락도 물면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어서 국민 학교생인 내가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잡기는 커녕 슬슬 피해 도망을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와 아버지를 찾았고 그 즉시 아버지는 부리나케 수로로
달려가 수로 옆에서 쉬고 있는 자라를 잡곤 하셨다.
자라는 서른 아홉 엄마가 낳은 늦둥이인 내가 젖을 먹지 못해 항상 몸이 약할
거라는 염려를 불식시키기에 좋은 보약 노릇을했다. 그렇게 잡아다 고아 먹은 자 라가 아마도 수십마리는 될것이다.
자라와 더불어 보신제 역할을 한것이 두더지였다. 깨끗한 모래가 주 토양인 밭에서
잡힌 두더지는 생각보다 아주 깔끔한 놈이다. 두더지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들쥐를
연상 하는듯 하지만, 두더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두더지도 몇백 마리는
구워먹지 않았을까..추산해 본다.
큰 솥에 넣어 푹 고아 먹고 남은 임금왕자가 선명한 자라의 뼈는 새끼줄에 달아서
안방 뒷쪽에 걸어놓곤 했다. 자라의 뼈는 음(陰)을 補하는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다. 어릴적 보음제를 그나마 충분히 먹고 자란 나는 덕분에 키가 또래들 보다 훨씬 크게
국민학교 이야기를 한번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아랫 마을 큰 동네도 겨우 가 보던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했다. 누나 손에 이끌려 2km 정도 떨어진 학교를 간 날이 입학식이었다. 사실 학교를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한다니 이끌려 간 것인데~
그날 비가 왔었다. 축축하고 음습한 중에 교실이라고 찾아갔고 그리고 뭐라뭐라 설명을 잔뜩 듣고 다시 집에 돌아온것이 기억날 뿐이다.
당시엔 다들 그랬지만, 한글도 다 학교에 가서 깨우쳤고 학교를 가고 오는 五里 안팍의 등하교 길은 그냥 놀이터의 연장일 뿐이었다. 봄이면 비를 맞고 여름이면 하교 길에 미역을 감고,,가을이면 고구마를 캐어 먹고,,겨울이면 얼어 붙은 개울을 미끄럼 타고 댕기는 재미로 학교를 오갔다. 물론 고구마는 등하교 길에 있던 우리 밭에서 캣다. 사실 그 시절 1950년대 시골서 학교 다니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것이다
공부? 는 솔직히 국민학교 6년간 집에서 단 한 차례도 책을 펴서 예습 복습을 해본 기억이 없다.책가방은 집에 오는 즉시 방에 팽개쳐 버리고 오로지 들로 산으로 새집 찾고 미역 감고 물고기 잡고 이런저런 나물 뜯고,, 버섯 따러 댕기고,솔방울 채취, 영나무 하기,싸리 훓어 오기,등으로 바빴다.
저렇게 밖으로 나 돈 것은 집에서 딱히 할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펴본 건 여름 겨울 방학숙제 할때 뿐이었다. 그것도 마지막 날 간신히 곤충 채집이며 과제물 하기 등을 시간에 쫒겨 겨우겨우 땜빵하기 일쑤였다.
그니깐 애초부터 나는 학교 공부 같은것엔 그닥 취미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2학년인가,3학년이 되니 주변에서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에 별 관심도 없었다. 이렇듯 학교 공부에 대한 집착같은게 별로 없던 내가 하나 잘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집중하는 능력이었다.
수업 시간에 절대 한눈 안 파는것.. 그리고 한번 들으면 좀체로 잊어 먹지 않는것,, 뭐, 결국 그게 공부 좀 하는 비결이 되긴 했겠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나는 예전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다. 산천을 헤매며 놀던 기억은 많은데 비해 학교 생활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요즘 시골 동창을 만나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당시의 학교 일을 아주 세세하게 잘 기억하고 있음에 나는 놀라곤 한다.
암튼 요새 애들의 선행 학습이 어떻고, 유치원에서 한글을 떼는 건 기본이고 영어까지도 척척 하고, 노는 건 오로지 컴퓨터 게임이고,이것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좀먹는 원흉이라고 하는데,,한국에서 더구나 공부 잘 한다는게 인간의 무한 창의성과 심미안을 희생하며 달성하는 반대 급부적인 성격이 강함을 어느정도는 인정해야할 터인데 뭐든 예전이 좋았다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이 시대는 중요한 걸 망각하고 있는게 확실한듯하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와는 상황이 너무도 변해서 뭐 꼭 그때가 최상 이었다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더구나 공부 잘하기와 감성의 무한 개발이 동시에 가능했던 그 시절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벼포기 하나,솔잎 하나,미류나무의 잎새 하나,고구마의 새순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침 이슬이 맺힌 풀잎들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 이런 것들은 결코 학교 공부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난했지만 공부에 목숨걸지 않아도 좋았던 그 시절을 나는 지금도 가슴이 시리게 회상해 볼 뿐 아니라 너무도 행복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