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시절.. 관악산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웬지 겉과 속이 밸런스가 안맞는 시기였다. 맨 좌측이 필자

이미 이들 중 2명이 세상을 떠났다

 

 

 

 1972. 3월 드디어 서울 약대의 입학식이 있었다. 동그란 원형의 월계수 잎이 둘러쳐진

서울대 뱃지~ 일반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그 뺏지를 드디어 내 가슴에 달게 된것이다.

곤색이 약간 감도는 짙은 색의 교복 상의~ 왼쪽 가슴에 그 뺏지를 달고 덜컹거리는 120번 

시내 버스를 타면 학교 가는 길이 무한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 가득차서

버스를  탓겠지만 시험 공부에 지쳐 키는 크고 깡마른 외모의 수척한 서울대생을 보는 

외부의 시선은 아마도 과히 즐겁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헌데 일반 고등학교 수준의 초라한 회색 시멘트 건물의 약대 캠퍼스는 처음부터 실망

이었다. 강의실의 책 걸상도 여늬 학원이나 고등학교 때의 그것보다 오히려 못한 수준이었

고 캠퍼스를 둘러싼 외부의 자연 환경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대학 1학년. 전공 보다는 일반 교양과목이 많은 커리큘럼이었지만, 대학의 첫 출발은 뭔가

내가 생각했던 그런곳 하고는 한참 먼 것이었다. 

단순히 캠퍼스의 외관에만 실망을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사실은 대학을 가면 뭘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준비한 바도 전혀 없었다.  그냥 허둥지둥

일단 합격부터 하고 본 것이 전부였다. 어떤 인생을 살며 어떻게 공부를 할것인지 생각을

미처 못했다. 이제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간혹  

개중의 동기들 중에는 약학에 관심이 많고 무슨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왔다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질병을 퇴치해 보겠다, 좋은 약을 개발해 보겠다, 간혹 다른델 갈려다 겨우 이곳에

왔다는 말을하여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서울공대 갈려다 힘이 부쳐 이곳에 왔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뭔지 떠밀려

온것 같은 약대~

 

나의 첫 출발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 공부에 매진할 수가 있었을가? 무슨 공부에 희망을 품고 앞날을 설계하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음 등록금을 벌어서 낼 수 있을까? 가 주요 관심사였으니 하루하루 지나는게

고통의 연속이었다. 등록금 문제가 설령 벅찻다고해도 만일 공부 자체가 즐거웠다면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당시의 학교 생활이나 공부가 즐거웠다고 나를 속일

생각은 전혀 없다.  안 그런건 안 그런 것이다.  

 

그리고 지난 재수 1년간 너무 공부에 주눅이 들어 난 완전히 지쳐 있었다. 

등록금 걱정을 하는 친구들은 나 외에도 여렀이 있었다. 누구나 인생을 알차게 설계하고 출발

하는 건 아니다. 엉성한 강의실, 주변환경^  별 재미도 없는 강의들^^ 재미가 없다는 건

내가 그 시기에 갈구하던 어떤것 하고는 번지수가 좀 달랐다는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외부적 요인과 함께 나의 중심없는 대학 생활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게 이어지고 

있었다. 캠퍼스의 낭만 같은건  운운하기조차 부끄러운 그런 것이었다. 교과목 자체도 흥미가

별로없는 그런것 들이었다.  상당히 고매하고 훌륭할 걸로 생각한 교수란 분들 또한 그런것

하고는 매우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풍모만 보여주는 너무나 기대할게 없는 분들이었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개인적 생각일 테지만 말이다)

 

도대체 이런 대학을 내가 왜 그리 힘들게 들어온 걸까??   

사실은 그럴때야말로 나에겐 인생의 멘토가 꼭 필요한 시기였다. 

 

하나의 산은 넘었지만 다음 인생의 목표  내가 이후에 추구해야할 새로운 목표 ~ 이런

거창한 문제를 나 혼자서 해결하기엔 역부족 이었다. 누구와 논의해 볼 생각도 엄두도 못낸채 

세월은 흘러 가고 있었다. 난 사실 그때쯤 모종의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약대를 계속 다닐건

지 아니면 때려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지를!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명쾌한 단안을 내릴 형편에 있지 못했다. 약대에 대한 사회적 평가나 나

스스로 왜 만족을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서 다음 발걸음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를

정할만큼 나는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과감히 약대를 버리고 공대 등으로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 입학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의 불만족이 다 해결 되었을까?  

 

거기에다 유신독재의 마지막 몸부림이 시작되든 터이라 학교는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늘상 시위의 긴박함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고, 공포 분위기가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저 휴강이 거의 일상화가 되던 시절이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이래저래 출발부터 매우 크게 삐걱거리고 있었든 셈이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아! 서울대학 그거 말로만 듣던것 하고는 영 다르네! 고작 그런

수준이었단 말이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울대학의 전부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수도 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문제이다. 엉터리로 운좋게 서울대를

간 것도 아니고 제대로 들어갔지만 나의 처한 환경이 그닥 좋지 않은 결과였고

약학이란게 내 적성에 썩 부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  *

 

p.s 따지고 보면 4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골프 시합을 봐도 두번의 라운딩을

거쳐 예선을 하고 거기서 70여 명을 짤라서 3,4 라운딩을 하며 최종 승자를 뽑지 않던가?

대학도 1,2학년의 예선을 거쳐 3,4, 학년이면 뭔가 최종 승부를 내야하는 그런 곳이다. 

지금 와서 반추해 볼때 대학 4년간 아름다운 추억이 거의 생각이 안 나는 것은 당시 무의

미했던 나의 학교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또한 약대를 그만두고 공대나 아예

문과 대학등 다른 과로 갔다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닐지 모른다~ 

 

단순한 젊은날의 방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대학 4년을 방황으로 보낸다는것도 그렇지만 이토록 재미없게 날려 버리다니~

내 젊은 시절의 커다란 공허처럼 느껴져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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