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고 1학년 시절(1968년)  사진의 맨 왼쪽이 필자이다.

 
 

 

시골서 겨우 중학을  나오고 고등학교를 어딜 갈까~생각할 때 사실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게 당시의 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실업계를

가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인문계를 추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서울

미아리에 살던 큰 누나 집을 찾아 가니 나 보다 몇 년 나이 많은 집 주인댁 형이

내 중학교 졸업 성적 얘기를 듣고 추천해준 학교는 성동 고등학교였다.

 

경기-서울-경복-용산, 등 A 그룹의 학교와 경동-휘문-보성-중앙-대광 등 A'

그 룹과 성동-중동-등 A'' 그룹에서 시골서 그 정도 했으면 아마도 수준이

맞을 거란 예측을 해 준 것이다.

 

해서 원서를 사러 성동 고등학교를 가니 마침 원서가 떨어져 내일 오란다.

시간에 쫓기던 나는 그 길로 그 형과 함께 아현동의 경기 공전을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헌데 거기도 입학 원서가 거덜 나서 내일 다시 오라는 게 아닌가?

이 무슨 일인지. 해서 다시 즉흥적으로 방향을 돌린 게 대방동에 있던 서울공고였다.

당시 나는 내일 다시 원서를 사러 갈 형편이 되질 못했다

 

당시 이 3 학교가 그토록 인기가 많았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일단 수험생들은

원서부터 여기저기 사놓고 보는 풍토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 정하는 것도 주먹 구구 즉흥적이요 원서 사는 것도 코미디 같이 되었다.

서울의 그 형이 데리고 다녔으니 망정이지, 서울 지리도 잘 모르던 나 혼자였다면

그 마저도 불가능한  입학 원서 구하기였다.


그렇게 해서 달랑 원서 한 장 사 가지고 고향 일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중학교에서는 어떻게 원서를  한 장만 사 오는 경우가 있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공고 건축과에 입학하게 된다. 사실 입학 시험에서도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내가 며칠간 머물던 미아리에서 대방동 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고 버스도 여러번을 갈아 타야 했었다.  버스 타고 어디

다니는데 미숙할 수 밖에 없는 시골 출신인 나는 입학 시험 당일 미아리에서

버스를 몇번 갈아탄 후 대방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내려 서울공고 교문까지

죽어라 뛰어갔지만 1교시 시험에 약 30분 정도나 늦고 말았다.첫 시험은 

국어 시험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교문의 수위 아저씨는 빨리 들어가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나는 세찬 숨을 몰아 쉬며 30분이나 늦게 1교시 시험을 겨우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1지망 과였던 기계과를 놓치고

2지망인 건축과에 1등으로 합격을 했다.

 

안성 목장의 5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공고는 짙은 고동색 벽돌로 본관은 물론 실습실이

지어져 있었다. 대지 면적 3만여 평에 달하는 꽤 넓은 캠퍼스였다.

몇년 전 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으니 1900년 초기 일제시대에

설립되어 졸업생 중에는 일본인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고 모교 총 동창회에는

일본인 선배들이 지금도 다수 방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특별히 대단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일제 강점기의 한 모습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사상계의 거두 이영희 선생도 이곳 전기과 출신이다. 대학은

안 가기로 하고 들어 왔으니 뭐, 특별히 공부를 할 것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

고 2 때 2학기부터 부족한 영어를 보충하고자 학교 수업이 끝나면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영어실력기초란 책을 여러번 열심히 보았다. 해질녘이 되면 가방을

챙겨 학교 인근의 하숙집으로 향하는 일을 꽤 오래 약 6개월 이상 지속했다.


허나 공고라는 곳은 인문학교처럼 공부를 주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필요한

기술을 전수시켜 이 나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것이 교육 목표일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해서 인문계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2년을 보내고

고 3 이 되었다.

 

사실  졸업 후 취직을 하고 당시 유일한 야간 공대인 한양공대를 가 볼까??

하는 정도의 정말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야간 대학,

그거 낮에 일하고 밤에 어떻게 다니지?라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야간 대학의

실질적 접근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2년 동안 목공 실습으로 탁자, 책상, 등을 만들고 건축 제도라 해서 주택 도면만

그리던 내가 과연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당시는 예비고사란 게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라 대학을 가려면 우선 그것부터 패스를 해야 하는 절박한 때였다.

 

특별히 누구에게 듣거나 깨달음이 있던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왠지 내가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졸업 후 취직을해서

생활을 안정 시켜야 할 내가 어찌된 영문일까? 

 

누구나 가는게 대학 같아도 실상 대학 못간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원래 대학은 글자 그대로 큰 학문을 하러 가는 곳이지만

요즘 어디 대학이 그런가?

 

지금이야 대학 진학률이 80% 를 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지만 70년 초만 해도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3학년 올라 가는 1970년 1월 1일 부터 세종로에 있던 세종학원에 영어

'삼위일체' 강의를 신청하는 것으로 입시 공부를 스타트 했다.

 

그런데 학원에 가 보니 맨 뒷줄에 중학교 3학년 생이 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아! 나는 고 3이 되어 겨우 영어를 시작하는데 나보다

3년이나 빠른 아이들^^그 친구들은 경기 중학교 뱃지를 달고 있었다. 역시 경기

로구나!

당시 경기 중,고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왠지 김이 쫙 빠지고 도무지 공부할 맛이 나질 않게 되긴 했으나 그렇게

1년을 학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부를 했다. 학교 마치면 그 길로 대방동 삼거리로

달려가 120번 버스를 타고 세종로로, 종로로 가서 한 두 과목씩 학원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 이럴거 였으면 처음부터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뒤늦게 이게 뭐하는

짓이람? 어찌 보면 나의 학교 선택이 첫술부터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고

뭐 이겠는가?

 

사실 이렇게 뒤늦게 공부를 하는 건 비 효율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 공고의 13개 科 중 기계과, 전자, 전기과, 화공과 등에 다니던 친구들은

정말 머리도 좋고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이었다. 가정 형편상 또 기타의 이유로 공고를

왔지만 그 친구들의 실력은 당시 용산고 정도는 충분히 될 거라 다들 얘기 했었다.

실제로 용산 고등학교를 다니다 무슨 이유인지 건축과로 전학을 온 서재석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역시 그 친구는 공부에 상당히 일가견이 있었고 자기 말로는 용산고 반에서

8등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서울대학에 가기 힘들어 일찌감치 공고로 전학을

왔노라 했다(물론 학비 때문에~)

친구의 선택이 현명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래 성적표가 당시의 내가 배웠던 교 과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실업고에는 나름 합당하지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너무나 부실한 과목들이다.

 

 

 

서울공고 건축과 2학년 때의 성적표--

 

 

교과목 수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보여준다.

총 6개 과목(체육,교련 빼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고 교과목으로는 당연하다 할 것이었다.

국어,사회,정치경제,수학,지리,화학, 이게 전부다.

아니 영어도 없지 않는가? 그리고 아래

 

전공 과목인 , 건축 구조학施工구조 역학計劃재료학製圖 , 실습 ,

 

 

고3, 2학기에 이르러 진학반이 두 학급으로 편성되었는데, 당시 역사

선생님은 진학반인 우리들한테

 

"너희 중에 서울대학을 한 명이라도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아주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속에서 진학반을

만들어 준 학교 측에는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우리를 분발케 하려는 좋은 뜻으로 이해는 하지만, 실은 공고 출신이

서울대학을 간다는 건 당시로는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만큼 불가능 하다는

걸 웅변으로 말해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지 않는가?

 

그러니 아무리 빈 말이라도 이런 류의 말은 함부로 어린 학생들에게

교사가 할 말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좋게 해석하면 반어법

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제 내 개인적으로는 역사 선생님의 그 참혹

한 말씀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렇게 공부를 이를 악물고 했던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왜들 그리 쉽게 하는지! 참,

정말 손에 장을 지져 보실라우? 어찌되나!

 

서울대학을 들어간 후 1학년때 모교인 서울공고에서 당시 서울대등 기타

유수의 세칭 잘 나가는 대학에 다니는 선배들을 몇몇 불러서 고3 후배들과

모임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니 서울공대, 법대, 또 다른 서울대

재학중인 선배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신출귀몰한 공부법을

후배들에게 토해 내고 있었다.

 

우리 62회 졸업생 중에는 내가 유일했지만 위 아래 기수에서는 서울대를

간 경우가 상당히 있었다.

 

 

아무튼 나는 1년간 밤낮 없는 종로의 학원가를 전전한 결과 마지막 모의고사

에서 당당히 전교 4등을 할 수 있었다. 1년 공부한 걸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였다. 문제는 산업 역군이 되라고 공업학교를 만들었고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수차에 걸쳐 세계 1위를 한 한국인데, 왜? 대학을 가려 그 발버둥이냐? 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2,000년 대를 지난 현재까지도 해결이 요원한 한국 사회의 기술자

홀대 전통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꼭 그것만이 원인이라고 말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걸 누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지금은 공고는 커녕 아예 이공계 대학 조차 기피하는 세상이 되었지 않았는가?

당시 공고만 나오고 대기업 임원이 된 친구도 적잖이 있긴 하다. 또 대학을

안 갔기 때문에 그 분투 노력으로 큰 기업을 일군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긴긴 세월 동안 흘렸을 그들의 고난의 눈물을

그 누가 알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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