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높이 정도의 소나무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간절함과 뭔가 놀라움 같은 게 깃들어 있었다.
'뭐지? 왜 저 녀석이 나를 이렇게 바라본단 말인가? '
발 아래를 쳐다 보니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는 밤송이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안에는 커다란 알밤이 하나 들어 있었다.
청설모는 내가 밤송이를 만지자 소나무를 타고 휙 올라가
저쪽 나무로 가 버렸다.
청설모에게 웬지 미안한 맘이 들어 산책길에 도토리 4개를 주어서
밤톨을 빼낸 밤송이 속에 넣어주고 아침 걷기를 마쳤다.
혹시라도 청설모가 다시 와서 밤 대신 도토리를 물고 가길 바랬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 에이 그거 청설모가 그 위 밤나무에서 밤송이를 흔들어
떨어 뜨린 거라구요~ 어째 당신은 그것도 몰라요~
청설모가 먹을 밤을 아무 생각 없이 뺏어오다니! "
앗^ 그런가?
"허어 이게 내가 뭐를 잘못했구먼~
허나 저 밤은 어차피 내가 그냥 두었드라도 누군가가
금세 집어갔을텐데 뭘~"
내가 맨발 걷기를 시작한 지는 1년 3개월이 지났다. 물론 그
대부분은 간헐적으로 했다. 그나마 휴일에 주로 걸었고 평일은
1주일에 2번 친구가 약국 봐주는 오전에만 했다. 그러다 두어 달
전부터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3-40분 정도씩을
집 앞에 있는 오솔길에서 매일 해 오고 있는 중이다.
한 달여 전쯤부터 오솔길에는 도토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부터 오가는 행인들이 옆 차도나 오솔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가는 게 보였다.
" 아 저거 다람쥐나 청설모가 먹어야 할 양식이라는데, 다 주워
가면 어쩌나~ "
그렇지만 도토리나 밤을 보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구부려 줍는다.
요즘도 도토리를 주워다 묵을 만들어 먹는 분들이 계실까 모르지만,
"그거 대체 왜 주워가는 거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약 1주일간 떨어진 도토리를 주웠다. 대략 100여 개 이상이 되었다.
모아 두었다가 가을이 깊어질 즈음 어디 적당한 산속에 참나무가
있는 곳에 뿌려줄 셈이었다.
물론 도토리를 주워가는 분들 중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분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청설모나 다람쥐등이 이걸 주어가나 보려고 짚앞 화단에 시험 삼아
10여 개를 떨어뜨려 보았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도토리는
그대로 있었다.
아마도 여기 화단에는 청설모가 오질 않는가 보다. 더구나
사람 손 냄새가 묻은 도토리를 다람쥐나 청설모가 물고 가는지도
불분명하다. 헌데,
며칠 지난 오늘 아침 산책길에 보니 도토리는 사라지고 밤송이만 남았는데,
아마도 사람이 주워갔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 거 도토리 집에 오래 둬봐야 벌레만 난다고요~
빨리 산에 가져다 던지세요 "
성화에 못 이겨 지난 일요일 아침 앞산을 걸으며 그간 모아둔 도토리를
참나무가 울창한 숲에 흩어 뿌려 버렸다.
다람쥐 청설모가 꼭 좀 물어 가기를 희망하면서~
엊그제 앞산 새벽 산책길에 보니 높은 나무 위에서 청설모 2마리가 열심히
쉭쉭 소리를 내며 밤송이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 그렇지 저건 저 녀석들 것이지~ 절대 굴러 다닌다고 줏어선 안돼!
아무렴 쟈들이 사람들 먹으라고 밤을 떨어뜨려 주겠어? "
이제야 겨우 청설모와 밤, 도토리의 관계를 어렴풋 알게 된 나는
떨어진 밤을 향해 무심코 나가던 손을 쉽게 멈출 수 있었다.
대신 저만치 참나무 뒤편에 서서 청설모가 언제쯤 밤을 주우러 내려
오는가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은 수년 전 분당 살때 대도사 부근 율동공원 뒷산에서 낚싯대로
두드려 반 말 정도 딴 적이 있지만 도토리를 올해처럼 많이 주어본 적은 없다.
한때는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 먹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요즘은
다람쥐는 커녕 청설모 구경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아직도 이른새벽 산책길에 '툭' 하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조그만 도토리가 떨어질땐 어찌 그리 큰소리를 내는지~
'툭 탁 투드득 탁 '
얼마 지나지 않아 참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어 갈 것이고 떡갈나무는
특유의 짙은 불타는 갈색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을이 점점 한 발자국씩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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