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닷물은 아니지만,,얼른 차를 세우고 사진을 한장 찍어 본다^^*
곧 이어 도요지에 도착을 한다. 
 
 
 
입장권을 끊고 서둘러 청자 박물관에 입장을한다. 청자는 가까운 이천
도요지에서도 더러 봐 온터라
실상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다. 뭐, 청자가 다 그렇지.
헌데 강진의 청자는 그 느낌이 이상하게 많이 달랐다.

 

청자는 나무를 태워 굽는것이 제일로 치고 값도 많이 나간다.
그냥 기름을 때서 굽는건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위의 청자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가격은 만든 공에 비해 그리 비싸 보이지
않았다.
 
위의 작품은 언뜻 보아도 품이 엄청 많이 들어가 보인다.
단 한번에 도공의 손끝으로 저런 무늬를
만들고 굽고 또 거기서 잘 못된거 솎아내고 온전한
제품중 저렇게 하나 만들려면 그게
어디 간단한 일인가?
청자를 잘 모르는
필자가 보아도 저건 귀해 보인다.
 
이 작품도 국보 무슨 청룡모양 청자라는데  밑에
가격을 보면 120마넌 정도 하는 거란다.
색감이 약간 청자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유약의 재료가 틀리나부다.
 

 

여기 꽤 근사한 청자들이 보통 저런 가격에 경매를 하여
팔린다고 했다. 매주 토요일엔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청자 경매를 실시한다고 하니 ,
가급적 토요일에 강진을 방문하시면 잘하면
저렴한 가격에 고려청자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거 같다.
우리집에도 청자 비스므리한게 있지만,
이곳 청자의 색감과는 거리가 먼것 같았다.
 
작품 하나 더 감상^^
 
이건 중국것인지~ 암튼 좀 색감이^^
 

 

이것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사의재를 새겨넣은 저 청자를 기어히 하나 구입했다.
조상님께 따를 약주 주전자도 하나 구입하고
막걸리용 청자 잔을 두개 샀다. 아무래도 막걸리도
맛이 다르지 않을까?
박물관 밖에도 청자를 판매하는 가게가 많았다. 거기에 들러
밥공기와 국 그릇용으루 청자를 다섯
세트씩 구입했다. 청자 밥공기라 ㅎㅎ
완전한 제품은 개당 만원씩 받는데
아주 미세하게 틘제품은 3천원이다. 
어차피 쓰다 깨질거~우린 3천원짜리로 구입을
완료했다. 

 

무슨 나무인가.. 멋지게 자라고 있었다.  
이제 마량항구로 향할 차례다. 엊 저녁 강진읍내의 한
약국에 들러 씨즈날을 한통 사며
70은 족히 넘었음직한 약국장님한테 조언을 구하니,
청자 도요지와 마량항을 꼭 들러 보라 하신다.
대체 마량이 무엇이길래 그럴까??
 
마량항 가기 전에 보이는 동그란 섬이다. 까막 섬이라 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꽤 운치가
있을거 같은 섬이다.

 

 

마량에 도착하니 흿뿌연 하늘이 더욱 을씨년 스럽다. 포구에 차를 주차하고
늘어선 횟집 중 완도 횟집이란델
찾았다. 어디서 본 글에 거길 추천하는걸 보았기 때문이다.
주인 할머니는 아주 커다란 감성돔을 집어
올리며 20마넌이라 한다. 크~둘이서 먹긴 너무 크다.
좀 작은걸~요 하니 우럭을 들어 올린다.
그건 10마넌 이란다. 됐다. 그 정도면,
낙찰을 보고 2층 방에 올라와 기다린다.
단출한 밑반찬이지만 하나 하나가
모두 기막히게 감칠맛이 있다.
 
음식이 올려지자마자 사진을 찍지 못해서,좀 그렇지만
예전에 군산에 가서 저것보다 다섯배 이상되는
소위 쓰끼다시를 대해본 적도 있지만 음식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이곳에서 다시 절감한다.
주인 할머니가 2층 계단을 숨차게 오르내리며 몹시 힘들어 하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사위가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주겠다 하는데
할머니가 그냥 두라했다고^^
[할머니! 좀 힘드시드래두 오르락 내리락 하시면 운동되고 좋을거예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아무래두 맘에 그게 걸린다. 해서
[약국에 가셔서 이런걸 좀 구입해 드세요]
 
하니..딸이 약사랜다. 이 동네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아하,이런 그래도 뭔지
그거 처방좀 써 달랜다. ㅎㅎ 나오면서 종이에
[콘드로이친 300 미리그람]이라고 써드렸다.
이보다 단위가 높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낮으면
효과가 적어진다 면서
 
식사를 마치고 포구로 다시 나가니 앞에 수협 공판장이란데가
보인다. 아내는 저곳을 들르자고한다.
원체 우리집 딸래미가 바다회를 좋아해서 마음에 좀
걸리는 모양이다. 공판장 맨 뒤로 들어가니
아줌마 한분이 30호 경매사란 모자를 쓰고 횟감을
다루고 있다.
식당에서 못 먹고 온 감성돔을 가르키니
꽤 큰 놈 3마리에 5마넌 이란다. 눈이 번쩍 띄인다.
더구나 여기는 養植이란 말 자체가
없는 곳이라니... 자연산 싱싱한 감성돔 3마리!! 크^^
포장해서 일단 집 주소로 택배를 부쳤다.
 
 
 

다산 초당의 얼크러진 나무뿌리 길을 어수룩한 저녁에 내려오는데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 저 위에 백련사 넘어가다 시간이 늦어 그냥 내려오는 길입니다. "

하고 내가 말하니~

 

"아이구 그래요? 백련사

동백나무 숲을 못 보면 후회가 될겁니다"

라고 말한다

 

" 앗! 그런가요? 이런,,그럼 차를 돌려 얼릉 가봐야겠구만요"

 

대전서 왔다는 그 분은 동백나무숲은 찬양을 했지만

 

"근데 영랑 생가같은덴 가 보시면 후회할겁니다.

 

별 볼게 없어요 "

했다.

 

 

백련사 입구부터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 숲

 

 

 부랴부랴 어둑해지는 백련사에 당도해 동백숲을 보러 올라 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한 아내는 차에서 쉬겠다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동백꽃이야 아까도 보질 않았느냐고 하며,

이런^

 

 

백련사의 목백일홍

 

올라가는 길은 동백과 비자나무숲이 빽빽했다. 숲에서 우는 새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부랴부랴 오르니 눈 앞에 저런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목백일홍 나무가 저렇게 멋지게 생긴거는

아무튼 나는 처음이다.

 

 

 

😛


 

   나무의 얼키설킴이 저렇듯 대단하다. 아! 정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련사의 역사를 백년은 족히 기억하고 있음직한 나무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멀리 구강포구 를 바라보니 으스름 저녁인데도 해안도로

주변에 벛꽃이 만발한게 끝도 없이 펼쳐진다. 오늘 숙박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

 

우선 저 길을 달려보고 싶다.

 

 

 

해는져서 어두운데,,저 건너 칠량의 불빛과 산세가 어렴풋 다가온다.

 

아..이토록 멋진 저녁 풍경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니,,, 이곳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적막한 저녁 방파제를 조용히 달려 본다.

 

 

      포구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곳이 강진 시내 쪽이다.

 

(당시 카메라가 시원찮은 것이라 저녁 사진이 이렇다)

 

아무도 없는 길이 으시시해서 얼른 차를 돌려 강진 시내로 향한다. 올때 봐두었던 남도장 여관을 연락하니

그만둔지 10년 이란다. 근데 전화는 우째 받을꼬~ 이런,,결국 유명하다던 한정식집 해태 식당도 시간이 늦어

안되고,,암튼 간신히 저녁을 어느 식당에서 해치우고 겨우 숙박도 해결했다. 더러 보이는 관광버스 손님들이

시내 숙박업소를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왕창 들었다. 어디갈땐 제발 예약

좀 하고 댕기라고^^

 

 

무화과 나무

 

 

묵었던 온천장 여관 앞집에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하도 신기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저게 무화과 나무란다. 사진은 그저 그러해 보이지만 담장

안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자 드디어 영랑의 생가이다. 강진 시내의 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꽤 면적이 넓고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쳐 있는 뒷담을 끼고 자리잡은 생가는

한 눈에 봐도 명당임이 틀림 없었다.거기다 여기서 멀리 구강포구가 어렴풋이

눈에 잡힐 그런 곳이니 말이다. 

 

 

 

척 봐도 얼마나 좋은 곳인지 ~~

 

 

             뒷뜰에 흐드러지게 피어 떨어진 동백  꽃들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방문 틀에 끼워 놓은 동백꽃!! 이곳은 동백이 함박눈처럼 날린다^^*

 

 

              별채 앞에 피어있는 겹동백의 어여쁜 모습  

 

 

은행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자란게 있다^^*

 

 

       동백 한 닢을 손에 들고 영랑의 집 손님이 되어 본다.

 

 

 

뒷뜰의 동백,백련사의 동백에 전혀 뒤지지않는 멋진 자태다.

 

           

생가 우측 높은 곳에 자리잡은 금서당(琴書堂).. 독립 운동의

산실이자 소학교 였다는데,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도 씌였다 한다.

 

 

금서당 뜰에 피어있는 꽃

 

 

                   

이곳 언덕에 누워 멀리 포구를 바라보면,

영랑 시인의 한 분 누님이 떠오른다 했든가??  

 

 

 

 이제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란이 생가 뜰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면 저 모란이 벌겋게 만개할 것이다. 지금도 저리 멋진 집인데,,

모란이 피면 정말 영랑의 생가는 詩로 만발할 것이다. 그때의 생가를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다산 초당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가

 

 " 별거 없어요..실망 할겁니다"   

 

란 말은 전혀 틀렸다!!

 

동백과 대나무가

어울러진 이 땅에서 볼수 있는 정말 멋진 집을 나는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1948 년도에 이집에서 떠나 서울로 향했다던 영랑!! 그는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서울을 택했을까? 당시 많은 시인 문인들의 주 활동 무대가 서울이라서

그랬을까?

 

서울로 간 그는

1950년 6.25 동란에 부상을 입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강진이 낳은 천재 서정 시인이 그렇게 사라질 줄

이야^^ 너무나 아쉬운 결과이다.  

 

 

 

 김영랑 생가를 돌아본후 얼핏 보니 부근에 사의재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땅으로 유배되어

왔을때 모두들 피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둥 마치 외계인 대하듯 할때 따뜻히 그를 맞아준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문밖(당시는 강진에 성곽이 있었다) 사의재라는 주막집이었다. 이곳 주모되는 할머니가 다산을

측은히 여겨 그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는데~

 

 

90년대만 해도 이곳을 찾을수없어 안타가워 했던 곳이다. 아마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 청장이 된후 사의제를 포함한 몇곳을 복원한게 아닐까..추측을 해본다.

왜냐면 그의 저서에 사의재의 유적지를 찾지못한 걸 못내 아쉬워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자그마한 초가집에 방 한칸을 다산 선생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막주인 할머니!!

아마도 하늘이 도움을 주러 내보낸 이가 아닐까..

 

 

 

이젠 이곳이 실학의 4대 성지로 불려지는 곳이 되었다. 1801년 11월 23일 날도 차고 바람도

심했을 11월 말의 강진 땅에 간신히 거처할 곳을 마련했을 때의 다산 선생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더구나 실의에 빠진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는가? ]

 

라는 주막 할머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아 경세유표 같은 불후의

명저를 남긴 곳이 바로 이 골방이었다니....참으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사의재...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나는 고려 청자 도요지에 가서 결국 사의재가 적힌 청자 판을 하나 구입했다. 그

냥 식탁 옆에 두고 수시로 읽어볼 요량이었다.

 

 

 

 사의재에 걸려 있는 다산의 시 한수입니다. 당시나 오늘이나 세상 사정은 늘

비슷한가 봅니다. 그래봐야 불과 200년 전 일이니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셈이군요^^*

 

그런 세상이었건만 오늘같은 나라로 성장한 걸 보면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음,,여기에 잘 나타나 있네요^^* 1803년 12월 초열흘이니 1801년11월 23일

처음 이곳에 정착한지 대략 2년쯤 경과한

때입니다. 다산선생도 주역을 읽고 계셨군요!!

 

 

 

  물론 최근에 복원시킨 거겠지만,,아담한 우물이 여기도 있읍니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들여다 보니  식음으로 사용은 못하겠드라구요.

 

 

 

 

다산 선생에게 힘을 주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는 주막집 할머니와 그의 외동딸

기념 동상입니다.

 

저는 주막집 뒷편에 있는 저 할머니 동상을 두손으로 어루만져 드렸읍니다.

 

" 할머니...고맙습니다^^ " 하면서 ~ 물론 다산과 저 딸과의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요?

 

 

 

 주막집 입구에는 이렇듯 앵두가 피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참으로 이곳  사의재를 복원한것은 정말 잘한 일 같읍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이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요^^

 

비록 작은 주막집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둘러 보고 나오는 강진의 하늘과 동네는

더없이 청량하고 맑게 느껴 졌읍니다^^*

 

무소의 뿔처럼 - 범능 스님 고규태 시
1.가라 좋은 벗 있으면 둘이서 함께 가라 가라
좋은 벗 없으면 버리고 홀로 가라
달빛엔 달처럼 별빛엔 별처럼 바람불면 바람처럼 가라
<후렴>내가 나에게 등불이 되어 그대 홀로 등불이 되어
함께 못 가도 같이 못 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가라 나의 맘 고우면 나누며 함께 가라 가라
나의 맘 탁하면 버리고 홀로 가라
꽃길엔 꽃처럼 물길엔 물처럼 천둥치면 천둥처럼 가라

 

 

무위사 경내를 부랴부랴 둘러보고 나니 벌써 저녁 6시 가까이 되어 버렸다.
얼른 강진 시내를 거쳐 귤동 정약용 선생의 초당으로 가야하는데,,시간이 빠듯했다.
강진을 왼쪽으로 끼고 포구를 보며 가는 길은 평지 시골 논밭길이다. 예전엔 포장이
안되어 진흙탕길 이라는 바로 그 길이다. 백련사라는 간판을 우측으로 보며 조금더 가니
자그마한 동네가 나온다.
여기가 그 '귤동' 이란 데구나!
차 한대만 겨우 들어가는 마을길을 조금더 올라가니 주차장도 아닌 겨우 차 몇대 세울수
있는 공간이 막다른 끝이다. 무슨 매표소 같은거라도 있나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걸어서 몇백 미터만 가면 초당이 나온단다.
참고로 정약용 선생은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며
선생님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고 또한
윤두서는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 된다.
고산 윤선도라~~ 어쩐지,

 

( 귤동 끝에 자리잡은 아담한 집 한채..벛나무가 고목이 되어 있다)
 
이 집을 끼고 위로 천천히 올라가 본다. 그냥 산 초입은 여느 동네의 야산과
다르지 않다. 몇발자국 올라가자 나무 등걸이 얼키고 설킨 산 길이 나온다.
정호승 시인이 이 길을 오르며 쓴 싯귀가 옆에 걸려 있다.

 

 

앙상하게 뿌리가 드러난 산길을 보는 시인의 마음은 저러했다.
다산이 유배지인 이곳 산길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지는
어렴풋 짐작은 되는데^
고속도로 자동차로 오는데도 허리가 휠것같이 먼 그 길을
조선시대 말을 타거나 걸어서 왔을 터이니,
당시 유배자에 대한 대접은 어떠했을까?
 
  조금 더 오르자 대나무와 삼나무가 곧고 길게 자라 오른 틈새에 동백이
간간이 섞여 무성한 숲을 이루기 시작한다. 바닷가 근처
야산 치고는 울창한 수목이다.
나무 등걸에 떨어진 동백꽃이 보이시나요?
 
 
 조금더 올라가니 초막 한채가 눈에 띈다.차성각 이라고 하는 서암 이란 곳으로
초당의 주인인 윤단과 그의 아들들 및 제자들이 거처하든 곳이란다.바로 옆에
약간 우측으로 비로서 다산초당이라는 집이 보인다.
초의선사의 다산초당 옛모습 그림 
저 초당위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원래 다산 유배 시절에는 이보다 작은 초당이었는데 후세에 조금 규모를
키워 지었다고도 한다
아, 이것이 다산초당이구나^^* 
초가  지붕이 아니고 기와 지붕이다.

 

    약천이라 불리우는 약수터가 바로 집옆에 있었다. 옆에 바가지로
시원하게 한모금 마셨다. 아마도 다산도 이 물을
마시며 여러 책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을게다. 
 
 
   초당 모서리 방 위에 쓰여진 관어제..바로 옆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여기에 붕어 잉어등 물고기를 키우던 곳이란다. 이 방 툇마루에 앉아
노니는 고기들을 바라보는 곳이었단 얘기 같다.
 
  
   이 글씨가 다산초당 바로 옆에 지어진 다산동암에 걸려있는 것인데,,
다산보다 24년 밑인 추사 김정희가 나중에 써 보냈다는
얘기가 있는 바로 그 글씨이다.
寶丁山房 !! 
 
 
 같은 건물 옆방에 걸려있는 다산동암..다산이 직접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 글씨에 대해선 일찌기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이곳에 유배당시 2000 여 권의 장서를 가져다
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니..숙연한 마음이 든다
 
 

 

 
 원래 다산의 유배시절엔 없던 정자인데,,,이 부근에 올라 멀리 강진 포구를
바라보며 흑산도에 유배를
당해있던 형 정약종을 기리며 상념에 젖던 곳이란다.
이곳을 올라보며 당시의 그 말할수 없는 다산의
회포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했다. 저 멀리 바다 건너가
칠량땅이고 그 너머가 마량이란 항구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청자 도요지가 그곳 가는 길에 있었다.

 

 
강진만으로 난 해안도로 저편에 벛꽃이 화사하게 줄줄이 피어있는게
백련사에서도,다산 초당에서도 보였든 바..어둑해진 도로를 따라 나서 보니,,
인적도 없는 저 멀리 마량 포구 쪽이 감감하게 다가 온다. 차를 길 옆에
세워두고 강진포구의 저녁 적막을 한동안 느껴본다.
 
아! 얼마만인가,,이렇듯 적막함에 물들어 가는 포구를 바라보는 것이^^*
다산 정약용이 다산 동암에서 썻다는 작품 하나를 소개해 올리면서
일단 여기서 글을 맺기로 한다.
------
 
 9월 12일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 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
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하니
그 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때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 버리니
이것은 인간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유홍준 저서에서 인용 -

 

 

 

남도 여행 --(1) 월출산 무위사로
남도 여행의 첫째는 봄철의 강진 땅이라 했다.

강진의 붉은 황토흙과 샛파란 하늘과 진노랑의 개나리와

피어  오르는 보리 이삭의 연푸른색을 보지 않고는

한국의 자연색을 논할 자격이 없노라고

일찌기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힘주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
얼마나 강렬한 색감을 나타내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참으로 궁금했었다.
강진의 황토색이라~ 남도의 색깔은 정말 그런 건가?
흐릿한 날씨를 뒤로하고 광주를 지나 월출산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한 반면 네비가 없으면 정말 만만히 찾아갈 수 없는 곳이다.
천안까지 일부 막히고 논산 부근에서 정체를 하고
전주 이후부터 비를 맞으며 달리다 보니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영암을 멀리서 바라보는 고갯길에 이르르니
한적한 찻집과 조그만 암자가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목련은 꽃잎이 지기 시작하고 벗꽃이 만개했는데
누렁이 한 마리가 낮선 손님을 보고 멍멍 짖어대기 시작한다.
고개위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 
노오란 수선화가 텃밭에 피어 있었다
 

 

멀리 영암쪽을 바라본 전경 --
넓은 벌판이 좌측의 월출산과 대조를 이룬다.
無爲寺 ! 무위 자연의 그 무위인 모양이다.
절앞에 가면 뭔가 좀 요기를 할수 있겠지.. 하고 겨우 문앞에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먹을게 없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나와 차밭 을 지나 내려오니
무성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동네가 나온다.
메뉴는 토종 오골계,오리 주물럭,삼계 등등 ..하필 여기까지 와서 오리를 먹다니,,
시간을 아낄겸 오리 주물럭을 시키니 한참만에야 나온다.
처음 보는 매실 장아찌에 풋풋한 상추와 맥주 한병을 곁들여 먹고나니
시간이 4시가 넘어 버린다.
월출산 기슭에 재배중인 차 밭을 얼릉 보고 무위사 경내로 들 어선다.
아주 작은 절로 벽화가 유명하고 극락보전의 목조 건물이
단아한 걸로 알려진 사찰 이다.
주말인데도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어 한적하기 그지 없으나
절은 보수와 증축에 한참 바쁘기만 하다.
오후 5시까지인 유물 전시실을 겨우 들어가 극락보전
보수시에 나왔다는 벽화들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무위사 들어가는 길에서 본 월출산의 봉우리 모습

 

 

 

산자락에 자리잡은 강진 녹차밭 전경
 
 
극락보전 벽에 그려져 있던 벽화
 
 
 
어느 사찰이건 그곳엔 아주 오래된 나무들이 있게 마련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앞으로 세그 루의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참으로 보기가 좋다.
어딜 가든지 멋진 나무가 보이면 사진을 담는 버릇이 습관처럼 배어 있는데,,
이곳의 느티나무도 그랬다.
극락보전의 오래된 목조 석가래는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같이
목조건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목조로 만든 빗살문짝의 모양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명작이다.
월출산을 북쪽으로 두고 아담하게 강진 포구를 바라보며 자리잡은 무위사!
찾아오는이 적어 한적하기 그지 없는데 천리 길을 달려 저녁나절에 도착한 객은
훠이훠이 한바퀴 돌아나오면 그만이다.
봉헌촛불 하나를 올 리고 갈길을 재촉해야했다.
극락보전의 모습
 
극락보전의 빗살창 모습
 
 
 
 
 
좀 멀리서 본 극락보전의 모습^^*
 
 
법당 안뜰 앞으로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서있다..하늘을 향해 맘껏 뻗어난
가지의 자유로움이 가슴에 시원하게 와 닿는다^^ 
 
입구 우측에 자유롭게 자란 대나무 숲~
 
남도의 곳곳에는 이렇게 대나무가 흐드러지게 자라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날이 흐린데다 늦게 도착하여 강진의 그 원색을 찾기 힘들었다.
참고로 유 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중
남도답사 일번지-강진.해남(1) 편의 끝부분을 소개 해 본다^
 
[[나는 우리 시대의 화가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남도의 봄빛을 보지 못한자는 감히 색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되다란' 기름기의 번쩍이는 물감을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 없이 사용하면서
함부로 민족적 서정이니 향토색이니 논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화학 공학자,모든 화공품 제조업자,모든 화장품 회사,모든 염색업자,
모든 물감 공장의 관계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부탁 드린다.
그 뛰어난 기술,그 좋은 시설의 100만분의 1이라도
잃어버린 조선의 원색을 찾아내는데 사용해 달라고.
우리에게 무한한 환희와 감정으로 다가오는
향토의 원색을 제조해 달라고.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 원색인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원색의 물결속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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